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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한국 최고의 부잣집 한옥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궁궐이 아닌 일반 양반집으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은 99 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나친 낭비를 막기 위해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 우리 전통 한옥을 살펴보면
99 칸보다 큰 집이 존재합니다.
정확히는 102칸 집이 있습니다. 하인들이 살던 집들까지 두 합치면 300칸에 이르렀던 집
[강릉 선교장]입니다.
현존 살림집 한옥 중에서 가장 큰 집 [강릉 선교장]을 다녀왔습니다.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대문만 12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으로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개인 소유의 국가 문화재입니다.
◆집 앞 들판이 모두 경포호수였던 과거에는 이 집으로 드나들기위해 배로 다리를
놓아 오고간다 해서 '배다리 집'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船橋莊(선교장)'
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소재지 :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장은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 부잣집입니다.
이 집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큰 전통 한옥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많습니다.
먼저 그 이름부터 다릅니다. 보통 양반집들은 ‘~당’이나 ‘~각’ 등의 이름을 붙이는데
이 집은 유독 ‘장’ 이란 이름이 붙습니다. 집의 경제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입니다.
선교장은‘장원’.이기 때문에 이름에 ‘장’ 자가 붙었다.
장원은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이 아니라
한 집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것을 말합니다.
선교장은 이 집의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만드는 침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전용 전문 인력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자연을 포용하면서 조화를 이룬 품위있는 모습과 선교장 주변 야산의 노송이 운치를 더하였습니다.
서구의 거대하고 오만한 성보다 바다, 호수,산, 들을 바라보는
평화롭고 따뜻한 모습에 반해서 사진을 올려 봅니다.
바로 강릉의 명물 ‘선교장’입니다.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대문만 12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왜 진짜 부잣집으로 꼽히는지 돌아보자.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집안이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된 것이다.
농토가 넓은 전라도나, 세력가들이 많았던 경상도가 아닌 산 많고 기후가 거친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나온 경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한때 선교장 집 땅은 북쪽으론 주문진, 남쪽으론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넓은 것인지는 지도를 펴 보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곡창지대가 아닌 변방 강원도에서 이 집이 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실은 족제비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ㅎㅎㅎㅎ
설마 그 족제비? 맞다. 그 족제비다.
선교장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내번이란 사람에겐 전설 이야기가 있다.
그가 집 지을 터를 찾아 강릉 일대를 돌아 다니던 어느 날 산 속에서 갑자기
족제비 무리를 만났다고 한다.
족제비가 떼를 이뤄 몰려가는 게 신기해 그는 족제비들을 좇아 갔는데,
어느 곳에 이르더니 족제비는 순식 간에 사라졌다.
의아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 봤는데,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곳이
놀라운 명당임을 알아 차렸다고 한다.
그 곳이 바로 지금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이다.
어떤 신기한 기운이 족제비 떼를 시켜 그에게 명당 터를 일러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명당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법도 해 보인다.
좌우지간 이렇게 집터를 고른 선교장 집안은 1760년께 집을 짓기 시작했고,
이 집이 점점 커져지금의 선교장으로 진화해 갔다
그럼 이 집이 얼마나 큰 집인지, 왜 진짜 부잣집으로 꼽히는지 돌아보자.
102칸 짜리 강릉 선교장, 강원도 유일의 만석꾼
102 칸 짜리 강릉 선교장
월화문으로 들어 가면 연못위의 활래정이 보이면서 그 뒤로 본체 모습이 다소곳이 나타납니다.
'활수(活水)가 계속 들어오는 정자’란 뜻의 활래정은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리라!!
이곳 다실에서 연꽃이 가득한 못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행복 그 자체일 것입니다.
곡자 정자로 5월이면 아름다운 연꽃이 못을 메운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아래처럼...↓
5월에 가면 할래정이 마치 연잎 위에 세원진 듯 우아하게 ...^^
선교장은 전면이 통째로 집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집은 무지하게 앞면이 길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 집 앞쪽으로 수구(水口)가 넓게 벌어져 있으므로
선교장은 집 방향을 남서향으로 틀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열린 수구를 비보하기 위해 긴 건물로 닫힌 형태를 만들어 홍수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습니다.
이 집은 앞서 말했듯 집안에 문이 12개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 대문은 2개입니다.
솟을대문으로는 남성들과 손님들이,
옆쪽 평대문으로는 가족들과 여성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사회구조를 문으로도 알 수 있지요.
집 앞쪽이 이렇게 길게 처리되고 대문이 2개가 있다는 점에서
선교장은 창덕궁 낙선재와 비슷합니다.
저 평대문 말고 더 멋진 솟을대문이 그 옆쪽에 있습니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얼마나 큰 집인지?
*솟을대문의 현판에는 船橋幽居(선교유거)라고 적혀있네요.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입니다.
양반 집에만 솟을대문을 만들 수 있는데 종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초헌)가 들어가야 하기에 대문을 높이 올린 것입니다.
선교장의 전체 칸수는 99칸이었지만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84칸이 현존합니다.
건물의 기둥과 기둥사이가 한 칸.
왼쪽으로 문이 있는데 긴 행랑채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작은 두번째 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으로 갑니다.
입구에서 보았던 그 긴 전면 건물인데 행랑이 줄지어서 있어서 ‘줄행랑’ 이라 부릅니다.
사랑채가 집 한 채가 아니라 무려 3채나 된다는 점이다.
긴 행랑채는 모두 23칸.
우리나라 집의 규모를 세는 단위는 칸 (기둥과 기둥 사이)인데,
이 행랑 건물은 작은 세칸집 8채를 붙여지은 수준입니다.
가장 작은 집은 3칸짜리^^(초가삼간 같은).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 만나는 공간이라 그 어떤 집보다도 크고 중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다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채가 큽니다.
선교장을 찾은 많은 묵객이 기거 하던 곳으로
이곳에 서서 보면 각 건물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머무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건물 기단의 높이를 다르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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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행랑채에서 사랑채 마당을 바라보는 풍경입니다.
1815년에 건립된 건물로 주인 남자의 거처입니다.
사랑채 열화당*
사랑채에 걸린 悅話堂(열화당)이라는 현판.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신조로 삼았던 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 이 사랑채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세상 일은 잊어버리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하랴,
친척의 정겨운 이야기를 즐기며, 거문고와 책을 벗하여 온갖 시름을 잊어버리자' 라는 시구처럼
형제,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담소하는 장소로 썼다고 합니다.
사랑채가 3개여서,
손님의 등급을 보고 머물 숙소를 정해 줬다고 합니다.
저 열화당 옆으로 중사랑이 있는데, 이 중사랑에 집사가 머물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안 내력과 학식을 테스트한 뒤
가장 뛰어난 손님이면 당연히 저 열화당으로, 중간급이면 중사랑으로,
그리고 좀 처지는 사람이면 아래사랑에 방을 내줬다고 합니다. 길디 긴 행랑건물이지요.
한옥 건물 앞에 뭔가를 붙였는데 왜일까? 뭘까? 궁금증 유발.
앞의 설명문을 읽었습니다.
#건물 앞의 테라스는 햇빛을 가리는 차양으로 조선 말기 러시아식 건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 준 銅으로 된 건물입니다.#
저런 집이 아주 드물지만 우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셈입니다.
가령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이보다 훨씬 큰 차양을 달았습니다.
<출처=문화재청 누리집 선향재>
품위 있는 굴뚝과 곱게 단장한 초가집 노야원이 보입니다.
노야원은 시문을 읊으면서 자연과 풍류를 즐기던 곳입니다.
일부러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로 한 지붕이 더욱 정겹게 다가옵니다.
이 근사한 집과 아래 긴 행랑채는 여행자 숙박이 가능합니다.
이제 남자와 손님들 공간을 봤으니 여성과 가족들의 공간 안채로 갈 차례입니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차례로 보입니다.
중랑채 툇마루에서 잠시 쉬었다가 안채로 가렵니다. *(♡L♡)*
도대체 손님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렇게 손님 공간을 크게 마련했을까?
선교장은 손님 환대 전략으로 집안을 키웠다.
강원도는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변방이다.
이 변방에서 선교장이 명성을 유지한 것은 ‘문화적 소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양반들 최고의 유람 코스는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다.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당대의 인사들이 찾아와 선교장에 머무는 것이 코스가 되었다.
워낙 환대해 주고 문화적 분위기가 좋았다.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은
선교장을 문화 인맥의 핵심이자, 한양 정계와 이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선교장이 얼마나 손님을 잘 치렀느냐면 절정기에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고,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 줬다고 한다.
그래서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찾아 온 손님들은 사랑에 머물다가 떠날 때에는
글이나 그림을 남겨 환대에 보답했다.
지금의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들의 글씨와 그림들이모두 이런 사랑손님들의 작품들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문 안에 또 문, 그리고 그 문 안에 다시 문이 보입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폴짝 ^^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그 느낌이 또 다릅니다.
반대 쪽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이 됩니다.ㅎㅎ
금남의 구역 안채입니다요 ㅎㅎ
1703년 선교장 건물 중 최초로 건립한 건물로써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입니다.
좌측으로 들어가니 ㅁ자 형인데 우측은 西別堂 좌측 2채는蓮池堂 이라 합니다.
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받을 때 사용하였고,
방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입니다.
오른쪽의 西別堂은 이씨가의 서고겸 공부방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살림을 물려 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뚝 올라서 앞을 굽어 보는 오른쪽 건물은 안채와 붙어있는 동별당이란 건물입니다.
안채는 큰 살림을 꾸리는 여인들의 거처이며,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사용했습니다.
방과 마루의 벽체가 모두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들의 성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건물의 현판이 일품입니다. ‘오은고택’.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혔던 여초 김응현의 글씨입니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여초가 선사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건물은 독특하게 건물 아래 기단부에 작은 쪽문이 달렸습니다. 보이죠?
궁금하시죠?
보이죠?
저 문은 건물 아궁이 출입문!
"세상에, 저렇게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다니ㅠㅠ"
당시 하인들에겐 저런 것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신분 계급 사회인 것입니다.
"아~~아 난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여긴 부엌
그런데 부뚜막의 우측 검은 건 무엇일까요? 글쎄???
안내분에게 물어 보았더니 물을 데우는 것이란다.
불을 땔 때 저기에 물을 부어 놓으면
가열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더운 물을 사용할 수 있다나!
자세히 보면 방 구조가 2겹. 앞쪽에 넓은 방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좁은 방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앞쪽 방이 주인인 마님 방.뒤쪽은 하녀의 방입니다.
하녀는 마님 옆 저 방에서 마님과 함께 자면서 심부름. 말벗을 했겠죠?
'나'를 버린 하녀노릇인 셈이죠. 역시 신분의 차이 쩝.
안채에서 바라 보는 외부입니다. 외부와 소통되는 개방적인 설계였습니다.
하단은 외별당입니다.
맏아들의 신혼 살림이나 작은 아들의 분가 이전에 사용한 건물로 안채에서 내려다 보입니다
현재 후손이 기거하고 있는 외별당입니다.
안채 우측 능선에 사당이 친밀감을 느끼도록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선조3대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소나무들이 사당에 머리 숙여 감싸 안고 있습니다.
안채 외부(외별당)에서 사당에 들어오는 쪽문 지붕모습입니다.
박공선이 참으로 부드럽고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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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내부를 다 둘러보고 외부로 나갔습니다.
선교장 다른 건물들에 견주면 평범한 건물들인데 오른쪽은 지금의 관리사무소.
한국 근현대사의 뜻깊은 곳으로
강원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동진학교’ 가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왼쪽은 만석군의 곡간채입니다.
곡간 뒤편에 자미제가 있더군요.^^
바람새가 둘레길에 올라가서 바라 본 선교장 외형입니다.^^
★ 곳간 뒤 쪽에 내방인들을 위한 체험장이 있습니다. ☆
★ 한 눈에 보고 싶어서 소나무산 둘레길에 갔습니다. 진달래 봉오리가 반겨 주었습니다. ☆
선교장 대문에서 바라 보이는 샘터입니다. 현재도 맑은 샘물이 있었습니다..
뒤편에 보이는 곳은 숙박. 선물센터.커피샵 등 여행객들을 위한 장소랍니다.
28)선교장 집안의 성공 비결은 지금의 기업가들 못잖은
경영 마인드였다.
조선 후기 선교장은 당시 시대 변화를 잘 포착해
"염전 사업"으로 부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새로운 농사법으로 떠오르던 이앙법을 도입했다.
또한 ‘벤처 정신’도 강했다.
번 돈으로 땅을 사들이기 보다는
농토 개간에 ‘올인’했다.
외부에서 이주해 온 이씨 집안으로선
강릉 토박이 세력들의 견제와 충돌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선교장 집안은 주변 뻘을 논밭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땅을 늘렸는데,
새로 개간한 땅은 세금이 면제되는 이점도 있었다.
선교장이 성공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최고의 방법인 ‘혼맥’이었다.
집안이 흥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돈을 많이 벌던, 과거에 붙어 고위 공직자가 되던
자력갱생 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결혼이다.
자기 능력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흔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반면 결혼은 ‘엘리베이터’ 다.
훨씬 더 높이, 그리고 빨리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어서다.
선교장은 당시 조선의 세도가인
‘벌열’ 들과 통혼을 하면서 집안 지위를 올려갔다.
그리고 대원군의 후원자가 되어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등
당대의 세도가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문화적으로 소통을 중시했던 점에서
이 집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선교장을 찾은 이는 실로 많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부터 일제 강점기 몽양 여운형까지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쟁쟁한 이들은 물론
문화계에서 당대의 스타들이 줄줄이 이 집을 찾아왔다.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이 집안의 재력과 위세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대신 이 멋진 건축만은
그 대로 남아있다.
강릉은 묘한 곳이다. 큰 도시라 해도 나라 끝에 있어
외진 입지이지만 문화사적으로 보면 그 위상은 중요하다.
불교와 유교 두 우리 문화축에서 그 의미가 크다.
우선 불교 면에서 보면 성지 오대산이 가까워
다양한 불교 유적들이 많다.
유교 면에서 보면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강릉에서 배출됐다.
문학은 또 어떤가.
조선 3대 여류 시인 중 2명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강릉 사람이다.
그러면 건축은? 아쉽게도 그리 대단한 것은 많지 않다.
특히 새로 복원한 강릉 관아의 수준은 눈뜨고 못 볼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강릉에서 꼭 봐야 할 건축은 있다.
고려시대 건물로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국보 건물,
강릉 객사문과 이 선교장이다. 이 둘은 진정 강능의 보물이다.
첫댓글 2023년 02월 15일 눈이 내려
방콕하면서 선교장에 발걸음을 멈췄다.
벌써 2년이 흘렀다. 올 봄이면 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방문.
비공개인 걸 보니 나의 서재 <바람새둥지>에서 가져 온 것이다.
코로나19가 3년째이니 아마 3년 전인 것 같다.
참 열정으로 답사기를 쓴 것 같다.
이제 기력이 쇠해서 이렇듯 기록할 수 없겠지!
노년이 되었나 보다
뒤를 돌아보게 되다니!!
검은 베레모를 쓴 내 모습이 낯설게 보인다.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