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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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나보르(Nabor)
성 마리누스(Marin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펠릭스(Felix)
축일 7월 10일
성 나보르, 성 마리누스(Marin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와 성 펠릭스(Felix)는
고대 순교자 목록에 이름이 기록된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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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온티우스(Leontius),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성 다니엘(Daniel)
축일 7월 10일
성 레온티우스(Leontius),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성 다니엘을 포함해서 45명의 아르메니아(Armenian)의
그리스도인들이 리키니우스 황제의 박해 때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대박해의 마지막 순교자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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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피나(Rufina)
성녀 세쿤다(Secunda)
축일 7월 10일
성녀 루피나와 세쿤다(Secunda)는 로마 원로원 의원인
아스테리우스(Asterius)의 딸로서 자매지간이다.
이들은 아르멘타리우스와 베리누스라는 그리스도인과
각기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돌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이들 두 남자는 배교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자매들은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 몰래 로마(Rome)를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이내 그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그들은 집정관 유니우스 도나투스 앞에 끌려갔다.
갖은 형벌과 위협을 다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먼저 루피나에게 모진 매를 때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쿤다는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 왜 언니만 때리느냐?”
이리하여 그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고문을 받은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플라우틸라라는 어느 외교인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로마에서 11마일 떨어진 아울레리아나 가도에
안장하였다. 이곳은 그들이 안장되기 전까지는
‘실바 니그라’ 즉 검은 숲이라 불렀는데 그 후에는
‘실바 칸디다’ 즉 흰 숲이라 부른다.
그 후 이 순교 성인들의 유해는 1154년에
라테라노(Laterano) 대성당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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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 비탈리스(Vitalis),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펠릭스(Felix),
성 필리푸스(Philippus)
성 실바누스(Silvanus)
축일 7월 10일
성 알렉산데르(Alexander)는 6세기 초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7월 19일)에 의해 로마
미사경본에 이름이 추가된 순교자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역사성은 분명하지 않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의 살라리아(Salaria) 가도에
있는 묘지에 7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묻혀 있었다.
이 7명의 순교자들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
이교도의 신상에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순교한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11월 23일)의 아들들로
별 근거 없이 주장되었다.
그들은 네 번의 재판을 받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7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은
성 알렉산데르와 성 비탈리스(Vitalis),
성 마르티알리스,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펠릭스(Felix), 성 필리푸스(Philippus) 그리고
성 실바누스(Silvanus)로 전해졌다.
그들은 모두 로마 순교록 7월 10일자에 기록된
진정한 순교자들로 로마에 있는 네 개의 묘지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그들 서로간의 그리고 성녀 펠리치타와의
연관은 없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 마카베오 하권
7장에 나오는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를
본떠서 인위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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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펠리치따스는 귀족으로 영세받은 부인인데,
남편과 사별한 뒤로는 과부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으며, 자선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은 열심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러므로 이 열심한 부인 때문에 귀족 집안이던
그의 집안에는 우상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이방인 사제들이 그녀를 고발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와 자녀 일곱 명이 황제 앞으로
끌려가서 이방신에게 희생 바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때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위협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영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이에 신문관이 그럼 죄없는 자녀들마저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만일 그들이 신자라면
영원히 살도록 힘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불을 기다려야 할 뿐이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리하여 황제는
그들을 각기 다른 형벌로 죽이게 하므로써
모두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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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아노르(Bianor)
성 실바누스(Silvanus)
축일 7월 10일
성 비아노르와 성 실바누스(Silvanus)의 순교는
그리스의 전설로 전해지고 현존하는 그들의 행전
또한 별로 신뢰성이 없다.
그들은 소아시아의 피시디아(Pisidia) 지방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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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멜베르가(Amelberga)
축일 7월 10일
성녀 아멜베르가는 아르덴 출신으로 전승에 따르면,
그녀의 미모가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워 국왕
피핀 3세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왕의 아들 샤를(샤를마뉴)의 결혼 상대자로
왕으로부터 직접 청혼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 번은 그녀가 피신해 있던 성당에서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어 결혼시키려다가 그녀의 팔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벨기에의 뮌스터빌센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1073년에
켄트의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 성당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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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멜베르가(Amelberga)
축일 7월 10일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 태생인 성녀 아멜베르가는
불과 13세의 나이에 비트겔(Witger) 백작에게 시집을
가서 세 자녀를 낳았는데,
이들이 곧 성녀 구둘라(Gudula, 1월 8일),
성녀 라이넬디스(Reineldis, 7월 16일) 그리고
캉브레(Cambrai)의 주교 성 에메베르투스
(Emebertus, 1월 15일)이다. 남편 비트겔이
로브(Lobbes)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자
그녀 역시 모뵈주의 수도원에서 같은 규율을 지키는
수녀가 되어 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여생을 매우 엄격하게 지내다가 남편이
운명한 후 그녀 역시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그녀는 아말부르가(Amalburga), 아말베르가(Amalberga),
아말리아(Amalia), 아멜리아(Amelia)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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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폴로니오(Apollonius)
축일 7월 10일
성 아폴로니우스(또는 아폴로니오)는 소아시아
리디아(Lydia) 지방의 사르디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코니움(Iconium)에서 채찍으로
매를 맞고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된다. 때때로 그는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있는 부제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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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 페체르스키(Anthony Pechersky)
축일 7월 10일
우크라이나(Ukraina)의 루벡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우스 페체르스키(Antonius Pechersky,
또는 안토니오)는 처음에 은수자가 되었으나,
이 생활을 위한 교육이 절실함을 깨닫고 아토스
산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어스피그메누 수도원과
관련을 맺는 은수자가 되었다.
여기서 몇 년을 살다가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서
드네프르(Dnepr) 강 언저리의 키예프(Kiev)에
은수소를 세웠다.
그의 지혜와 성덕은 은수 생활을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처음부터 키예프의 동굴들
(키예프-페체르스카야-다우라)는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러시아인을 위하여 러시아인이 세운 첫 번째
러시아 수도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체르니고프(Chernigov)에 또 다른
수도원도 세웠지만, 즉시 페체르스카야 라우라의
자기 동굴로 돌아와서 여생을 엄격하게 수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와 더불어 그는 러시아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동굴의 성 안토니우스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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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엠마누엘 루이스(Emmanuel Ruiz)
프란치스코 마삽키(Franciscus Masabki)
축일 7월 10일
크림 전쟁(Crimean War) 후 파리(Paris)의 의회는
터키에 대하여 오토만 황제의 어떤 개혁,
즉 터키 내의 소수집단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요구하였고, 1856년에는 술탄이
칙령을 내려 제국 내의 모든 신하들은 인종과
종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화해 무드가
조성되던 중, 1860년에 어느 청년 그리스도인과
힌두교인 사이의 논쟁이 화근이 되어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 해 5월 30일과 6월 26일 사이에 레바논(Lebanon)
전역에서 6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살해되었다.
잘레에서는 5명의 예수회원이 목 졸려 죽었고,
다일 알-카말에서는 마로니트 수도원의 원장이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만행 끝에 순교하였고
그곳의 수도자 20명은 도끼에 맞아 죽었다.
7월 9일에는 이 불길이 다마스쿠스(Damascus)로
옮겨 붙었다.
그 당시 엠마누엘 루이스는 프란치스코회의 원장이었는데
모아브인(Moabite)들의 급습을 받고 성당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죽는다.”고 말하고 제대 앞에서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또 프란치스코 마삽키(Franciscus Masabki)는
70세 된 노인이자 그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분으로 프란치스코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이들은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서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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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도시오 페체르스키(Theodosius Pechersky)
축일 7월 10일
러시아 바실코프의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또는 테오도시오)는
안락한 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고는 농노들과 함께
들에서 노동하였고, 손수 빵을 구워 먹었으며
고행자의 옷을 입고 지냈다.
1032년 그는 안토니우스 페체르스키
(Antonius Pechersky)가 세운 키예프의 동굴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그곳의 발람 수도원의 원장을
계승하였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수도원 개념을
확고히 하고 더욱 발전시켜서 팔레스티나(Palestina)
수도생활에 적응시켜 나간 위대한 수도자였다.
그는 환상적인 엄격성과 보속 행위보다는
기도와 고행 그리고 노동의 조화를 강조했고,
수도자들의 세속 개입을 권장하는 한편 활동과
관상생활의 조화를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원 건물과 수효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과 구호소를 세움으로써
전인적인 복음화에 주력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일에 뛰어들었던 실천적인 사람이었고,
키예프의 왕좌를 형제에게서 찬탈했던
스비야스토스라브를 카인에 비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의 수도원은 러시아 수도원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비유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는 러시아
수도회의 설립자라고도 불린다.
Catholic Cultural Center 한┃국┃가┃ 톨┃ 릭┃ 문┃ 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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