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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섶의 노래
신 보 성
휴대용 라디오 목에 걸고 어깨춤 들썩이며
산을 오르는 노인이 있다
풀섶의 송장메뚜기들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덩달아 즐겁다
중국 발 미세먼지는 이 땅의 풀잎들이
다 삼켜버렸는지 바람냄새 산뜻하고
청명한 하늘 떠다니는 구름마저
밝게 빛나는데
초음속 전투기의 굉음이 웬말인가
소리는 요란한데 비행기는 안 보이고
맑고 푸른 하늘이 어쩐지 불안해진다
중국에서 날라 오는 미세먼지 안보이고
전투기 소리도 안 들리는 고요한 하늘 아래
할아버지는 라디오 목에 걸고 등산을 가고
송장메뚜기 신명나서 튀어 오르는
풀섶 가에서 금수강산 아리랑을
부르고 싶다
목욕관리사
신 보 성
열흘쯤 되었을까
내 몸을 분탕질해 놓은 감기가
떠난듯하여 오늘은 공중목욕탕에 갔다
평소 자기 손 놔두고 목욕관리사에게 때 미는
사람 좋게 보이지 않았는데
등뼈가 성치 못한 내가 도리 없이
관리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몸뚱이 관리사도 참 많다
이발사 미용사 손톱관리사 눈썹관리사
그뿐인가
내과 외과 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신경과
종합병원 모든 의사들이 몸뚱이 관리사이다
몸의 때를 밀어주는 목욕관리사는
훌륭한 전문의사였다
늙은 몸의 구석구석 달라붙은 오물을
말끔히 닦아주는 전문직업인 덕분에 내 몸은
날아갈 듯 가뿐해졌다
이들 몸뚱이관리사들 노력으로 인간 수명이
백세로 늘어났다는데
인간 영혼의 관리사는 없는 것일까
몸의 뿌리가 영혼이라면 인간이 백 살을 산다 해도
병든 영혼을 담고 있는 몸뚱이는
썩은 뿌리에 한 순간 솟아오른 풀잎이리니
영혼의 목욕관리사를 찾아야 하리
때 늦은 벌초
신 보 성
추석 전에 해야 할 선산의 벌초
감기가 말려 하지 못하고
감기 물러가자 새벽안개 헤치고
선산으로 내려왔다
곱게 자란 잔디를 멧돼지가 시샘하는지
분탕질해 뒤집어놓았고
해마다 아카시아는 뿌리까지 뽑았는데도
씨앗이 어디로부터 날아왔는지 무성히 자라있다
고요한 산록 햇살 고운 무덤 위에
잠자리들 날아와 망인의 외로움 달래주고
푸른 하늘 흰 구름 유유자적 노니는데
별안간 들려오는 일꾼들 제초기 돌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알밤들이 우두둑 떨어진다
무덤 앞에 절하고 반야심경 독송하니
가신 님 숨소리가 들여오는 듯
적막한 산소에 울먹이는 호곡소리
홍시꽃
신 보 성
고향의 들녘 감나무 홍시꽃 만발하였네
홍시꽃은 먹는 꽃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화사하게 피었다
십자가가 보이는 교회당이 있고
허수아비 춤추는 고추밭엔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떨어진 홍시꽃이 널브러져 있어도
사람의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네
이곳으로 살아서 오건 죽어서 오건
말벗할만한 친구 하나 없어서 심심하겠다
고향마을 들어가기 전 물어볼 것도 적지 않은데
사람 하나 안 보이고
경계의 눈초리를 한 말벌들만 설치네
떨어진 홍시 두어 개 계곡물에 씼어
점심으로 때우니 배가 부르다
수승대 물소리
신 보 성
국민관광지 내 고향 수승대는 가을이 좋다
구연교 다리 밑 바위에 맨발로 앉아
흘러가는 물소리 귀로 들으며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월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멱 감던 백옥 같은 맑은 물은
수수십년 풍상에도 그대로이고
날 알아보는 젊은이 없어도
이리 저리 촌수 대면 남이 아니니
산천도 내 고향 인심도 내고향이로다
여기 이대로 앉아 그리운 어머니 생각하며
망모석으로 굳어버린다 해도
후회하진 않으리라
수수만년 물소리에 취하고 거북바위 벗하여
님 오시는 길목을 지키오리라
고향의 모텔에서
신 보 성
부모형제 다 떠나버려
타향처럼 되어버린 고향
객지에 나온 나그네처럼
모텔방에 들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바뀌고
마음은 여일한데 몸뚱이는 변하였네
옛 친구들 다 떠나버리고
한 잔 술 함께 할 사람도 없는
내가 살았던 옛 고향
모텔 창문 열고 바라보는 밤풍경은
흙빛이다
쓸쓸한 모텔방
객수에 젖은 마음으로
잠이 들면 무슨 꿈을 꿀 것인가
금강경 독경소리 틀어놓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여 본다
옛 정취는 살아있어도
신 보 성
밥 짓는 연기 솟아오르고
음메! 음메! 황소 울음소리
고욤은 익어서 빨갛게 웃고
고추 따는 새색시 발그레 상기된 얼굴 위로
햇살이 곱다
어린 시절 많이 보아왔던
농사짓는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이
새삼스레 신기하다
수년전만 해도
이런 길가에서 우연히 그 아주머니 만나면
한사코 그의 집으로 끌고 가
정구지 베고 고추 애호박 전 부쳐
근사한 술 한상 차려 내놓곤 하였는데
등뼈는 계속 쑤시고 아리며
떠오르는 생각마저 어수선하니
고향에 고향에 돌아 와도 서러운 이내 심사
달랠 길이 없구나
거창 사과마라톤
신 보 성
등뼈 부서질 듯 아프지만
나의 고향 거창에 온 김에
사과 마라톤을 안 보고 갈 수는 없다
특산물 판매장 무슨 무슨 박물관
아림예술제 평생교육 전시장
먹을거리 골목 의료지원센터 무수한 간판들
눈요기만 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가는 곳 마다 아는 사람 찾아와 인사를 한다
군민의 날이어서 거창군민들 다 여기로 나왔는지
날 알아보는 사람들 많기도 하다
반갑긴 한데
인사하기 바빠서 구경은 뒷전
등뼈가 아프니 인사하고 웃어주는 일도 고통이다
사람 피해서 구석진 나무 그늘 밑으로 가니
거기엔 고향 사람들 더 많이 모여있다
마라톤 코스
모두가 선수 인 것은 아니다
그냥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는 서민 스포츠
운동장 잔디 위로
하늘이 맑고 가을이 푸르다
넉넉한 먹을 거리
잔칫집 찾아온 손님이라면
누구에게도 푸짐하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내 고향 거창 인심 후하다고 소문나야지
아픈 등뼈 끌어안고 마음으로 달려보는
내 고향 산천
내 집이 천국
신 보 성
여행이 고행이고 내 집이 천국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되고
새 것보다 때 묻은 것이 좋으며
혈연의 사촌보다 이웃의 사촌이 더 소중하다
여행이 주는 교훈은
내가 사는 내 집 내 이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
노상 보는 은행나무 잎사귀
새삼스레 다정해 보이고
무심코 흘려보낸 까치들 지저귐이
새롭게 들려온다
이제는 고향 나들이도 힘이 들어
선산 묘지 관리도 장남에게 넘겼다
물려 준 재산도 별로 없는데
제사와 묘지 관리 의무까지 다 넘겨주니
자식에게는 미안하지만 홀가분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 이곳을
천국으로 알고 산과 들 벗하여 살아가노라면
그런대로 세월은 휘영청 흘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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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글을 읽으면 모습이
비디오 보듯 영상도 떠오름니다
제 고향은 함양인데요 거창을 자주 들려가곤 했고 수동을 지나 웅평이라는 곳에 저의 큰 기와집이였는데...이제는 주인도 바뀐지 오래되어 간곳없습니다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림니다
감사합니다.
함양과 거창은 지척간이지요.
함양의 상림숲 안의의 용추폭포 서상 가는 길목의
농월정을 가 본 적이 있어요.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