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22](수) [동녘이야기]
[동녘글밭] 욕심과 양심, 그 사이에서
https://youtu.be/GpkvYD283SY
어제는 1.19 폭동 사태에서 빚어진 안타까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읍니다. 특히 그 안타까움은 폭동에서 중심 역할을 한 젊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어쩌다 꾐에 빠져 젊음의 뜨거운 열정을 거기에 쏟게 되었는지 아쉬움이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 젊은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감싸 안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를 들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읍니다. 폭동 사태의 중심 노릇을 했으니까요. 이런 복잡한 생각에 ’어디까지 우리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글밭을 일구었던 것입니다. 서운한 것을 넘어 밉기까지 했으니까요.
오늘은 ’우리들‘의 언저리에 서 있는 그 젊은이들 뿐만이 아니라 그 젊은이들을 이용하고 있는 놈들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참입니다. 그 놈들은 이런 저런 탈을 쓰고 있읍니다. 정치꾼이면서 정치인으로, 법률 사기꾼이면서 으젓한 법률가로, 똥장군이면서 정의롭고 용맹한 장군으로, 종교 사깃꾼이면서 그럴듯한 종교인으로요.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빠져드는 젊은이들은 물론 늙은이들도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태극기 부대‘요, 요즘에 새로 생긴 듯이 보이는 ’백골단‘입니다. 이 님들은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분별력이 없는 님들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될 것으로 여기고, 단순히 가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생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의 까닭인 ’욕심의 작동‘에 내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 맨 처음에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욕심의 작동이요, 그 작동에 의한 생각이요, 행동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니까요. 이처럼 그 시작은 ’이익‘입니다.
그쪽에 서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막연한 생각에 빠진 바로 그 ’나‘입니다. 크게 보면, 넓게 보면, 멀리 보면 사실은...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요, 내게 전혀 도움이, 이익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욕심의 작동‘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에 내가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노릇입니다. 뒤늦은 후회로 성큼 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너무도 큰 실수로 삶을 망치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경우는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존재가 바로 이 욕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욕심‘만이 아닙니다. 정반대의 ’양심‘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늘 작동하고 있듯이요. 같은 크기의 정 반대 방향으로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작동합니다. 그렇기에 ’모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짊어진 모순의 ’나‘를요. 온갖 모순으로 얽혀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오늘, 글밭의 제목으로 잡은 것이 ’욕심과 양심, 그 사이에서‘입니다. 어쩌다 사랑으로 태어난 ’나‘입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욕심과 양심이라는 모순을 그대로 안고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나‘는 하염없이 이 욕심과 양심 사이를 오늘도 헤매고 있읍니다. 그게 바로 우리네 삶이지요. 욕심과 양심, 그 사이를 늘 헤매고 있는 ’우리들‘인 것을 결코, 잊지 말자는 말씀입니다.
이런 오늘도 어김없이 욕심과 양심, 그 사이를 거니는 ’나‘를 봅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오늘의 글밭은 어제에 이은 것입니다.
1.19 폭동 사태에 중심 역할을 한 젊은이들에 대한 아쉬움이 커
어찌하여 가담을 했는지에 대하여...
그 까닭을 , 그 뿌리를 말씀 드리고 싶어
'욕심과 양심, 그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잡고 일군 것입니다.
그리고 찾은 것이 '욕심과 양심'입니다.
욕심과 양심은 모순 관계에 있읍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 드리고 싶었읍니다.
혹,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