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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에 관한 소고(小考)
김충환
들어가는 말
성서에서 기도는 주술의 수준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고도의 영적 교제와 또한 하나님과의 뜻과 행동의 일치의 단계로 나아감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기도에 대한 모든 언급들을 포괄할 수 있는 정의는 불가능하다. 다만 가능하다면 기도를 가리키는 전칭적 용어들 속에 나타나는 의미만을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제사장 또는 천상적 존재의 중재를 수반하거나 또는 수반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하나님과의 교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대개 음성적인 것이나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기도는 인격적 접촉의 창조라는 수단에 의하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과 방향에 영향을 주기 위해 계획된다. 기도의수단과 그 결과는 하나님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항상 달려 있다.
1. 성서에 나타난 기도의미
기도를 설명하려면 며칠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기도에 대한 몇 가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는 적어도 다음의 4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다. 즉 ACTS이다. Adoration(찬양, 시편95:6), Confession(고백과 회개, 시편32:5), Thanksgiving(감사, 빌립보서 4:6), Supplication(간구 기도 도고, 딤전2:1)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행 12: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요 14:13), 성령의 권능으로(렘 6:18)해야한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기도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이다.
가. 기도의 명칭들(Gebetstermini)
1) 구약
우리는 구약에서 "기도(Gebet)"에 대한 상위개념(Oberbegriff)을 발견할 수 없다. 이 기도에 대한 개념 중 하나는 (팔랄)이다. 이단어의 피엘형(강한 의미의 능동태)인 의미는 간섭하다, 판단하다(to judge, to adjudge)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힛파엘형(재귀형)인 (힛팔랄)은 중재하다(to intercede), 기도하다(to pray)라는 의미가 있다. 이 용어의 고대의 근원은 하나의 예배행위로서 예배자 자신이 그의 몸을 상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되었다. 이의 명사형은 (테필라)로서 특히 시편의 제목들에서 사용되었다. (카라; rufen, to cry, call out, shout)는 하나님의 이름( )을 찬양하거나 기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부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시편 27:4, 122:6) 또는 하나님의 계시를 묻다(민 27:21, 수 9:14)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외에 구약에서 나타나는 기도와 관련된 단어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부르짖다, 소리치나, 외치다, ...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이다.
결국 이런 단어들은 기도의 대한 2가지의 목적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바로 탄원(Klage)과 찬미(Lob)인 것이다.
나) 신약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기도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명사 (프로슈케)와 여기서 파생된 동사 (프로슈코마)이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견된다(85회: 마태 6:5; 누가 6:12; 행 2:42 등).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께 요청하는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데이시스), (데오마이)라는 단어도(누가 8,28)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여 쓰이지는 않았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bitten flehen<탄원하다>:요청하다, 바라다이다.
요한복음(16:24, 26)에는 기도라는 의미로서 주로 (아이테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사람이나 하나님께 요청하는 데 함께 쓰일 수 있다
2. 기도란?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구원받을 만한 길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곤경에 빠졌을 때 구조 받기 위한 수단을 찾으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자기 아닌 다른 곳에서야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대신 채우시며 우리의 궁핍함을 넘치는 부요로 대신 채우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모든 기대와 소망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보고(寶庫)를 열어 주신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논리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을 열어주신 자는 주의 광명 중에 광명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시편 36,9).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넘쳐흐르는 샘에서 물을 길러 내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길어 낼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자신의 모든 은혜의 풍성함 두기를 기뻐하셨다(골 1:19, 요 1;16). 그런 사실들을 우리가 신앙으로 깨달았다면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 그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며 기도로 요청하는 일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선한 것의 주인이시며 시여자(施輿者: 거저 무엇을 주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청하라고 권면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물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알면서도 파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참 신앙이란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복음에서 신앙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은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다(롬 10:14-17).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양자의 영이시다. 그분은 우리 마음에 복음의 증거를 인치시며(롬 8:16), 우리의 영혼을 부추기셔서 감히 우리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게 하시며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하시고(롬 8:26) 아바 아버지라 담대히 부르짖게 하신다(롬 8:15).
마더 테레사는 그의 저서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도는 기쁨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어주는 햇빛이다. 기도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희망이다. 기도는 여러분 모두와 나를 위해서 타오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을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 기도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중 한 시각에서 기도는 대화로 정의 할 수 있다.
가) 기도는 대화이다.
우리는 다음 성경구절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참으로 쉬운 것 같으나 어려운 것이 이 구절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모습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서 우리의 속마음을 내어놓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모르신다는 것이 아니다. 알고 계시기에 더욱더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보여주듯이 우리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도는 대화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같이 기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여봅시다. 그러면 아주 편안히 우리는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 일본의 신실한 기독교신도이며 소설가인 이우라 아야꼬(三浦綾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사실은 사람과 대화하듯이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매일 기도하고 있는 신자들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 기도는 사귐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대화 이전에 어느 정도 교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가 목사님과 오랜 교제를 하였다면 무슨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다. 남녀관계에서도 만나면 만날수록 일반적으로 대화가 많아진다. 교제가 없으면 대화가 쉽게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특히 속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하나님과의 사귐인 교제가 없으면 쉽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먼저 그 분을 가까이하여야한다. 가까운 사이라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성경을 자주 대하는 것,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것, 신학수업에 참여하는 일 등을 우리는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장 지름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우리편에서 먼저 말을 건네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귐의 시작인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서}라는 책에서 "기도는 보이지 않으나 가장 거룩하신 자와의 교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교제와 사귐이 대화하는 일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도 기도로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먼저 말을 거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인간이 먼저가 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이렇게 용기를 내어서 시작할 때 그때에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가 시작 될 것이다.
다) 기도는 아버지와의 대화이다.
기도는 신자와 하나님과의 대화요 교제라고 우리는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너무 무섭고 어려운 분이라고 우리와 일반 신자들은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잘못된 하나님 상을 우리는 교회에서 바로 잡아 주어야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아버지라고 생각하여한다. 자식이 자기 아버지와 교제하여 대화하는 부자관계에서 자식의 입장에 우리가 서있으면 된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라고 마태 6장에서 알려주셨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하는 우리는 자녀이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아버지인 것이다.
우리 신자에게는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가 있다(요 1,12). 기도는 이 세상의 육신의 아버지와 대화하듯이 하늘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라 생각하여보자. 예수님은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6)"고 말씀하셨다. 자기의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하며 대화를 할 수 없는 자녀는 불행한 것처럼, 하늘의 하나님-아버지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하며 기도를 할 수 없는 신자는 불행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없거나 아버지라 부를만한 자녀로서의 자격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이어야 함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다.
라) 기도는 영적인 대화이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한다. 그래서 소리를 내어 말하면 귀로 들음으로써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도라는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즉 영으로 말하고 영으로 듣는 것이 우선 되어야한다.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이다.
3. 기도의 필요성 및 원칙
가) 기도의 필요성
우리는 위에서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부(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친교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친교를 통하여 하늘 성소에 들에가 직접 하나님께 그의 약속에 대하여 애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약속하셨다 할지라도 그 약속을 믿는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은 기도로 구하게 되어있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의 복음은 보화가 묻혀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으며 우리는 신앙으로써 그것을 이미 보았다. 이제 기도로써 그 보화를 캐내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또한 직접기로를 하는 것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유용한가를 말로서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성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유일한 요새라고 말씀하여주고 있다(참고, 요엘2:32).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과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하여 우리의 형편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권능으로 연약해서 쓰러질 듯한 우리를 붙드시고, 자비로써 비참하게 죄의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은혜가운데로 영접하신다. 요컨대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시도록 하나님을 부르며, 그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비상한 평안과 안식이 찾아온다. 왜냐하면 우리를 억누르는고 있었던 궁핍함을 주님 앞에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돌보시려는 의지와 능력이 충분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불행도 다 알고 계시다는 생각을 함으로 마음이 푹 놓이기 때문이다.
나) 기도의 원칙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20장에서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경외 :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첫째 원칙은, 하나님과 대화하려는 사람에게 합당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르고 순수하게 묵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육적인 염려나 생각에서 벗어나 기도에만 마음을 기울일 뿐 아니라 가능한 한 자기를 초월하여 마음을 높이 들도록 하자. 여기서 칼빈은 어떠한 불안으로도 찔림을 받거나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초연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심각한 근심거리 인하여 기도할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궁핍과 회개의 마음 :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자신의 무력을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기도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를 드릴 때 마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듯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읊어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칼빈은 지적하고 있다.
겸손 :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즉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곧 자기 신뢰를 전적으로 버려야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주장해서 허영과 교만이 부푼다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칼빈은 주장하고 있다.
확실한 소망 : 우리는 참으로 겸손한 마음에 정복되고 압도되더라도, 동시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도록 용기를 내어야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인도를 따른 다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한 법칙이며, 이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과 잘 조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두 이 원칙에 유의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참고, 마태 21:22, 약 1:5-6)". 그러므로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편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에는 약속이 함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마태 7:7,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기도의 명령과 이에 대한 약속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가는 말
기도는 하나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마치 호흡과도 같다. 호흡을 하여야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듯이 기도는 필수적이다. 기도할 때 확신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한다. 많은 성서의 구절(잠 18:10, 요엘 2:32, 롬 10:13, 사 65:24, 시 91:15)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런 하나님께 우리는 그저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태만하여 머뭇거릴 때에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라는 말씀을 항상 귀에 쟁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벧전 5:7, 시 55:22)을 향기로운 제물같이 기뻐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이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