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피는 연꽃 진짜 보배”
-“발자국 떼어 놓듯 그렇게 사세요”-
“수억겁 살던 관습·집착
욕심과 애정·원한 등이 쌓여
꽃이 피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 이 자리를 하게 된 것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입니다.
세계를 돌아봐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그 과정을 그대로 가르쳐주는 곳이 별로 없고,
또 스님네들이 잘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때 당시의 방편을 자꾸 쓰시니까
현대의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고 해서 큰 걱정입니다.
세계를 따지고 전 우주를 다 따져봐도 모두가 한 생명 한 교리인데,
우리가 그렇게 뜻을 같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여러분은 먼 데서 찾지 마시고 아주 가까운 나에게서,
못났든 잘났든 내가 나온 자리에서 바로 나를 찾도록 하세요.
아랫눈썹과 윗눈썹이 깜짝거리듯 정신계와 물질계가
즉 육신과 정신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지금도 항상 활용하고 사시건만 너무 가까워서
찾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몸 속에 들어가서 나를 찾지 않고 타의에서
나를 찾는다면 영원히 찾지 못한다구요.
그러면 몸 속에 들어가서 찾을 때 어떻게 찾느냐.
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 소임을 맡은 구비구비
그 개체의 소임자들을 다 만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게 됩니다.
만약, 우리 정신계가 저 벼룩만 하다면,
벼룩만하게 축소해서 들어간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산도 있고 물도 있고 진흙밭도 있고 자갈밭도 있고
뭐 온통 난리일 겁니다.
세계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에 나를 찾으러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 구비구비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자갈밭을 걷고 가시밭을 걷고
흙탕물에 빠져가면서 걷고 할 때에 그것을 고(苦)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한마음의 생활은 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속에 구비구비 넘어가면서 닥쳐오는 모든 것을
거기 놓고 가거라 이랬단 말입니다
. 지금 내가 비유해서 이 속에 들어가서 구비구비 걷고 빠지고 나오면서
온통 이렇게 돌아치는 경로를 얘기했는데 우리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고’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한테 어떠한 일이 닥치든,
안에서 일어나든 바깥에서 치고 들어오든,
모든 것을 나오는 자리에다가 되놓으라고 했습니다.
고등동물이란 모든 것이 자동으로 입력이 돼서 누적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차례차례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의식처인데 생명의 의식들이 하는 농간에 속지 마세요.
이 의식들이 모두 입력이 돼서 차례차례로 나오게 되니
그 헤아릴 수도 없이 나오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해결을 못하니까 그걸 팔자다 운명이다 이런 말들을 하죠.
그러나 그것을 나오는대로
다시 그 속에다 놓으면 앞의 입력이 없어지고
현실에 내가 새롭게 입력하는 것만이 나오기 때문에
팔자운명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수차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지만 듣기는 들으나
실천에 옮겨지지 않음으로써
해결이 되지 않는 경향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는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 세상에 자기 빼놓고 바깥으로 믿을 데가 누가 있습니까.
부처도 믿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를 따르되 믿지는 마라.
먼저 너를 알아야 부처의 마음도 알고,
부처가 공체로서의 몸이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는
도리도 알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아까도 몸 속에 들어가서 겪어야 할 문제를 말씀드렸듯이
그렇게 겪는 것이 지금 우리가 생활에서 겪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둘로 보지 말고
자꾸 거기다 놓고 가고 또 놓고 가고 한다면
바로 홀연히 문이 열리게 될 겁니다.
결국은 내가 나를 찾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진짜로 믿지 못하고 놓지 못한다면
아니 놓는다는 말도 이게 아닙니다.
뭐 놓는다 안 놓는다 이런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죠.
왜냐하면 저 나무들 보셨죠. 뿌리가 전부 줄기하고 맞붙어 있어요.
흙이 덮여 가려서 안보일 뿐이지 맞붙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무한테는 그 흙이 무명이 되고,
무명이 가려서 자기 뿌리를 못보게 되고,
인간은 자기의 그 무명이 나무에 흙이 덮인 것처럼
관습, 욕심, 착을 버리지 못해서 자기를 못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모든 고난을 다 겪고나면
홀연히 연꽃이 피게 됩니다.
진흙 땅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죠
. 그냥 진흙 땅에서 연꽃 피는 거야
누구나 보고 말하고 행할 수 있지만
, 내 몸 속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더러운 물이 묻지 않으니
아주 귀한 것이 되죠.
마음은 체가 없으니 묻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수억겁을 살던 관습과 집착과 욕심과
애정과 원한 이런 것들이 쌓여서,
꽃이 피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 진흙 땅에서 피는 그 연꽃은 더러운 물이 묻지 않는다는
그 뜻을 다시 한번 새겨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의 꽃이 즉, 마음에서 홀연히 피는
그 마음의 연꽃이야말로 진짜 보배임을 알게 될 겁니다.
마음의 연꽃이 피면 그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참나라고 이름 해서 붙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참나를 찾는데 방편이 된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누진이라고 하는 그것을 찾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도
일곱 걸음을 걸으실 때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연꽃이 그 발밑에 피어서 그걸 밟고 나오셨습니다.
여러분이 한발짝 떼어놓을 때에 그것도 말하자면 ‘용무’입니다.
내가 이 발자국을 떼어놔야겠다 하고 떼어놓는 게 아닙니다,
그렇죠? 내가 가겠다 하는 것도 없이
그냥 말도 없이 갈 때가 되면 그냥 걸어 갑니다.
발자국을 하나하나 떼어놓을 때에 뒷발자국은
자꾸 없어지면서 새로 앞으로 한발짝씩 걷는 것이
바로 용무입니다.
바로 ‘공법’이다 이 소립니다.
내 몸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들어있는 한 개체가 떼어놓을 때
그것을 연꽃에 비유한 것은,
내 마음이 바로 움죽거리는 연꽃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움죽거리며 피어나는,
그리고 한발짝 떼어놓을 때마다 하나씩 피어나는 연꽃처럼
움죽거리는 연꽃이란 얘기입니다.
지는 연꽃이 아니라 움죽거리는 연꽃 말입니다.
연꽃이 피게 되면 지는 것도 없고 피는 것도 없는 것이 연꽃이니까요.
부처님께서 마음의 연꽃을 밟고 일곱 발자국을 떼놓으셨다 이러는 건
우리가 육체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그 근본 뿌리가 즉 ‘불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발자국을 떼어놓는다고
방편으로 말씀을 하신 거죠.
그러면 타의에서 찾는 게 아니라 우리 몸 속에서
그렇게 찾아야 하는데 내 몸이 한발짝 한발짝 떼어놓을 때에
여러분은 떼어놓는 그 발자국을 마음으로 붙잡고 갑니까,
그냥 놓고 갑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 생각없이 그냥 떼어놓고 마음은 아무 동요없이 그냥 떼시죠?
그것처럼 살림살이도 그렇게 사시란 말입니다.
왜냐? 살림살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발자국 떼어놓는 것처럼 순간순간
이것 보고 흘러가고 저것 보고 흘러가고,
저것 듣고 흘러가고 이것 듣고 흘러가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이치가 있는데 여러분은 좋으면 좋다고 붙들고,
언짢으면 언짢다고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그게 놔지지를 않는 겁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 언짢아도 한 찰나 좋아도 한 찰나인 것을요.
그것을 좋다고 붙들고 즐겁다고 붙들고 행복이라고 붙들고
또 언짢으면 언짢다고 울고
가슴 아파하고 붙들고 늘어진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 부도가 났다 할 때도
얼른 놔버려야 할텐데도
내내 그 과정을 붙들고 울고
거기에만 매달리니 일이 더 안풀리게 되는거죠.
그거 하나 뿐 아니라 일체가 다 그러합니다.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한테도 그렇게 살지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부도를 맞아서
숟가락 하나도 건질 수 없다고 하길래
몽땅 놔버리고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자리에 놓고 뛰시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다 해결을 하고선 참 고맙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오히려 내가 고마워 해야 된다고 말이죠.
여러분이 아무리 붙들고 늘어져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게 돌아가질 않는 거예요.
흙탕물이라면 흙탕물대로 놔버리세요.
새 물을 또 쓸텐데 흙탕물을 계속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새 물이 들어올 사이가 없죠.
이것은 아주 심각한 얘기입니다.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