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전문가에서 통역 자원봉사자 변신한 박종덕님
- 통역 자원봉사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 연결해주는 거죠”
▲ (1)국제금융전문가로 활동하던 박종덕씨는 은퇴 후 고향 강릉으로 돌아와 각종 국제행
사에서 통역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박씨가 그동안 통역 봉사를 하며 받은 ID
카드와 표창장. (2)2013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당시 통역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 최문순
지사, 외국인 선수단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는 박종덕씨. (3)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고향
후배 염돈호 강릉문화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종덕씨.
1952년 강릉사범학교 졸업 후 교직 생활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연세대 영문학과 입학
195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입사
55세에 한국지점장 끝으로 정년퇴직
세무사로 제2의 인생 설계하던 중
日 야마구찌 은행 도와달라는
제의받아
부산지점서 국제금융담당 고문 맡아
18년 근무 … 2002년 72세로 현역 퇴임
30년 부산생활 청산하고 돌아온
고향
유창한 영어·일어 실력 바탕 통역 봉사 시작
올 강릉단오제서도 최고령 봉사자로 활약
“4년 뒤 동계올림픽서도 도움되고
싶어”
“너무 어려웠던 시절 제 어머니는 사천에서 과줄을 만들어 저를 대학 공부 시키셨습니다. 노후를 위해 고향을 찾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야지요. 그것이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 길인 듯 싶습니다.”
2014 강릉단오제에서 최고령
자원봉사자로 활약한 전 BOA(Bank of America) 한국지점장 박종덕(83)옹은 고향에서의 통역 자원봉사 활동을 어머니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30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단오장에 나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통역 자원봉사활동을 펼친
박옹은 영어는 물론, 일어까지 능통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강릉시 통역자원봉사자로 명성이 자자한 박(83)옹이지만 지금도 매일
아침마다 강원일보 영어회화와 언중언을 스크랩한다.
평생 영어와 일본어를 하며 지냈지만 매일 회화 공부를 통해 언어 감각을 되새긴다는
박옹은 “강원대 어학원에서 제공하는 영어회화인데 그때그때 유행어도 알려주고 영어회화하는데 도움이 돼요”라고 말한다.
통역을 할 때는
나이도 잊는다. 몸은 조금 힘들지만 마음만은 젊은이 못지 않다.
“강릉단오제 때 통역 자원봉사자가 참 많이 부족합니다. 통역은
단순히 강릉단오제를 소개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박옹이 통역
자원봉사자를 하게 된 것은 2009년 3월부터 강릉빙상경기장에서 열린 세계국제컬링대회부터였다.
“2009년 1월인가 아파트 반상회를
하는데 통역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고 반장이 안내를 해요. 그래서 사람이 부족한가 보다 생각하고 지원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통역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통역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대회만 꼽아도 8개 행사가 넘는다. 2009년부터
강릉단오제에서 통역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 ISU 세계주니어 피겨스케이팅대회, 2012년 ICCN 세계무형문화축전,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대회 등에도 참여했다.
박옹이 이처럼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가졌던 직업 때문이기도 하다.
BOA에서 30년, 일본 야마구찌 은행에서 20여년을 근무해 업무 속에서 익힌 영어와 일본어 회화는 수준급이다. 박옹은 이처럼 50여년 동안
생활 속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늘 써왔기 때문에 통역이 자유롭다. 특히 업무를 통해 고급 영어회화 실력을 갖춰 외국인들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능통한 영어실력을 자랑한다.
국제금융전문가로 명성을 날린 박옹은 1952년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강릉중앙초교 교사로
근무하며 당시 강릉교육장의 중매로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만났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정도 이뤘지만 배움의 열의를 저버리지 못해 1954년
연세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연희동 한 주택에 살면서 주경야독을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근로장학생을 신청했고
그렇게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수업 시간 외에는 늘 도서관에 머물면서 책을 정리하곤 했는데 매일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연희동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연세대를 창립한 언더우드 박사를 자주 만났다. 그렇게 인사를 하며 친분을 쌓았는데 BOA에 입사
당시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박사가 추천서를 써 줘 BOA에 입사할 수 있었다. 박 전 지점장은 그것을 좋은 인연이라고 설명했지만 늘 같은 시간에
언덕을 오르며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성실한 청년을 알아본 안목 있는 교육전문가와의 만남으로 보였다.
1958년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BOA에 들어가 1986년 정년퇴임 때까지 국제금융을 담당했다. 당시 BOA는 우리나라의 첫 외국은행이었던 까닭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국제차관은 BOA를 거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박 옹이 우리나라의 1, 2차 경제성장과 맥을 같이하며 그 누구보다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다.
55세에 BOA 한국지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한 뒤 박 전 지점장은 세무사로 전업을
계획했다. 은행을 다니며 틈틈이 공부해 세무회계 자격을 따 놓았기 때문이다. 그때 일본 야마구찌 은행으로부터 부산지점의 국제금융담당 고문으로 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저 1~2년 고문으로 근무하다 세무사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려 18년을 근무했다. 2002년 72세의 나이로
현역 퇴임한 뒤 부산에 정착하려고 했지만 아내가 고향을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1978년부터 2007년까지 30년 동안 살았던 부산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다.
박옹은 “부산에서는 은행 관계자로 30년 동안 있다보니 지역 유지이지요. 저는 남은 여생을
부산이나 서울에서 보내려고 했는데 아내가 강릉여고 10기예요.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박 옹은
고향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사천면을 찾았다. 고향 후배인 염돈호 강릉문화원장은 “강릉에 돌아와 제일 먼저 사천면 경로당을 찾아 고향 어르신들과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더군요. 그리고 1년에 한 번 사천면 경로당 회원들을 모두 초청해 좋은 곳도 구경시켜주시고 정말 마을 어른으로서 역할을
하시고 있어요”라고 칭송했다.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통역 자원봉사자를 어떻게 육성해야 할지 묻자 박옹은 “강원도든, 강릉시든 통역
자원봉사자를 육성하기 위해 예산을 지원해야 합니다”라며 “통역 자원봉사자는 단순히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닌 강릉과 강원도,
대한민국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아는 그래서 그 통역 자원봉사자를 통해 한국을 보여주는 문화자원봉사 외교관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옹은
“2018동계올림픽까지 4년도 안 남았습니다. 전 세계가 제 고향 강릉을 주목하고 있는 이때, 제가 가진 외국어 능력으로 세계에 강릉을 더 알려
고향 발전에 일조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 참조 : 강원일보 조상원 기자님(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