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매일 출근” 37%뿐… 재택근무로 빈 건물 늘자 아파트로 리모델링
1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중심가에 위치한 옛 평화봉사단 본부 건물. 평화봉사단 이전 이후 새로운 입주자를 찾지 못해 비어 있던 이 건물은 도심형 아파트로 리모델링되고 있다. 재택근무 확산으로 상업용 건물 공실률이 치솟은 미국에선 도심 건물을 아파트로 전환하는 등 도심 공동화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1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중심가. ‘2024년 봄 오픈’이라는 간판을 내건 8층 건물은 새 단장에 한창이었다. 백악관부터 듀폰서클까지 이어진 워싱턴 핵심 상업지구인 골든 트라이앵글 한가운데 있는 이 건물은 원래 평화봉사단의 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한 평화봉사단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2000여 명의 단원을 한국에 보내 영어를 가르치고 결핵 퇴치 사업을 벌이는 등 한국의 교육·보건 분야 지원 사업을 벌인 기관이다.》
당초 이 건물은 2020년 평화봉사단이 이주한 뒤 연방 서비스관리국(GSA)이 새로 입주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입주가 취소됐다. 결국 이 건물은 163가구의 도심형 주택을 공급하는 주상복합 아파트로 리모델링 중이다.
재택근무가 크게 늘면서 미국 대도시들은 도심 공동(空洞)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 정부와 주요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줄이고 사무실 출근일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근로자들은 출근 요구에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코로나19가 수그러든 지 오래지만 주요 대도시 사무실 절반 이상이 여전히 비어 있는 상황이다.
결국 주요 도시들은 도심 유휴 공간을 채우기 위해 각종 혜택을 제공하면서 빈 건물을 아파트로 리모델링하는 도심 재편 계획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일부 대도시는 도심 공동화로 매출이 줄어든 가게들이 앞다퉈 철수하고 범죄가 급증하면서 남아 있던 기업들마저 철수하는 ‘붕괴의 악순환’에 들어섰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도심 아파트 전환에 4조 원 지원
워싱턴 당국은 지난해 도심지 빈 건물을 리모델링해 2500채의 새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당국은 상업용 빌딩의 아파트 개조를 확대하기 위해 20년간 최대 680만 달러(약 90억 원)의 재산세를 감면해 주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세제 혜택을 최대 4100만 달러(약 538억 원)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당국이 세제 혜택을 대폭 확대하면서까지 도심지 아파트 개조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코로나19 확산 후 계약이 종료된 뒤 새 입주자를 찾지 못한 건물이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자회사 CBRE에 따르면 현재 워싱턴 도심지 상업용 건물의 공실률은 21%. 미국 수도 워싱턴의 건물 5채 중 1채가 입주자를 찾지 못해 비어 있다는 얘기다.
2018년까지 12% 안팎이었던 공실률은 코로나가 확산된 2020년 15% 수준으로 오른 뒤 계속 상승하고 있다. CBRE는 5일 보고서에서 “대규모 사무실의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공실률은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 당국도 ‘적응형 사무실 재사용 태스크포스(FT)’를 구성해 올해 초 세제 혜택과 규제 개선 패키지를 내놨다. 또 13㎢ 규모의 건물을 도심형 주택으로 개조해 10년 내 2만 채의 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샌프란시스코는 건물 인가를 바꿀 때 부과하는 비용을 없앴다. 필라델피아는 상업용 건물을 개조한 아파트에 재산세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백악관도 지난달 27일 주택 공급 및 실행 계획을 통해 상업용 건물을 도심형 아파트로 재건축하는 프로젝트에 매년 30억 달러(약 4조 원)의 지역 사회 개발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대도시 사무실 출근율 50% 이하
미국 주요 도시들이 도심 중심가 건물의 아파트 전환을 앞다퉈 허용하고 있는 것은 재택근무 확산으로 늘어난 상업용 건물들의 공실률이 당분간 줄어들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맥킨지 글로벌연구소가 7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미국 근로자들의 주당 평균 출근일은 3.5일로, 코로나19 이전보다 30% 줄었다. 전제 근로자 중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는 비율은 37%에 그쳤으며 56% 이상이 여전히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결합한 이른바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전문직,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나 대기업일수록 재택근무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따라 대기업 일자리가 많은 미 대도시의 중심가가 더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미 상업용 건물 보안 관리업체 캐슬시스템스가 조사한 1일 기준 미국 10대 도시 주간 평균 사무실 출근율은 샌프란시스코가 41.9%로 가장 낮았다. 이어 새너제이와 필라델피아가 각각 42.5%, 워싱턴 47%, 로스앤젤레스 48.2%, 뉴욕 48.9% 순이었다.
기업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재택근무를 줄이려 하고 있지만 이미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근로자들은 출근 요구에 반발하고 있다. 인사이더에 따르면 2021년에만 맨해튼을 떠나 뉴저지 교외 지역인 허드슨밸리로 이주한 주민만 약 3만 명. 대도시 주민의 교외 이주 붐이 한창이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의 모기업인 메타 등이 직원들에게 일주일 최소 3일 이상 출근하도록 했지만 직원들은 재택근무 축소에 반대하고 있다. 백악관도 올 8월 제프 자이언츠 백악관 비서실장이 직원들의 출근일 확대를 지시하는 등 연방 정부 부처들도 재택근무 축소 조치에 나섰다. 연방 공무원 노조 역시 재택근무 유지를 요구하고 있다.
‘도심 이탈→도심 붕괴’ 악순환
일각에선 근로자들의 도심 이탈이 도심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당국이 상업용 건물의 아파트 전환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주거용으로 리모델링이 어렵거나 상업성이 떨어지는 건물들이 적지 않은 만큼 도심 슬럼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빅테크 기업과 함께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의 메카가 된 샌프란시스코는 재택근무 확산으로 건물 공실률이 높아지면서 노숙인과 범죄가 급증하면서 쇼핑몰 등 소매업체들이 잇달아 매장 이전에 나서고 있다. 그러자 범죄가 더 늘어나 당국이 오히려 기업들에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심 붕괴 악순환은 1970년대 제조업 일자리가 디트로이트를 떠났을 때처럼 핵심 산업의 중대 변화를 통해 발생한다”며 “경제학자들은 ‘샌프란시스코는 이미 붕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중대한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고 전했다.
도심 공동화는 교통망 등 인프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워싱턴 메트로는 2025년부터 전철 운행을 줄이고 일부 역을 폐쇄하기로 했다. 재택근무 확산으로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승객 수가 40%가량 줄어들고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졌기 때문이다. 메트로 버스 또한 가장 붐비는 일부를 제외한 모든 노선을 단축할 예정이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