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읽어도 그만이지만, 나는 5월 1일 노동절을 그냥 지나가기가 싫습니다.
이땅에 살고있는 1000만 노동자들의 축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학과 학우들이 5월 1일이 '노동절'이라는 것은 알아야겠죠?
1. 노동절이란?
"나는 이 도시의 빵집 노동자들이 개새끼처럼 취급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조직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죄란 말인가? 이들이 16시간씩 일하는 대신 10시간씩 일하게 되었다. 이것도 죄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죄를 지었다. 나는 맥조 양조장의 노동자들이 새벽 4시에 출근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밤 7시나 8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들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나의 큰 죄이다. 나는 잡화상의 점원들이 밤 11시까지 일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을 충동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밤 7시까지만 일하고 일요일은 쉬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큰 죄가 아닌가?"
-1886년에 체포된 미국 노동운동의 지도자 파슨즈의 마지막 재판 진술 중에서
5월 1일 노동절은 평등과 자유, 해방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전세계 노동자 민중이 함께 투쟁을 진행하는 날입니다. 노동절은 민중들의 국제적 연대의 날이자, 또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의 날입니다.
노동절은 1890년 5월 1일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 미국에서 동시에 투쟁을 진행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1886년 8시간 노동시간 쟁취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투쟁하였던 미국 노동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이 정신을 현재의 투쟁으로 이어가기 위해 1889년 7월 제 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기념일을 만든 것이 5월 1일 노동절이 된 것입니다.
이후 111년 간 매년 5월 1일은 전세계 노동자 민중의 연대의 의지를 보여주고, 전세계 민중의 보편적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이 진행되었습니다. 2001년에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세계화 반대! 구조조정 반대!"를 중심으로 세계 100여 국에서 노동자 민중들이 거리와 나와 힘차게 투쟁을 진행하였습니다.
2. 한국에서의 노동절 역사
한국에서의 노동절 1 - 1920년에서 해방 전후까지
한국에서의 노동절은 일제 치하에 있던 1920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의 노동자들은 1920년 3월 1일 민중항쟁 이후 3월 22일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1923년 조선노동연맹회를 중심으로 5월 1일 조직적인 노동절 투쟁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평균 12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특히 18세 미만의 소년 소녀 노동자들은 감옥 같은 기숙사에 갇혀 노예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23년 노동절 행사는 비록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 속에 열리지 못하였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를 조직적으로 시도하는 중요한 성과를 남겼습니다. 이후 24년 건설된 조선 노동총동맹은 25년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의 확정, 소작료와 지세의 지주 보담, 동양척식회사에 의한 일반 농민의 조선 이민 반대, 언론 집회의 자유 개방'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인천 대구 강경 홍원 진주 광주 군산 나주 진영 함흥 등 전국 곳곳에서 노동절 투쟁을 성사합니다. 그리고 25년 4월, 조선 민중들의 민족 해방과 노동의 해방의 염원을 담은 조선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노동절 투쟁은 좀 더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지니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일제는 더욱 강하게 노동절 행사를 봉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26년부터 노동절은 전국노동총동맹의 지도 하에 총파업, 가두 투쟁 등으로 전국 곳곳에서 더욱 강력하게 진행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전세계적인 공황 속에 일본 제국주의는 31년 일본의 만주 사변 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며, 전쟁과 새로운 식민지 개척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위기를 벗어나려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의 탄압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행되었습니다. 1931년부터 1935년에 이르는 기간 노동 운동으로 1759명이 검거되었습니다. 탄압으로 조선노동총동맹은 무력화되었으며, 조선공산당은 28년 해체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37년 조선병참기지화 이전까지 매년 전국 각곳에서 '일제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절 투쟁은 동맹 파업, 가두 투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함흥 흥남 광주 평양 원산 군산 진남포 북청 청진 인천 울산 왜관 거창 안동 주을 김해 등이 대표적인 투쟁 지역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의 민중들은 자유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금 급속하게 투쟁의 조직, 해방의 조직을 건설합니다. 1945년 9월 조선 공산당 건설, 11월 1194개 노조 50만명 노조원의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건설됩니다. 46년 노동절 행사는 조선 공산당, 전평, 경성 평의회의 공동 주최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20만 노동자가 참여하여 성대히 치루어졌습니다. 이외에도 인천 대구 논산 삼척 등 전국 10여 곳에서 수천에서 수만명까지 참여하는 노동절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46년 5월 9일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남한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노총 등의 우익 반공 단체들을 동원하여 전평 조선 공산당 등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 조직 분열 공작을 진행합니다. 전평은 이에 대항해 46년 9월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25만 이상이 참여하는 9월 총파업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미 군정과 친일파 세력의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100만 민중이 투쟁에 나서는 10월 항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무장 경찰, 반공단체들을 동원해 철도파업 현장을 기습, 파업을 파괴하고, 전평 조선공산당 등의 활동가 1400여명을 검거함으로서 46년 민중들의 항쟁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47년 5월의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남한의 단독 선거를 준비하게 된 미군정과 반공 친일 세력들은 더욱 무자비하게 민중들의 자주적 민주적 대중조직들과 정치 조직들을 백색 테러와 정치 공작으로 파괴해나갑니다. 이러한 가운데 전평은 48년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2.7 총파업 투쟁을 벌여내기도 하였으나, 48년 미 군정이 전평을 불법화함에 따라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게 되고, 47년 3월 제주 4.3 항쟁, 48년 10월 여순 반란사건 등 극악한 백색 테러 공안탄압을 거치며 완전히 무력화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48년 노동절은 전평에 대한 탄압과 미군정의 지원 하에 성장하던 대한노총 단독으로 치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노동절 2- 해방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한노총에 의한 어용 노동절 행사는 57까지 계속됩니다. 대한노총은 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동절 행사에서 '노총 총본부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가 하면, 뒤이어 '노동자의 은인인 이 박사를 절대 지지하자'며 이승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등 57년까지 노동절은 노동자 민중의 권리보다는 정권에 아부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54년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56년 이승만은 다시 재집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민주압살 정책과 친미적 반민중적 통치에 염증을 느낀 민중들이 56년 이후 본격적으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며 다시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됩니다. 이승만은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 특히 노동자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하게 선전합니다. 이승만 정권은 57년 노동절 행사를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의 노동자 대표들은 폭압하고 잔인무도한 공산도당과 같은 날에 함께 즐길 수 없는 의도하에 ...... 대한의 참다운 민주적 노동자들이 공산당과 전평을 타도하고 민주 대한 노동자들의 총집결체인 대한노총을 창립한 3월 10일을 한국의 노동절로 축하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라는 이유로... 하지만 60년 3월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부정선거가 치루어지게 되고, 결국 이승만 정권은 419 항쟁으로 하야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60년 11월 정치적 지주를 상실한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이끌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통합하여 한국노련을 창립하게 되고, 61년 5월 1일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또 다른 세계를 위한 싸움을 염원하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빼앗긴 노동절을 다시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여냅니다. 하지만 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즉각적으로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조합 간부, 학생들 3천여명을 검거함에 따라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꾸준히 성장을 해오던 변혁 운동은 다시금 암흑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61년 8월 30일 박정희 정권은 한국노련을 해체하고 정권의 어용 노동조합인 한국노총을 새로이 조직합니다. 1963년에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5월 1일 노동자의 날을 불법화하고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대체하게 됩니다.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은 94년에 날짜가 5월 1일로 바뀌지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날을 근로자의 날로 바꾼 것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정체성 형성'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노동자'라는 말 속에 역사적으로 녹아있던 변혁 해방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주체의 의미는 근로자라는 말 속에서 근대화 프로젝트의 주체, 수출 역군의 주체, 피지배자라는 의미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 산업화 프로젝트 반공주의 속에서 노동자들에게 굴종과 초과착취를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는 지금까지도 남아 노동자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전위 투사로 나서는데 방해물로 작용하게 됩니다.
민중들은 87년 6월 항쟁과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다시 노동절을 되찾게 됩니다. 한국의 노동달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고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 극장에서 '전태일 정신 계승 및 노동법 개정 노동자 대회'를 3만 노동자가 결집한 가운데 치루었습니다. 군사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85년 구로 동맹 파업, 85-86년 5월 1일의 가두 투쟁 등 노동자들의 평등 자유 해방의 염원을 키워온 성과가 87년 투쟁을 기점으로 수면위로 부상한 것이었습니다. 1988년 12월에는 열네 개의 지역 노동조합 협의회와 여섯 개의 업종별 협의회 대표가 모여 '지역별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건설했고, 그 산하에 700여 민주노동조합과 30만 노동자를 망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국회의는 그 동안의 실천 투쟁의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1989년 상반기 '임금인상'과 '주 44시간 노동제', '노동악법 개폐'를 당면 과제로 설정하고 상설 공동투쟁기구로서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본부'를 조직하여 힘찬 연대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88년 5월 1일에는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 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 대회'를 공개적으로 열렸으며, 89년 5월 1일에는 드디어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함으로써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자랑스런 노동운동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갖기로 한 전국회의의 공식 선언 이후 5월 1일이 가까워질수록 민주주의와 또 다른 세계를 염원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권력과 자본의 엄청난 공세 속에서도 각 지역 투쟁본부 발대식, 그 후 이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진행된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노동악법, 반민주 악법 철폐를 위한 노동자 궐기대회' 등을 통해 정권의 탄압에 대응하는 한편, 지역적, 전국적 연대와 단결의 수위를 높여냈습니다.
90년 1월 전평의 정신을 계승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가 건설되었고,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서 3000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15개 지역, 250여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1990년의 노동절 투쟁은 KBS 노조의 파업,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맞물려 5월 1일부터 4일까지 29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명이 참여하는 5월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199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명이 참가한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991년의 노동절 투쟁은 5월 9일 총파업과 강경대 열사,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5-6월 대투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1992년에는 한양대에서 2만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의 13개 지역에서 세계 노동절 기념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993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두 행진을 벌인 것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로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근로자의 날로 개정하였습니다. 물론 정부와 자본은 5.1일을 합법화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마하고,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메이데이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동자 의식을 마비시키고 정부, 자본에 대한 투쟁 열기를 식히려는 의도였지만 그것은 한낱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이미 노동자들의 가슴속에는 수년간의 5.1절 투쟁을 통해서 지울 수 없는 노동절 정신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4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하고 대학로까지 행진을 전개하였습니다. 1995년은 서울대학교에서 약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했고 보라매공원까지 행진하여 마무리 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세계노동절 106주년을 맞아 서울,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청주 등 전국 6개도시에서 동시에 노동절 기념대회를 열고 96년 임단투 승리와 노동법개정, 민주노총 합법성 쟁취,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96년 정리해고 변형근로제 파견근로 등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의 핵심을 담은 노동법이 12월 날치기로 처리됩니다. 즉각적으로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들어가게 되고, 10만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여내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김영삼 정권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던 수 많은 국민들이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에 동참하였습니다. 96-97년 겨울에 진행된 노동법 개악 저지 민주주의 사수 총파업 투쟁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90년대로 받아 안는 역사에 남을 투쟁이었습니다. 김영삼 퇴진과 노동법 개악을 전면에 내건 정치 총파업은 1월까지 이어졌으며, 종로 일대가 민중들의 해방구가 될 정도로 가두 시위는 시민들의 적극적 지지와 호응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파업을 정치세력화로' 이어간다는 명분 하에 총파업 투쟁을 실질적으로 종료하면서, 노동법 개악 문제는 민중들의 손에서 국회의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 21의 패배는 대중투쟁에 기반하지 않는 정치세력화 운동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97년 서울을 비롯한 13개도시에서 10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97 임단투승리, 재벌경제타파 부정부패 척결, 사회개혁 쟁취, 교사·공무원 단결권쟁취'를 다짐하였습니다. 장충공원에서 2만여명의 조합원이 서울중앙대회를 마치고, 마무리집회 장소인 종묘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은 페퍼포그와 체류탄을 쏘아대며 참가자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 노동자 3만여명과 1만여명에 이르는 학생, 시민들은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노동절 집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속노동자들이 모여있던 종로3가에 최류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분노를 담아 집회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은 이날 최류탄 가스에도 물러서지 않고 '정리해고·파견제 철폐, 고용유지 보장, 부당노동행위 척결, 공공부문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실업자 생활보장, 재벌개혁, IMF재협상'을 요구하였습니다. 1999년 '세계노동절 109주년 총력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5만여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이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을 외치며 서울역에서 대회를 치뤘습니다. 2000년 세계노동절 110주년대회는 서울역에 2만명을 비롯해 전주, 광주, 포항, 부산, 양산, 구미, 원주, 경주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6만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세계 노동절 110주년 기념 대정부 교섭 촉구 및 총파업 투쟁 결의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은 대회에서 △주5일근무제 실시 △자동차산업 해외매각 중단과 협동조합 강제 통합 중단 △임금 15.2% 인상과 외환위기 동안 후퇴시킨 단체협약 원상회복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을 철폐와 정규직 전환 △조세개혁과 사회보장 예산 GDP 기준 10% 확보를 촉구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5월31일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집회에 이어 1만5천여명의 노동자, 학생 등 대회참가자들은 명동을 거쳐 종로2가까지 행진한 뒤 보신각 앞 도로를 점거하고 '대정부 교섭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2001년 111주년 노동절 대회에서는 2-3월 대우자동차 매각 반대 정리해고 분쇄 투쟁을 뒤이어 '김대중 정권 퇴진' 요구를 중심으로 대학로에서 3만 노동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4월 10일 부평에서 벌어진 공권력의 살인적인 폭력 만행에 대한 규탄과 정권 퇴진 요구가 주를 이루었으며, 10년만에 시청 4거리를 점거하는 투쟁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