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사 일주문. |
대구광역시와 경북 영천·경산시, 칠곡·군위군 등 5개 시 군에 걸쳐있는 팔공산(1192m)은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중악(中岳) 혹은 공산(公山)이라고 불렀던 명산이다. 공산이 팔공산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6월 24일자 대구 신숭겸 장균 유적 참조).
팔공산에는 신라의 서울인 경주 남산만큼 유명한 사찰과 불교 문화재가 많아서 대구 쪽에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를 비롯해 은해사·거조암·부인사·파계사 등 수많은 암자들이, 군위 쪽에는 제2석굴암으로 알려진 군위 삼존불상이, 칠곡 쪽에는 송림사(松林寺)가 있다.
그런데,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의 송림사는 신라 눌지왕(417~458)때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하고, 그보다 1세기 경 뒤인 진흥왕 5년(544) 명관(明觀) 스님이 중국 진(陳)에서 불경 2700권과 함께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세운 사찰이라고도 한다. 경내에 통일신라시기인 9세기 초 작품인 5층 전탑이 있어서 신라시대의 사찰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사적기가 없어서 정확한 창건 유래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한 이후 널리 알려졌다.
송림사는 고려 말인 고종 22년(1235) 몽골의 3차 침입으로 전탑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가 400여년이 지난 조선 효종 8년(1657) 기성(箕城) 대사가 숙종 12년(1686)까지 30년에 걸쳐 중창했는데, 대웅전 서쪽 담 너머 약 100m 떨어진 밭에 윗부분이 부러진 당간지주 2기가 있고, 현재의 일주문에서 북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도로변 음식점 앞에 기성 대사의 공적을 새긴 비각이 있어서 이 일대가 모두 송림사의 경내이었지만 지금의 규모로 축소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송림사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찾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인 송림사는 중앙고속도로 칠곡 나들목을 빠져나와 동명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되지만, 대구에서 시내버스 급행 3번을 타고 동명면 종점에서 내린 뒤 칠곡군 3번 시내버스로 갈아탄 후 송림사 앞에서 내리면 된다. 입장료는 없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부처의 불법을 전하는 설법전 건물이 가로막는데, 설법전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왼편에 삼천불전(보물 제1066호)과 종무소가 나란히 있다. 중앙에 5층 전탑이 있고(보물 제189호), 5층 전탑보다 한 계단 높은 곳에 대웅전(보물 제1065호)이, 오른쪽에 명부전(유형문화재 제306호)과 범종각이 각각 있다. 하지만 범종각의 아래층을 문화유산해설사 대기소로, 2층은 종각으로 사용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다. 대웅전 뒤에 부도 탑과 승방, 산신각 등이 있다.
기성대사 비각. |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효종 8년(1657) 기성 대사가 중창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4장의 판자를 이어붙인 가로 366㎝, 세로 160㎝의 커다란 대웅전 편액은 숙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불국사 대웅전, 법주사 대웅보전 현판을 쓴 숙종의 글씨체와 비슷하긴 하지만, 아직 공인 받지는 못했다. 또 대웅전에 안치된 높이 3m의 목조 삼존여래좌상은 국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향나무로 조각했으며, 잔잔한 미소를 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모습이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한다(보물 제1605호).
송림사를 가장 유명하게 하는 것은 대웅전 앞의 5층 전탑이다.
본래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부처와 그 제자들의 상징물로 공을 반으로 자른 형태로 흙과 돌로 쌓고, 꼭대기는 약간 평평하게 한 뒤 그 위에 네모난 돌난간을 두르고 가운데에 둥근 지붕을 씌운 것을 고대 인도어로 스투파(stupa)라고 했다. 한자로는 솔탑파(率塔婆)라고 번역하는 스투파는 열반한 승려와 관련 있는 장소에 세웠는데, 대웅전을 지어 불상을 모시기 시작한 이후에는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앞에 세우는 탑(pagoda)의 기원이 되었다.
탑은 처음에는 만들기 쉬운 목탑→전탑(塼塔)→석탑으로 변했는데,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래받은 일본에는 목탑이 많지만 국내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목탑은 몽고란 때 소실된 경주 분황사 9층탑이 대표적이고, 법주사 팔상전도 그 한 예이다. 목탑을 석탑으로 바꾼 것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장인(丈人)들이라고 한다(2011년 5월 11일자 절 구경하기 참조).
5층 전탑. |
전탑도 흙을 빚어서 구운 전탑과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모전(模塼)석탑으로 나뉘는데, 발달과정도 순수한 전탑→모전전탑→석탑으로 변했다고 한다. 순수한 전탑은 경주 덕동사지 전탑, 인왕동 전탑, 석장사지 전탑, 삼랑사지 전탑 등 6기가 기록으로 전해오고, 경북 안동시에도 신세동 법흥사지 7층 전탑(국보 제16호), 운흥동 법림사지(法林寺址) 5층 전탑(보물 제56호), 조탑동 5층 전탑(보물 제57호) 등 3기의 전탑이 있다. 그중 법흥사지 전탑과 법림사지 전탑은 순수한 전탑이고, 조탑동 전탑은 화강암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것이다.
특히 법흥사지 7층 전탑은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높이 17m로서 국내 전탑 중 최고 최대를 자랑하지만, 현재는 중앙선 철로와 ‘고성이씨 탑동 종택’ 사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공간속에 있다. 또 안동역 주변의 법림사지 5층 전탑도 동국여지승람과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서는 7층 전탑이라고 했지만, 임진왜란 때 무너지자 그 후 5층으로 개축된 것이다. 조탑동 5층 전탑도 몇 년 전까지 과수원 속에 있다가 최근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밖에 경기도 여주 신륵사 전탑이 있다(보물 제226호). 경주 분황사탑은 대표적인 모전석탑이다(국보 제30호).
사리함. |
송림사 5층 전탑은 현존하는 국내 전탑 중 가장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단석(화강암)·탑신부(16.13m)·상륜부 등 탑의 격식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어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59년 탑을 해체. 복원할 때 현재보다 훨씬 좁은 폭 4.5m 정도의 기단 석축이 발견됨으로써 여러 차례 해체 복원과정에서 탑을 크게 넓힌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유물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더욱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즉, 탑 1층에서 나무와 돌, 구리로 만든 불상이 각각 2구씩 출토되었으며, 2층에서는 거북 모양의 돌 상자 속에서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섬세한 금동제 사리탑,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사리병, 옥과 진주가 붙어있는 유리잔들이 발견되었다(보물 제325호). 또, 3층에서는 나무 뚜껑으로 덮인 돌 상자 안에서 발원문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발견되었으나, 해체할 때 햇빛을 보자 모두 산화되었다 하고, 또 탑의 상륜부인 복발(엎어놓은 대접모양의 장식) 안에서도 상감청자로 만든 원형 합과 금동으로 만든 원륜 2개가 발견되었다.
출토품들은 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이렇게 하나의 탑 안에서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 것도 송림사의 역사성과 5층 전탑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유리잔.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 등 10명의 왕(十王)이 전생을 심판한다고 하는데, 시왕이 있는 송림사 명부전은 전면 5칸, 측면 4칸으로서 국내 사찰에서 가장 큰 명부전이라고 한다. 또, 명부전의 목조시왕상과 제상(경북도유형문화재 제360호), 복장 전적(경북도유형문화재 제366호), 명부전의 석조 삼장보살좌상도 국내 유일한 조선후기 석조불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경북도문화재자료 제471호).
신라 초기에 창건되었던 송림사는 지정학상 삼국이 다투면서 팔공산 주변에서 벌어진 수차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중창되고, 또 전쟁터에서 죽어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한 사찰이 아니었을까 싶다(6월 25일자 대구 신숭겸장군 유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