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민에게 권영민 드림”>
그러니까 바로 엊그제이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서울 분위기에 취해 있었고 어느 정도의 만족감도 만끽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몸담고 있는 현대 외교전시관 사업 준비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의 권영민 교수를 오찬에 초청하고 둘이서 그 동안 나누지 못하였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이야기들을 즐기고 있을 때였으니까.
사실 나는 권영민 교수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동명이인인 그 분은 남다르게 훌륭한 평론가 겸 학자로서 국민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물론 그 분은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고, 대학도 한두 해 아래였지만, 그의 학문적 깊이는 이런 것을 떠나서 나를 항상 자극하고 있었다. 그 분은 천재에 가까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하루, 내가 우연히 인터넷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Yahoo, Naver, Daum 및 Paran 등이다. 그리고 깜짝 놀란 것은 과거 그의 이름만 처 봐도 그의 학문적 업적들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는데 이번에 처 보니 「권영민」이란 이름을 가진 분들이 10여명이나 되고 그 중에서도 현대의 배구선수 권영민 선수와 UAE 유명 호텔에 계신 권영민 요리사의 활동내용이 우선은 상기 e-메일 들을 도배질 하고 있었다. 옛날과는 달랐다.
권영민 교수나 나의 이름은 첫 장에도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현상을 보고 사실 나는 매우 바람직스럽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러 사람들이 사회 각 분야에 많이 진출하여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와는 다른 상황이었고, 또한 이래야만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끼일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자 말자 권 교수에게 이를 이야기하였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이다. "권 교수, 옛날엔 권 교수 이름만 처 봐도 그 업적이 주르륵 나올 정도로 대단했는데 요즈음엔 여러 사람들이 나와 있더군요. 그걸 보면 우리나라도 다변화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분 좋은 현상이지요" 권 교수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머리를 적극적으로 끄덕이었다.
그리고는 계속하였다. "그래요. 그래서 요즈음엔 권영민 교수라고 처야 제 것이 나옵니다." 과거 우리들에게는 남다른 에피소드가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둘은 공히 동명이인으로서 충남출신이었다. 나는 아산출신이었고 그는 보령출신이었다.
내가 외무고시에 합격한 1969년, 나는 행정대학원 2학년 때였고 권 교수는 학부의 국문학과 4학년 때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전화 사정이 좋질 않아 현재 일반화 되어있는 이동전화 (Mobile Phone)는 물론이고 유선전화도 백색전화다 뭐다 하여 매우 귀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시골에서는 우리들이 고시를 봤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1969년 6월경 신문에 외무고시 발표를 하며 "최연소 합격에 권영민 씨"(서울문리대, 충남출신) 이었다는 요지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권 교수 댁에 찾아 와서 한 턱 내라고 야단을 처, 권 교수 아버님이 동내사람들에게 한 턱을 냈다는 것이다.
83년 내가 요르단에서 참사관으로 있을 때, <문학과 지성 사> 김병익 이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문인들 10여명이 그곳에 왔을 때 간사역할을 하던 권 교수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대신 한턱을 나보고 내라고 하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이후 나는 권 교수를 자주 기억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나와 권 교수는 두 사람의 이름이 똑 같으니 앞으로 공개적으로 이름을 쓸 때는 시너지 효과를 위하여, 한글로 이름을 쓰자고 합의하여, 나와 권 교수는 공히 한글로 이름을 써왔다. 물론 술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권 교수와 나는 한자로 이름을 쓰면 민자에 권 교수는 백성 민(民)자에 임금 왕 변을 부친 옥돌 민(珉)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백성 민(民)자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한자이름은 좀 달랐다. 그런데 내가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2년간 학생들을 가르칠 때인 2002년이다. 친한 젊은 교수 한 분이 내방으로 찾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가 넌지시 나에게 물었다. "대사님께서는 언제부터 평론도 쓰시고 있나요?"
그런데 2009.2.18(수) 점심에 만났을 때, 권 교수는 내가 "자네 출세했네- 내가 본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 라는 책을 내밀자, 자신도 엊그제 출간하였다고 2009.1월에 발간한 "문학사와 문학비평"이라는 평론집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들은 책을 쓴 동기들을 설명하고, 이 책들을 교환하였다. 그런데 책 속에서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권영민에게 권영민 드림"이라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권영민」 이라는 이름 석 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여, 모두가 한글로 이름을 쓰자고 제안하고, 우선 내 책 한 권씩을 나눠 줄까! 세대나 학교, 또는 어느 지역출신이라는 모든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차이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권영민/현 순천향 대학 초빙교수/전 한. 독 미디어대학원 대학 부총장/전 주(駐) 독일대사/저서: 자네 출세했네>
첫댓글 귀한 인연을 갖고 계시는군요. 오래도록 지니도록 하십시요. 늘 건안하십시요.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나와 그뤽아우프와 비슷한 인연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