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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1부 고려의 건국과 문신 귀족사회의 성립
제1장 후삼국 통일과 중앙집권 양반 체제의 확립
1.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 왕권의 불안정
1) 고려의 세계(世系) 설화
고려 왕실의 선대(先代)는 역사기록이 빠져 상세하지 않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태조 즉위 2년(919년) 왕의 삼대(三代) 조상(祖上)을 추존(追尊)하였다. 증조부(曾祖父)인 시조(始祖)에게 시호(諡號)[제왕·경상(卿相)·유현(儒賢)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追贈)하던 이름]를 올려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고, 그 비(妣)[돌아가신 어머니의 일컬음]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으며, 조부(祖父)인 의조(懿祖)는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그 비는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으며, 부(父)인 세조(世祖)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라 하고 그 비는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하면서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강과 산을 두루 구경하다가 부소산[지금의 개성직할시 송악산]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서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다. 그의 집은 부유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는 활쏘기를 잘 하여 사냥을 일삼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마을에 사는 아홉 사람과 함께 평나산(平那山)[지금의 개성직할시 장풍군과 황해북도 금천군 사이에 있던 성거산]에서 매 사냥을 했다. 마침 날이 저물어 그들은 바위 굴 속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막 잠자리에 들 때였다.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굴 앞을 가로막고 큰 소리로 울었다.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시험삼아 쓰고 있는 관(冠)을 던져 보아서, 호랑이가 무는 관의 임자가 나가서 맞서기로 하세.”
그들은 모두 쓰고 있던 관을 던졌다. 호랑이는 그 중에서 호경이 던진 관을 덮석 움켜잡았다. 호경이 호랑이와 싸우려고 바위 굴 밖으로 나왔다. 호랑이가 갑자기 사라지고, 바위굴이 무너져 내렸다. 바위 굴 속에 숨어 있던 아홉 사람은 모두 바위에 깔려 아홉 명은 모두 빠져 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호경이 돌아가 평나군에 알리고 다시 산으로 되돌아 와서 아홉 사람을 장사지내려고 먼저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바로 그때였다. 숲속에서 산신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과부의 몸으로 이 산을 맡아 보고 있소. 성골장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어 신정(神政)을 함께 펴고자 하오. 호경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고 싶소.”
산신이 말을 마치고 호경과 함께 사라졌다.
이에 평나군 사람들은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는 동시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아홉 사람이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구룡산(九龍山)이라고 고쳤다. 산신이 된 호경은 옛 아내를 잊지 못해 밤마다 항상 나타나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것은 마치 꿈 속에서의 일 같았다. 그후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강충(康忠)이라고 지었다. 그는 생김이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다. 서강(西江)[예성강]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五冠山)[지금의 개성시 장풍군에 있는 산] 마아갑(摩訶岬)에서 살았다. 그때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풍수지리에 밝았다. 마침 그가 부소군(扶蘇郡)에 왔다. 부소군은 부소산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산의 형세가 빼아났다. 그러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강충에게 일러주었다.
“만약 부소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윗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三韓)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강충은 부소군 사람들과 함께 부소산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고,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군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지금의 개성직할시]라고 고쳤다. 강충은 마침내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마아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자자손대대로 보유하는 재산]로 삼고서 두 곳을 왕래하면서 살았다.
강충은 많은 재산을 모으고 두 아들을 낳았다. 작은 아들의 이름은 손호술(損乎述)이라 하였다가 보육(寶育)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보육은 성품이 지혜로웠고,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가 도(道)를 닦았다. 그후 평나산 의 북갑(北岬)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마아갑으로 옮겼다. 어느 날, 꿈에 곡령(鵠領)[지금의 개성직할시 송악산]에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오줌을 누었더니 삼한(三韓)의 산천에 그 오줌이 흘러넘쳐 은빛 바다로 변하였다. 이튿날 보육이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대는 반드시 하늘을 떠받들 기둥이 될 사람을 낳으리라.”
이제건이 말을 마치고, 그의 딸 덕주(德周)를 보육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뒤에 보육은 거사(居士)가 되어 마아갑에서 나무를 엮어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라의 술사(術士)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곳에 살고 있으면 반드시 당(唐, 618년~907년)나라의 천자(天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오.”
술사가 보육을 보고 예언했다.
뒤에 보육이 두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의 이름은 진의(辰義)라고 했다. 그녀는 얼굴이 곱고 재주가 많았으며 지혜로웠다. 나이 겨우 15세가 되었을 때였다. 그녀의 언니가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다. 소변이 흘러서 천하에 넘쳤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 진의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비단치마를 줄 테니 그 꿈을 달라고 진의가 청하기에 언니가 허락했다. 진의는 언니에게 다시 그 꿈 이야기를 하도록 말하고, 꿈을 움켜서 품에 안는 시늉을 세 번이나 하였다. 그랬더니 그녀의 몸이 움쭉거리고 무엇인가 얻는 것만 같았다. 진의는 그것으로 하여 마음이 매우 뿌듯하게 되었다.
당나라 숙종(재위 756년~762년)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산천을 두루 유람하기 위하여 천보(天寶)[당나라 현종의 연호, 742년~756년] 12년 계사년(753년)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예성강]의 서포(西浦)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썰물 때가 되어 강기슭이 진창이 되어 시종 관원들이 배 안에 있던 돈을 꺼내 진창 위에 깔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그후 그 포구를 전포(錢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당나라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되던 해 목종(穆宗) 황제가 왕위에 있었다. 선종이 장난삼아 황제의 용상(龍床)에 올라가 여러 신하들에게 읍(揖)하는 시늉을 하였더니 목종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그것을 보고 내심 꺼렸다. 무종(武宗)이 즉위한 후 선종이 궁중에서 박해를 당해 숨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멀리 도망쳤다. 그리하여 선종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가 선종의 용안(龍顔)을 속으로 알아보고 특별히 후대하여 염관현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지금의 중국 장쑤성 양저우시]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은 항주(杭州)[지금의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의 속현(屬縣)인데 모두 황해[東海]에 연접하여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처지였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우려한 까닭에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당시에는 『당사(唐史)』가 편찬되지 않았을 때라 당나라 황실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숙종 선황제(肅宗 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은 들었으나 선종이 난리를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황제의 일을 숙종선황제의 사실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한 사람이 왕과 교유를 하고 있었다. 그가 충선왕에게 물었다. “일찍이 듣기를 왕의 선조께서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하던데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말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을 나간 일이 없었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영무(靈武)[지금의 중국 닝샤후이족 자치구 링우]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동쪽으로 유람하여 아들까지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충선왕은 이 말에 크게 난처해하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민지(閔漬)가 곁에 있다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인 것일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림학사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했으니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숙종이 드디어 송악군(松嶽郡)에 이르러 곡령(鵠嶺)에 올랐다. 그가 남쪽을 바라보며 예언했다.
“이 땅은 반드시 도읍지가 될 것이다.”
시종 관원이 고개를 수그리고 아뢰었다.
“여기는 8진선(八眞仙)[8명의 신선]이 사는 곳입니다.”
마아갑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숙종이 보육의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터진 곳을 꿰매어 달라고 부탁했다. 보육은 그가 당나라의 귀인(貴人)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즉시 큰딸로 하여금 분부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큰딸이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터져서 되돌아 나왔다. 그는 다시 둘째딸 진의(辰義)로 대신하게 하여, 마침내 잠자리에 모시게 되었다. 숙종은 머무른지 한 달 만에<민지의 『편년강목』에는 혹 1년 동안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의가 아기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숙종은 그녀와 작별하면서, 그 자신이 당나라의 귀족이라 밝힌 뒤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주라고 말했다.
그후 진의는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작제건(作帝健)이라고 지었다. 뒤에 보육을 추존(追尊)하여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고 했다. 작제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용맹이 있었다. 나이 대엿섯 살이 되자, 그는 어머니에게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당나라 어른이시다리고만 대답했다.
작제건은 성장하면서 육예(六藝)[고대 중국의 여섯 가지 교과로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즉 예의·음악·활쏘기·말몰기·글씨·수학 등 여섯 가지 재주를 가리키는 것이다.]를 두루 잘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글씨와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났다.
작제건의 열여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겨 두고 간 활과 화살을 그에게 주었다. 그가 화살을 쏠 때마다 겨눈 곳에 다 맞았다. 사람들은 그를 신궁(神弓)이라고 불렀다.
작제건은 아버지를 찾아 가기 위하여 상선(商船)을 타고 떠났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해졌다. 배가 사흘 동안이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점을 쳐보고 말했다.
“마땅히 고려 사람을 떼어 버려야 한다.”<민지의 『편년강목』에는 혹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김양정(金良貞)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갈 때 작제건이 마침 그 배에 탔었다. 김양정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기를, ‘만일 고려 사람을 내려놓고 가면 순풍을 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작제건은 그는 활과 화살을 몸에 지니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마침 바다 밑에 바윗돌이 있어 그는 그 위에 올라 설 수 있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배는 나는 듯이 가버렸다.
잠시 후, 한 늙은이가 나타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서해(西海)의 용왕(龍王)이오. 매일 저녁 늙은 여우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부처 이름의 일종]의 형상을 띠고 하늘에서 내려와 해와 달과 별을 구름과 안개 사이에 벌려 놓고 소라를 불어 소리를 내고 북을 쳐서 풍악을 울리면서 와서 이 바위 위에 앉아 『옹종경(擁腫經』[병을 부르는 독경으로 『전국책』과 『사기』 등에 기록상으로만 전해지는 가상의 책]을 읽으면 나의 머리가 심하게 아파온다오. 듣자하니 그대는 활을 잘 쏜다 하니, 원컨대 내가 겪고 있는 괴로움을 없애주기 주기 바라오.”
이에 작제건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는 혹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제건이 바위 근처에 난 한 갈래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1리 남짓을 들어갔다. 또 한 바위가 나타났다. 그 바위 위에 한 채의 전각이 서 있었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하는 곳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서 자세히 보았다. 붓으로 쓴 점획(點劃)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은 없었다. 작제건이 그 자리에 앉아 붓을 들고 불경을 베끼기 시작했다. 홀연히 어떤 여인이 나타나서 그 앞에 섰다. 작제건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이라 여기고 벌떡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배례하려 하니 그 여인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작제건은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불경을 베끼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나는 용녀(龍女)로서 여러 해 동안 불경(佛經)을 베꼈으나 아직도 다 베껴쓰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대는 글씨도 잘 쓰시고 활도 잘 쏘시니 그대가 머물면서 제가 공덕(功德) 닦는 일[불경을 베끼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하고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제거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7일 동안 기다리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늙은이의 말하던 때가 되자, 과연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고 과연 서북쪽에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작제건은 진불(眞佛)[삼신불의 하나인 ‘보신불’을 화신불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 아닌가 의심하여 감히 활을 쏘지 못했다.
늙은이가 다시 다가와 일렀다.
“저건 틀림없이 늙은 여우니 의심하지 말고 쏘시오.”
작제건이 활을 들고 화살을 먹여서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겨누어 쏘았다. 활 시위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과연 늙은 여우 한 마리였다.
늙은이는 크게 기뻐하면서 작제건을 궁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가 사례하면서 말했다.
“그대의 힘으로 나의 근심이 덜어졌으니 큰 은덕을 갚으려 하오. 그대는 앞으로 서쪽 당나라로 들어가서 천자(天子)이신 아버지를 보려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곱 가지의 보물을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시려 하시오?”
작제건이 말했다.
“나의 소원은 동방의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말했다.
“동방의 임금이 되려면 ‘건(建)’ 자가 붙은 이름으로 자손까지 3대를 거쳐야만 하오. 그 때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되오. 다른 것이라면 그대의 소원대로 해 드리리다.”
작제건은 그 말을 듣고 임금이 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우물쭈물하며 미처 소원을 말하지 못했다.
그의 뒤에 있던 노파가 농담삼아 말했다.
“왜 용왕의 딸에게 장가를 들지 않고 가려고 하는가?”
그제서야 작제건이 깨닫고, 장가들기를 청하였다. 늙은이는 그의 맏딸 저민의(翥旻義)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작제건이 일곱 가지의 보물을 가지고 돌아가려 하였다. 용녀가, “우리 아버지에게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있는데 그것은 일곱 가지의 보물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그걸 달라고 해서 가지고 가도록 해요.”라고 귀뜸해 주었다.
작제건은 일곱 가지의 보물을 돌려주고,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달라고 청했다. 늙은이는 , “이 두 가지 물건은 내가 가진 신통한 것일세. 그러나 그대가 청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라 하면서 돼지까지 얹어 주었다.
작제건과 용녀는 칠선(漆船)[옻칠하여 만든 배]에 일곱 가지의 보물과 돼지를 싣고 바다를 건넜다. 그들이 탄 배가 언덕에 도달하였는데, 그곳은 창릉굴(昌陵窟) 앞 강안이었다.
백주(白州)[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의 정조(正朝)[관직명] 유상희(劉相晞) 등이 그 소식 들었다.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돌아왔으니 크게 경사스러운 일이다.”
유상희는 개주(開州)[지금의 개성직할시]·정주(貞州)[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염주(鹽州)[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백주와 강화현(江華縣)[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교동현(喬桐縣)[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하음현(河陰縣)[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영안성(永安城)[지금의 개성직할시 예성강 상류로 세조의 능 창릉이 위치]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어주었다.
저민의는 처음에 왔을 때, 바로 개주(開州)의 동북산(東北山) 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은주발로 물을 길어 썼다. 그것이 지금의 개성 대정(大井)이다.
영안성(永安城)에서 산지 한 해가 지난 어느 날 돼지가 우리로 들어가지 않았다.
작제건이 돼지에게 말했다.
“만일 이곳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면 내가 장차 네가 가는 대로 따라 가겠다 ”
이튿날 아침. 돼지가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이르러 드러누웠다. 드디어 작제건이 그곳에 새 집을 지으니, 그곳이 바로 강충(康忠이 전에 살던 곳이었다. 작제건은 영안성을 오고 가면서 30년 동안이나 살았다.
용녀는 일찍이 송악산 새 집 침실의 창밖에 우물을 파고, 그 속으로 해서 서해(西海) 용궁(龍宮)에 드나들었다. 그것이 광명사(廣明寺)의 동상방(東上房)에 있는 북정(北井)이다.
평소 용녀는 자신이 용궁으로 돌아갈 때 절대로 엿보지 말라고 하며, 약속을 어긴다면 다시는 돌아 오지 않겠다고 작제건과 다짐했다.
어느 날 작제건이 몰래 엿보았다. 용녀가 어린 딸을 데리고 우물로 들어가서 모두 황룡이 되어 오색구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작제건은 기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용녀가 돌아와 화를 내며, “부부의 도리는 신의(信義)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어제 당신이 약속을 어겼으니 더는 여기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어린 딸과 함께 용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갔다.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만년에 속리산(俗離山)의 장갑사(長岬寺)에 들어가 항상 불경을 읽으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뒤에 그를 추존하여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이라고 하고, 용녀를 원창왕후(元昌門后)라고 했다. 원창왕후는 네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이름을 용건(龍建)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융(隆)이라고 고쳤으며, 자(字)를 문명(文明)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세조(世祖)이다. 세조는 체격이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졌으며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넓어 삼한을 통합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아내를 삼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생김새가 꿈 속에서 본 여자와 용모가 너무나도 닮았다. 마침내 그들은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몽부인(夢夫人)이라고 불렀다. 혹은 그녀가 삼한의 어머니로 모셨기에 성을 한씨(韓氏)로 택했다고도 했다. 그녀가 바로 위숙왕후(威肅王后)였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 여러 해 살다가 또 새 집을 그 남쪽에 지으려 했는데, 그 터가 바로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였다.
그때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당나라의 유명한 승려로 천문·역법의 거장]으로부터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는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렀다.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마침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세조에게 알려주었다. 세조가 급히 좇아가 도선을 만나보고는 마치 서로 전부터 알던 사이와 같이 친밀해졌다.
마침내 그들은 함께 곡령에 올라가서 산수(山水)의 맥(脈)을 조사하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폈다.
도선이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地脈)은 임방(壬方)[북쪽]의 물의 근원이오. 나무의 줄기인 백두산으로부터 와서 말머리 모양의 명당(明堂)에 떨어졌으며, 당신은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좇아서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區)의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 아이의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지으시오. ”
그리고는 도선이 봉인한 봉투를 만들어 그 겉봉에다,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글쓰기를 마친 도선이 봉투를 세조에게 건네주었다.
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874~879) 3년 4월[신라 헌강왕 2년(876년) 4월]이었다. 세조가 도선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다. 그 달부터 위숙왕후(威肅王后)가 태기가 있어 태조를 낳았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만나기를 청하여 이렇게 말했다.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백육지운(百六之運)]에 응하여 하늘이 내린 명당 터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들[백성들]이 그대가 홍제(弘濟)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도선은 태조에게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그리고 산천의 형세를 바라보아 차례대로 제사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가르쳐주었다. 건녕(乾寧) 4년(897년) 5월에 세조가 금성군(金城郡)에서 죽었다. 그를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그 묘를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뒤에 위숙왕후를 합장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1027년)에 세조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왕후에게는 혜사(惠思)를 더하여서 올렸으며, 고종(高宗) 40년(1253년)에는 세조에게 민혜(敏惠)를, 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하였다.”라고 하였다.>
―「고려세계」, 『고려사』 제1권,
『고려사』에서 인용한 『편년통록(編年通錄)』에 기록되어 있던 ‘고려의 세계(世系) 설화’
왕건은 신라의 수도 금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지역인 송악의 호족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에 대하여서는 역사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의종 때의 벼슬아치인 김관의가 지은 『편년통록』에 기록되어 있던 것을 정인지 등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관계 기록을 채취하여 실어, 왕건의 조상에 대한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영웅들의 핏줄이 섞이고, 용과 호랑이 같은 성스러운 동물이 등장하는 ‘고려의 세계(世系) 설화’는 내용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설화는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하던 왕건의 조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왕건은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다. 왕건이 패강진(평산)·혈구진(강화) 등 개성 주위에 설치된 군진(軍鎭)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사회적인 진출을 꾀하였다고도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왕건의 가장 기초가 되는 배경은 경제력이었다. 즉 왕건의 선조들이 해상활동을 하면서 해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거느린 흔적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왕건의 집안이 평산 지방의 호족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사실도 발견할 수가 있으나 왕건 집안의 군사력에 앞서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이었다. 그러므로 왕건의 호족으로서의 기반은 해상활동 즉 무역활동을 통하여 획득한 경제력이 주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또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 전체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였다.(박한설, 「왕건세계의 무역활동에 대하여」, 『사총』10, 1965) 참조.
―박한설,「고려의 건국과 호족」,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12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탐구당(번각 발행), 2013, p.19.
고려 왕실의 기원 설화인 ‘고려의 세계(世系)’는 신라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에 이르는 156년 간인 신라 하대의 호족(豪族)의 성장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도선의 풍수지리설, 용녀(龍女)와의 결혼, 그리고 모계 중심의 가계와 근친혼 등은 핵심적인 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세계(世系)’에서 드러나 있듯이 윤색되어 미화된 내용이 섞여 있다는 견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내용 중에 보육의 맏딸이 오관산 마루턱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흘러서 천하에 넘치는 꿈을 꾸고, 깨어나 둘째 딸에게 그 꿈을 팔았다는 이야기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꿈을 판 '보희 설화'와 거의 비슷하다.
‘고려의 세계(世系) 설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 왕실의 핏줄이 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대목이다. 『고려사』 「고려의 세계」에 보면 태조 왕건의 조부모인 작제건과 용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 사람의 장남이 용건이고, 용건의 장남이 왕건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려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용녀의 핏줄을 받은 ‘용의 후손’으로 거룩하고 성스럽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고려의 건국과 태조 왕건의 호족 통제
왕건(재위 918년∼943년)의 성은 왕(王)이고, 이름은 건(建)이다. 송악(지금의 경기도 개성시) 출생으로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륭(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왕건은 어려서부터 지혜가 있고 용과 같은 얼굴에 미간이 시원하고 턱은 모나고 기상과 도량이 웅대하고 심오했다. 그는 신라의 수도 금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송악의 호족 출신이었다.
원년(918년) 여름, 왕건(王建)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내쫒고 철원의 포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고려’라는 나라 이름은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었다.
17년(934년) 정월 왕이 서경으로 거둥하여 북방의 진(鎭)들을 두루 순찰하였다. 그 해 5월에 왕이 예산진(禮山鎭)[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거둥하여 조서(詔書)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뭇 도적이 다투어 일어나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들의 해골이 거친 들판에 널렸다. 전 임금(궁예)이 온갖 혼란을 평정하고 국가의 기초를 닦았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쳤고 국가가 멸망하였다. 내가 그 위태로운 뒤를 이어 새 나라를 창건하였다. 백성들에게 고된 노역(勞役)을 시켜 힘들게 하는 것이 어찌 짐의 뜻이겠는가? 다만 나라를 창건하는 때라 일이 부득이 하여 그런 것이다. 내가 비바람을 무릅쓰고 주·진(州鎭)을 순찰하고 성책(城柵)을 수리하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도적들의 화난(禍難)을 면하게 하려함이다. 그 때문에 남자들은 모두 군대로 나가게 되고 부녀자들까지 부역(負役)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수고로움과 고통을 참지 못하여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숨거나 관청에 와서 호소하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왕실의 친족들과 권세가들 중에서 방자하고 포악하게 굴면서 약한 자를 억눌러서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내 한 몸으로 어찌 집집마다 친히 찾아가 그들을 보살펴볼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호소할 길이 없어서 저 하늘에 울부짖는 것이다.
마땅히 그대들 공경장상(公卿將相: 고위관리·장수·재상)으로서 나라의 녹봉(祿俸:관리에게 1년 또는 계절 단위로 나누어 주던 금품)을 먹는 사람들은 내가 백성들을 자기 자식과 같이 사랑하는 뜻을 잘 헤아려서 그대들 녹읍(祿邑: 모든 벼슬아치에게 나누어 주던 논밭)의 백성들을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가신(家臣)으로서 무지한 무리들을 녹읍에 보낸다면 오직 긁어들이는 일만 힘쓰고 착취를 함부로 할 것이다. 그대들이 어찌 다 알겠는가? 비록 간혹 이를 안다고 하더라도 역시 금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백성들 가운데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자가 있는데도 벼슬아치들이 정실 관계에 끌려 이들의 잘못을 숨기고 있다.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일에 관하여 타이른 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더욱더 노력하고 알지 못하는 자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 고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명령을 어긴 자는 따로 조사하여 죄를 물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과오를 숨겨 주는 것을 현명한 일로 생각하여 위에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선악에 대한 사실을 어떻게 듣고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어찌 절개를 지키고 허물을 고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훈계하는 말을 준수하고 나의 상벌(賞罰: 잘한 것에 상을 주고, 잘못한 것에는 벌을 줌)을 따르도록 하라. 죄가 있는 자는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그 자손까지 처벌할 것이다. 공이 많고 죄가 적은 자는 잘 헤아려 상벌을 시행하라. 만일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 녹봉을 추징할 것이다. 또한 1년. 2년, 3년, 5년, 6년으로부터 종신에 이르기까지 벼슬아치에 등용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라를 받드는 뜻이 정성스러워 처음부터 끝까지 허물이 없다면 살아서는 영화와 후한 녹봉(祿俸)을 누릴 것이고, 죽어서는 명가(名家)라 일컫게 될 것이며, 자손들까지 우대하여 나라를 위해 세운 큰 공로를 표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만 오늘뿐만 아니라 만세(萬世)에 전하게 함으로써 좋은 규범이 되도록 할 것이다. 만약에 남에게 고소를 당한 자가 관가(官家)에서 소환하여도 오지 않을 때는 반드시 재차 소환하여 우선 곤장(棍杖) 10대를 쳐서 명령을 어긴 죄를 다스린 다음 그가 저지른 죄를 논하도록 하라. 그리고 벼슬아치가 일부러 사건 처리를 지연시켰을 때는 지연된 날짜를 계산하여 그에 해당한 처벌을 할 것이다. 또한 위세를 믿고 권력을 믿어 그들을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가 있거든 그 이름을 아뢰도록 하라.”
往者, 新羅政衰, 群盜競起, 民庶亂離, 曝骨荒野. 前主服紛爭之黨, 啓邦國之基, 及乎末年, 毒流下民, 傾覆社稷. 朕承其危緖, 造此新邦, 勞役瘡痍之民, 豈予意哉? 但草昧之時, 事不獲已. 櫛風沐雨, 巡省州鎭, 修完城柵, 欲令赤子, 得免綠林之難. 由是, 男盡從戎, 婦猶在役, 不忍勞苦, 或逃匿山林, 或號訴官府者, 不知幾許. 王親權勢之家, 安知無肆暴陵弱, 困我編氓者乎? 予以一身, 豈能家至而目覩? 小民所以未由控告, 呼籲彼蒼者也. 宜爾公卿將相食祿之人, 諒予愛民如子之意, 矜爾祿邑編戶之氓. 若以家臣無知之輩, 使于祿邑, 惟務聚歛, 恣爲割剝, 爾亦豈能知之? 雖或知之, 亦不禁制. 民有論訴者, 官吏徇情掩護, 怨讟之興, 職競由此. 予嘗誨之, 欲使知之者增勉, 不知者能誡. 其違令者, 別行染卷, 猶以匿人過爲賢, 不曾擧奏, 善惡之實, 曷得聞知? 如此, 寧有守節改過者乎? 爾等遵我訓辭, 聽我賞罰. 有罪者, 無論貴賤, 罰及子孫, 功多罪小, 量行賞罰. 若不改過, 追其祿俸, 或一年, 二三年, 五六年, 以至終身不齒. 若志切奉公, 終始無瑕, 生享榮祿, 後稱名家, 至於子孫, 優加旌賞. 此則非但今日, 傳之萬世, 以爲令範. 人有爲民陳訴, 勾喚不赴, 必令再行勾喚, 先下十杖, 以治違令之罪, 方論所犯. 吏若故爲遷延, 計日罰責. 又有怙威恃力, 令之不可觸者, 以名聞.
―『高麗史(고려사)』 권1 「世家(세가)」 제2 갑오 17년
19년(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25년(942년) 겨울, 거란이 사신 편으로 낙타 50필을 보내왔다.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동맹을 깨뜨리고 그 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이 있지 않는가?”
태조 왕건이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대광 박술희가 대답했다. ‘대광(大匡)’은 고려 전기의 벼슬 등급의 하나였다.
“거란은 심히 무도한 나라로서 친선 관계를 맺을 나위가 못된다. 국교를 단절하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고 꼴을 주지 마라.”
태조 왕건이 명했다.
26년(943년) 4월에 왕이 내전(內殿)에 나가 앉아 가장 신임하던 대광 박술희를 불러 자신의 자손에게 남기는 10가지 지침인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지어 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건대, 순(舜)임금은 역산(歷山: 중국 산둥성에 있는 산)에서 농사를 짓다가 마침내 요(堯)임금의 왕위를 받았으며, 한나라 고조(재위 기원전 206년~기원전 194년)는 패택(沛澤: 중국 장쑤성에 있는 패현의 수택)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 나라의 왕업(王業: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또한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그릇되게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몸과 마음을 다해 고생한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다. 외람되게 왕위에 있은 지가 25년이나 되었고 이제는 몸도 늙었다. 자손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함부로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게 할까,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요십조」를 지어 자손들에게 전하니 아침 저녁으로 펴 보아 영구히 귀감으로 삼을지어다.
첫째,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호위를 힘입었다. 그러므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임명하여 븐향하며 불도(佛道)를 닦게 하고, 각 각 그 업(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훗날 간신이 정권을 잡으면서 중의 청탁을 들어주게 되면 모든 사원(寺院)을 다투어 서로 다투어 바꾸고 빼앗고 할 것이니, 마땅히 이를 금지하여야 한다.
둘째,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道詵)이 국내 산천의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를 가리고 점쳐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선정한 것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지으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大業)이 길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ㆍ공후(公侯)ㆍ후비(后妃)ㆍ조신(朝臣)들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면서 행여 더 많은 사원들을 창건할까 크게 우려되는 바이다. 신라의 말기에 사탑(寺塔)을 다투어 지어서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셋째, 임금의 맏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이 비록 보통의 예법이라 하지마는, 옛날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不肖)하므로 요는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실로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에서였던 것이다. 후세에 임금의 맏아들이 불초하거든 그 둘째아들에게 전하여 주고, 둘째아들이 모두 불초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대통(大統)을 잇게 하여야 한다.
넷째, 우리 동방(東方)은 오래 전부터 중국의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과 풍토가 다르고, 인성이 다르다.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 거란(契丹)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나라이다.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역시 다르다. 부디 의관(衣冠)과 제도(制度)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내가 삼한(三韓) 산천(山川)의 드러나지 않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서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된다. 마땅히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중간 달에 국왕은 그곳에 거둥하여 100일 이상 머물러 나라의 안녕(安寧)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내가 지극한 관심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천령(天靈: 하늘의 신령)ㆍ5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것을 금지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도 역시 처음부터 마음에 맹세하여 그 모임을 갖는 날에는 국기일(國忌日: 제왕과 후비의 기일)을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에 따라 행하도록 해야 한다.
일곱째,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얻으려면, 간언(諫言)을 따르고 참소하는 말을 멀리하는 데 있을 뿐이다. 간언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되며, 참소하는 말은 꿀처럼 달지마는 그것을 믿지 않으면 참소하는 말은 저절로 그치는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되 시기에 맞추어 부리고, 요역(徭役: 나라에서 장정에게 구실 대신으로 시키던 노동)과 부세(賦稅: 세금을 부과함)를 가볍게 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저절로 백성의 마음을 얻어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기가 낚시에 걸려 들고, 상을 후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곁에는 반드시 새가 피하고, 어진 덕(德)을 베푸는 아래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했으니, 상과 벌이 올바르면 음(陰)과 양(陽)이 맞아 기후까지 순조로울 것이다.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바깥은 산천과 땅의 생긴 모양이 모두 거꾸로 뻗쳤으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州)·군(郡)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이나 왕실의 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이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다. 또한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 붙어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 혹은 왕후(王侯)나 궁원(宮院)에 붙어 말을 간교한 말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정사(政事)를 어지럽혀서 재변(災變)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벼슬자리를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아홉째, 벼슬아치들의 녹봉(祿俸: 관원에게 일년 또는 계절 단위로 나누어 주던 금품으로 쌀·콩·보리·명주·베·돈 따위)은 나라의 규모를 보아 정한 것이다. 함부로 늘리거나 줄이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고전(古典)에 말하기를, “공적(功績)으로써 녹(祿)을 정할 것이며 사사로운 정으로 관작(官爵)을 다루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공로가 없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사사로이 친한 사람들로 헛되이 국록(國祿)을 받게 하면, 아래 있는 백성들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본인들도 역시 복록(福祿)을 길이 누리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엄중하게 이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강하고 포악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므로 평안한 때에 위태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병졸(兵卒)에게는 마땅히 보호와 구휼을 더하고 요역을 헤아려 면제하고, 매년 가을에는 용감하고 무예가 빼어난 자들을 사열하여 편의에 따라 벼슬을 올려 주도록 하라.
열째,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근심이 없는 때에 마음을 가다듬어 경계하고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여야 한다. 주공(周公) 같은 성인(聖人)도 「무일(無逸)」 1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하였다.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붙여 놓고 들어오고 나갈 때 보고 반성하도록 하라.”하였다.
―『고려사』 제1권 「세가」 제2 계묘 26년
(癸卯)二十六年 夏四月 御內殿, 召大匡 朴述希, 親授 訓要, 曰 “朕聞, 大 舜耕 歷山, 終受 堯禪, 高帝起 沛澤, 遂興漢業. 朕亦起自單平, 謬膺推戴. 夏不畏熱, 冬不避寒, 焦身勞思, 十有九戴, 統一三韓, 叨居大寶二十五年, 身已老矣. 第恐後嗣, 縱情肆欲, 敗亂綱紀, 大可憂也. 爰述 訓要, 以傳諸後, 庶幾朝披夕覽, 永爲龜鑑.
“其一曰, 我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 故創禪敎寺院, 差遣住持焚修, 使各治其業. 後世, 姦臣執政, 徇僧請謁, 各業寺社, 爭相換奪, 切宜禁之.
其二曰, 諸寺院, 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 道詵云, ‘吾所占定外, 妄加創造, 則損薄地德, 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 各稱願堂, 或增創造, 則大可憂也, 新羅之末, 競造浮屠, 衰損地德, 以底於亡, 可不戒哉?
其三曰, 傳國以嫡, 雖曰常禮, 然丹朱不肖, 堯禪於 舜, 實爲公心. 若元子不肖, 與其次子, 又不肖, 與其兄弟之衆所推戴者, 俾承大統.
其四曰, 惟我東方, 舊慕唐風, 文物禮樂, 悉遵其制, 殊方異土, 人性各異, 不必苟同. 契丹是禽獸之國, 風俗不同, 言語亦異, 衣冠制度, 愼勿效焉.
其五曰, 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西京水德調順, 爲我國地脈之根本, 大業萬代之地. 宜當四仲巡駐, 留過百日, 以致安寧.
其六曰, 朕所至願, 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姦臣建白加減者, 切宜禁止. 吾亦當初誓心, 會日不犯國忌, 君臣同樂, 宜當敬依行之.
其七曰, 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 欲得其心, 要在從諫遠讒而已. 從諫則聖, 讒言如蜜不信, 則讒自止. 又使民以時, 輕徭薄賦, 知稼穡之艱難, 則自得民心, 國富民安. 古人云 ‘芳餌之下, 必有懸魚, 重賞之下, 必有良將. 張弓之外, 必有避鳥, 垂仁之下, 必有良民.’ 賞罰中, 則陰陽順矣.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㗸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其九曰, 百辟群僚之祿, 視國大小, 以爲定制, 不可增減. 且古典云 ‘以庸制祿, 官不以私.’ 若以無功人, 及親戚私昵, 虛受天祿, 則不止下民怨謗, 其人亦不得長享福祿, 切宜戒之. 又以强惡之國爲隣, 安不可忘危. 兵卒宜加護恤, 量除徭役, 每年秋閱勇銳出衆者, 隨宜加授.
其十曰, 有國有家, 儆戒無虞, 博觀經史, 鑑古戒今. 周公大聖, 無逸一篇, 進戒 成王, 宜當圖揭, 出入觀省.”
十訓之終, 皆結‘中心藏之’四字, 嗣王相傳爲寶.
―『고려사』 제1권 「세가」 제2 계묘 26년
호족 세력의 회유와 포섭을 하기 위해 혼인 정책을 쓴 왕건
태조 19년(936년) 왕건은 군사들을 이끌고 일리천(지금의 경북 구미시 해평면)으로 나아가 후백제의 신검과 대치하였다. 왕건이 동원한 군사들의 수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8만 6천 8백 명이었다. 이 가운데 왕건의 직속 군사들의 수는 2만 명, 나머지는 지방의 호족들이 동원한 군사들이었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고려가 호족(豪族)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왕건은 지방에서 반독립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호족 세력들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태조는 호족들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포섭정책을 썼다.
태조의 호족에 대한 정책으로서는 결혼정책(結婚政策)·사성정책(賜姓政策)·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기인제도(其人制度)가 있다. 그리고 호족들에 대한 유화적인 和合政策을 들 수 있다. 태조는 먼저 호족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동시에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실행하였다. 태조는 무려 29명이나 되는 후비(后妃)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후비를 거느리게 된 것은 『고려사(高麗史)』 「후비열전(后妃列傳)」을 보면 정략적인 혼인정책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박한설, 「고려의 건국과 호족」,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12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탐구당(번각 발행), 2013, p.41.
왕건은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는 혼인 정책을 써서 왕후가 여섯, 부인이 스물 셋이나 되었다. 그리고 귀순해 오는 호족들에게는 왕씨(王氏)의 성을 주어 가족적인 관계로 묶어 놓는 사성 정책(賜性政策)으로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왕건은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민심 안정정책을 펴 나갔다.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지금의 경기도 개성)으로 옮기고, 신라 말기 이래에 크게 문란해진 토지 제도를 바로 잡고 각종 세금을 경감하는 정책을 폈다.
왕건은 포섭된 호족들이 새로운 특권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호족에 대한 통제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북진정책을 펴, 고구려가 멸망한 후 거의 황폐화된 평양의 이름을 서경(西京)이라고 고치고, 중앙 귀족들의 자제들을 이주케 하여 새로 관청과 벼슬아치들을 두고 새로 성을 쌓고 학교를 세우는 등 수도 개경에 못지 않는 도시로 만들도록 했다.
한편 고려 정치의 기본 방향이 제시된 「훈요십조(訓要十條)」는 태조 왕건의 사상과 정책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훈요십조」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의 왕업(王業)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불도佛道를 닦고, 모든 사원들이 서로 다투어 바꾸고 빼앗고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여야 한다.
둘째,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함부로 사원을 지으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국운이 길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왕위는 맏아들 세습을 원칙으로 하되, 맏아들이 현명하지 못하면 그 형제 중에서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잇게 하여야 한다.
넷째, 우리나라는 중국과 풍토가 다르고 인성이 다르니,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풍수지리사상을 존중하고 서경을 중시하여 나라의 안녕을 이루게 해야 한다.
여섯째, 매년 정월 보름날에 이틀 밤을 등불을 켜 부처님을 섬기는 행사인 연등회와 하늘의 신령·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의 신을 섬기는 행사인 팔관회를 성실히 지켜야 한다.
일곱째, 간언(諫言)을 따르고 참소하는 말을 멀리해 백성과 신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백성에게 일을 시키되 시기를 가리고 부역과 세금을 가벼이 해 민심을 얻으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여덟째, 차령산맥과 금강 바깥은 산천과 땅의 생긴 모양이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민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홉째, 벼슬아치들의 녹봉은 그 직무에 따라 정하되, 함부로 늘리거나 줄이지 말아야 한다.
열째,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 일을 거울로 삼아 현재를 경계해야 한다
「훈요십조」를 통해서 우리는 태조 왕건이 불교와 풍수지리사상을 널리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 지방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풍수지리설의 관점을 따른 것이지만, 후백제를 힘겹게 통합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