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마아파트 안전진단 통과 같은 호재는 예전 같았으면 강남 부동산 시장이 떠들썩했을 일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옛날 말이에요.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도 강남에 집 하나 구한다는 생각에 옵니다. 재건축을 하더라도 엄청나게 돈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지난 3월 2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A 공인중개사무소 박모(51) 사장은 “요즘 강남 부동산 경기가 어떻냐”는 말에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는 지난 2월 초 이후 거래를 성사시킨 건수가 ‘딱 2건’이라고 했다. “그나마 한 달 내내 놀고 있는 다른 중개업소에 비해서는 괜찮은 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2월 이후 단 두 건 거래 성사”
한때 강남 부동산 시장의 대형 호재로 손꼽혔던 은마아파트가 안전진단을 통과했지만 강남 주택시장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리 냉기가 감돈다. 서울 강남구는 지난 3월 5일 한국시설안전연구원으로부터 ‘조건부 재건축’ 대상 판정을 받은 은마아파트에 대해 재건축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대형 이벤트의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현재 은마아파트 전용 77㎡(23.2평)의 시세는 10억~10억5000만원 선. 현재 이 가격에 대해서는 전문가는 물론 아파트 주민들도 재건축된 이후의 집값이 모두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더 이상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주민도 거의 없다. 아파트 주민 유모(63)씨는 “실제 주민들이 원하는 것처럼 은마아파트가 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된 이후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주민들도 빨리 사업이 추진돼 새집이나 하나 생겼으면 하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은마아파트의 이 같은 분위기는 서울 강남권 주택시장 전반에 퍼져 있다. 현재 강남 재건축 아파트는 물론 일반 아파트의 거래도 줄었고 가격도 지속적으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택시장에는 ‘집값 상승의 공식’이라는 것이 통했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 목동·과천·분당 등 버블 세븐 → 서울 전체 → 수도권으로 집값 상승세가 확산된다는 공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공식이 통하지 않고 있다. 올해 초 은마아파트와 송파구 잠실5단지 등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가 2~3주 사이에 수천만원씩 오르며 강세를 보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히려 서울과 경기도 집값은 소폭 하락세를 보였고 강남 재건축 시장도 다시 잠잠해졌다. 강남 주택시장이 예전처럼 전체 주택시장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시대는 아니라는 말이다.
강남 하락세가 서울 집값 하락세 주도?
현재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집값은 각종 수치에서 확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우선 국내 아파트 실제 거래 가격의 흐름을 보여주는 아파트 실거래가 지수가 2개월 연속 하락했다. 아파트 실거래가 지수는 지난해 10월까지 9개월 연속 상승세를 보이다 지난해 11·12월 2개월 연속으로 떨어졌다.
11월엔 전달보다 0.27% 떨어진 130.8, 12월엔 0.31% 하락한 130.4를 기록했다. 실거래가 신고제도(2006년)가 도입되고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하락한 이후 두 번째 하락한 것. 실거래가 지수는 주택을 거래한 이후 60일 이내에만 신고하면 되기 때문에 3개월의 시차가 발생한다. 따라서 올해 초 주택 거래 가격이 반영되면 실거래가 지수는 당분간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호가를 위주로 전반적인 집값의 동향을 보여주는 지수도 비슷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 집값은 2월 마지막주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해 3월 셋째 주까지 4주 연속 하락세를 기록했다. 서울 집값이 떨어지는 가장 큰 요인이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다. 3월 셋째 주 서울 재건축 아파트 변동률은 -0.15%를 기록하며 3주 연속 하락했다.
송파구가 0.65% 떨어져 낙폭이 가장 컸으며 강동구(-0.43%), 강남구(-0.05%) 등도 하락했다.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의 시세는 지난해 말 저점 수준으로 떨어져 올 초 15억원을 웃돌았던 115㎡형 주택은 최근엔 5000만원가량 떨어져 13억~13억5000만원 선에서 호가가 형성돼 있다. 김규정 부동산114 부장은 “현재로선 강남의 하락세가 서울 전반의 집값 하락세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DTI·보금자리주택 영향도
강남 집값이 맥을 못 추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전반적인 실물 경기가 완전한 회복세로 돌아서지 않았다는 점 외에도 정부의 대출 규제, 보금자리주택 공급 등의 영향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주택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규제로는 소득 규모에 따라 주택담보 대출 규모를 제한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들 수 있다.
정부는 지난해 9월 DTI 규제를 기존의 투기지역(서울 강남·서초·송파구)에만 적용하다 서울·인천·경기 전역으로 확대했다. 당시 DTI 규제 확대 때만 하더라도 강남 지역은 이미 이 규제를 받고 있어 집값이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제도를 시행한 결과 DTI 규제의 효과는 예상보다 강력했다.
“강남권 집값은 비(非)강남권에서 강남으로 진입하려는 수요가 항상 풍부했기 때문에 강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DTI 규제의 확대 적용으로 비강남권 주택의 거래가 막히면서 강남으로 진입하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아 강남으로 유입되는 수요가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강남 집값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하락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이영진 닥터아파트 이사)
당분간 약보합세 유지할 듯
이 밖에 정부가 공급하는 보금자리주택의 영향도 강남 주택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남권에는 보금자리주택 시범지구와 2차 지구에서 세곡·우면지구 등이 포함돼 있다. 게다가 ‘강남권 신도시’로 불리는 ‘위례신도시’에서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주택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강남권 보금자리주택에서 공급되는 집값은 주변 시세의 50% 수준이다. 주택 수요자 입장에선 구태여 비싼 기존 주택을 사지 않아도 강남으로 진입할 수 있는 새로운 입구가 생긴 셈이다. 이영진 이사는 “실제 보금자리주택에서 공급되는 강남권 주택은 기존 강남 주택 수요층과도 다르고 시장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물량도 풍부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반값 강남 아파트’라는 인식이 예상 외로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강남 집값이 단기간에 상승세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 많다. 건설사들은 강남 집값이 살아야 전체 주택시장이 살아난다며 규제를 풀어달라고 아우성이지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정부는 지방 미분양 주택에 대해서는 분양가격을 할인하는 것을 전제로 양도세 감면 제도를 연장했지만 수도권은 예외였다. 대출 규제에 대해서도 지방선거(6월)를 불과 석 달 앞둔 상황에서 정부가 대출 규제를 완화할 경우 집값 상승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건설업계에서 대출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LTV(담보인정비율)와 DTI는 가계 및 은행의 건전성 측면에서 봐야 한다”며 당분간 대출 규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역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답변에서 “LTV와 DTI 규제를 지속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면 정부는 금리 인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금리 상승은 집값 상승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경기 회복 속도보다 집값 상승 속도는 더딜 수 있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전체 주택시장이 침체된 이상 강남 주택시장만 상승세로 돌아서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은 “장기적으로 볼 때 강남은 언제나 대기 수요가 풍부하기 때문에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확실한 실물경기 상승세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전체 주택시장의 분위기와 함께 약보합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