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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은 무수(茂壽)
과거 보러 상경 때 선조임금 꿈에 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어
종각에 있는 이를 데려오게 했더니
그가 바로 정무수무과 시험에서 출중함 보여
선조가 ‘기룡’ 이름 직접 내려"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본관은 곤양(昆陽), 초명(初名)은 무수(茂壽)였다. 정무수는 과거를 보러 상경하게 되는데 그때
선조임금이 꿈을 꾸었다. 꿈에 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어 종각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그가 바로 정무수였다고 한다. 그는 무과 시험에서
출중한 무용(武勇)을 보여 선조가 ‘기룡’이라는 이름을 직접 내렸다.
정기룡이 태어날 때 산모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죽을 상태가
됐다. 가족이 염(殮·시신을 거두어 관에 넣음)을 하려는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더니 사흘 후 아이가 태어나고 산모는 사망했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있어 모두 영웅 탄생으로 믿었다.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했던 그는 소를 통째로 삼킬 만한 기상이 있었다. 뽕나무 활을 쏘며 놀던 어릴
때부터 뭇 아이들을 위엄으로 굴복시켰다. 13세 때 부친상을 당해 여묘(廬墓·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살이를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글을 배우지 않고 활쏘기를 배우겠다고 청하니 그의 형 인룡(仁龍)이 못하게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찍이 형과 함께 과거 시험장에 갔다가 형이 병이 나서 수레에 실려 돌아와 죽었다. 크게 상심해 무술 익히는 업(業)을 포기하고 형을
위해 3년 동안 소식(素食·고기반찬이 없는 밥)을 했다. 그 후 친척들이 강권해 그 업을 제대로 마치도록 힘쓰게 했다.
그는
임진왜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부인 강 씨를 잃는 슬픔 속에 용감히 싸웠다. 강 씨는 강세정(姜世鼎)의 딸이다. 강세정은 고을의 아전을 지냈다.
강 씨가 왜적을 피해 진주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적삼에 혈서를 써서 남편에게 죽음을 알리고 마침내 그 어머니와 시누이와
함께 촉석루 아래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부인을 잃은 후 새 부인을 맞았다. 새 부인 권 씨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권 씨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결혼하지 않아 노처녀가 됐는데 정기룡을 만나고 나서야 결혼하겠다고 했다. 또 권 씨는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날쌔고 힘이 세 정기룡 장군이 타고 다녔다. 이 말은 장군이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선봉으로 진격, 왜군 모두 격살
상주에서 험한 고개를 넘어 호서의
영동에 주둔한 왜군을 토벌했다. 명나라 장수인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도산(島山)에서 왜군과 접전하자 정기룡이 선봉이 돼 맨 먼저 진격했다.
연이어 거창(居昌)·함양(咸陽)·안음(安陰)·금산(金山)·상주(尙州)·성주(星州)·사천(泗川) 등지의 왜군들을 모두 격살(擊殺)했다. 함양에
있는 왜적을 공격할 때에 명나라 장수 이절이 전투에 패해 죽었다. 그러자 명나라 병사들이 정기룡의 휘하에 소속되기를 원했다. 그는 이를 명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명 황제가 이를 허락해 그를 천조(天朝·중국 조정)의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았다.
그는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공격했으나 단 한 번도 기세가 꺾이거나 패하지 않았다. 그는 의관(儀觀·엄숙하고 위엄이 있는 몸가짐이나 차림새)이
웅위(雄偉)하고 눈빛이 횃불처럼 빛났다. 청렴결백해 오점(汚點)이 없었고 항상 남의 곤궁한 처지를 급히 나서서 도와주면서 자기의 사정은 돌보지
않았다.
그가 타던 말은 평지에서 여섯 길이나 되는 참호(塹壕)를 건너뛰었으며, 절벽을 오르고 험한 지형을 건너는 것을 마치
날카로운 발톱과 빠른 날개가 달린 것처럼 해내 정기룡이 적을 제압하고 위기를 벗어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정기룡이 말과 서로 떨어져
있다가 적에게 붙잡혔다. 갑자기 말이 정기룡의 목소리를 듣고는 재갈을 잡고 있던 적을 물어 거꾸러뜨리고 가파른 비탈 위에 있는 그에게로
달려왔다. 뒤에 그 말이 병들어 죽자 정기룡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경북 기념물 제13호,
장군의 묘
정기룡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있다가 1622년 2월 28일에 군영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그의 묘가 있는데 경북 기념물 제13호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 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돼 있다.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을
일으키고, 위국충정의 화신이 된 정기룡 장군의 행적은 만세의 사표가 된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