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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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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스크랩 김구 암살범 안두희 처단, 정의봉 박기서
러브인 추천 0 조회 403 14.06.15 04: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A%B8%B0%EC%84%9C_(1951%EB%85%84)


박기서(朴琦緖, 1951년 ~)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으로 당시 경기도 부천에서 버스기사로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안두희를 몽둥이를 때려서 피살시킨 장본인이다. 

실제 나이는 1948년생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력[편집]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의 중구 신흥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 몽둥이를 든 중년 남성이 들이닥쳤다.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박기서는 경기 부천에서 버스 운전을 하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박기서는안두희의 부인을 안방으로 끌고 가 묶은 뒤 옆방에 있던 안두희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중풍에 걸려 있던 안두희는 무언가를 얘기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으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이렇게 최후를 맞았다. 1949년 당시 32세의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는 백범의 거처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갔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그는 다짜고짜 4발의 총탄을 쏘았다. 사건 후 그는 현장에 재빨리 도착한 헌병 지프에 실려 갔다. 범행 두 달 뒤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석 달 만에 15년형으로 감형됐고 복역 중 2계급 특진도 했다. 이것이 이승만(李承晩) 정부 하에서 국가 공권력이 안두희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의혹을 만든 단서가 되고 말았다.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포병 장교로 복귀해 전투에 참가했다. 제대 후에는 강원도에서 군납 사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4·19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두희는 잠행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안두희를 붙잡으려는 사람들과 그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1961년 안두희는 서울에서 김용희에게 붙들려 검찰로 끌려갔으나 공소 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1965년에는 곽태영이 강원 양구군에서 안두희를 찾아내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안두희의 목을 칼로 찔렀지만 안두희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또다시 안두희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 낸 사람은 ‘안두희의 천적’으로 알려진 권중희였다. 숨어 있던 안두희를 찾아낸 권중희는 안두희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며 1987년 서울 마포의 버스 정류장에서 그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 역시 권중희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안두희의 사망이 알려지자 “뒤늦게나마 죗값을 치른 것”이라는 반응과 함께 “그의 입이 닫히면서 사건의 진상도 땅 속에 묻혔다”라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왔다. “법치국가에서 사형(私刑)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각계의 구명 노력으로 1998년 3월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고 권중희는 “다시는 이 땅에 안두희와 같은 암살자가 나타나지 않아야 하고, 그런 암살자가 활개치고 사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 [1][2]

안두희 사건[편집]

배경[편집]

1947년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서북청년회 중에서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 중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3]:261~264[4] :53~54

그러나 안두희에 대한 의혹 가운데 하나인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의혹과 자세한 배후 등에 대해서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는데, 당사자인 안두희가 확실한 증언을 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이 의문은 끝내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다만 안두희에 대한 감형, 예편 후의 군수업자 근무, 이승만과 김구와의 대립, 미국의 배후 개입 등으로 인해 권력과 결탁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안두희가 중형을 면한데다가 1년 여밖에 복역하지 않았으며,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하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그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일면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개월 여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조사받기는 커녕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한번 확정 판결된 사건은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의 원칙에 의거해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56년 10월 안두희에게 폭행당한 양구경찰서 순경 길종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안두희를 고소했으며, 결국 1962년1월 25일 특수 폭행 치상죄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65년 12월 곽태영이라는 청년이 안두희를 테러했으며, 1966년 김지웅 자신이 김구 암살의 총책임자라고 일본에서 폭로하는 등 진상규명의 분위기가 일자 안두희는 미국 이민을 시도하였다.

1971년 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년 4월 권중희(權重熙)와 김석용이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 1992년 11월 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姜信玉) 의원)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1995년 12월에 작성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이 하수인으로 활동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서 어떤 목적으로 지시를 받게 되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현재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5]

관련자 약력[편집]

4·19 혁명 이후 백범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김용희 간사가 안두희를 잡는데 직접 발 벗고 나섰다. 이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에 중국 서주에서 광복군 지하공작원(김용희)과 냉면집 주인(안두희)으로 만난 구연이 있었다. 그래서 김용희는 오래 전부터 안두희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김용희는 1961년 4월 19일, 안두희가 어린 아들과 함께 종로2가에 모종을 사러 나온 것을 확인하고 거기서부터 신설동까지 지프차와 택시로 쫓기고 쫓는 추격전을 벌였다. 마침내 김용희는 동묘 앞에서 안두희를 붙잡아 사건의 전말을 네댓시간 녹취했다. 이 녹취록으로 백범 암살 진상 일부가 세상에 밝혀졌다. 1995년 12월 국회법제사법위원회 백범암살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이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기도 했다.

1965년 12월 중순, 전북 김제군 출신의 청년 곽태영은 안두희를 응징하고자 수소문 끝에 강원도 양구로 잠입하였다. 곽태영은 안두희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행상차림으로 찾아 나섰다. 그는 안두희 군납공장이 있는 동네에다 하숙을 얻었다. 그 집에서는 안두희 공장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곽태영은 동네사람에게 장사꾼이라고 속인 뒤 실제 그렇게 보이려고 이웃 여러 민가에 양말, 장갑 등을 팔기도 했다. 그러면서 안두희 공장에도 들러 군납공장 내부 구조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런 가운데 그해 12월 22일 마침내 군납공장에서 안두희를 발견하여 두 사람이 격투로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마침내 곽씨가 안두희 배 위를 올라탄 뒤 우물 옆에 있던 돌로 안두희의 머리를 내리치고 칼로 옆구리를 찔렀다.

곽태영은 곧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연행되고 안두희는 긴급히 서울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두 차례나 뇌수술을 받았다.곽태영은 안두희를 두들겨 팬 상해죄로 1966년 7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선고를 받은 뒤 풀려났다.

경북 안동 태생으로 1983년부터 10여 년간 안두희를 끈질기게 추적 응징했다. 1987년 3월 27일 낮 1시 10분경 서울마포구 성산동 마포구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권중희는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로 안두희의 온몸을 두들겨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혔다.

이후에도 권중희는 계속 범인을 추적하여 안두희로부터 장은산 포병사령관에게 직접 지령을 받았다는 얘기, 사건 전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는 얘기, 미 정보장교로부터 지령이나 다름이 없는 암시를 받았다는 얘기 등 결정적인 자백 받았다.

하지만 곧 안두희는 기자회견장에서 '권중희의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고 이를 전면 부인했다. 권중희는 안두희 사후에도 백범진상 배후를 규명하고자 2004년 1월 성금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까지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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