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고장, 누르지 마세요
김 시 경
무단결근 첫날,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해영이 암막 커튼을 걷었다. 유리창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에 현기증이 일며 헛구역질이 났다. 회사에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마침표를 찍는다는 게 찝찝하고 허망할 뿐이었다. 예기치 않은 벨소리가 울렸다. 해영은 까닭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군가를 부르지도 않았고 인터넷으로 주문해 놓은 물품도 없었다. 열에 들뜬 몸을 담요로 감싼 채 해영은 현관문 앞에 섰다. 두꺼운 쇠문 너머로 높고 맑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에 사는 하늘이엄마예요. 젊은 엄마들이 함께 공부하는 모임인데요…….”
잠깐 해영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방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깜박 잠이 든 해영은 요란한 벨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방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귀를 기울였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한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 주시면…….”
해영은 곧바로 침대로 돌아왔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드라이아이스가 내뿜는 차가운 김에 닿기라도 한 듯 온몸이 으슬으슬 쑤시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남의 집 벨을 무시로 누르고 다니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해영은 더 이상 벨소리에 마음을 졸이고 싶지 않았다. 문득 언젠가 보았던 메모가 떠올랐다. 1층 엘리베이터 바로 옆집이었는데 벨 위에 이렇게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기가 자고 있어요. 벨 누르지 마세요.’ 해영은 넓적한 포스트잇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벨 고장, 누르지 마세요.’ 그리고 현관 유리구멍에 눈을 대고 밖을 살폈다. 현관문을 빼꼼히 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벨 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해영은 자신이 하는 양이 어이없고 우스웠다.
해영이 방전된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고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와 있었다. 한 통은 황 부장, 한 통은 김 과장에게서였다. 해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제 일은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 황 부장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황 부장과 따로 만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아니, 이 회사에 입사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모두 벌어진 일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해영은 허기지고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밥을 해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영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진하게 유자차를 탄 컵을 들고 해영은 소파에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어느새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7년 동안 입시 학원 강사를 하며 해영은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다.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대학 선배가 연락을 해왔다. 일로 알게 된 출판사에서 이번에 학원교재를 처음 만들면서 학원 강사 경력이 있는 편집자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해영은 학원에서 부교재나 참고자료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지원했다. 하지만 출판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이는 많고 편집 경력은 전무한 해영을 팀원들은 부담스러워했다. 무엇보다 해영은 김지현 과장이 껄끄러웠다. 알고 보니 해영과 동갑인 김 과장은 매사에 일처리가 꼼꼼하고 실수에 너그럽지 않아서 다른 직원들도 버거워하는 상사였다. 입사 초반 해영은 무턱대고 일을 진행하다가 김 과장한테 여러 번 책잡히고 무안을 당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붙잡고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해영은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여 회사 옥상에 혼자 올라가 울고 있었다. 그때 해영에게 다가온 사람이 황 부장이었다. 황 부장은 그동안 김 과장과 지내봐서 그 고충을 잘 안다며 해영을 위로했다. 출근 때마다 회사 입구에서부터 숨이 턱 막히고 편집부 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던 해영이었다. 해영은 황 부장을 통해 숨을 쉬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황 부장은 가끔 해영을 불러 업무와 관련하여 조언을 해줬다. 해영은 부장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힘이 났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더 싸늘해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황 부장이 자료 조사를 핑계로 해영을 불러냈다. 그리고 서점으로 가는 길이 아닌 교외로 차를 몰았다. 강변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은 황 부장은 사무실에서와는 사뭇 태도가 달랐다. 해영을 바라보는 눈빛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해영은 그저 황 부장이 늘어놓는 개인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평소 황 부장을 대하는 김 과장의 태도는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황 부장이 해영을 불러내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김 과장은 황 부장에게 더 뻣뻣하게 굴었다. 해영은 황 부장과 김 과장 사이에서 시한폭탄을 안고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편집부 직원 모두가 자신을 두고 수군대는 것 같았다.
바로 어제였다.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은 황 부장이 해영을 불러냈다. 해영을 태우고 낯선 곳으로 향하던 차가 정차한 곳은 모텔 주차장이었다. 해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로 하릴없이 황 부장에게 끌려갔다. 해영은 어떻게 모텔에서 빠져 나왔는지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정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밤새 앓았다.
무단결근 이틀째, 간신히 몸을 추스른 해영이 묽은 죽을 떠먹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김지현 과장이었다. 해영은 받지 않았다. 김 과장이 해영에게 할 말이 뭔지는 듣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책임감 운운하며 회사 그만두라는 말일 터였다. 해영은 지금 누구하고도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무단결근 사흘째, 해영은 밥을 하고 된장국을 끓여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벨 위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이후 한 번도 벨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딩동! 문자가 왔다. 김 과장이었다. 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최해영 씨 김지현입니다. 황동수 부장이 거래처와 부당 거래 및 직무 유기 문제로 해고됐어요. 최해영 씨는 아무 관련 없다는 것 알아요. 빠른 시일 내로 업무 복귀 바랍니다.’
해영의 눈앞에서 글자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해영은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헤아리려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첫댓글 제목도 좋고, 뭔가 다음을 기대하게 했는데...스스로 벽을 만들며 소통하지 않는 현대인, 이런 주제로 ...주인공 최해영 이야기가 나옴으로써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벨 고장이라는 포스트잇을 붙인 후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두 가지 생각이 결국 두 개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선생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벨고장 포스트잇이 아이디어 좋네요. 실생활에 응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정말 두가지 이야기가 되었는데, 벨고장 후 뒷이야기도 궁금하고, 최해영의 일도 궁금하게 만드네요.
저두요...벨고장을 붙힌 후에 얘기가 더 궁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