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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왕릉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권정희
19세에 건네받은 나라의 운명 |
왕세자 효명, |
- 작가 박민경
1.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 효명!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이곳 지하 수장고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한 청년의 유품이 보관되어있다.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한국전쟁 중 어진의 절반이 불타버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 정조를 닮아 이마가 반듯하고
눈은 용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4살 되던 해 왕세자로 책봉된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3년간 대리청정을 했던 실질적인 국왕,
하지만 그는 스물 두살에 요절하고 만다.
'문조익황제어진'
"효명세자가 왕으로 즉위했다라고 한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조선의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 이덕일 박사(역사평론가)
"조선의 불운이 연속으로 이어졌기 때문에라도
효명세자 같은 능력있는 왕세자가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
외척의 세도 정치에 둘러싸여 왕권이 끝없이 추락하던 시대.
왕권 강화라는 사명을 가지고 대리청정을 시작했던 효명.
그는 대리청정과 함께 춤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춤은
세도 정치를 견제하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춤을 통해 정치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
이 이야기는 그의 대리청정 3년간의 기록이다.
2.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다
봄 못이 맑으니 꽃 그림자 곱기도 해라
온 산천 붉어 비와 이슬을 머금으니
우리 임금 깊은 덕이 창생에 미쳐
이같이 고르구나
- ‘춘당대’, 효명세자 作
정재.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를 경축하기 위해 지은
궁중 무용이다.
"곱기도 하구나.
달 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비단 옷소매는 춤을 추듯 바람에 날리도다."
- 춘앵전(효명세자 지음)
이 춤은 효명세자가 창작한 대표적인 궁중 무용이다.
조선조 말까지 전해진 정재는 53수인데
이중 효명세자의 손을 거친 것이 모두 26수.
효명은 우리 무용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시를 쓴 왕들은 많았지만
춤에 관심을 가진 왕은 효명세자, 익종이 유일하다.
19살 어린 나이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은
국왕에 준하는 엄청난 정무를 맡고 있었지만
춤에 대한 관심을 놓지를 않았다.
무엇이 그를 춤의 세계에 빠져들게 했을까?
그의 춤에 대한 사랑은 의궤에 잘 담겨져 있다.
국가나 왕실의 주요 행사가 기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의궤>.
효명이 주관한 의궤는
기축년 <진찬의궤(進饌儀軌)>와
무자년 <진작의궤(進爵儀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궤에는
글 뿐아니라 그림을 함께 실어
후대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순조기축 - <진찬의궤>, 1829년 출간
악공들의 의상에서
악기들의 종류,
음식의 가지수와 만드는 방법까지,
그 내용이 얼마나 자세한 지
의궤만으로도 당시 영화를 재현할 수 있다.
'무고'는
북을 가운데 두고 무용수들이 돌면서 북을 치며 추는 춤이다.
"춤출 때 무고라는,
북을 가운데 놓고 추는 춤이 있는데,
그 무고를 만들 때 나무통이 얼만큼 들어갔고,
나무통을 씌우는 소가죽이 얼만큼 들어갔고,
북통을 만드는 데 못이 몇 개 들어갔는지,
고리가 몇 개 들어갔는지,
색칠할 때는 어떤 염료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다 세세하게 적혀 있어서 지금도 만들 수 있어요.
음식도 재료와 수량이 다 적혀 있어요.
참기름 얼마, 파 얼마, 그런 것까지 다 적혀있어요."
- 김종수 박사(규장각한국학연구원)
효명은 대리청정 3년 동안
크고 작은 연회를 총 11번 열었는데,
대부분 부왕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였다.
그가 사후에 '효명'이라는 시호를 받은데는
아버지 순조에 대한 그의 효심에 남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봄 못이 밝으니
꽃 그림자 곱기도 해라
온 산천 붉어
비와 이슬을 머금으니
우리 임금 깊은 덕이
창생에 미쳐 이같이 고르구나"
- 효명세자 '춘당대' 중
3. 효명, 춤을 만들다!~
"오는 12월초 10일 안으로
책자를 만들고 관리를 정해서
기녀를 선출하여 올라오게 할 것."
- 순조기축진찬의궤
1828년 11월.
효명은
다음해에 있을 순조 30년과 보령 40세를 맞아 잔치를 계획하고
순조에게 허락을 구한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성상께서는 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내년 정월 초하룻날 즉위하신 지 30년을 축하하는 예를 크게 거행하도록 허락하소서."
- 순조 28년 11월 21일
조선 왕조에 재위 30년을 채운 임금은
세종과 선조, 숙종, 영조, 순조 등 다섯명에 불과할 정도로 드문 경사였지만,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순조에게는 당황스런 제안이었다.
하지만 거듭된 상소로
마침내 순조의 허락을 받아낸 효명.
그 날로 <진찬소>라는 준비 기구를 꾸리고
본격적인 잔치 준비에 들어갔다.
'1828년 11월 24일 <진찬소(進饌所)> 설치'
국부인 순조의 사순 잔치는
왕실 뿐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였다.
효명은
길일을 잡아 잔치날을 정하고
대신들의 업무 분장을 챙기는 등
잔치의 전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잔치때 무슨 춤을 출 것인지
무용의 종류와 순서 역시 직접 결정했는데
여기엔 자신이 직접 창착한 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연의 기획에서 무대 연출까지
효명은 진찬의 총감독이었다.
춤이 결정되었으니 춤꾼을 모아야 했다.
여령(女伶)은
궁중의 각종 연회에서 춤과 노래를 맡았던 여자들이다.
제주와 함경도를 제외한
6개 도에 공문을 보내 기녀를 소집했는데,
1828년 11월 27일. 6개 도에 공문 하달
"오는 12월초 10일 안으로 책자를 만들고 관리를 정해서
기녀를 선출하여 올라오게 할 것."
- 순조기축진찬의궤
선발된 기녀들은 말이나 배를 타고 한양으로 이동했다.
각 지역에서 춤과 노래가 뛰어난 기녀 총 85명이 선발됐다.
'덕애, 연심, 차심, 금병매, 양대운, 금패, 홍도...'
"만약 늙고 병들고 가무를 잘 못하는 자로
구차하게 숫자만 채워 올려 보내는 폐단이 있으면 해당 수령을 문책하겠다."
한양에 도착한 기녀들은 장악원에 여장을 풀었다.
현재 을지로 2가에 그 터만 남아있는 장악원은
조선조 궁중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드디어 지방에서 올라온 85명의 여령들은
한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1828년 12월초 여령 85명 소집
"지방에서 여기(女妓)들을 불러오게 된 것은
인조반정 이후에 처음이었어요.
조선 전기에는 장악원에 소속된 여기들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여기들을 폐지를 했거든요.
궁중 잔치를 할려면
지방에서 여기들을 불러와서
두 달 정도 같이 연습을 해서 공연을 했어요.
공연이 끝나면
다시 바로 지방으로 내려가곤 했지요."
- 김종수 박사
여장을 푼 여기들은
맨 먼저 효령이 쓴 창사를 연습해야 했다
창사는
궁중 무용을 출 때 춤추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다.
장악원의 전악 김창하가
창사에 곡조를 붙이고
기녀들을 연습을 시켰다.
특히 효명이 창작한 '춘앵전' '무산향' 같은 정재보가 20편 이상 늘어나면서
익혀야 할 악장의 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빙정월하보
"곱기도 하구나 달 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효명은 매 잔치때마다 창사를 지어
거기에 노래와 춤을 입혀 새로운 정재를 선보였는데,
이렇게 만든 효명의 정재들은 파격 그 자체였다.
'무산향'.
효명이 만든 독무로,
침상 모양의 대모반이라는 이동무대에서 추는 춤으로,
왕의 총애를 받은 여인의 기쁨을 표현한 것으로
근엄한 정재의 내용을 벗어난 것이었다.
봄날의 꾀꼬리를 형상화 한 '춘앵전'은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처음 시도된 독무로써,
효명의 작품중 오늘날까지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효명은
이름만 남아있던 고구려무와
신라의 사선무를 복원해냈고,
다양한 소품과 무대를 활용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26편.
효명은 춤의 예술성이나 양적 풍성함으로
조선 시대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춤의 진경시대'를 연 인물이었다.
약 한달 정도 연습을 한 여령들이 장악원을 떠나 궁궐안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당시 총 10번의 예행 연습이 있었는데
효령이 진두지휘한 것은 물론이었다.
왕세자가 직접 기녀들의 연습을 참관하고 감독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 손에 쥐고 펼칠 수 있는 책 홀기는
큰 의식의 식순 등을 적어놓은 공연 팜플렛의 일종이다.
'정재무도홀기'에는
궁중무용의 진행 순서 및 춤사위, 음악과 노랫말 등을 소상히 적어놓은 책으로,
직접 보지 않고도 춤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런데 예행 연습이 시작되고 얼마뒤 대신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천민 신분의 기녀들이 궁궐을 돌아다니는 모습이나
세자가 직접 연습을 참관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신이 듣자니 일전에 대궐 내에서
여령들이 기예를 연출한 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저들과 같이 미천한 무리들이 때도 없이 엄숙한 대궐에 출입하니
듣고 봄에 해괴하게 여겨집니다."
"또 여러 차례 연습을 해당 관소에 위임하지 않고
모두 임관하시니 성색의 즐거움에 마음을 방탕하게 하기 쉽습니다."
- 순조실록 1829년 1월 10일, 대사헌 박기수
하지만 효명은 단호했다.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고 모함했다고 분노한 후
박기수를 유배시킨다.
"방탕한 마음이라 비방하였으니
내가 부끄러움이 지나쳐 사람을 상대할 면목이 없다.
무슨 의도로 규례를 살펴보지도 않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박기수를 호남의 바닷가로 귀양보내라."
- 순조실록 1829년 1월 13일
보수적인 관료들의 비난을 뒤로 하고
정재 연습은 물론 연회의 전 과정을 꼼꼼히 챙겼던 효명.
그에게 연회는 부왕의 생신 잔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4. 외척 세도정치,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지금 임금의 나이가 어려 김조순의 무리가 국권을 장악하니
하늘이 재앙을 내려 큰 흉년이 거듭되고
굶어 부황된 무리가 길에 널려 죽음에 임박했다"
- 홍경래의 난 격문 중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은
6개월에 한 번꼴로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직접 챙겼다.
유교 국가에서 예악을 바르게 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세종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서,
예법을 정리하고,
우리 음악인 아악을 집대성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효명에게는
세종 못지 않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외척들의 세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세도 정치의 기원은
정조때 홍국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위태로운 세자 시절을 보낸 정조는
후견 그룹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왕이 되었다.
정조는 죽기 보름전
평소 신임하던 김조순을 불러
순조의 뒤를 봐줄것을 부탁한다.
정조의 사망 당시 순조의 나이는 11살.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는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며 반대파들을 숙청했고,
정조의 유시를 받아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이는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박해를 통해
정조를 지지하던 남인 세력 등 5백 여 명을 제거하고
노론의 기반을 굳히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물러난 후에는
김조순 중심의 안동 김씨 세력이 국정을 장악하게 된다.
국왕의 인사권도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이조와 병조가 세 명의 인재를 추천하고
왕이 그 중 한 명을 낙점하는 것으로 관리를 임명했는데(삼망제)
김조순을 위시로 한 외척들은
삼망에 모두 자기 세력을 올리는 방식으로
조정의 주요 관직을 장악했다.
"순조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곧바로 수렴청정을 받고,
부친 정조가 아꼈던 신하들이 모두 죽거나 귀양가는 것을 보면서
상당한 공포를 느꼈겠구나 추측할 수 있죠.
그래서 순조는 노론이라는 거대 당파와 싸우기 보다는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방임 정치를 하게 되죠."
- 이덕일(역사평론가)
한양의 안동 김씨 세도가에는
연일 벼슬을 청탁하려 오는 이들로 북적였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시인이 이를 비꼬아 시를 지었다.
'가문의 성세는 자하동의 갑족 김씨요
이름자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순'자 항렬이라네'
- 평안도 시인 노진
안동 김씨와 소수 가문에 권력과 토지가 집중되면서
삼정(조세, 공납, 역)은 문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순조 9년에 흉년이 겹쳐
민심은 흉흉해졌다.
결국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민란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안도에서
몰락 양반 홍경래를 중심으로
중인과 농민, 수공업자, 광산노동자들까지 합세한 농민 반란이었다.
"지금 임금의 나이가 어려 김조순의 무리가 국권을 장악하니
하늘이 재앙을 내려 큰 흉년이 거듭되고
굶어 부황된 무리가 길에 널려 죽음에 임박했다"
- 홍경래의 난 격문 중
"순조때부터는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많은 민란이 발전하게 됩니다.
일반 백성들이 이미 국왕도 허수아비가 됐다라고 생각을 하고,
'백성들 자신의 문제는 자신들이 풀어야겠다'라는 생각의 발로입니다."
- 이덕일 박사
왕권을 바로세워야 했지만
11살에 왕위에 올라 성인이 된 순조였다.
장인인 김조순을 위시한 외척 세력들이 포진해 숨통을 조일 뿐이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무기력증을 앓게 된 순조는
정신 계통의 질환을 앓게 되는데
실록에 따르면 화기가 쌓여 앓게 된 일종의 홧병이었다.
"전하께서 화기가 쌓인 증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을 써서 답답함을 풀고 계셨지만..."
- 순조 11년 8월 16일.
5. 순조의 선택은 아들 효명세자!~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하더라
이 용이 만물을 키워내리니
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일 것이다."
- 잠룡, 효명세자 지음
외척에 둘러싸여 고분분투하던 순조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자신의 아들 효명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은 용모에
학문을 사랑하는 것 역시 닮아서
잠자고 먹을 때를 빼고는 공부하는데만 매진했다는 효명.
순조는 외척 세력에 대항했던 김재천을 효명세자의 스승으로 삼고
세자의 위상을 세우려고 다각적으로 노력했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 과정을 그림으로 기록한
'효명세자 왕세자입학도'
세자는 만 9살에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창덕궁을 나서 성균관까지 주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 시대 세자 관련 기록화는 총 13점.
그중에 효명세자 관련 기록화가 가장 많은데
이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순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 * 왕실 관련 그림에는 왕이나 왕세자는 그리지 않음)
"순조 연간 경우에는 왕권을 강화되려는 움직임으로,
세자시강원(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청)의 위상 강화,
또 그리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들의 정치적 참여가 더 높아지는 당시 정치적 기류를
효명세자와 관련된 기록화가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박정혜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집권 27년째 순조는 효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대리청정, 1827년 2월 9일 대청의 명을 받들고
2월 18일 인정전에서 하례식을 마치고 정무를 시작함."
당시 순조의 나이 38살.
한창 나이임에도 옥새를 넘긴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때 순조가 효명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뭔가 정국을 바꾸어보자는 입장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정치에 상당히 포위되어 있었고,
그런 상황을 뚫어보고자
상당히 능력을 갖추고 과감성이 있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국 돌파를 하게 하고
또 그것이 왕이 되어서는 훨씬 강한 왕권을 구축하게 하는
그런 의도와 메세지로써 대리청정을 하게 했다고 판단이 됩니다."
- 신병주 교수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하더라
이 용이 만물을 키워내리니
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일 것이다."
- 잠룡, 효명세자 지음
쇠잔해가는 조선의 국운이 19살 청년의 어깨위에 얹어있었다.
대리청정 한 달째, 효명은 장악원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국가가 있으면 음악이 있으니
음악은 국가의 큰 절목이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듣고 정치를 관찰하는 것이다.
내 보아하니 종묘제례때 추는 춤 '일무'가 많이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그 폐단을 빨리 바로잡도록 하라.
그리고 장악원에 뽑아놓은 악생 72명에게 봉급을 주고 춤을 가르치도록 하라."
- 순조실록 1827년 3월 11일
효명의 예악 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827년 9월.
부왕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의 존호를 높이고 첫 연회 개최한다.
대리청정 2년째(1828년 6월).
어머니 순원왕후 40세를 축하하는 진작연을 창덕궁 연경당에서 잔치를 치뤘다.
그리고 대리청정 3년(1829년)
순조 즉위 30년과 보령 사십세를 맞아 기축년에 성대한 진찬을 준비한다.
6. 효명, 외척의 세도 정치를 향해 칼을 들이대다!~
순조기축진찬도병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예악 정치를 추구했다.
조선 시대 궁중 연회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예와 악으로써 왕 중심의 질서를 강화하고
왕의 위상을 높이려는 정치적인 의식이었다.
잔치에 참석하는 유력 대신들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서약하고
만세무강을 비는 치사를 낭독하게 된다.
잔치를 통해
왕의 위엄과 권위를 내보이고
군신의 질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한편 효명은
순조의 사순 잔치를
자신의 친위 부대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도록 했다.
할아버지 정조 역시
화성원행때 자신의 친위 부대를 동원했다.
화성원행을묘도병
정조와 효명은
연회를 통해 친위대를 보강하고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효명세자가 계시던 그때 보면
이미 내적으로 정치가 어수선하고 세도 정치가 번창했던 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효명세자가 원하는 것은
국왕 중심의 국가 운영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보면
궁중 음악이라든지, 무용 같은 것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창안해서,
진찬위 같은 행사에서 선보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내적으로는 정치적인 안정을 기하고,
대외적으로 외세에 대해 국가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 안태욱 실장(문화재 보호재단)
기축년 잔치는
2월과 6월에 총 6회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2월 명정전 진찬에 참석한 신하의 수는 2백 여명,
접대를 맡은 관리만 70명이 넘는 대규모 연회였다.
효명이 마련한 잔치는 역대왕들과 확연히 다른 게 있었는데
바로 익일회작이다.
잔치가 끝난 다음날 벌어지는 익일회작의 주인공은
왕과 왕비가 아니라 바로 왕세자 효명 자신이었다.
특히 이 자리엔 효명의 장인 조만영과 김로, 서준보 등
반외척세력들이 참석해 정치 회합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연회를 주관하는 사람이 왕세자 자신이었고
왕세자가 연회의 중심에서 주인공으로 드러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단순히 수고한 관원들을 위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왕세자로서의 위상과 위치, 그런 것을 스스로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 박정혜 교수
창덕궁 후원에는
효명세자와 관계된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한 건물이 어린 효명이
순조에게 청해 지었다는 공부방 기오헌(寄傲軒)이다.
기오헌 - '세속을 떠나 초연한 자유인의 경지를 마음껏 펼치는 집'
세도 정치 시기.
단청도 없는 북향 건물을 지어놓고 절치부심했던 효명.
대리청정 시작과 함께
외할아버지 김조순과 그 측근을 향해 사정의 칼날을 들이댄다.
효명은 예악을 바로 세우는 한편,
대청(대리청정)과 함께 강력한 인적 쇄신을 시도한다.
대청 나흘째 2월 22일.
안동 김씨 외척 세력들을 감봉 조처한다.
안동 김씨 계열 전임 이조판서 이희갑, 김재창과,
현임 이조판서 김이교를 감봉 조치.
3월 22일.
안동 김씨 계열 우상 심상규의 권세와 사치를 탄핵하고,
김조순이 장악했던 비변사 당상돌을 감봉 조치한다.
1827년 6월.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과 조카 김교근 등
안동 김씨 핵심 세력들을 정계에서 축출 유배시킨다.
대청 4개월.
효명은 안동 김씨 핵심 외척 인사들을
정계에서 축출하거나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전하는 명을 잇따라 내려도 끝내 듣지 않는 것은
겉으론 엄히 토벌한다하면서 속으론 발을 빼려하는 것이니 이들 불성실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오늘 서연에 나온 대간과 억당들을 모두 파직하라."
- 순조실록 27년 11월 15일
사정 바람이 거세지자 대신들의 반발도 잇따랐다.
"물러나라는 명과 함께 파직하시니
임금이 누구와 함께 다스리겠습니까."
- 순조실록 11월 15일 영의정 남공철
"일단 국왕이 누구를 임명하는 것은 상당히 제약되어 있어도
파직시키는 것은 국왕의 권한이기 때문에
이러한 권한을 이용해서 일정 정도 변화를 줄 수 있었는데
바로 효명세자가 그런 권한으로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흔적들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최고 정책 결정 기구인 비변사를 비롯해
정부내 주요 요직에 외척 세력이 포진해 있었다.
효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소론 등
반외척 세력을 정계로 복귀시킨다.
언론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삼사에 배치된 인물들은
연일 핵심 외척 세력들의 비리를 폭로해 탄핵을 이끌었다.
"영조말 정조때부터도
이러한 외척 세력이 깊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합니다.
그들을 우리는 '청명당' 세력이라 얘기를 하는데,
순조 초기의 벽파 세력에 의해
정조의 정치가 부정되는 과정에서는,
청명당의 후손이나 그 관련된 세력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물밑에 가라앉게 되는데..."
- 김명숙 교수(동덕여대 사학과)
청명당
- 영조 48년부터 외척의 정치 간섭을 반대하고,
사림의 정국 주도를 표방하면서 결성된 밀결사조직.
효명은 청명당 세력을 내세워
안동 김씨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이들이 효명세자의 대청을 계기로 해서
다시 결집을 하게 된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아무래도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외척 세력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다보니까,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세력들은
바로 외척 세력에 비판적인 인물들을 등용할 수밖에 없는거죠."
- 김명숙 교수(동덕여대 사학과)
효명이 등용한 김로, 홍기섭, 김노경(추사 김정희 부친), 이인보는
외척 세력들이 나중에 효명의 4대신으로 지목해
숙청할 정도로 최측근 핵심이었다.
효명은 또 신진 세력을 등용하기 위해
소수 특권 가문만 급제할 수 있는 과거 제도의 비리를 혁파했다.
"이번 과거에는
응시자와 함께 들어가 돕는 자를 매우 엄격하게 하려 하니,
응시자가 과거장 문을 들어갈 때에는
각별히 두루 살펴 그 동행자를 낱낱이 잡아내고,
데리고 들어간 응시자도
그 이름을 즉시 알아내어 서면 보고하여,
법을 엄격히 하라"
- 순조실록 윤 5월 20일
효명은 대리청정 3년 동안
총 50차례가 넘는 과거를 실시해서
전국 각지의 인재를 고루 등용시키려 했다.
"조정에서는 사람 쓰는 것이
겨우 서울 안에서만 뽑아쓰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어진 이를 등용함에 그 출신을 가리지 않아
사람들에게 벼슬길이 넓음을 보여주는 뜻이겠는가.
8도에서 각기 경학에 밝고 재주가 우수한 선비를 천거하여
조정에 등용할 수 있도록 하라."
- 국조보감 순조 29년 10월
입현무방(立賢無方).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지역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효명의 원칙이었다.
7. 박규수와의 운명적 만남!
궁 밖에 나가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길 좋아했던 효명은
어느날 미행길,
창덕동 앞 계동에 다가갔을 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환재(桓齋) 박규수.
그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근대 개화 사상의 선구자가 되는 인물이다.
두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독서와 토론을 즐겼는데,
이 과정에서 효명은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박규수에게 <연암집(燕巖集)> 편찬을 명할 정도로
효명은 실학과 이용후생이라는 박지원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박지원이라는 인물은 북학 사상의 대표적 인물이요,
바로 그의 손자 박규수도 초기 근대 개화 사상의 선구자입니다.
효명세자는 당시 북학 사상에 매우 관심이 있었고,
이런 점에서 볼 때 만약 정국을 오랫동안 주도했다면
북학 사상과 개화 사상을 연결시키는 데도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 신병주 교수
창덕궁 후원 폄우사(어리석음을 없애는 정자) 앞에
효명이 걸음걸이를 연습했다는 박석이 남아있다.
가슴을 펴고 턱을 당기고 걸어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고 하는데
심한 팔자 걸음이라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
효명은 이곳 폄우사에 자주 들러 책을 읽거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를 좋아한 효명은 낮에는 정무를 돌보고
밤이면 신료들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가 남긴 시와 문장이 400여 수에 달한다.
그런 그의 예술적 재능은
궁중 무용에도 고스란히 담겨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국립극장(해오름극장)
지난 5월 초연된 국립 무용단의 '코리아 환타지 밀레니엄 로드'.
국내 최정상의 안무가 국수호씨가
전통춤을 재해석해서 선보인 지난 공연에서는,
'춘앵전' '무산향' 등
효명이 창작한 정재가 화려한 음악과 안무로 부활했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무산향 공연>
"효명세자는 다른 때와 다르게,
세종조에 박연이 아악 정비를 해서
한국춤을 정재로 해서 연희도로 다 만들어 놓았는데,
효명세자는 그걸 완전히 정리를 하면서
그 춤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조로써는
그분이 맨마지막으로 춤의 전성기를 만들어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안무가 국수호
8. 3년 3개월의 짧은 대리청정, 그리고 급작스런 죽음!~
19살에 대리청정을 시작해
이제 막 22살이 된 효명세자.
젊은 나이로 감당하기엔 너무 막중한 책임탓이었을까.
효명의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1830년 윤 4월 23일.
밤 10시경 유성이 남방의 하늘가로 떨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날밤 효명은 한 달전부터 앓던 호흡기 질환 끝에
한사발이나 되는 피를 쏟았다.
"1830년 4월 22일.
왕세자가 각혈을 해서 가미육울탕을 올렸다."
효명은 어릴 때도 비슷한 증상으로 탕약을 복용한 적은 있었지만
피를 토한 건 처음이었다.
약원에서 매일 감기약과 위장약을 제조해올렸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자,
효명 자신이
탕의 약재가 무엇이며 양은 얼마나 넣었는지 확인하고
직접 처방을 내렸다.
"이 탕약은 내 몸에 맞지 않는 것 같으니
자음화담탕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5월 4일.
약원에서 인삼과죽음을 올렸는데
왕세자가 자음화담탕을 들이도록 했다.
자신의 약을 처방할 신료들을 궁궐 안팎에서 불러들였다.
그는 왜 의약 처방에까지 관여했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조선 후기에는 국왕과 집권당의 정치적 갈등이 고조화되면서
어느날 갑자기, 불과 몇 일이나, 불과 한 달 사이, 이런 식으로 건강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정치적 갈등이 해소되면서
노론의 집권이 계속 되기 때문에 '독살설'이 나오는 것인데,
대개 독살은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물증이 안 남는 경우가 많죠.
정조나 효명세자 같은 경우는
의약 처방을 할 때 자기 자신이 직접 개입을 함으로써 독살을 막고자 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정조도 그렇고, 효명세자도 그렇고, 의혹속에 세상을 떠나고 말죠."
- 이덕일 <조선왕 독살사건> 저자.
5월 5일.
효명은 정약용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다산이 효명을 진찰했을 때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효명은
스물 둘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희망을 걸었던 아들이 죽자
순조는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하루 아침에 재앙이 내려 만사가 기왓장처럼 깨어질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슬프고 슬프도다."
- 순조실록 30년 7월 12일
효명과 우정을 나누며
조선의 개혁과 변화를 꿈꾸었던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세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20년이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며
오직 독서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자신의 호도 '굳셀환(桓)'자에서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환(?)'자로 바꾸었다.
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던 효명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효명이 살다간 19세기초는
전 세계가 산업혁명의 격랑에 휩쓸리기 시작한 때였다.
이웃나라 일본은
이런 세계사적인 흐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 조선은
무력화된 왕권과 부패한 관료 사회를 바로잡고
새로운 사회를 꿈꿨던 왕세자 효명이 있었다.
3여 년의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국정을 장악했던 효명세자.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효명이 급서하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 한국사 전을 보고...
(좋은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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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사무국에도 있으니 언제라도 이용 부탁드립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읽고 또 읽어서 피가되고 살이되도록 또 읽어봐야겠습니다.
만약에 만약이 만약이라면 ? 오늘도 감당할 수 없는 사유를 성찰 합니다.
안개꽃 선생님, 마음에 새길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 자료입니다. 흥미있게 감상하였습니다.
열심히 읽어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