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빈]: 履有齋(全義李氏)
「履有齋」는 全義李氏 대구 落南派祖인 禮山公 李佖(字는 洪中)의 후손들이 禮山公을 기리는 뜻에서 세운 齋舍이다. 전의이씨는 달성군 하빈면 일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강북 여러 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연혁·특징
「이유재」는 1917년에 全義李氏 대구 落南派祖인 禮山公 李佖(字는 洪中)의 후손들이 예산공을 기리는 뜻에서 세운 齋舍이다. 이후 건물이 퇴락하여 철거하고, 1997년에 새롭게 중건을 했다. 최근에 건립된 건물인 까닭도 있겠지만 재사 건물임에도 「附椽·婦椽」을 달고 있다. 이는 예산공의 손자가 되는 洛浦 李宗文의 「霞鶩亭」 부연의 유래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인물
▪始祖: 高麗統合三韓開國翊贊功臣 三重大匡太師 全山侯 諡 聖節 李棹. 고려 태조의 南征時 태조를 호종하여 범람한 금강의 渡河의 공을 세운 금강변 호족 李齒가 그 공으로 태조로부터 李槕이라 賜名을 받음. 본래 公州에 世居, 태사공 이후 全義 李城으로 移居하니 후손들이 全義로 貫鄕을 삼음. 시조의 묘소는 忠南 燕岐郡 全義面 柳川里에 있다.
▪入鄕祖: 禮山公 李佖(字는 洪中). 예산 현감을 지닌 예산공이 대구 달성군 하빈으로 옮겨오니 곧 全義李氏 落南 入鄕祖이다. 공의 휘는 佖이고, 자가 홍중(洪仲)으로 시조 태사공 휘 도(棹)의 15세손이다. 공은 중종 신사(1511)년에 서울 궁동에서 태어나 예산현감을 지냈으며 서울에서 처음 영남으로 落南한 입향조이다. 공의 낙남 연대와 사유는 세월이 너무 오래되고 기록 또한 남은 것이 없어 상세히 살필 수 없으나 아들 참판공과 손자 낙포공의 사적으로 보아 임란이 일어나기 직전 명종 때로 추정된다.
[이천리]: 伊江書院(달성서씨)
이천리는 금호강이 금호, 박곡, 달천을 지나 만나게 되는 강 우측 마천산(274m) 자락의 자연부락이다. 금호강은 달천리 일대까지는 西流를 한다. 이천리 일대에서 좌측으로 세천리를 끼고, 크게 방향을 틀고 남류하여 낙동강과 합류한다. 이천리에서 금호강 너머로는 최근 조성된 「성서5차산업단지」가 조망된다. 이천리 마을 입구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이강서원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다. 이강서원은 달성서씨 12세 大宗孫이자, 대구 성리학의 제2세대 대표로 손꼽히는 樂齋 徐思遠(1550-1615) 선생의 유적지이다.
연혁·특징
이강서원은 낙재선생 사후 3년 뒤인 1639년(인조17), 낙재 선생의 생전 강학지소였던 「伊川精舍·仙査齋」 터에 창건되었다. 훼철 후 「玩樂堂」과 「二樂樓」만 복원되었고 최근 2009년도에 보수를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은 文昌侯 崔致遠이 遊講하던 伊川洞 仙査庵 舊址로 알려져 있다. 고운선생이 벼루를 씻던 연못, 爛柯臺, 武陵橋이 있었다고 한다. 낙재 선생은 仙査齋 시절 완락당 벽에 주자의 ‘夙興夜寐’를 모사하여 걸어 두었다고 한다.
주요 건물로는 현재 복원이 된 「玩樂堂」과 「二樂樓」가 있다.
인물
▪樂齋 徐思遠(1550-1615, 字는 行甫 號는 晩悟堂·彌樂齋·樂齋). 達城10賢. 달성서씨 12世 大宗孫(縣監公派). 生父 徐洽. 7세에 伯父 徐泂의 后로 出系. 향시 문과장원. 이천정사와 선사서재를 창건 강학. 1601년(선조34) 여헌 등 23현과 船遊한 ‘琴湖仙査同遊錄’과 ‘船遊圖’가 現存. 泗水의 정한강, 玉山의 장여헌과는 從遊. 손모당과는 친교. 1586년 조정의 讀書鍊丹賦를 지으라는 시험에 장원, 임난 때 대구 최초의 의병대장, 임난 때인 1595(선조28) 淸安縣監에 부임한 것을 끝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 대구 伊江書院, 龜巖書院, 청주 龜溪書院에 봉향. 묘소는 달서구 巴山洞(현 호산동)에 있으며, 그 山下에 낙재 선생 묘소 齋室인 樂仙齋가 있다.
▪達成徐氏 系譜圖
徐晉(1)→奇俊(2)→穎(3)→均衡(4)→沉(5)→
→文翰(6)→濟(縣監公派)(7) ⇢⇢洽(生父), 泂(伯父로 出系)(11)→思遠(12)
→文幹(6)→渡(學諭公派)(7)
→文德(6)→涉(判書公派)(7)
[세천리]: 琴回影閣(金寧金氏)
연혁·특징
1900년(高宗37·光武4)에 金寧金氏 14世孫 金鍾聲이 世川과 新塘의 諸族과 합의하여 건립한 影閣이다. 琴回影閣 境內에 있는 慕毅齋는 白村 金文起 선생의 寓慕之所로 1893(고종30)창건, 1986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각에는 忠毅公 白村 金文起 선생의 影幀이 奉安되어 있다.
인물
▪鼻祖는 신라 敬順王의 8세손인 大輔公 金閼智(신라 김씨왕조의 시조).
▪得貫祖는 文烈公 金詩興. 고려 仁宗 때 妙淸의 亂 평정으로 金寧君에 封君.
▪白村 金文起: 조선왕조실록에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인 선생은 동네이름을 효자동이라고 할 만큼 어려부터 효심이 지극한 데다 문무를 모두 갖춘 당대의 명궁(名弓)이고 전략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촌은 1399년 조선조 2대 임금인 정종 원년 12월 충북 옥천 금강변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금령(金寧)으로 이름은 효기였으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옛부터 백지리를 효자동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1426년(세종8) 생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의, 공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三軍都鎭撫에 있었던 1456년(세조2)에 박팽년, 이개,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육신과 함께 6월8일 순절하였다.
[서재리]: 龍湖書院(星州都氏 大宗派)
대구시민이라면 성서지역의 「서재」라는 지명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동명이 한 인물의 號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達城10賢」의 한분이기도 한 星州都門의 18世 都汝愈 公의 號가 바로 「鋤齋」이다. 이렇듯 서재공의 福祿을 기려 현재까지 이 마을은 「서재공마을」이라 불린다.
연혁·특징
용호서원은 1704년(숙종30)에 묘우인 「世德祠」로 최초 건립되었다. 1708년(숙종34) 「용호서원」으로 승격된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 이후 「龍湖書堂」으로 사용되다가 1984년 重修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직까지 묘우는 복설하지 못한 상태이다. 용호서원 시절 묘우는 「龍湖祠」였는데 養直堂 都聖兪, 鋤齋 都汝愈, 止巖 都愼修 3위를 배향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入德門(正門)·講堂[安仁齋(東室)·正義齋(西室)]이 있다. 용호서원 앞에는 「致敬齋」라는 별도의 건물이 하나 있다. 이는 묘소를 失傳한 起世始祖 都順과 3世 都有道(大邱派祖)·都有德(星州派祖) 先代 3位를 위한 齋室이다. 大宗派 世居地 서재마을 東山에 자리 잡은 이 「致敬堂」은 星州都門의 정신적 뿌리와 같은 상징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인물
▪得貫祖: 都陳. 都氏는 單一本으로 신라시대 壽昌郡의 4縣인 大丘縣,八居縣,河濱縣,花園縣 중 八居縣의 豪族이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지역의 호족장인 都陳에게 漆谷府院君에 封하며, 八居縣을 食邑으로 하사함에 貫鄕으로 삼았다.
▪起世始祖: 都順. 고려이전의 世系는 불명확. 2세 都忠朴(1205-1268)의 墓誌銘을 근거로 하여 都順을 1세조로 함.
▪大宗派 鋤齋 入鄕祖: 都欽祖(1515-1563, 자는 敬先, 虞侯公, 鋤齋 入鄕祖). 八莒지역에서 萬戶에 있던 중 하빈의 ‘島村’으로 擇里하게 된다. 島村은 姓氏와 同音이라 都村으로 불리다가 鋤齋公의 福祿으로 「鋤齋公마을」로 칭하며 480여년 세거하고 있다.
▪星州都氏 由來: 고려조에 八居縣이 八莒縣으로 변경. 팔거현이 京山府 屬縣으로 편입. 조선조에 廢縣되어 漆谷都護府로 변경. 世居地의 이동 등 여러가지 이유로 1752년(영조28) 壬申譜를 편찬할 때 당시 八莒縣이 소속된 星州牧의 이름을 따서 星州를 貫鄕으로 삼음.
▪星州都氏 大宗派 系譜圖
1順(1世)→忠朴(2世)→有道(3世·大邱派)⇢⇢欽祖(16世)→
→有德(3世·星州派)
元國(17世)→(養直堂)聖愈·(華齋)正愈(18世)<鋤齋>
元結(17世)→(鋤齋)汝愈·(司正公)命愈(18世)<鋤齋>
元亮(17世)→(翠厓)應愈·(逸庵)彦愈·(洛陰)慶愈(18世)<西村·龍山>
元禮(17世)→(敬巖)以愈·(智齋)乃愈(18世)<義興>
聖愈(18世)→(撝軒)愼與(19世)
汝愈(18世)→(止巖)愼修·(竹軒)愼徵(19世)
應愈(18世)→(西湖)愼徽(19世)
▪都夏(1418-1479, 字는 處中 號는 永樂), 세종 때 사마시, 세조 때 文科別試 壯元. 같은 대구출신의 四佳亭 徐居正의 총애를 입었다. 사가정 이후 대구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出仕한 첫 인물. 과거장에 늦게 도착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세조가 그 소리를 듣고 과장출입을 허락했다. 그 시험에서 장원을 하자 도하는 “집을 떠난 지 7일 만에 장원급제하고 특별히 정언에 제수되었으니 快哉快哉로다”하여 「快哉正言」이란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도성유(都聖兪, 1571~164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養直). 할아버지는 경상좌우후 흠조(欽祖)이며, 아버지는 병절교위를 지낸 원국(元國)이다.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문장과 행실이 당대에 출중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조달하였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난하자, 그들의 무죄를 변호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세상을 등지고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오경체용합일도 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 體用各分圖>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성리정학집 性理正學集≫이 있으며 대구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도여유(都汝兪, 1574~1640):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중(諧仲)이며 호는 서재(鋤齋)이다. 우윤(右尹) 도원결(都元結)의 아들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서낙재(徐樂齋)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배웠는데, 정구가 그에 대해 말하기를 후생(後生) 중에 뜻을 가진 가지는 도여유 뿐이라고 했다. 이괄의 난 때에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세상과 단절한 채 산림에 묻혀 오로지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아들 도신수(都愼修)와 함께 대구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도신수(都愼修, 1598~16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 경상좌상좌우후 흠조(欽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한성우윤 원결(元結)이고,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郞) 여유(汝兪)이며, 어머니는 여흥이씨로 증판결사 우겸(友謙)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학·학정·박사 등을 역임하고, 참예도찰방(參禮道察訪)에 옮겼다가 임기가 만료되었다. 전적·형조좌랑·공청도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호조정랑·함흥판관·울산부사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역학(易學)을 서사원(徐思遠)으로부터 배웠으며 성장하여서는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수령으로 재임할 때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경인년(1650)에 지방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영해부사로 나갔다. 12월 11일에 병이 들어 관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후에 용호서원에 배향되었다.
[용산동]: 屛巖書院(星州都氏 西村派)
금일 답사의 마지막 일정이다. 성서 용산동에는 서재의 「용호서원」과 더불어 성주도문의 이름난 서원이 하나 있다. 바로 「병암서원」이다. 근년에 새롭게 중건한 서원인데 그 규모는 물론이거니 사용된 목재 등에서 비범함이 느껴지는 참 아름다운 서원이다.
연혁·특징
병암서원은 제향중심의 묘우에서 출발한 서원이 아니라 강학활동에서 출발한 서원이다. 그 내력을 한번 살펴보자. 1625년(인조3) 洛陰 都慶愈가 「洛陰精舍」를 지어 처음으로 강학을 시작하였다. 1675년(숙종1) 「屛巖書堂」을 창건하여 강학 및 宗會堂으로 사용. 1785년(정조9) 翠厓·洛陰 두 형제를 봉향한 「屛巖書院」으로 승격. 1868년(고종5) 훼철. 1924년 講堂 復元. 1982년 廟宇 復設. 도시계발로 인해 옛 서원을 헐고 2003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4년 중건한 서당은 存置.
주요 건물로는 飛烏亭, 紹源門(外三門), 養正堂(講堂), 求仁齋(東齋), 講義齋(西齋), 雙徽門(內三門), 崇賢祠(廟宇), 屛巖會館 등이 있다.
인물
▪得貫祖: 都陳. 都氏는 單一本으로 신라시대 壽昌郡의 4縣인 大丘縣,八居縣,河濱縣,花園縣 중 八居縣의 豪族이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지역의 호족장인 都陳에게 漆谷府院君에 封하며, 八居縣을 食邑으로 하사함에 貫鄕으로 삼았다.
▪起世始祖: 都順. 고려이전의 世系는 불명확. 2세 都忠朴(1205-1268)의 墓誌銘을 근거로 하여 都順을 1세조로 함.
▪大宗派 鋤齋 入鄕祖: 都欽祖(1515-1563, 자는 敬先, 虞侯公, 鋤齋 入鄕祖). 八莒지역에서 萬戶에 있던 중 하빈의 ‘島村’으로 擇里하게 된다. 島村은 姓氏와 同音이라 都村으로 불리다가 鋤齋公의 福祿으로 「鋤齋公마을」로 칭하며 480여년세거하고 있다.
▪星州都氏 由來: 고려조에 八居縣이 八莒縣으로 변경. 팔거현이 京山府 屬縣으로 편입. 조선조에 廢縣되어 漆谷都護府로 변경. 世居地의 이동 등 여러가지 이유로 1752년(영조28) 壬申譜를 편찬할 때 당시 八莒縣이 소속된 星州牧의 이름을 따서 星州를 貫鄕으로 삼음.
▪星州都氏 大宗派 系譜圖
1順(1世)→忠朴(2世)→有道(3世·大邱派)⇢⇢欽祖(16世)→
→有德(3世·星州派)
元國(17世)→(養直堂)聖愈·(華齋)正愈(18世)<鋤齋>
元結(17世)→(鋤齋)汝愈·(司正公)命愈(18世)<鋤齋>
元亮(17世)→(翠厓)應愈·(逸庵)彦愈·(洛陰)慶愈(18世)<西村·龍山>
元禮(17世)→(敬巖)以愈·(智齋)乃愈(18世)<義興>
聖愈(18世)→(撝軒)愼與(19世) <鋤齋>
汝愈(18世)→(止巖)愼修·(竹軒)愼徵(19世)<鋤齋>
應愈(18世)→(西湖)愼徽(19世)<西村·龍山>
▪都夏(1418-1479, 字는 處中 號는 永樂), 세종 때 사마시, 세조 때 文科別試 壯元. 같은 대구출신의 四佳亭 徐居正의 총애를 입었다. 사가정 이후 대구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出仕한 첫 인물. 과거장에 늦게 도착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세조가 그 소리를 듣고 과장출입을 허락했다. 그 시험에서 장원을 하자 도하는 “집을 떠난 지 7일 만에 장원급제하고 특별히 정언에 제수되었으니 快哉快哉로다”하여 「快哉正言」이란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도응유(都應兪, 1574-1639):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성주. 자는 諧甫, 호는 翠厓. 아버지는 元亮이다. 정구·서사원의 문인이다. 선조대에 진사를 했다. 최영경을 구호하고 오현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3) 정인홍이 이언적·이황을 배척하자 그 잘못을 반박하였고, 박이립 등이 정구를 모함하자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1627년 정묘호란에는 召募將이 되어 정경세을 도왔다. 주리파 성리학을 강조하여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 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하였다. 五賢禮設을 편찬하였다. 대구 병암서원에 봉향되었다.
▪도경유(都慶愈, 1596-1637): 조선 중기이 문신, 본관은 성주, 자는 來甫, 호는 洛陰. 정구·서사원·손처눌 세 분 선생의 문인이다.
1624(인조2) 사마시에 합격. 정묘호란 때 호남으로 세자를 호종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금부도사·평양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 沈演의 從事官이 되어 쌍령전투에서 쌓아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그 죄로 유배를 갔다가 잠시 뒤에 형이 잘못 집했되었음이 드러나 풀려나서 귀성도중에 怨人의 危害로 卒하였다. 뒤에 이 화약폭발사고가 그의 裨將 朴忠謙(전시의 군율에 의거 참수된 자)의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대구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음집 6권 2책이 있다.
성독(聲讀) 자료
中庸章句第十九章 (성독회 단체)
哀公問政.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 則其政擧; 其人亡, 則其政息.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 蒲盧也.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脩身以道, 脩道以仁.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故君子不可以不脩身; 思脩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 五者天下之達道也. 知̖ 仁̖ 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 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知斯三者, 則知所以脩身; 知所以脩身,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曰: 脩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吳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侯也. 脩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不怨, 敬大臣則不眩, 體吳臣則士之報禮重, 子庶民則百姓勸, 來百工則財用足, 柔遠人則四方歸之, 懷諸侯則天下畏之.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脩身也;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試, 旣稟稱事, 所以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凡爲天下國家有九經, 所以行之者一也.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獲乎上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 不信乎朋友矣;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 學之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
師說 韓愈 (대학생부 단체)
古之學者, 必有師,하니 師者는所以傳道授業解惑也.라 人非生而知之者,면 孰能無惑.이리오 惑而不從師,면 其爲惑也, 終不解矣.라 生乎吾前,이면 其聞道也, 固先乎吾,리니 吾從而師之.하고 生乎吾後라도 其聞道也, 亦先乎吾,어늘 吾從而師之,리니 吾는師道也.라 夫庸知其年之先後生於吾乎.리오 是故,로 無貴無賤,하며 無長無小,히 道之所存,은 師之所存也.라
嗟乎.라 師道之不傳也, 久矣.라 欲人之無惑也, 難矣.로다 古之聖人,이 其出人也, 遠矣,로되 猶且從師而問焉,이어시늘 今之衆人,은 其下聖人也, 亦遠矣, 而恥學於師.라 是故,로 聖益聖,하며 愚益愚,하니 聖人之所以爲聖,과 愚人之所以爲愚, 其皆出於此乎.인저 愛其子,하얀 擇師而敎之,하고 於其身也, 則恥師焉,하니 惑矣.로다 彼童子之師,는 授之書而習其句讀者也,오 非吾所謂傳其道解其惑者也.라 句讀之不知,와 惑之不解,에 或師焉,하며 或不焉,하야 小學而大遺,하니 吾未見其明也.케라 巫醫樂師百工之人,은 不恥相師,어늘 士大夫之族,은 曰師曰弟子云者,를 則群聚而笑之,하고 問之, 則曰 彼與彼, 年相若也,며 道相似也.라 位卑則足差,하고 官盛則近諛,라하니
嗚呼.라 師道之不復,을 可知矣.로다 巫醫百工之人,은 君子不齒,어늘 今其智, 乃反不能及,하니 可怪也歟.인저 聖人은無常師,하사 孔子師郯子萇弘師襄老聃,하시니 郯子之徒, 其賢不及孔子.라 孔子曰 '三人行,에 則必有我師',라하시니 是故,로 弟子不必不如師.요 師不必賢於弟子.라 聞道有先後,하고 術業有專攻,이니 如是而已.라 李氏子蟠,이 年十七,에 好古文,하고 六藝經傳,을 皆通習之,하고 不拘於時,하야 請學於余,어늘 余嘉其能行古道,하야 作師說以貽之.하노라
선현유적 답사 현황
첫댓글 중간에 사진이 안 보입니다
저도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몇 번이나 시도하여 다시 작업을 했습니다.. 이제는 괜찮은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