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略稱). 저자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德行)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권 판을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이를 상 · 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학자(南人學者)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이다. 즉 이익(李瀷, 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 ≪칠극≫ 중에는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여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는 만큼,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윤리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그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칠극≫이 공자의 이른바 사물(四勿)의 각주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논평하였다.
한편 ≪칠극≫은 1777년부터 1779년간의 소위 천진암 · 주어사(天眞菴 · 走魚寺)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되었음이 확실하며,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감화시켰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한글필사본이 절두산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graphiques sur ies Je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Chanhai 1932 / 朴鍾鴻, 西歐思想의 導入批判과 攝取,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第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M. Courant, Bibliographie Coreenne, Paris 1896.
26-칠극(七克) 이야기(1)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
칠극에서의 그리스도교와 유학의 만남
이제 또 하나의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얼마 전 일주일간 개인피정을 가졌다.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가, 오래 전에 대충 읽어보고 '나중에 깊이 읽어봐야지' 하고는 잊어버린 「칠극」(七克)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 책을 피정주제로 삼아 매일 한 주제씩 읽고 그것을 내 삶에 비춰 묵상하며 기도했다. 시간도 부족했고 집중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은혜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로 이 '칠극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칠극」은 마태오 리치의 뒤를 이어 중국에 건너 온 예수회 선교사 빤또하가 자신이 배웠던 스콜라 신학의 윤리론, 특히 그 중에서 칠죄종(七罪宗)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7가지 덕을 역시 그 당시를 풍미했던 성리학의 수양체계와 조화시켜가면서 설명한 책이다. 그래서 부산교회사연구소에서 출판한 번역서에는 '그리스도교와 신유학의 초기 접촉에서 형성된 수양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실상 스콜라 신학과 성리학은 여러 관점에서 흡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모든 학문들을 아우르는 방대한 통합체계, 그것을 집대성한 토마스 데 아퀴노와 주자(朱子),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형이상학적 개념과 실천적 수양론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이 늘 걸림돌처럼 거북해 했던 문제는 역시 우주의 근원 즉 본체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많은 저술과 대화를 통해 정립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빤또하의 저술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중국의 많은 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서문을 써 주었던 진량채(陳亮采)는 「칠극」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언제나 하느님(上帝)을 따르고 믿어서 하늘의 보답을 누릴 것을 바라고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날 것을 바라고 있으니, 이것은 유자(儒者)를 보좌해 주는 것이다"(其欲念念息息歸依上帝 以冀享天報 而永免沈淪 則儒門羽翼也. 「七克篇序」).
빤또하 자신도 중국으로 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느님(상제)이 인간과 사물의 참된 주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는 참된 지름길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가련하게 여겼다"(원문생략 「七克自序」).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덕을 쌓지 못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면서 역시 삶의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욕망을 이기고 덕을 닦는 일을 종일토록 논의하고, 평생토록 힘쓰는데도 거만함, 질투, 분노, 방탕과 같은 여러 욕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겸손, 어짊, 곧음, 참음과 같은 여러 덕은 끝내 쌓여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세 가지 이치에 어둡기 때문인데,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첫째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 셋째이다"(然而克慾修德終日論之畢世務之 而傲?忿淫諸欲 卒不見消 謙仁貞忍諸德 卒不見積 其故云何 有三弊焉. 一曰不念本原 二曰 不淸志向 三曰 不循節次. 「七克自序」).
하여튼 이 책은 인간 죄악의 7가지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교만, 질투, 인색함, 분노, 먹고 마심, 음란함, 게으름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7가지 덕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수양법이기도 한 이 주제들이 유학사상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또 유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7가지 주제를 따라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독자들도 나와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피정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면 어떨지…. 권해드리고 싶다.
27-칠극(七克)이야기(2)
善이 커지면 惡은 작아지고
내가 칠극(七克)을 읽으면서 지향했던 것 중 하나는 이 글을 먼저 읽었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유학을 공부했기에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선시대 말엽, 사회적 혼란과 함께 그동안 성리학의 이념으로 이상적 사회를 이루려고 했던 노력들이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을 즈음, 그들은 서학(西學)의 문물과 사상을 만난 것이다.
유학도 본시 인간의 본질을 하늘이 부여한 도덕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유학자들이 「칠극」 안에서 수많은 서양의 선비와 현자들의 수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놀랍고 반갑게 느꼈을까?
더 나아가 자신들이 마음속에 품어왔던 삶의 근본인 하늘과 하늘의 이치〔天理〕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와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인격체로서 설명될 때, 혼란스러우면서도 또 한편 얼마나 커다란 희열을 느꼈을까? 내가 그들 안에서 느끼고 만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참된 진리에 대한 욕구, 근원적 존재에 대한 열망 그리고 어려운 결단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였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이었다.
칠극(七克)에서 극(克)의 뜻은 무엇일까? 전주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번역본이 '일곱가지 승리의 길'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을 보면, '이기다' 또는 '극복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극복해가는 방식은 독특하다. 즉 일곱 가지 죄의 뿌리와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립되는 덕(德)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스콜라 철학이 악(惡)을 그 자체로 규정하지 않고, 선(善)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또한 선의 결핍(缺乏) 혹은 완전성의 결여(缺如)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마르틴 부버가 지은 「인간의 길」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준다. 즉 서로 사돈관계인 두 랍비가 대화를 나누는데, 한 랍비가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속죄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니 다른 랍비가 "그것에서 벗어나시지요"라고 답하는 내용이다. 그것에 이어 또 다른 랍비의 강론을 소개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에 대한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저열한 그것을 마음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자는 결코 돌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어쩌자는 말입니까. 똥을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본들 똥은 똥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안지었는가 해봐야 하늘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꿍꿍거릴 겨를이 있으면 차라리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진주알을 꿰고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십시오."
이것이 「칠극」의 특징이기도 하다. 죄의 7가지 뿌리를 분석하고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적할 수 있는 더욱 완전한 덕을 설정하고 매진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찬찬히 이 책을 읽어나가자.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정통 신앙의 보화들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28- 칠극(七克) 이야기(3)
고개 숙일수록 주님과는 가까워져
칠극(七克)은 교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것은 판토하가 성경을 인용해 말하고 있듯이, 교만이 모든 죄의 시작(집회 10,13)이며, 모든 악덕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죄악이기도 하다.
그래서 판토하는 교만의 실마리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 첫째는 선(善)이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하느님(天主)께 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셋째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고, 넷째는 남을 경멸하며 자신을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원문생략. 「七克」, 1권).
유학에서도 교만은 결정적인 악덕(惡德)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공자는 「論語」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주공과 같은 아름다운 재능을 갖고 있어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已. '태백편' 11).
공자는 늘 주(周)나라의 문물제도를 예찬하고, 그것을 이룩한 주공(周公)을 흠모해 이상적 인간으로 생각하며, 꿈에서라도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공이 훌륭한 능력을 지녔다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인간으로서 더 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놀랍다.
「大學」에서도 "군자에게는 큰 道가 있으니, 반드시 忠과 信으로써 얻고, 교만함과 방자함으로써 잃는다"(君子有大道 必忠信鎰之 驕泰以失之. 10장)고 경고한다.
판토하가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경구절은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집회 3,18)는 말씀이다. 이것은 그가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마음 쓰지 말도록 권고하기도 하지만, 이미 높은 지위를 얻었다면 더 겸손하라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많은 예화들은 대부분 서양의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성덕(聖德)에 출중한 서양의 현인들이 오히려 얼마나 겸손에 힘썼는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학에서도 '크고 넉넉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을 君子라고 말한다(子曰 君子 泰而不驕. 「論語」, 자로편). 이러한 사상은 주역(周易)의 흐름 안에서도 나타난다. 즉 정자(程子)는 주역의 겸괘(謙卦)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겸(謙)은 「서괘전」(序卦傳)에 '크게 소유한 자는 가득차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겸괘로써 받았다'고 했다. 그 소유한 것이 이미 크면 가득차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없고, 반드시 겸손하고 덜어내야 하기에, '대유괘'(大有卦) 뒤에 '겸괘'로 받은 것이다"(謙 序卦 有大者 不可以盈 故受之以謙. 其有旣大 不可至於盈滿 必在謙損 故大有之後 受之以謙也. 「周易傳」, 謙卦).
다시 말하면 주역의 64괘의 순서는 아무렇게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성덕(成德)의 과정을 일러주는 것인데, '겸괘'가 '대유괘' 다음에 온 이유는 이미 충분히 가진 자는 반드시 겸손하고 덜어내야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순리(順理)이며, 이상적 경지를 향해 가는 올바른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교만의 시작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시편10,4;예레 13,5)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그리고 더욱 높아지려는 욕심과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자기의 것으로 착각함으로 교만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
29-칠극(七克) 이야기(4)
자신과 하느님 아는 것, 선의 시작과 끝
「칠극」을 읽다보면 늘 만나게 되는 독특한 느낌들이 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이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의 교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소신학생 시절 영적 지도신부님의 훈화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게도 되며, 심지어는 한문을 가르쳐주셨던 여러 어르신들의 이야기들도 함께 어우러져 또 다른 세계를 여행하며 그것에 젖어 들어가는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학자인 김승혜 수녀는 「칠극」의 특성으로 '지혜문학적 성격'을 지적하기도 한다. 판토하가 인용하는 많은 성경구절, 고대 문학의 가르침, 교부들의 말씀들은 대부분 지혜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동양 종교들의 지혜들도 함께 곁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여튼 「칠극」은 '교만과 겸손'이라는 주제로 시작하면서 그것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 이 주제가 수덕(修德)의 출발점이자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교만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고 나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즉 세상의 행복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戒以形福傲), 마음의 덕을 자랑하는 것(戒以心德伐),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여기기를 좋아하는 것(戒好異), 명예를 좋아하는 것(戒好名), 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낚으려는 것(戒詐善釣名), 예찬을 듣는 것(戒聽譽), 귀해지기를 좋아하는 것(戒好貴)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 뿐 아니라 동양의 모든 종교들이 그 수덕과정에서 강조하는 것들도 바로 이런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을 잊고 세속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문제요, 이러한 경향들은 모두 교만이 빚어내는 결과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교만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키는 것'(識己保謙)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핵심적인 설명으로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을 전해준다.
"너희가 만약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을 지니고,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면 겸손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善)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모든 죄(罪)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지 못하므로 하느님에게 바라거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것은 모든 악(惡)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爾持二知. 逃二不知. 則能成智. 知己則生謙爲衆善之始. 知天主故愛天主爲衆善之成. 此二知也. 不知己故生傲爲衆罪之始. 不知天主故無所畏望於天主爲衆惡之成. 此二不知也. 「七克」, '識己保謙').
유학이라는 학문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자신을 살피고, 가꾸고, 완성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다. 그래서 유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부른다.(「論語」 헌문편 25절 참조) 그리고 그 학문은 하늘의 뜻을 아는 지명(知命)에서 완성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論語」라는 책도 '學而時習之'(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不知命無以爲君子'(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로 끝나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겸손은 모든 수덕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덕행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다면 '원리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30-칠극(七克)이야기(5)
하느님 사랑에 젖어들면 질투는 사라져
둘째 주제: 질투를 가라앉히다
처음 칠죄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질투가 과연 여기에 포함돼야 할 만큼 커다란 악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조금씩은 지니고 살지만 그렇게 해롭게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토하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다른 덕에 비해 깊은 악의 뿌리이며 어리석은 악덕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의 대가로 주어지는 쾌락도 없으면서, 실제로 남에게 받는 피해도 없으면서 혼자 일으키고 혼자 고통을 받는 모습이란….
무엇 때문일까? 질투의 원인은 많겠지만, 아마 가장 일반적인 것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論語」에서는 처음부터 '君子'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人不知而不?)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즉 세상의 가치나 남들의 평가에서 자유로운 경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랜 수련을 통해 올바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도 남의 잘잘못을 보고 그것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과 연결시키며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일러주곤 했다.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자신을 어질지 못한 사람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論語」, '里仁')
뿐만 아니다. 또 말하기를 "착한 것을 보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듯이 여기고,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끓는 물이 뜨거워서 손을 빼는 듯이"(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論語」, '季氏') 하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글머리에서 "질투는 마치 파도처럼 일어나는데, 이는 용서로서 가라앉혀야 한다"(妬如濤起 以恕平之)고 말한다. 이 서(恕)는 유교 대인윤리의 핵심적 개념이다.
고대의 많은 종교가 그러하듯, 유학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래서 주자는 恕를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물에 미치는 것'(推己及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공자의 인(仁)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언젠가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바로 恕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論語」,'衛靈公')
공자는 '顔淵篇'에서 仁을 설명하면서도 같은 말을 한다. 또한 그것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확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도록 해 주고, 내가 이루고자하면 남도 이루게 해 주어야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論語」, '雍也') 마치 레위기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판토하가 강조하는 것은 역시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만이 질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정직하고, 먼저 우리에게 주시며, 바라는 것이 없고, 맑으며, 헛된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다. 이것이 빤또하가 늘 말하는 근본을 아는 것(知本)이고, 모든 덕행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질투하는가? 왜 질투하는가?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 잠겨보자. 그것이 답이다.
31-칠극(七克) 이야기(6)
가난을 즐기고 부를 베풀라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셋째주제: 탐욕을 풀다
칠극(七克)을 읽다보면 같은 주제를 반복하다보니 사실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한 주제를 이렇게 다양하고 꼼꼼하게 설명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탐욕의 의미, 그 해로움, 다양한 실상, 풍부한 예화, 끊임없이 쏟아내는 성인과 현자들의 명언들 그
리고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
무엇보다도 해탐(解貪)이라는 단어가 깊이 와 닿는다.
나는 앞의 글들에서 유학의 수양론이 보편적이고 공정한 하늘의 뜻(天理之公)을 어떻게 잘 보존하는가
그리고 사사로운 인간의 욕심(人慾之私)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 두 방면으로 전개됨을 설명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유학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르듯이 막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빤또하는 그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즉 세상과 재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욕심이 되지만, 그것을 놓거나 밖을 향해
풀어헤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문제와 답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종교가 탐욕을 탐탁하게 여기겠는가?
불교에서도 수도(修道)에 가장 큰 걸림돌(三毒)은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痴)이라고 말한다.
도가(道家)에서도 수도(修道)의 핵심으로 덜어냄(損)이나 비움(虛)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 점은 유학도 마찬가지다.
맹자도 일찍이 "수양하는데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 莫善於寡欲, 「孟子」 '盡心 下')고 했는데,
송대의 주렴계 선생은 더 나아가 "聖人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하나이고, 그것은 바로 무욕이다"
(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一爲要 一者 無慾也. 「通書」)고 말한다.
칠극을 원문으로 읽거나, 원문과 대조하며 읽노라면 이 글들이 과연 서학서(西學書)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경이나 교부들의 말씀을 번역하면서 선택한 용어들이 거의 유학의 용어들이요, 어떤 때는 그 내용까지 흡사하기 때문이다.
빤또하가 탐욕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글들 중에, 유교의 가르침과 핵심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재물을 취할 때 그것이 의(義)에 합당한지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어떤 부자에게 가르침을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재물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만나면, '이것이 의로운 재물인가 아니면 의롭지 않은 재물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않은 재물은 그것을 하나라도 손에 넣으면 하느님(상제)에게 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聖厄勒臥略 勸一富者曰 爾値取財之勢 宜思非義之財 一取卽得罪於上帝也. 「七克」, '解貪')
또 하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이다. 빤또하는 말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아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난을 즐기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가난과 궁핍을 즐기는 것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날개이기 때문이다."(平心受貧 忍也. 樂貧 大智也. 貧廬之樂 昇天之翼. 「七克」, '解貪')
그러나 빤또하는 탐욕의 문제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느님(天主)이 너희를 가난하게 하였다면 이는 너희가 가난을 참고 견디는 공으로써 보답을 받기를 바란 것이고,
너희를 부유하게 해 주었다면 이는 너희가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공으로써 보답을 받기를 바란 것이다."
(원문생략. 「七克」, '解貪')
< 평화신문 : 2008. 09. 28발행 [987호] >
칠극(七克)이야기 (7)
주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시니
넷째 주제 : 분노를 없애다
꽤 많은 분들이 함께 칠극(七克)을 읽고 있노라고 전해왔다. 감사한 일이다.
이 가을에 그리스도교의 정통 수양서를 읽고, 그것에 빠져드는 것은 비록 바쁘고 힘들더라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많은 은총 받으시기를 기도한다.
탐욕과 함께 분노도 모든 종교의 수행에서 걸림돌이 되는 큰 악덕이다.
언젠가 산상설교를 묵상하면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렇게 큰 죄악인가?
유학에서도 분노는 수양에 있어 중요한 주제가 된다.
군자가 행동을 함에 있어 올바른 지향을 일러주는 이른바 '구사'(九思)에서도 '분사난'(忿思難)이라는 것이 있다.
화가 나면, 절제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한 후에 어떤 어려움이 올지 미리 생각하라는 것이다.(「論語」, 季氏篇 참조)
또한 「大學」에서는 수신(修身)의 요점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正心) 있는데,
몸이나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없다고 깨우쳐준다.
(所謂修身 在正其心者 身心有所忿 則不得其正… 「大學章句」, 傳7章)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면 수양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유학에서는 이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수양의 최고의 경지로 칭송되기도 한다.
언젠가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제자 가운데 누가 학문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 공자는 '안회라는 사람이
학문을 좋아해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아니하고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았다'고 답한 적이 있다.
(哀公 問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論語」, 雍也)
유학에서 '학문을 좋아한다'(好學)는 것은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不遷怒)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不怨天), 남을 탓하지 않는다(不尤人)는 것을 말한다.
빤또하는 분노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한 후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 방법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愛讐)이다.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에는 무엇으로 갚겠는가? 곧음으로써 원한을 갚고 덕으로써 덕을 갚는 것이다'라고 하셨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論語」, 憲問篇) 이것이 유학이 지닌 한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뛰어넘는 차원을 요구하나 그것은 절대자와의 깊은 관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가 남에게 대하듯 그대로 우리에게 대해 주심을 깨달아가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노력할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윤리도덕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행위인 것이다.
빤또하가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은,
참음으로써 어려움에 맞서는 것(以忍德敵難)과 고생과 어려움으로 덕을 늘이는(窘難益德)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이 알아주시고 갚아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지닐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동양 현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늘이 나에게 복을 박하게 준다면 나는 내 덕을 두텁게 쌓아 이를 맞이할 것이고,
하늘이 내 몸을 수고롭게 한다면 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이를 보완할 것이다.(원문 생략, 「채근담」, 전집)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
< 평화신문 : 2008. 10. 05발행 [988호] >
칠극(七克) 이야기 (8)
절제, 희생 아닌 주님 찬미의 한 방법
내가 학장이 된 후 제일 먼저 학생들에게 강력히 제안한 것은 '올바른 술자리 문화'였다. 다분히 협박성(?)이 강한 제안이기는 했지만…. 한때 유독 술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군사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어, 서로 술잔을 강권하기도 하고 또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마치 대단한 능력인 것처럼 무용담으로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술잔을 강권하지도 않고, 자신의 주량에 맞게 스스로 결정하며, 한풀이 하듯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절제와 책임을 지니면서 화락한 분위기에서 마시는 것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술자리 문화'인 것이다. 학생들은 아직도 관망하는 추세지만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갈 심산이다. 왜냐면 이러한 자기통제의 능력이 훗날 그들이 보낼 건강하고 행복한 사제생활의 중요한 자산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빤또하가 칠극(七克)에서 다섯 번째로 제시하는 수양의 걸림돌도 바로 이 문제다. 즉 절도(節度) 없이 먹고 마심으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이 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빤또하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다. "사람들이 바라고 향하여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다만 아름답고 좋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좋은 것에는 셋이 있는데, 하나는 이로움의 아름답고 좋음이고, 또 하나는 의로움의 아름답고 좋음이며, 다른 하나는 즐거움의 아름답고 좋음이다. 그런데 너희가 먹고 마시는 것을 절도에 맞게 한다면, 이로움과 의로움 그리고 즐거움의 셋을 모두 누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잃을 것이다. 그러니 먹고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꾀한다면, 이는 다만 몸을 해치고 덕을 없앨 뿐만이 아니라 그가 꾀한 즐거움마저 아울러 없애게 될 것이다."(聖奧斯定云 夫人有欲所趣向者美好而已. 美好有三 一曰利美好 一曰義美好 一曰樂美好 爾食飮以節 利義樂三咸亨也 否則咸亡焉 故食飮圖樂者 微獨傷身損德所圖樂竝消亡矣.「七克」, '塞 ') 정말 깊이 새겨둘만한 말씀이다.
유학에서도 같은 의미로 절도 있는 삶을 강조한 경전 대목은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論語」에서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익한 즐거움이 세 가지 있고 해로운 즐거움이 세 가지 있다. 예악을 절도있게 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좋은 점 말하기를 좋아하고 어진 벗 많은 것을 좋아하면 유익하다. 교만하고 편안하기를 좋아하고 태만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잔치 벌이기를 좋아하면 해롭다."(孔子曰 益者 三樂 損者 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宴樂 損矣. '季氏篇')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린 것은 성 이냐시오의 '원리와 기초'였다. 빤또하는 역시 예수회 신부였다. 탐욕과 절도있는 삶을 언급하면서 먼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상기시킨다.(그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금지되지 않고 우리의 자유 의지에 맡겨져 있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 초연해지도록(indiferentia) 힘쓰고, 더 나아가 오직 창조된 목적으로 우리를 더욱 이끄는 것을 원하고 선택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절제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참된 의미가 있음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칠극(七克) 이야기(9)
사악함에 마음의 자리를 내주지 마세요
여섯째 주제: 음란함을 막다
빤또하는 "음란은 마치 물이 넘쳐 나는 것과 같은데, 이는 마음을 곧고 바르게 하여서 막아야 한다"(淫如水溢, 以貞坊之)는 말로 이 주제를 시작한다. 물론 인간 수양과정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내면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도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8-19).
유학에서는 의외로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부덕(婦德)을 이야기하면서 정절(貞節)을 요구하거나, 선비를 이야기하면서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를 제시하기는 한다. 그러나 더 강조하는 것은 내면적 순수함과 깨끗함이다.
공자는 제자교육에서 「詩經」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詩經」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경」 삼백 편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論語」, 위정편)
즉 詩의 내용이 善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켜 분발하게 할 수 있고, 惡한 것은 사람의 방탕한 마음을 징계할 수 있으니, 그 효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性情을 얻게 하는 데 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 한 것이다. 정자(程子)는 이 '思無邪'를 성(誠)으로 해석하고 있다.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思無邪), 나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숙제다. 얼마나 더 수련하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와 연관하여 빤또하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악한 감정 가운데 욕정(欲情)처럼 이겨내기 어려운 것은 없다. 따라서 사람이 이미 정결로써 그것을 이겨내었다면, 다른 사악한 감정을 이겨내는 일은 그다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사악한 감정의 때를 이미 씻어내었다면, 속마음은 순수하고 환해질 것이다. 따라서 심오한 도덕과 오묘한 하늘의 일을 모두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이며, 맑고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 속에 하나의 작은 천국이 만들어질 것인데, 하느님(天主)은 그곳에 머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원문생략, 「七克」, '坊淫')
유학에서 사악함과 연관된 또 하나의 수양법은 「周易」에 보인다. 「周易」의 '乾卦 文言傳' 九二爻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평소의 말도 미덥게 하고 평소의 행실도 삼가며 邪를 막고 誠을 보존하여야 한다"했다.(易乾之九二 子曰 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이 구절에 대한 정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평소의 말도 미덥게 하고 평소의 행실도 삼간다는 것은 어떤 급한 상황에서도 늘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邪를 막으면 誠이 저절로 보존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邪를 막는 것인가? 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 邪가 막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악함을 막고 誠(天道)을 보존하는 것(閑邪存誠), 이것 또한 내겐 중요한 명제였다. 그런데 나는 정자와 정 반대의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즉 誠을 보존하면서 邪를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소화데레사 성녀에 관한 책의 어떤 대목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하느님의 현존을 잃을 때가 있습니까?' 하고 내가 묻자 데레사는 솔직하게 '아니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단 3분도 그냥 지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전념할 수 있는 것에 놀라니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권고와 추억)
칠극(七克) 이야기(10)
사랑이란 소명의 길, 끝까지 성실하게
이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인 것 같다. 처음에는 「칠극」이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 주제만 가져오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좋은 것들이 많아, 결국은 유학적 내용들과 섞어가면서 스케치하듯 그 책을 소개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이런 기회에 많은 이들이 「칠극」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는 '게으름'(懈怠)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부지런함'(勤德)이다. 이 주제는 가장 평이한 주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주제일 수 있다. 왜냐면 '성실'과 '근면'을 빼놓고 인간됨이나 수행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가끔 두려움에 빠지는 대목은 '탈렌트의 비유'에서이다. 내가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다.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문제에서, 특히 시간 사용에 있어서는 정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일의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을 보시는 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과정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공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의 삶은 곧게 마련인데, 곧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화나 면하고 있는 것이다."(子曰 人之生也 直 罔之生也 幸而免. 「論語」, 雍也篇) 삶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모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책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빤또하가 말하는 게으름의 문제는 삶의 외적 태도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참된 목표와 희망을 지니고 그것에 투신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한 번은 루카복음으로 피정을 하면서 피정 지도자로부터 '예수의 하루 일과표'를 작성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단편적 장면들이었지만, 성전에서의 가르침, 세리와 죄인들과의 만남, 끝없는 병자치유 그리고 새벽까지의 기도와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장면까지…. 그 하루는 정말 자신의 소명에 충실히 투신하는 모습이었다.
공자 자신도 자신의 삶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언젠가 섭공(葉公)이 제자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에 대해 물었을 때, 자로가 대답을 못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하며 서운해 했다. "너는 왜 그 사람됨이 학문에 발분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조차 잊어 버려서, 늙음이 장차 닥쳐오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亡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論語」, '述而') 대단한 경지이다.
이러한 주제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새로이 다지며 떠올리는 구절이 있다. 증자(曾子)의 말이다. "선비는 포용력이 잇고 강인해야 할 것이니,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후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論語」, '泰伯')
우리 그리스도교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하는 것으로 소명을 삼았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또한 죽은 다음에야 완성될 것이니, 얼마나 먼 길이 되겠는가? 강인한 의지와 큰 열정을 지녀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해 주고 계신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히브 6,11-12).
첫댓글 자신을 바로 앎으로써 회개하고 감사하여 그 은혜를 나누고,
인내하고 의로움에 기뻐하며 내면에 하느님을 모시면서
사랑이라는 삶의 소명을 쉼없이 실천한다.
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키고(교만-회개), 하느님을 알아 그 사랑에 젖어들며(질투-감사),
가난을 즐기고 부를 베풀어 보답하고(탐욕-은혜나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어 덕을 쌓고(분노-인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과 함께(무절제-의화),
마음안에 하느님이 머무시는 정결한 천국을 간직하며(음욕-정결),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삶의 목표와 희망을 향해 곧게 나아간다(나태-성실).
----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