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문화] 자선의 참의미를 생각하며
영작문을 가르칠 때 내가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E B 화이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인류나 인간 (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남자(man)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
즉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론이나 일반론보다 각 개인이 삶에서 겪는 드라마나 애환에 대해 쓸 때에만 독자들의 동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보스턴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하는 미국 친구가 글 잘 쓰는 학생이라며 홍세희라는 한국 학생의 글을 보내왔다. 짧게 요약하여 번역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올해 예일 어린이 병원의 성탄 파티 때 우리는 아이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다. 성탄 트리를 함께 만들고 나서 아이들은 줄지어 우리들 앞에 섰다. 그림 그리기에 별로 소질이 없는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무슨 그림 그려줄까?'내가 묻자 첫 아이가 '눈사람이요'하고 대답했다.
나는 아이의 뺨에 흰색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리고 검은색 눈과 입을 그려 넣었다. 아이는 거울을 보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사실 내가 보기에도 썩 괜찮은 그림이었다. 다음에는 여자아이였는데 산타클로스를 그려 달라고 했다.
눈사람보다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빨간색 삼각형 모자에 구름 같은 흰 수염을 그리자 아이는 신이 나서 뛰어갔다. 다음은 너댓살로 보이는 흑인 아이였다. '이름이 뭐니?' 내가 묻자 '자마, 근데 난 왼쪽 뺨에는 특공대 군인 아저씨, 오른쪽 뺨에는 파워레인저 로봇을 그려 줘.'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그렸다. 그러나 결과는 왼쪽 뺨에는 초록색 방울, 오른쪽 뺨에는 빨간색 방울 하나씩이 붙어 있는 형상이 됐다. 거울을 내밀며 나는 자마가 울음을 터뜨릴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마는 울음 대신 함박웃음을 짓더니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려 내 목을 꼭 껴안았다. '너무 멋지다, 고마워요!'결국 눈물을 흘린 것은 자마가 아니라 나였다. 부근의 빈민촌에 사는 이 아이들은 아마 우리가 준 선물 하나와 뺨의 그림이 이번 성탄절에 받는 선물의 전부이리라. 자마를 안고 나는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바닷가 아침이었다. 태양이 천천히 잿빛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해변을 걷고 있는데 열 살 정도의 소년 하나가 무엇인가를 미친 듯이 바다 쪽으로 던지고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소년이 답했다. '이제 곧 해가 높이 뜨면 뜨거워지잖아요.
그럼 여기 있는 모든 불가사리가 태양열에 죽게 될 테니까 이 불가사리들을 바다 속으로…'.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보고 말했다. '얘야, 이 해변을 봐라.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네가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소년은 수긍이 가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불가사리 하나를 집어 힘껏 바다를 향해 던졌다. 불가사리는 첨벙 소리와 함께 시원스럽게 물 속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적어도 저 불가사리에게는 소용이 있었지요'.
이 아이들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진정한 변화는 아이의 얼굴에 푸른색 방울을 그리는 것과 같이 아주 작고 구체적인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자선의 참의미라는 것을. 자마는 나의 불가사리였다.'
거리에는 다시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어느 얼굴 모르는 학생의 글이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걸핏하면 거창하게 사랑.정의.자선을 들추지만 막상 내 주변의 수많은 불가사리는 잊고 살았기 때문일 게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 --
[사설] 국방부 무기비리 고질병인가
군 무기 획득 과정의 한 부정 사건이 경찰에 적발돼 예비역 소장과 업자들이 구속됐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린우리당 천용택 의원에 대한 소환 계획으로 이어져 김대중 정부 당시의 대형 무기 스캔들 및 군 인사비리로 발전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1998년 12월부터 2002년 11월까지 국방부 획득개발관.획득정책관.품질관리소장으로 재임했던 이원형씨가 한 무기업체로부터 23차례에 걸쳐 1억3천1백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비리의 넝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경찰은 그의 비리 혐의를 캐기 위해 차명계좌를 조사한 결과 입금액 27억원 중 군 관계자 2~3명(전.현직 장성)의 돈도 들어온 흔적(인사청탁 혐의)을 찾았다. 경찰은 또 뇌물 제공 혐의의 업체들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2000년 국회 국방위원장이던 千의원(국방부 장관.국정원장 역임)에게 돈을 주었다는 진술과 정황을 확보했다.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만 놓고 봐도 대형 무기 스캔들, 군 기강문란 및 인사비리로 진전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우선 李씨가 저고도 대공화기 오리컨포 사격통제 장치의 성능개량 사업이란 비교적 단순한 사안을 놓고 지속적으로 거금을 받았다는 점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투입 중인 방위력 개선 사업에 또다른 부정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아파치 헬기 사업과 관련한 李씨의 수수혐의도 드러났고, 千의원에 대한 혐의도 포착됐기 때문이다.
또 李씨가 김대중 정부 시절 특정지역 출신의 군 실세여서 군 사정기관의 견제를 받지 않는 가운데 인사 개입까지 했다는 의혹이 경찰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기무사의 집중 견제를 받다 보니까 돈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는 그의 진술이 그 점을 잘 방증한다. 군 인사가 특정지역에 편중된 결과 군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얘기다.
따라서 국방부 장관은 수사 기한에 쫓길 뿐 아니라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찰 수사에 이 사건을 일임하지 말고, 무기획득 과정의 비리 존재 여부는 물론 기무사와 군 수사기관의 의도적인 묵살 여부 등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지시해야 한다.
[중앙 시평] 이공계 찬밥, 교수들도 책임있다
올해의 대학 입학에서도 학생들이 이공계를 외면하고 의.치대로 몰리는 현상은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지난 수년간 정부는 우수한 이공계 신입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졸업하면 공직에 나갈 기회를 확대해 준다는 등의 당근을 내놓았지만, 아직은 큰 효과가 없는 듯하다. 사실 서울대의 이공계열 입시설명회는 썰렁하게 끝난 반면 사설 입시기관이 실시한 의.치대의 입학설명회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이제는 '학교'의 서열화보다 '학과'의 서열화가 더욱 문제라고 한탄하는 교수들도 많다. 과거에는 돈벌이가 안 되는 기초학문 계열의 학과라도 소위 명문대에서는 그런 대로 학생을 유치해 국가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인력은 양성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것마저 어려워지는 모양이다.
*** 학교 서열화가 학과 서열화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의 꿈이 없음을 탓하기도 한다. 과거에도 돈벌이로 보면 의사나 변호사가 좋았지만 기술입국이나 위대한 학자로의 야망을 갖고 이공계나 기초학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처럼 꿈을 좇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적어졌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 보상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공계 전공자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신제품을 개발하고 생산.수출해 부(富)를 창출하면, 그 과실을 챙기는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기술자들이 아니라 권력이나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라는 불만이다. 물론 이러한 불만들에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겠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으나, 불평이나 거대 담론만을 논하기에는 당면한 위기가 너무 급하기에 좀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최근 미국의 물리학회가 발표한 한 연구 결과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어 우리 나름대로 곱씹어볼 만하다. 미국에서도 이공계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줄고 있어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학생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물리학과들이 있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본 보고서가 출간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학생 유치에 성공적인 학과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학생들에 대한 학업과 진로 상담제도가 매우 활발하다는 점이다. 신입생 때부터 전공에 관련된 직업에 대해 친절히 소개해주고, 졸업이 임박하면 대학원 진학을 도와주거나 기업체와 연결해 주는 등 학생들의 진로 개발에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현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전문대학들이 졸업생 취업률도 높고 입학 지원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결국 학교에서 학생들의 장래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도움을 주느냐가 학생 유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둘째는 원칙에 충실한 교과 과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공계 공부가 어려워 학생들이 기피한다는 속설과는 반대로, 소위 잘 나가는 물리학과들은 교과내용의 수준을 낮추거나 후한 학점으로 학생들의 인심을 얻어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철저한 학사관리를 통해 졸업생들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 교수들이 교육여건 개선 고민을
이와 더불어 학생 유치에 성공적인 학과라고 해서 장학금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라는 조사 결과는 '돈'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셋째로는 학과 혹은 대학 전체의 집단적인 노력이 필수라는 사실이다. 교수 한두명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새로운 교과과정을 개발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과 전체가 협력하고 공동으로 노력하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학생 지원 프로그램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어 장기적인 성공이 담보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 교수들은 이러한 노력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을까. 과거 양적 팽창만 추구하다 교육 여건의 개선이나 충실한 학생지도 등의 원칙에 철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
[중앙 시평] '딸들의 반란' 어떻게 풀 것인가
대법원은 사회적 가치판단과 직결된 주요 사건에 대해 공개 변론 재판을 도입해 해당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인 진술형식으로 듣고 판결에 반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첫 번째 공개변론이 오는 18일 열린다.
제1회 공개변론 사건은 출가외인 딸들이 종중을 상대로 자신들도 공동선조의 후손으로 종중원의 자격이 있음을 확인해 달라는 사건으로 대법원은 공동선조의 후손 중 성년의 여자, 특히 출가녀에 대해 종원의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 현금화된 종중 재산의 분배에 있어 출가녀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 더 나아가 성년의 여자가 종중의 구성원으로서 종중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국민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해 공개변론을 연다고 한다.
*** 관습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법
사건은 종중이 종중 재산을 처분한 현금을 분배하면서, 성년남자, 미성년자 남자, 출가하지 않은 성년의 여자, 미성년의 여자, 출가한 여자 등에게 각각 금액을 차등해 지급하자, 출가한 딸들이 자신들에게 종중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시작됐다. 1심과 2심 법원은 기존의 대법원 판례의 입장에 따라 출가녀에게는 종중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례는 종중은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및 종원 상호 간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인 종족집단체로서 공동선조의 후손 중 성년의 남자로만 구성되는 것이 전통의 관습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해서, 이러한 관습에 따르면 종중원은 성년의 남자로만 구성되고 미성년자와 여자.출계자는 제외되며, 성년의 남자 이외의 자를 종원으로 한다는 내용의 규약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종중의 본질에 반하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관습은 시대나 지역 등에 따라 변화하고 내용을 달리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아들과 출가한 딸이 돌아가며 지낸 시대도 있었고, 출가한 딸뿐 아니라 다른 성을 지닌 며느리에게도 종중원 자격을 인정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성년의 남자만이 분묘수호와 제사라는 역할을 담당했고, 그 결과 성년의 남자만이 종중원이 될 수 있었던 시대나 지역의 관습만이 오늘날까지 종중이나 종중원의 자격에 대한 법적 판단의 근거가 돼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 나아가 종중 구성원들이 성년의 남자 이외의 자에게 종중 자격을 인정하겠다고 하는 경우에도 효력이 없다고까지 해야 하는 점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성년의 남자가 아니어도 공동선조의 후손인 이상 상호 간에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 분묘수호와 제사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날 공동선조의 후손인 성년 남자 중 실질적으로 분묘수호와 제사라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전체 종원 중 몇%나 되는가.
종중이 존재하는 목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논리라면 성년남자 여부가 아니라 실제 분묘수호와 제사라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는가를 기준으로 해야만 한다. 분묘수호와 제사라는 종중의 목적은, 공개변론을 결정하면서 대법원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사회변화에 따라 이미 퇴색했다.
*** 법정상속 출가해도 차별없어
같은 호적에 있는 여자의 법정상속분은 남자의 2분의 1, 출가한 여자의 법정상속분은 남자의 4분의 1로 규정했던 민법이 개정돼 법정상속분에서 성별과 출가 여부에 따른 차별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가족 내에서 자녀들은 '아들.딸 구분없이' 모두 같은 정도의 책임과 역할을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화됐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관습을 붙들고 현재의 우리 모습을 그 틀에 억지로 맞추려 한다.
공개변론이라는 절차를 통해 종중원의 자격에 대한 법적 판단에 종중의 목적과 역할에서의 변화를 반영하려는 대법원의 시도가 반갑다.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내는 결실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를 통해 차별을 해소하려는 오랜 노력 끝에 마련된 법규정들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조수정 변호사
첫댓글 좋은 정보!!!!!!
좋은정보에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