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괴짜 공부
『최재천의 공부』라는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교육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는 자연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는 제목이다. 더구나 최재천이라는 사람이 누구던가.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아닌가.
최재천은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무엇이든 궁금증이 생기고, 관심이 동하면 그것에 몰두해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요즈음 말로 조금은 괴짜 같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지금의 자기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괴짜 본능 때문에 별별 일에 다 호기심을 보이고 그것에 심취해서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관심을 보이다보니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정점에서 하나로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한다.
그의 용어로 말하자면 통합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과에 환호하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는 그의 괴짜 근성을 예외적인 시선, 말하자면 어쩌다 성공한 케이스로 본다. 대학입시, 유학 등 모든 과정에서 괴짜는 걸림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좌충우돌하는 삶이었지만 그런 좌충우돌이 결국은 그의 학문의 탄탄한 밑바탕이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그의 전공을 벗어난 다른 영역에서도 그는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는 세상 모든 일에 관여를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누구하나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존경심을 담아 그가 자기들의 정책, 연구 등에 참여주기를 기대한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강의가 빗발치고, 출판사에서는 서평을 부탁하느라 매달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에서도 괴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제목을 『최재천의 공부』로 한 것은 공부에 관한 최재천의 괴짜 근성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교육에 괴짜를 도입할 수는 없을까? 아니면 괴짜를 허용하는 교육은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책은 안희경이 묻고 최재천이 대답하는 대담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대담 내용은 최재천이 지금까지 어떻게 공부를 해왔는지를 드러내고 그의 학습 방법에서 우리가 어떤 시사를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 출판 의도일 것이다.
나.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책의 목차는 그의 공부 성장사에 맞추어 공부의 뿌리, 시간, 양분, 성장, 변화, 활력 등 여섯 꼭지로 맞추어 정리하고 있다. 대담 중에 간간히 우리 교육에 갖는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하고 교육에도 다양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가 보는 교육은 학생들을 인위적으로 하나의 틀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한동안 교육계에서는 붕어빵 교육을 하지 말자는 소리가 있었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서 인공지능시대에 맞는 교육방법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사실,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 교육의 문제점 한두 가지 쯤은 꼽는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나름의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안이라는 것이 가만히 뜯어보면 각자의 전공 분야를 우대해야 한다는 점을 은근히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정부 부처의 밥그릇 싸움이 그 나마의 논의조차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교육제도, 방법 등 교육의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원론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정부나 학계의 밥그릇 지키기가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니 교육을 전공한 학자들은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으므로 입을 다물고 만다. 결국 또 다시 교육개혁은 현제도에 대한 땜질식 처방에 그치고 만다. 그 사이에 기민한 기득권자들이 교육적 이득을 최대한 누린다.
이처럼 교육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다 전문가다. 아마도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교육을 보는 국민의 시각도 뚜렷이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도 정작 교육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이야기는 별로 잘 들리지 않는다.
교육개혁을 말하는 사람도 교육학자보다는 다른 영역의 전공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우리 교육현실에 문제점을 아는데 교육학자들은 모른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최재천도 이런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해 정면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먼저 교육 전체를 부정하며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으며, 그보다는 ‘이제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어떤 교육을 하면 좋을지 모색하고자 한다’고 이 책의 목적을 분명히 말했다. 혹자는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동력이 그래도 교육임은 분명한 사살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교육을 통해 보다 합리적인 사고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교육이 바뀌면 우리 정치도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에서 지금 구태여 교육 이야기를 하는 이유이다.
다. 몰입이 일어나는 학습
공부는 누가 하라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부도 자기가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가정이나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일이 고역이라는 것만을 가르친다. 공부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도 악착같이 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최재천은 공부의 구조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엉성한 구조로 가는 것이 낫다. 이런 것에 덤벼들고 저런 것에 덤벼들면, 이쪽은 엉성해도 저쪽에서 깊게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쪽과 저쪽이 얼추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계에 오래도록 몸담았던 나의 경우도 교육과정 개정 세미나 등에서 틈날 때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국어, 수학 이외의 교과를 없애자는 주장을 해왔었다. 3학년 이상의 학년에서도 교과서 분량을 현재의 절반으로 줄이자는 주장을 해왔다.
물론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은 온전히 교사에게 돌려주어 교사 교육과정으로 운영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교육 현실에서 누가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러면서도 자기주도적 학습이 필요하다고 교육부나 교육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어떻든 교육의 변화는 결국 국가 수준 교육과정의 틀을 바꾸어야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며, 이는 교과와 직결된다. 교과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 내용은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그런 후에 교육 방법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수 있다.
가끔 보면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인가에 푹 빠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게임일수도 있고, 독서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다. 어떻든 그런 시간에는 주변의 상황변화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관심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런 상황에 대해 “창의력은 혼자서 몰입한 시간이 만들어낸다”라고 했다. 자기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홀로 집중하며 만들어낸 작업을 사람들은 ‘창의적이다’라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최재천이 말하는 교육일 것이다.
라. 읽기 쓰기 말하기
최재천의 독서는 일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독서는 빡세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진다고. 자기계발서가 유행인데 그걸 보고 성공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혹평까지 쏟아낸다. 책은 취미로 읽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어야 한다. 관심 밖의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당연히 어렵다. 그러나 같은 분야의 책을 또 읽게 되면 조금씩 쉬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순간 그 주제가 내 지식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일’입니다.”(144쪽)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해 나를 찾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지식을 탐구하면서 그 안에서 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최재천은 ‘지식의 영토를 넓힌다’라고 표현했다. 내 영토는 얼마나 넓을까 궁금해진다.
글쓰기만큼 중요한 것이 말하기다. 말을 잘 하려면 글쓰기를 잘해야 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평소에 많이 읽고 많이 관찰해야 한다. 이 순환과정이 원활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출되는 쓰기와 말하기에 곤란을 겪는다.
우리나라 교육이 토론이 약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교과 과정을 마친다. 우리나라 교육이 미국 교육에 비해 좋은 점이 참 많지만 결정적으로 모자라는 부분이 바로 토론이다.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훈련을 거의 못 받고 정규 교육과정을 빠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재천은 우리나라 선거법이 투표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었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고등학교 2,3학년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투표권이 있는 고등학생들의 정치 토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토론 교육은 중학교, 초등학교로 내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자기주도적 학습이 정착될 것이라 전망이지만 아직은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선거는 4년 또는 5년을 주기로 실시되니 투표에 참여할 기회를 가지지도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수능고사라는 발등의 불이 다급한 터에 한가하게 토론타령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마. 창의력
한편, 최재천은 창의력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창의력을 가르치려 덤비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의력은 키울 수는 없으나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는 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시험문제를 예로 들었는데 말하자면 확산적 사고를 이끌어내는 시험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도 강의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게 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현실 문제를 대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나름의 창의력이 길러진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창의력이란 온 마음을 쏟으며 길을 모색하는 경험에서 나오며,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란 ‘자기 일처럼 몰두하고 부딪쳐나가는 환경’속에서 길러지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교육은 너무 근시안적이다. 당장의 안정된 직장에 생각이 몰려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온전히 하는 시기는 20년 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모는 말할 것도 없다. 교육변화가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제는 유명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이득을 보는 상황은 지났다.
매일 오락실에서 게임에 몰두하던 아이들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엄청난 금액의 연봉을 받는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 만화방을 가면 부모들이 야단을 치곤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오락실을 가면 부모들이 야단을 친다. 그러나 지금은 웹툰의 인기는 세계적이고 전자게임은 우리나라가 거의 메카수준이다.
그래서 전 세계 게이머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지경이다. 가급적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부모가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교육방법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은 한 분야에만 몰입해서 전문가가 되면 별로 쓸모가 없는 전문가가 되기 십상이다. 인접 학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최재천의 말로 통섭형 인간이어야 한다.
우리 교육이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최재천의 공부’는 충분히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부, 가장 잘 하는 곳에 몰입하도록 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저마다의 삶 속에 저마다의 공부가 있는 셈이다.
공부란 한 사람을 성숙시키는 길이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개체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을 사려 깊게 만드는 도구 같은 것이다. 그것이 삶으로서의 공부일 것이다. 그러자면 엘리트주의 즉, 서열 중심의 학력 구조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분명히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