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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1-4).”
마가는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 데 지체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선 '크리스토스(Christos)'는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족'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언젠가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모든 압제자와 고통에서 건져 줄 '메시아'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스도는 여러 왕 중에 하나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셨다.
마가는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을 덧붙인다. 하나님의 아들, 이것은 당시 대중이 생각하는 메시아 개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과감한 표현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신성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어서 마가는 내친 김에 폭탄 발언을 해 버린다.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곧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예수님이 주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 주 하나님, 자기 백성을 구원할 신적인 왕, 그리고 예수님. 이 세 호칭은 동일한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대담한 주장을 통해 마가는 예수님을 예로부터 내려온 이스라엘의 종교와 최대한 깊이 연결시키고 있다. 마가의 주장은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이 표현한 열망과 환상을 실현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마가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의 경전 중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s)밖에 없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 여기서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다. 탈을 쓴 랍비들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 다니 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가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진정한 왕의 오심도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세례식 장면에서 삼위를 모두 언급했다.
*삼위일체의 기독교 가르침은 신비로운 것이며 인지적으로 도전이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니다. 또한 한 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일위론도 아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 주신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C. S. 루이스(Lewis)는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분이 아니다. 역동적이고 활기찬 생명이시다. 마치 드라마와도 같다. 불경한 표현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춤과도 같은 분이다."신학자 코넬리우스 플랜팅가(Cornelius Plantinga)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은 서로를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각 위격은 서로를 높이고, 서로 교제하며, 서로를 존중한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자기 존재의 중심에 품고 있다. 끊임없는 자문과 수용을 통해 각 위격은 서로를 덮으며 에워싼다. (따라서) 하나님의 내적 삶은 서로에 대한 존중심으로 넘쳐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너무도 존경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쁘기 한량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바로 이런 기쁨을 누려 오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에게 사랑을 퍼 주고 서로를 기뻐하고 찬양하며 서로를 높이고 있다. 세 위격은 서로의 영광을 무한히 추구하며, 그로 인해 무한히 행복하시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이 세상의 궁극적 실재는 하나의 춤인 것이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이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세 위격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기쁨과 능력, 평안,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
한샘이다.“
*왜 루이스는 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자기중심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다. 전혀 역동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만물이 자신의 주위를 돌기 원한다. 그가 남을 돕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이나 돈이 여유가 있을 때만 베풀고, 베푸는 목적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 모든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남들의 유익보다는 이 목적이 언제나 우선이다. 남들과 즐기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안 돼. 네가 '내' 주위로 돌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섯 혹은 열 혹은 백 사람이 무대에 올랐는데 다들 중심에 서려고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는 춤이 성립되지 않는다. 무대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애쓸 뿐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요 자연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라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뇌의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유전자의 성공적인 전달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랑을 느끼는 것도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화학 물질들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순전히 화학 반응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존재하기는 하되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 아닌 셈이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하나의 위격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존재할 수 없었다. 사랑은 둘 이상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 아니다. 능력과 위대함은 있을지 몰라도 사랑은 아니다. 하지만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위격들의 공동체로 존재하셨다면, 그분의 본질은 곧 사랑의 관계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이 하나의 위격이라면 자신을 찬양하고 사랑해 줄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런 대상을 누리고 계셨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그 어떤 인간도 줄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사랑을 주고받고 계셨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까? 답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그러면 춤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너는 춤을 위해 창조된 존재니라.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향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씀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춤의 의미다."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막연히 믿기만 하고 있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가끔 힘들 때만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주위를 돌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2-13).”
이 두 구절에서 마가는 우리의 궁극적 실재는 춤 즉 하나님과의 교제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전투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마가는 당시 독자들이 잘 아는 구약 성경 속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을 서로 교차시키고 있다. 먼저 창세기의 내용을 보자. 성령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
이번에는 마가복음을 보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으며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 뒤로 창세기와 같은 패턴이 이어진다. 하와에게 그러했듯이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의 단어 선택에 주목해야 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크리스천들은 들짐승들의 밥이 되었다. 그래서 겨우 살아남은 크리스천들은 신앙을 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니 예수님도 아담처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누리면서도 위협에 맞서셔야 했다.
보다시피 광야는 고난으로 가는 우회로가 아니다. 광야는 곧 전쟁터다. 그리고 유혹은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다. 유혹의 배후에는 실질적인 적이 도사리고 있다. 마가는 사탄을 가공의 인물이 아닌 실존하는 인물로 다룬다. 귀신은 물론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말일 것이다. 현대인들이 볼 때 사탄은 미신에 찌든 원시 사회에서 악을 의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탄은 상징일 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악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사탄에게 미루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선한 초자연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한 초자연적인 존재도 믿어야 옳다. 성경은 악한 힘들이 매우 실제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힘들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지능적이다. 이런 힘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우리를 춤에서 끌어내기 위해 온갖 유혹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받았고 광야에서는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1-2장을 보면 인간은 모든 관계가 온전한 세상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왕이셨기 때문에 인간은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완벽한 관계를 누렸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그만 자기중심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 자기중심주의는 관계를 파괴한다. 자기중심주의만큼 우리를 불행하게(혹은 재미없게) 만드는 것도 없다. 내 기분이 좋은가? 남들이 나를 잘 대접하고 있는가? 내가 성공했는가? 이처럼 나 자신만 생각하면 정적인 삶으로 흐른다. 자기중심주의보다 더 파괴적인 것도 없다.
전쟁이 왜 벌어지는가? 계급 투쟁은? 가정 파괴는? 왜 인간관계가 끊임없이 깨지는가? 모두가 자기중심주의라는 어두운 힘 때문이다. 스스로 중심이요 왕이 되려고 하는 순간 육체적, 사회적, 영적, 심리적으로 모조리 무너져 내린다. 춤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시 춤추기를 갈망하고 있다. 민족마다 이런 갈망을 전설로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는 달라도 주제는 모두 똑같다. 진정한 왕이 돌아와 용을 죽인 뒤 입맞춤으로 우리를 죽음의 잠에서 깨우고 속박의 탑에서 꺼내 다시 춤 속으로 이끈다. 진정한 왕이 돌아와 모든 혼란을 바로잡고 온 세상을 회복시킬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복음은 조언과 다르다. 복음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우리가 획득할 필요가 없다는 소식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획득해 주셨다. 그 길은 우리가 순전히 은혜로 받는 선물이며,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주어진다. 이 선물을 받아 굳게 붙잡는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은 당신을 극단이나 중도로 몰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삼아 그분을 섬기기를 원한다. 우선순위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 깔보지 않는다. 그를 억압하기보다는 섬기려고 애쓴다. 왜일까? 복음은 조언이 아니라 왕을 따르라는 부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왕은 해야 할 일을 지시만 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신 뒤에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분이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막 1:29-31).”
이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영의 세계만이 아니라 물질세계에도 관심을 갖고 친히 그 세계까지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펴실 때처럼) 권위를 '주장'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권위를 발휘하셨다. 예수님은 질병까지도 다스리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 그분의 손이 닿기만 했는데도 열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치유의 기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구절 뒤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무리 전체를 치유하셨다고 말한다.
또 며칠 뒤에는 문둥병자를 고치셨다. 마가복음 2장의 중간쯤에서 모든 사람이 놀라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귀머거리가 듣고 눈먼 자가 보고 절름발이가 걸었다. 마가복음에는 질병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 주는 치유 사건이 30번이나 나타난다. 마가복음은 처음 몇 장에 걸쳐 물질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가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 주는 증거를 드러낸다.
"나를 따라오너라. 네가 그토록 찾던 왕이 바로 나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만물의 저자이나 너를 위해 낮아졌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네 믿음과 행동이 엉망일 때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는 네게 조언이 아니라 소식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너의 진정한 사랑이요 생명이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인가! 내가 한창 설교하는 중에 갑자기 지붕에서 사람이 내려오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해 지붕까지 뜯어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시는 듯하다. '치유가 되었으니 일어나라.'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중풍병자를 보며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 이 중풍병자가 우리 시대와 장소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대꾸하지 않았을까? “예수님, 지금 당장은 중풍병을 고쳐 주세요. 이것이 제게 급선무에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신다. 이 남자에게는 육체적 질병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이 문제부터 지적하신다. "네 고통을 처음부터 지켜봐서 다 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고쳐 주마.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 문제는 죄란다.”
성경의 죄는 나쁜 행동만을 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이나 음욕같은 것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곧 그분에 대한 반역이요 죄다. "내 인생이니 내 맘대로 살겠어." 예수님은 이런 태도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가장 큰 문제를 밝힘으로써 그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신다. "내게 몸만 고쳐 달라는 것은 깊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네 마음의 바람이 얼마나 깊은지를 모르고 있다." 몸이 마비된 사람이라면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되살아나 걷기를 갈망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하지만 다시 걷는 것 자체에만 희망을 두는 것은 문제다. "걷기만 하면 살맛이 날 텐데.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 더는 불평하지 않을 텐데. 걸을 수만 있다면 더는 소원이 없겠어."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착각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이 귀에 거슬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몸만 고쳐 주면 평생 행복할 것 같지? 하지만 두어 달만 지나 봐라.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아. 불만족의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 각자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든, 어떤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든, 심지어 일어나 걷는 것이든, "이것만 가질 수 있다면, 소원만 성취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텐데" 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행과 환멸에서 구원해 줄 것을 찾고 있다. 이 소원을 구세주로 삼은 것이다. 물론 실제로 구세주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행동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짜증과 불만족과 공허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 소원을 이루면 더더욱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워진다. 우리는 이 소원을 구세주로 왜곡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원을 이루자 그 소원이 뒤통수를 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만나면 진정한 만족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너의 진정한 구세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문제가 있어서 교회에 나간다. 하나님이 어려운 고비만 살짝 넘기게 하시면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아닌 것에서 만족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큰 소원을 아뢸 때마다 그분은 훨씬 더 깊이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얼핏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들린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래서 내게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는 증거로 네게 말한다.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그렇다면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고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셈이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으로 용서의 능력을 증명하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친구여, 죄가 실제로 용서되는 것은 네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나는 기적만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구세주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죄를 사했다는 말은 세상의 구주만 할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 2장의 이 대목부터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을 훤히 읽고 계셨기 때문에, 단순한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닌 세상의 구주로 나서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줄 이미 아셨다. 하지만 중풍병만 치유하지 않고 죄까지 용서함으로써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성큼 나아가셨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만인의 용서 작업을 위한 '계약금'을 치르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몸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지금 우리가 원하는 성공과 배우자, 명성을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즉각 주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가 있으신 분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피상적인 해법임을 아신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든, 근근이 먹고사는 무명 배우든, 이제는 고생 끝에 성공한 유명인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단지 소원을 들어줄 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분이 필요하다. 자기중심주의와 죄는 우리를 노예로 삼고 심지어 아름다운 소원조차도 왜곡시킨다. 우리에게는 발톱으로 이 자기중심주의를 뚫고 이 죄를 벗겨 줄 분이 필요하다. 요컨대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불만족이 마침내 치유될 수 있다. 그러려면 기적을 행하는 자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1.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일. 2. 주일에 마른 손을 고치신 예수.
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을까? 안식일은 상한 것을 회복시키는 날이다. 안식일은 마른 땅을 소생시키고 망가진 것을 고치는 날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른 손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안식일의 규정에만 얽매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들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 병자는 손만 말라 있었지만 그들은 마음이 말라 있었다. 그들은 사소한 규정으로 비판만 일삼았다. 왜일까? 바로 종교 때문이다.
두 사건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영적 패러다임을 보여 주셨다. 둘 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고 하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따르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자. 둘 다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하는데 한 사람에게는 순종이 짐이요 속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이요 선물이다. 한 가지 패러다임은 바로 종교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의 본질은 충고이다. 다른 패러다임은 소식으로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착하게 살아야 그분께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세부 사항은 천차만별이라도 대부분의 종교가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한다. 민족주의라는 종교에서는 민족의 구성원답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영성주의적인 종교에서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 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적인 종교에서는 행동 강령을 따르면 신에게 은총을 입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종교의 이면에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내가 잘해야 비로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 논리와 완전히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먼저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율법을 지키는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율법의 세부 항목에 연연한다. 종교에서는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소한 실수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율법의 의도는 뒷전이다. 율법의 세부 사항을 다 찾아내 율법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서 하나님의 법은 비록 구속력이 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우리 자신에게 매몰되는 대신에, 하나님과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고 닮아 가기 위해서이다. 지키기 편하도록 인위적인 세부 사항을 덧붙이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깎아내리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경악할 만한 선언이었다. 그 전까지 그 어떤 인간도 그런 주장을 펼친 적이 없었다. "나는 신성한 존재이다."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많았다. 그들은 인간은 물론이고 나무와 바위까지 만물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와 달리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계셨다. 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하셨으며 무한히 초월적인 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주를 운행하신다. 모든 분자와 별, 태양계들이 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유지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늘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르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된 포도나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여기서 "나는・・・이다(1 Am)"란 표현이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부르신 이름인 '스스로 있는 자(I Am)'와 같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너무도 신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입에 담지도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나는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본질적으로 이는 모든 죄가 그분에게 지은 죄라는 주장이다. 용서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 따라서 죄는 바로 하나님이 당하신 일이며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모든 선지자와 종교 지도자, 현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라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군가를 의지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에 이어진 모든 말씀의 이면에는 그분이 스스로 존재하는 창조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바리새파가 채택한 '전통적인 가치' 방식은 도덕의 준수를 강조한다. 이 방식에 따르면 완벽에 가깝게 살아야 한다. 헤롯당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을 중시한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이 두 방식 모두 스스로 구세주요 주인이 되려는 태도다. 둘 다 예수님의 메시지와 정면으로 대치한다. 뿐만 아니라 둘 다 자기 의로 이어진다.
도덕주의 진영은 이렇게 말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시대를 따르는 진영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생각이 트인 사람은 복을 받고 비판적인 고집쟁이는 벌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생각이 열린 사람들이다."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복음에 따르면 겸손한 사람은 용납되고 교만한 사람은 배제된다. 자신이 남보다 낫지도 생각이 트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고, 자신이 옳은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하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이런 복음의 논리가 드러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5-17). 예수님이 "의인"을 위해 오신 게 아니라는 말씀은 “의인"에게는 그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중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의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을 때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조언만이 아니라 개입을 원한다. "정말로 아프군요!" 이런 말만 할 줄 아는 의사는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약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르신다. 의인은 착하거나 도덕적인 행실로 스스로를 치유하여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영적 의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죄인은 어떤 사람인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겸손히 인정하는 사람이 죄인이다. 안식일의 주인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종교로부터 영원
히 쉴 수 있다.
한번은 영국의 유명한 목사 딕 루카스(Dick Lucas)가 설교 중에, 초대교회 성도와 이웃 로마인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웃 로마인이 말한다. "듣자 하니 종교인이라면서요? 종교는 좋은 것이지요. 당신 종교의 성전과 성지는 어디에 있나요?"
크리스천이 대답한다. "성전은 따로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성전이시지요."
“성전이 없다고요?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서 제사를 지내나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은 따로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시지요."
“제사장이 없다고요? 그러면 희생 제물은 어디서 드리나요?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잖아요."
"희생 제물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죠.”
"뭐 이런 종교가 다 있어?" 이웃 로마인이 툴툴거리며 간다.
맞는 말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 예수님은 마치 말썽쟁이 아이에게 하듯 폭풍을 꾸짖으신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놀라운 사실은 그 사나운 폭풍우가 착한 아이처럼 곧바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얼핏 '그치다'라는 표현과 '잔잔하여졌다'는 표현이 중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잔잔하여진 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다다. 그리고 '아주 잔잔하다'는 '죽은 듯이 잔잔하다'라는 뜻이다. 바다가 흔들림 없는 유리잔처럼 고요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바다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시자 바다가 그 정도로 잔잔해졌다. 사실 보통은 풍랑이 그쳐도 파도는 아주 오랫동안 계속해서 출렁인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칠 뿐 아니라 바다까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잠잠하라"고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단순히 너희에게 쉬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이 아니다. 나는 쉼 자체다." 이제 예수님은 행동을 통해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나는 단순히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나는 능력 자체다. 우주에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은 바로 내게서 비롯된 것이다."
얼마나 대담한 주장인가.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두 가지 선택사항이 있다. 첫째, 이 세상이 단순히 거대한 '풍랑'의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연, 맹목적이고 광포한 자연의 힘, 빅뱅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죽으면 우리는 먼지로 돌아간다. 못되게 살든 착하게 살든 어차피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 그분이 맞다면 삶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정말로 예수님이 풍랑의 주인이시라면 세상과 삶이 어떠하든 그분 안에서 필요한 모든 치유와 쉼, 그리고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기 전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풍랑을 잠재우고 나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다. 왜일까? 마가는 예수님이 깨시기 전에 배가 거의 침몰 직전이었다고 말한다. 배에 물이 꽉 차고도 계속해서 차올라서 제자들이 아무리 퍼내도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면 배에 물이 꽉 차 다 죽게 생겼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말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왠지 낯익은 장면이지 않은가?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인생의 배는 침몰해 가는데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만 같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 제자들은 투정을 부렸다.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막으셨어야죠.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해 주셔야죠.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애초에 저희를 이런 위험에 빠뜨리지 마셨어야죠. 풍랑을 잠재운 뒤 예수님이 "아이고, 많이 놀랐겠구나!"라며 제자들의 등을 다독거리셨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꾸짖으셨다. 제자들의 벙벙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왜냐고요? 왜 무서워했느냐고요? 배가 가라앉아 죽게 생겼는데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이 저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아 두려웠어요.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놔두실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 이면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다. "너희의 전제가 틀렸다. 너희가 더 잘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자들이 폭풍을 통과하도록 허용한다. 너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풍랑의 한복판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면 풍랑이 잠잠해진 후에는 더더욱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을 잠재우고 나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왜 제자들은 풍랑이 몰아칠 때보다 잠잠해졌을 때 더 두려워했을까? 예수님이 풍랑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풍랑의 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예수님의 힘은 풍랑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새롭게 인식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풍랑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를 마모시키고 파괴할 뿐이다. 오래 살면 누구나 몸이 쇠하여 죽고 만다. 지진이나 산불 같은 재난이 닥치면 더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자연은 맹렬하고 압도적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자연을 통제할 수 없다. 이 무시무시한 자연의 힘이 언제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도 통제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계획이나 논리에 따라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시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힘만 무한한 게 아니라 지혜와 사랑도 무한한 분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주체 못할 사랑을 품고 계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아울러 사랑을 제대로 알았다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생각이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쁜 일을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강력한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가르쳤던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정리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분은 내 예배와 섬김을 받으실 만하다. 오직 그분의 뜻 안에만 쉼이 있다. 그분의 뜻은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분의 뜻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25]
풍랑의 한복판에 서 있는가? 풍랑은 힘이 막강하며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은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다. 그분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최대치를 뛰어넘으신다. 하나님은 안전한가?
“물론, 그분은 우리의 안전지대를 벗어난다. 그 누가 안전함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은 선하시다. 그분은 우주의 왕이시다.”
*"기쁘긴 해요. 하지만 내가 진실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아서 기분이 살짝 나빴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단다. 그러니 많이 믿는 사람이 덜 믿는 사람을 너무 몰아쳐서는 안 돼. 너도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지도 몰라."
맥도널드의 말은 지극히 성경적이고도 중요한 말이다. 많이 믿는 사람은 덜 믿는 사람을 너무 몰아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믿음은 자질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이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을 때는 안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가야 한다. "믿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예수님께 가서 아뢰라.
"당신이 믿음을 주시는 분인 줄 압니다. 여태껏 믿음을 얻기 위해 고민하고 묵상하고 교회에서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믿음을 얻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믿음의 근원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게 믿음을 주세요." 그럴 때 예전부터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예수님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원천이요 공급자이시며 믿음의 대상이시다.
풍랑에 관한 이 구절을 읽으면 여느 구절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제자들은 늘 실패해서 비웃음을 자아낸다.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군!"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코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공감이 가는 점이 있다. 사나운 바람과 파도,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 가라앉기 직전의 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때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거친 풍랑 앞에서 침착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아직 없었던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있다. 밖에서 어떤 풍랑이 몰아쳐도 우리 안은 더없이 고요할 수 있다. 왜 그럴까? 힌트를 주겠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구약의 요나 이야기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예수님과 요나는 둘 다 배 안에 있었고 두 배는 모두 풍랑에 휩싸였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선원들이 잠자는 사람을 깨워 말했다. “우리가 죽게 생겼소." 두 경우 모두 기적적인 개입으로 바다가 잠잠해졌다. 게다가 두 경우 모두 선원들은 풍랑이 잠잠해진 뒤에 오히려 더 두려워했다.
이렇게 거의 똑같은 두 이야기에 딱 하나 차이점이 있다. 풍랑의 한복판에서 요나는 선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오. 내가 죽어야 여러분이 살 수 있소"(욘 1:12 참조). 그래서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집어던졌다. 하지만 마가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났나? 조금만 뒤로 물러나 나머지 이야기 전체를 보면 결국 이 두 이야기는 거의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바로 그분 자신을 지칭하신 것이었다. “내가 진짜 요나다." 이 말씀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언젠가 내가 모든 풍랑을 잠재우고 모든 파도를 고요하게 할 것이다. 내가 파괴를 파괴하고 죽음을 죽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바로 요나처럼 궁극의 풍랑이요 죄와 죽음의 파도인 십자가를 향해 몸을 던지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죽게 만들 수 있는 형벌의 풍랑 곧 십자가를 향해 우리 대신 몸을 던지셨다. 이 풍랑은 예수님이 몸을 던지신 후에야 비로소 잠잠해졌다.
*"예수님의 인내의 본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이는 첫 공도문 (Book of Common Prayer)의 저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부활절 전 종려주일에 사용하려고 쓴 기도문이다. 인내가 뭔가? 인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 내는 것이다. 인내는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계속해서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인내는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않고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힘들고 답답하고 다급할 때마다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다.
크랜머의 기도는 부활절 전주에 예수님의 희생적인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라는 점에서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 예수님은 적들과 십자가 처형 앞에서만 인내를 발휘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풍랑 속에서 그들을 얼마나 잡아 주셨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땅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인내를 보여 주셨다.
…
그 순간 야이로는 예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차분한 눈빛으로 야이로를 바라보며 안심시키신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막 5:36).”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를 믿어라. 인내해라.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문화마다 시간관념이 다르다.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면 그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30분 정도 늦어도 괜찮은 문화에서 자란 신랑과, 1분만 늦어도 눈살을 찌푸리는 문화에서 자란 신부의 결혼식을 상상해 보라.신부와 들러리는 벌써 결혼식장에 도착했는데 신랑은 결혼식이 15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결혼식장의 왼쪽 편에는 헛기침과 초조한 눈빛이 가득하다. 하지만 오른쪽 편은 마냥 들뜬 분위기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관념은 문화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시간표대로 진행되는 법이 좀처럼 없다. "나를 믿어라. 인내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야이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내가 풍랑을 잠재운 사건을 통해 풍랑 가운데에도 내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기다림 속에도 내 은혜와 사랑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 지체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지체하신 것이다. "내가 다 알아서 하마. 내 시간표를 너의 시간표에 맞추려고 하면 내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야이로와 같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많다.
우리 눈에 예수님의 지체는 불합리하고 터무니없고 황당해 보인다.
*당연히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이로는 딸의 소생이 아니라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을 모셔 온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받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내드려야 한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오셔서 딸아이를 치료하실 수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큰 믿음을 요구하셨다. 딸이 죽은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야이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믿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의 시험이었다.
이번에는 병든 여자를 보라. 여자는 고침을 받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다. 여자는 그저 예수님을 만지고 나서 서둘러 사라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자를 그냥 놔두지 않고 사람들 앞에 서게 하였다. 여자에게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앓던 혈루는 종교의식상 부정하게 취급을 받던 병이었다. 따라서 혈루 환자가 공공장소에서 랍비를 만지는 것은 금기를 깨뜨리는 행위였다. 그러니 누구인지 찾으시는 예수님의 요구는 아주 무섭게 들렸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녀를 사람들 앞에 서게 했을까?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지만 다소 미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여자는 예수님을 만지기만 하면 나을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자신을 밝히게 한 다음 "아니다. 너를 구한 것은 믿음이다"라며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다. 이제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으로 가 보자.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3-34).”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치료한 것이다. 이제 네 삶을 변화시키는 나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육체가 치유받은 미신적인 사람과 인생이 바뀌어 영원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모든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 가면, 애초에 드리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요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오셔서 그의 딸이 단지 자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에 해당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분명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셨다. 야이로의 딸은 죽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상태를 잠이라고 칭하신 걸까?
답은 예수님의 다음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소녀 곁에 앉아 손을 잡고 두 마디 말씀을 하신다. 첫 번째 마디는 '소녀'란 뜻의 "달리다(talitha)" 다. 하지만 '달리다'를 '소녀'로만 해석하면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달리다'는 정이 듬뿍 담긴 애칭이다. 엄마가 딸을 부르는 애칭이기 때문에 '얘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다. 두번째 마디는 '일어나라'를 뜻하는 "굼(koum)"이다. “다시 살아나라"가 아니라 "일어나라.” 마치 부모가 밝은 아침에 딸을 깨우는 분위기다. 예수님이 침대 맡에 앉아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얘야. 이제 일어나야지." 그러자 소녀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난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장 거칠고 가장 가혹한 적인 죽음을 이렇게 대하셨다. 예수님은 권능의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으키셨다. “얘야, 일어나렴.”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네 손을 잡고 있으니 죽음은 그저 잠일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강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충만하다. 어릴 적에는 부모의 손을 잡고 나가기만 하면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쁜 부모도 있고, 좋은 부모라도 완벽하지는 못하다. 심지어 최고의 부모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완벽한 부모시다. 그분이 우리의 손을 잡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길을 함께 걸어 주신다. 하늘에 별을 다신 우주의 주인이 우리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얘야, 이제 일어나야지."
왜 우리는 이토록 자상하고도 강하신 분을 재촉하는가? 왜 우리는 이런 분을 믿지 못하고 조급해하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칠흑 같은 밤길을 함께 걸어 주신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13장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나신 덕분에 우리 역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려고 약해지셨다. 어린아이에게는 넓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서 부모의 손을 놓치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놓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치셨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이 아버지의 손을 놓치신 덕분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한 번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토머스 크랜머가 종려주일 기도문을 쓴 이유다. 사실, 기도문의 전문은 이렇다. "예수님의 인내의 본을 따르고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면류관으로 가는 길이 반드시 십자가를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부활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지나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병든 여인을 치유하신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또 다른 그림자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힘을 주기 위해 힘을 잃으셨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기 위해 단순히 힘이 아니라 목숨 자체를 잃으셨다. 우리에게 능력과 생명을 주시기 위한 길은 약함과 죽음을 지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을 재촉하고 있는가? 기다림에 조바심을 내고 있는가? 그러지 말고,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믿고 따라가는게 어떤가? 예수님이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실지 알고 계신다. 곧 일어나야 할 때가 올 것이
다. 예수님처럼 인내하며 기다렸다가 부활에 참여하자.
*악한 행위(손과 발이 의미하는 것)와 악한 욕망(눈이 의미하는 것)은 마치 거실에서 발화한 불과도 같다. 소파의 쿠션에 불이 붙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서 "괜찮아. 쿠션에만 불이 붙었을 뿐이야"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화마가 집 전체를 집어삼키기 전에 재빨리 쿠션의 불을 꺼야 정상이다. 불은 만족할 줄 모른다. 연기조차도 피어 오르게 놔두지 말아야 한다. 한쪽 구석에만 불이 났다고 방심해서는 곤란하다. 가만히 두면 집안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버린다. 죄도 마찬가지다.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과의 분리로 이어져 결국에는 막대한 고통을 낳는다. 먼저 이생이 힘들어지고 종국에는 내세를 망친다. 성경은 내세의 고통을 지옥이라 부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사지절단이라는 끔찍한 표현을 쓰신 것이다.
타협은 있을 수 없다. 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발이 죄를 짓게 만들면 잘라 버리고, 눈이 죄를 향하면 뽑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우리를 가장 부정하게 만드는 요인은 발이나 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마음이 문제다. 발이나 눈이 골칫거리라면 고통스럽긴 해도 잘라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마음은 잘라 버릴 수가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외적인 해법으로는 영혼을 다룰 수 없다. 바깥만 청소해서는 소용이 없다. 문제의 대부분은 안에서 비롯한다. 외향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치장해도 자신이 불결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또 다른 외적 해법은 대중문화다. 크리스티나 켈리(Christina Kelly)는 고백의 글을 발표했다.
“왜 우리는 유명인들에게 열광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유명인들을 숭배하고 그들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우리는 자신의 초라한 삶을 탈출하기 위해 유명인들에게서 대리 만족을 얻으려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완벽한 화장과 성형수술, 지방흡입술로 만들어진 스타들 앞에서 절대적인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열등감만 느낄 뿐이다. 열등감으로 인해 스타들을 숭배하지만 그래 봐야 열등감만 더 심해질 뿐이다. 우리가 스타들을 만들면 스타들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나는 편집자로서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 일과가 끝나면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왠지 카프카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 열등감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대중문화는 이렇게 속삭인다. “깨끗해질 방법이 있어. 예뻐지면 돼.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만들어 봐. 외모를 바꿔봐. 날씬해져. 유명인들처럼 꾸며 봐.” 하지만 크리스티나 켈리는 정작 유명인들도 열등감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열등감 덩어리들을 보며 자신의 열등감을 한층 더 키운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외적 해법은 통하지 않는다.
종교나 정치, 대중문화만이 외적 해법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외적인 해법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애쓴다. 기독교 목회마저도 외적 해법으로 전락했으니 그야말로 누구도 예외가 없다. 사람들이 왜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가? 거룩한 열정? 맞는가? 몇 해 전에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이 신학생들을 위해 쓴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설교하지 말라." 당시 이십대였던 나는 그 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설교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 하지만 목회를 몇 해만 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교회의 몸집이 커지고 성도들이 나를 좋아하면 우쭐해진다.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성도들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 초라해진다. 한마디로 우리는 외적인 해법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며 나를 좋아해 주면 하나님도 나를 좋아해 주실 거야. 그러면 자신감이 솟고 나 자신이 불결하다는 생각이 사라지겠지."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래전 로마서 1장 17절의 이 말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설교로 의로워지려는 자는 주일마다 죽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착한 행실로 자신을 조금이라도 씻어 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다고 못 박아 말했다.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렘 2:22). 외적인 해법으로는 인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스가랴가 보니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배설물에 뒤덮인 채로 지성소 안에 서 있었다. 더러워도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스가랴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딜러드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대제사장이 그런 꼴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딜러드의 답은 이러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그분의 시각을 보여 주신 것이다. 아무리 착하고 도덕적이고 순결해지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지나 속을 보신다. 우리의 속마음은 어떠한가? 배설물로 가득하다.
모든 도덕과 선행은 마음까지 뻗어 가지 못한다. 스가랴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스가랴는 좌절하기 직전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4, 8-9). 분명 스가라는 심히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스가랴야, 이것은 예언이다. 언젠가 희생 제물이 완성될 것이다. 정결법이 완벽히 이루어질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딜러드는 다음과 같이 설교를 마무리했다. 수세기 뒤에 또 다른 여호수아, 또 다른 예수아가 나타났다. 예수, 예수아, 여호수아, 이 셋은 같은 이름의 아람어와 헬라어, 히브리어다. 또 다른 여호수아가 나타나 자신의 속죄일을 준비했다.
일주일 전 예수님은 준비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전날 밤에 잠드시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 일어난 일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일어난 일과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격려하지 않았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거의 다 그분을 배신하거나 버리거나 부인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자 아버지는 격려의 말을 건네기는커녕 가차 없이 그분을 버리셨다. 깨끗한 옷을 입기는커녕 입고 있는 옷마저 찢기고 두들겨 맞다가 벌거벗은 채로 죽임을 당하셨다. 딜러드에 따르면 그분도 목욕을 하셨다. 단, 깨끗한 물이 아닌 인간의 침으로 뒤범벅이 되셨다. 왜일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은 예수님께 죄의 옷을 입히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벌을 대신 받으셨다. 덕분에 우리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처럼 요한계시록 19장 7-8절에 기록된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히브리서 13장은 예수님이 성문 밖 시체를 태우는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한다. 쓰레기 더미라니, 더없이 더러운 곳이 아닌가. 덕분에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대가를 치르신 덕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히 깨끗하고 값진 옷을 입혀 주셨다. 그 대가는 바로 그분의 피였다. 우리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보혈뿐이다.
과거에 저지른 실수 하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가? 평생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는가? 카프카처럼 특별히 악하지도 않으면서 열등감과 싸우고 있는가? 종교나 정치, 아름다운 외모로 이 열등감을 치유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심지어 기독교 목회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가? 하지만 외적인 노력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당신의 치명적인 '행위'를
예수님의 발치에 던져 놓지 마라.
그분 안에, 오직 그분 안에만
영광스럽고 온전히 서라.
*수로보니게 여인 – 제임스 에드워즈는 이렇게 썼다.
“여인은 이스라엘 메시아의 목적을 이스라엘의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여인의 담력과 끈기는 예수님의 족하심과 풍부하심을 굳게 믿는다는 증거다. 여인은 제자들과 이스라엘을 위한 예수님의 공급하심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몫이 있을 만큼 넘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예수님은 선별한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갖은 애를 쓰셨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고 우둔하기만 하다. 예수님은 하찮은 이방 여인에게 말도 섞지 않으려 하신다. 하지만 겨우 한 문장 뒤에 이 여인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분의 확실한 칭찬을 받는다....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이 여인이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이해한 첫 번째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인이 예수님과 똑같은 비유로 대답한 것은 그녀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첫 번째 인물임을 의미한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만남에서 복음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이 여인처럼 우리도 생각보다 훨씬 더 악하지만 감히 소망할 수도 없는 사랑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인은 자신의 자격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교만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직언을 겸허히 인정했다. "어찌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참을 수 없어요!" 이렇게 따지고 들지 않았다. 혹시 당신은 예수님께 수없이 따지지 않았는가? 또 한편으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낙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잡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교만해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열등감이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리가 없어!"라고 말한다. 그런 태도로는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목사였던 존 뉴턴(John Newton)은 매우 낙심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극심한 죄책감과 열등감에 시달린다고요? 물론 자기 안의 악을 의식하는 건 좋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의식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것 같군요.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처럼 형편없는 사람을 받아 주실 리가 없다고 했죠? 그러면서 자신을 하찮게 여겼죠? 물론 우리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구속자의 인격과 사역, 약속까지 하찮게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당신은 죄 때문에 불평을 했죠. 하지만 당신의 불평을 가만히 들어보면 자기의와 불신, 교만, 조바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불평하는 최악의 악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그분의 용서를 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큰 잘못이다. 토머스 크랜머가 쓴 성찬에 관한 기도문은 영어 기도문 중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 첫 공도문에 포함된 이 기도문은 마가복음의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으며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고백되었다.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자비하신 주님의 크신 자비를 통해 당신의 이상 앞에 나아옵니다. 우리는 당신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자격조차 없지만 당신은 늘 자비로운 주님이십니다.”
크랜머는 이 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이 여인처럼 자격이 없어도 담대히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촉구하고 있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직언과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라.
*여인이 딸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아리송하고 신비스러웠다. 맛으로 치자면, 떫다고나 할까. 반면,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남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나사로가 죽은 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가셨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그렇게 말했다가 예수님께 꾸지람만 당했다. 그런데 마리아가 똑같은 투정을 부렸을 때는 예수님이 함께 울어 주셨다. 같은 말에 반응은 천양지차로 달랐다. 이유가 뭐였을까?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신다. 그야말로 기묘자요 모사시다.
예수님은 귀머거리요 벙어리인 이 남자의 아픔을 그대로 느끼셨다. 예수님이 그의 귀와 입을 만지신 것은 일종의 수화였다. "여기를 치료하자. 두려워하지 마라. 이번에는 여기를 치료해야겠다. 자, 하나님을 보자." 예수님은 이 남자의 세계로 들어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셨다. 남자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셨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왜 그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셨을까?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라. 그는 늘 구경거리였다. 귀머거리라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던 남자.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놀려 댔을까? 예수님은 이 점을 잘 알기에 이번만큼은 그가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뼈저리게 느끼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공감은 더 깊은 차원까지 들어갔다. '깊은' 탄식. 탄식보다는 신음 소리로 번역해야 더 옳다. 신음은 고통의 표현이다. 왜 예수님은 고통스러워하셨을까? 이 남자의 소외감과 고립감을 깊이 느끼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치료하실 참이지 않은가? 왜 예수님은 씩 웃으며 "기대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한층 더 깊은 차원의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 남자를 치유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대가를 떠올리셨기 때문이다.
*마가는 "귀 먹고 말 더듬는"이란 부분에 일부러 특이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 대가를 암시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모글리라로스(moglilalos)'는 이 구절 외에는 성경 전체에서 이사야서 35장 5절에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마가가 이 희귀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일부러 이사야서 35장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너희를 구하시리라..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4-6). 마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 보이는가? 귀가 열리는 것이 보이는가?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는 것이 들리는가? 이사야서 35장에서 약속된 대로 하나님이 오셨다.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왕이시다."
마가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사 보복하시며"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검을 빼들지 않으신다. 그분은 권력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닥까지 낮아지신다. 그분은 세상을 취하기는커녕 섬기신다. 보복은 다 어디로 갔는가? 답은 빤하다. 그분은 보복하러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보복을 당하러 오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우리의 처지가 되셨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부스러기조차 없이 상에서 완전히 내침을 당하셨다.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우리는 입양을 받아 그 상 앞에 앉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아들딸의 자격으로 상에 앉도록 만들기 위해 아들이 개가 되셨다.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의 처지가 되신 덕분에 우리는 얼마든지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같은 개가 상에 앉을 수 있도록 아들이 개가 되셨다. 우리의 혀가 풀려 그분을 왕이라 부를 수 있도록 그분이 벙어리가 되셨다. 그분의 치유가 미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우리는 모두 자격이 없다. 이런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교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라고 말씀하신다. 그 전까지는 메시아와 고난을 연결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구약을 보면 고난을 받을 신비로운 주의 종에 관한 예언은 많다(예를 들어, 이사야서 43, 44, 53장). 하지만 예수님 이전에는 그런 예언을 메시아의 소망과 연결 지은 사람이 없었다.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악과 불의를 종식시키고 세상만사를 바로잡아야 할 인물이 고난이라니. 고난을 받다가 죽으면 어찌 악을 이길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궤변처럼 보인다.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또한 이 표현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을 계획이시다. 분명 이 말씀이 베드로의 심사를 가장 세차게 뒤흔들었을 것이다. 싸우다가 죽는다면 모르되 아예 죽으러 오셨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베드로가 항변한다. 여기서 항변에 해당하는 동사는 예수님이 귀신들을 꾸짖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예수님께 대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불러 놓고 곧바로 대들 만큼 흥분한 이유는 뭘까? 베드로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메시아가 강림하여 악과 불의를 끝내고 보좌에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황당한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메시아요 왕이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왔다. 나는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을 잃기 위해서 왔다. 내 목적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악을 무찌르고 세상만사를 바로잡기 위해 사용할 방법이다."
인자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보건대, 고난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버림을 당해야 한다. 죽임을 당해야 한다. 부활해야 한다. 단순히 "나는 죽으러 왔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죽어야 한다. 내 죽음은 필연적이다. 내가 죽지 않으면 세상과 네 삶이 새로워질 수 없다." 왜 예수님의 죽음은 필연적이어야만 했을까?
우리에게는 진짜 사랑이 필요하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차이는 이렇다. 가짜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짜 사랑에는 조건이 붙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준다. 가짜 사랑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즉시 몸을 뺀다. 하지만 진짜 사랑의 목적은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이 사랑을 준다. 진짜 사랑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이다. 아낌없이 전부를 내주는 사랑이다.
그런데 반스톤은 세상에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절실히 원하지만 서로에게 그런 사랑을 줄 수는 없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어느 정도 가짜다. 왜 그럴까? 우리가 공기와 물을 필요로 하듯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는 어느 정도 이해타산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물론 개중에는 사랑하는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반스톤의 말이 옳다. 우리는 모두 진짜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 조건 없이 파격적으로 사랑해 줄 분,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 줄 분. 이런 사랑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자존감이 충만해져 비로소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눠 주기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줄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삼위일체의 춤이 기억나는가? 아버지와 아들, 성령은 영원 전부터 서로를 완벽히 사랑해 오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을 자체적으로 주고받으실 수 있다. 인간에게는 부족한 사랑이 하나님 안에는 충만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선택 사항은 용서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불같이 일어나는 복수심을 꾹 누르면 속병이 생기기 쉽다. 용서란 고통스러운 결단이다. 내 평판은 땅에 떨어졌는데 상대방의 평판은 승승장구하는 꼴을 봐야 한다. 남이 잘못한 대가를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이처럼 진정한 용서란 고통이 따른다.
이렇듯 잘못의 대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방이든 나든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용서를 통해 내가 대가를 치러야 잘못을 바로잡을 여지가 생긴다. 복수심을 가득 품고서 나무라 봐야 참회하며 고개를 끄덕일 가해자는 별로 없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내가 복수심을 누르고 스스로 용서의 대가를 치러야 그나마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잘못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당장 잘못에서 돌이키지 않더라도 용서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효과가 있다.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내가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너희 아니면 내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죄의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죽으셔야만 했다. 하지만 그냥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실 수는 없었는가? 그냥 인간의 몸이 노쇠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셔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폭력에 의한 죽음이어야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라고 말한다. 이는 기적에 의한 피 흘림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피'는 자연적인 죽음 이전에 목숨을 내주거나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숨은 이세상에서 치를 수 있는 가장 비싼 대가다. 예수님이 목숨을 내놓으셔야만 죄의 빚이 청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빚 청산이 아니었다. 일종의 폭로이기도 했다. 성경학자 제임스 에드워즈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은 거대한 아이러니를 숨기고 있다. 사실, 인자의 고난과 죽음은 사람들의 예상처럼 불경하고 악한 사람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장로와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분노한 폭도나 범죄자에게 맞아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분은 공식 영장을 통해 체포되고 지도층의 질투 속에서 심문과 처형을 당하셨다. 다시 말해,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법정(principia juris Romanorum)이 예수님을 죽였다.
유대 대제사장과 서기관, 로마 통치자들은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뒤로는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 불의를 자행했다. 십자가는 정의와 진리가 아닌 권력과 압제를 추구하고 부패를 일삼는 세상 체제의 진면목을 폭로한다. 세상의 지배자들은 예수님을 유죄 판결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유죄를 드러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추태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의 속성도 드러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분이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아들인 덕분에 그분과 우리를 옭아매던 죽음의 마수가 풀렸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어 용서를 이루셨다. 그분은 맞불 작전을 펼치지 않으셨다. 부패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지 않으셨다. 권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낮아짐으로써 승리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권력 추구와 남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세상 권력은 패배했다. 세상 체제의 마법이 깨졌다.
세상의 부패 권력은 많은 도구로 사람들을 겁주고 있으며 그중 가장 무서운 도구는 죽음이다. 언제라도 우리를 죽일 수 있는 대상 앞에서 우리는 겁을 먹고 그 대상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니 그분을 만난 사람에게는 최악의 죽음조차도 최상의 선물일 뿐이다. "얘야, 이제 일어나렴." 죽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죽음은 무시무시한 힘을 잃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온 천하를 얻어도 존재 깊은 곳에 묻은 공허함의 때를 지울 수는 없다. 세상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남의 사랑이나 직업적 성공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그런 것이 무너지는 순간 살아갈 의지도 잃는다.
예수님이 얼마나 파격적이신지 이제 알겠는가? 이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 나는 부도덕해. 그러니까 이제 교회에 가서 도덕적이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어." 하지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도 역시 성과 중심의 방식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과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짓은 그만둬라. 내가 전혀 새로운 방식을 알려 주마. 낡은 정체성을 내던져라. 그리고 나와 복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라.”
나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정말 좋다.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머리로만 알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머리로 알고 결심해서 존재 깊이 변화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열쇠는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게 이론만 배워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 삶을 봐야 한다. 나는 십자가로 갔다. 너희가 생명을 얻도록 내가 십자가 위에서 내 생명을 잃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이런 사랑을 받고 존재 깊은 곳에서 감동을 받으면 자신의 성과나 외모, 재력 혹은 남들의 사랑과 상관없는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는다. 이 주제를 C. S. 루이스만큼 잘 풀어낸 사람도 없다. 루이스는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의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루었다.
'자기'를 비우고 그분을 채울수록 더욱 진정한 자신이 되어 간다....진정한 자기가 그분 안에서 우리를 내내 기다리고 있다. 그분을 거부하고 자기 맘대로 살려고 할수록 자신의 전통과 태생, 환경, 육체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사실 내가 자랑스럽게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출발시키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는 사건의 열차들이 모이는 집결지에 불과하다. '내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 육체적 기관들이 일으키거나 남들의 생각을 통해 주입된 욕망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얻는다.(그럼에도)(새로운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는 말아야 한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한, 전혀 그분께 나아간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신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 것은 사실상 그분께 나아간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은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대상이다. 예수님을 추구할 때 진정한 자신은 덤으로 따라온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하자 베드로는 그분이 아닌 자신을 위해 화를 냈다. 베드로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에 고난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자 베드로는 참지 못하고 항변한다. 자신만의 목적을 세우면 예수님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분을 이용하지 않는다. 감히 왕 앞에서 흥정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뭐든 명령만 하세요"라고 말할 뿐이다. 예수님은 그냥 왕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왕이시다. 보좌에만 앉은 왕에게는 의무감으로 복종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왕이시다. 그래서 그분께는 사랑과 신뢰에서 우러나와 복종할 수 있다. 자신을 완전히 내주신 분께 어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 삶에 대해 죽는다는 뜻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현재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예수님이 이 땅으로 돌아오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세대가 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 말씀을 소중히 여겼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약하게(십자가 위에서) 시작되지만 약하게만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힘을 경험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랑과 섬김, 영향력이 자라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포기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구주가 필요하다는 겸손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를 대신 갚음으로써 의의 조건을 채워 줄 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하셨다. 먼저 약한 인간이 되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달리셨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우리도 약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돌아와 우리를 회복된 세상으로 데려가실 때 사랑이 미움을 완전히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이길 것이다.
C. S. 루이스는 '목숨을 얻기 위한 버리기'에 관한 글을 다음과 같이 끝맺음했다.
자신을 포기하면 진정한 자신을 얻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구원하리라. 죽음, 즉 매일 자기 야망과 소원의 죽음, 결국에는 몸 전체의 죽음에 온전히 순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무엇도 움켜쥐지 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부활할 수 없다. 자신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미움과 외로움, 절망, 분노, 파멸, 부패만 얻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면 그분을 찾을 뿐 아니라 나머지도 덤으로 따라온다.
정말로 춤이 존재한다면 정말로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는 왕이 계시는 셈이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가 스스로 씻을 수 없는 더러움이 있다면 반드시 십자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때 모세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8-23).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근처에만 갔는데도 모세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여 환히 빛났다.
이제 수세기가 지나 또 다른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눈부신 광채 때문에 예수님의 옷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 산꼭대기,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심지어 모세의 출현까지 비슷하다. 시내 산의 사건이 재연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모세는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듯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을 스스로 만들어 내셨다. 엘리야나 모세 같은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의 영광 자체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표현을 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또 시내 산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여기서는 일어났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면전에 서고도 죽지 않은 것이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구름의 형태로 강림하셨다. 이것을 '쉐키나의 영광'이라 불렀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했던 지성소에 쉐키나가 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임재가 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이 말씀은 신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격차가 있다는 뜻이다. "너희는 나의 실재를 감당해 낼 수 없다. 너희는 나의 거룩함과 영광을 견뎌 낼 수 없다. 나를 직접 보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변화되신 산에서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이유다. …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보호해 줄 성막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즉시 구름이 나타나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뒤덮었다. 그리고 쉐키나 영광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셨기 때문이다. 엘리야와 모세, 아니 그 어떤 인간도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춤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성전과 성막을 필요 없게 만든 궁극의 성전이요 성막이시다. 예수님은 더 이상 희생 제물을 필요 없게 만든 궁극의 희생 제물이요 모든 제사장에게 나아갈 방향을 보여 준 궁극의 제사장이시다.
*구름이 내려왔을 때 제자들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였다. 마가복음의 초반부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처럼 제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에게 쏟아 내시는 사랑의 표현을 두 귀로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이 사라지고 제자들은 눈부신 광채가 사라진 산꼭대기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바로 '예배'를 경험한 것이다.
예배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술이나 연애나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나 가족에서 그 갈망을 찾는다. C. S. 루이스는 유명한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에서 나그네 취급을 받는 느낌. 인정받고 무시당하지 않고 자신과 현실 사이의 넓은 틈을 이으려는 욕구. 이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비밀 중 하나다. 바로 이 점에서 영광의 약속이 더없이 소중하다. 영광이 하나님과의 좋은(관계), 하나님의 인정, 반응, 칭찬, 진정한 환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생 두드려 왔던 문이 마침내 열릴 것이다. 우리는 평생 향수병에 시달린다. 우주의 뭔가에서 분리된 느낌을 안고 살아가며, 이 뭔가와 다시 연합하기만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평생 밖에서만 봐 왔던 문 안쪽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있다. 단순히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질적인 상황을 가장 정확히 보여 주는 지표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바깥에 있다. 문의 잘못된 쪽에 있다. 하지만 신약의 나뭇잎들은 우리가 언제까지 그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문으로 바스락거리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우리는 들어갈 것이다.
예배는 단순히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산에 올라가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을 믿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머리로 믿는 바를 몸으로 느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은 C. S. 루이스가 말한 갈망의 대상 곧 하나님의 얼굴과 포옹을 미리 맛본 것이다.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19-29).”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기도 없이' 애를 썼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가.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의 악과 고통을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기도 없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한 것이나 원인은 하나다. 자신들이 얼마나 약하고 교만한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악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들의 힘은 과대평가했다.
그 현장에는 서기관들도 있었다. 아마도 제자들을 비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현장에서 자기 힘으로는 눈앞의 악과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고 인정한 사람은 소년의 아버지밖에 없었다.
"제 아들을 치료해 주세요." 아버지가 말하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자 아버지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에 가득한 의심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치료해 주셨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예수님이 계시니 우리는 완벽히 의롭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니 네 마음을 청소하고 네 모든 죄를 고백하고 네 모든 의심을 없애라. 그렇게 더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내게 오는 자만이 치유를 부탁할 자격이 있다." 아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제 안에는 의심이
가득합니다. 제 도덕적, 영적 능력은 보잘것없습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구원하는 믿음이다. 우리에게 완벽한 의는 불가능하다. 완벽한 의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평생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자신이 의롭지 않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게 된다.
*하지만 곧 닥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고서 이 현장을 떠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영광 속에서 끝없는 세월을 사셨다. 산 위(변화산)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뒤덮이셨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실 것이다. 산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누리셨던 삶을 엿보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빛에 둘러싸인 삶이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벌거벗은 채로 어둠 속에 서실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셔야 했는가? 우리를 위해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5)고 말했다.
예수님은 힘든 사명이 있었다. 모든 악을 이기기 위해 감내해야 할 지독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산 위에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강하게 만드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힘을 주시어 악에 맞서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신
다.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가? 때로 성령이 그 사랑을 특별히 더 깊이 느끼게 하신다. 때로 우리는 산 위로 가게 된다. 때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무조건적이고도 영원하며 지극히 친밀한 사랑의 음성을 듣는다.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그분의 속삭임을 듣는다. "너는 내 딸이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한한 대가도 치르고 끝없는 나락으로도 떨어질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했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 바로 그것이 예배다. 하나님의 포옹을 느낄 때마다 우리 영혼은 그분의 반사된 영광으로 조금씩 더 밝아지고 조금씩 더 강한 모습으로 인생을 대처해 나간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청년의 이 말을 해석하면 이렇다. "제 모든 재산은 정의롭고 공정하게 쌓은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죄를 지은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라고 쏘아붙이지 않으셨다. 물론 재물을 악하게 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절제와 비전과 끈기 같은 미덕을 통해 부를 얻을 수도 있다. 보다시피 예수님은 부축적 자체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갖고 계시지 않다. 예수님은 돈을 갖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
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나라마다 이런 표현이 있다. 가령 '눈덩이 같은 확률'이 그런 표현이다. 눈덩이가 뜨거운 곳에서 녹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부가 죄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부자가 다 나쁜 것도 아니요 가난한 자가 다 착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단순한 논리를 펼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탐욕에 빠지지 말고 가끔씩 베풀며 살라는 뜻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모두가 죄인이지만 돈이 특히 죄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돈의 기만적인 힘은 엄청나다. 그래서 돈에 눈이 멀면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한다. 부의 한복판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적이고도 은혜로운 개입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서 부자 청년이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저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돈도 많이 벌었고 높은 지위에도 올랐어요. 도덕도 잘 지키고 종교에도 열심을 다했어요. 예수님이 훌륭한 랍비라고 들었어요. 제게 혹시 뭔가 빠진 게 있나 궁금해요. 제가 빼먹은 게 있나요? 아무래도 뭔가가 빠진 것 같아요."
물론 그는 뭔가를 빼먹었다.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어도 공허함과 불안감과 의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똑바로 살아도 어딘가 모르게 불완전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뉴욕의 거리를 걷다 보면 흠 한 점 없이 깨끗한 얼굴을 수없이 만난다. 성희롱으로 체포될 각오로 몇 사람에게 "정말로 보이는 것 처럼 흠이 하나도 없나요?"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매일 그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작은 상처와 흠을 본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흠을 가리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였기 때문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흠이 있다.
돈이며 명예까지 세상에서 이룰 것은 다 이루고 나이까지 어린 청년이다. 하지만 공허함을 견딜 수 없어 랍비와 선생을 찾아다니며 묻는다. "뭔가가 부족해요. 그게 뭔지 아시나요? 정말 많은 일을 이루었는데 아직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은 것 같아요. 제 영적 이력에 무엇을 추가해야 할까요? 시키는 대로 다 할 자신이 있어요. 말씀만 하세요."
그런데 예수님의 주문은 너무도 뜻밖이다. 예수님은 먼저 잽을 날리신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것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나는 선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나를 한낱 랍비로 생각하고 와서는 어찌 선하다고 하느냐? 네가 생각하는 선과 악의 개념은 문제가 많다." 예수님의 잽에 청년은 턱이 얼얼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곧 이어 카운터펀치가 날아온다. 예수님은 청년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더 나아가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풀이하면 이렇다. "나를 따르고 영생을 얻고 싶다면 당연히 간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남을 속이거나 살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나쁜 짓만 회개하면 기껏해야 종교적인 사람만 될 뿐이다. 정말로 영생을 얻고 싶으냐?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싶으냐? 허전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으냐? 존재의 때를 어떻게 지워야 할지 모르겠느냐? 그렇다면 네가 받은 선물을 지금과는 다르게 사용해야 한다. 여태껏 너는 좋은 것들을 잘못 사용해 왔다. 그 점을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네 부와 성과에 믿음을 두고 있구나.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리더로만 여길 뿐 구세주로 삼지는 않고 있구나. 어떻게 아냐고? 돈 없이 산다고 생각해 봐라. 유산, 통장, 하인, 저택까지 전부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았다고 생각해 봐라. 그래도 행복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처방에 청년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슬픈"은 '비탄에 잠겨'로 번역해야 더 옳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예수님에 대해 쓰인 적이 있다. 마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극심한 비탄에 잠겨 피의 땀을 흘리셨다고 말한다. 왜 그러셨을까? 곧 궁극의 고난을 당할 줄 아셨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을 줄 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잃을 줄 아셨기 때문이다. 영적인 중심을 잃을 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라고 하자 청년은 비탄에 잠겨 떠나갔다. 예수님께 아버지가 전부라면 청년에게는 돈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에게 돈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나님을 리더요 도덕 선생으로만 삼는다면 모르지만, 하나님을 구세주로 삼고 싶다면 현재의 구세주를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구세주를 갖고 있다. 당신의 구세주는 무엇인가? 돈인가? 하나님인가?
크리스천이 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죄를 뉘우친 뒤에는 인생의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았다는 사실을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싶은가? 뭔가 허전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이 청년의 문제점은 재물이라기보다는 도덕성이다. 청년은 나름대로 도덕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도덕성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자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자신의 도덕성에 소망을 두었다면 속히 회개해야 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오히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일 때가 많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보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아는가?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왜 갑자기 예수님의 마음에 사랑이 그득해졌을까? 물론 예수님은 원래 사랑 자체시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특정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수님이 자질을 보고서 이 청년을 사랑하셨을까?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셨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
당시 아마도 서른하나쯤 되셨을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셨다. 예수님도 부자 청년이시다. 이 청년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부자시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의 불가해한 영광, 부, 사랑, 기쁨 속에서 사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막대한 부를 이미 버리셨다. 바울은 예수님이 부유하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고 말한다(고후 8:9).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가난해졌다. 내 전부를 내주었다. 왜인줄 아느냐? 바로 너를 위해서다. 이제는 네가 나를 따르기 위해 전부를 내놓아라. 내가 너를 얻기 위해 '큰 것'을 전부 내놓았으니 너도 나를 따르기 위해 '작은 것'을 전부 내놓아라. 내가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은 일을 너에게 시키지는 않는다. 나는 너를 얻기 위해 진정한 부를 버린 진정한 부자 청년이다. 이제 네가 나를 얻기 위해 너의 부를 버려라.”
예수님이 진정한 부자 청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돈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고민하기보다는 돈을 나눠 줄 방법을 더 고민하게 된다. 진정으로 후한 사람이 되려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내가 십자가에서 행할 일을 보고 돈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지는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감동이 되고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면 함정을 피할 소망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에 진정으로 감사하면 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과 돈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돈을 움켜쥘 수도 있고 후히 나눠 줄 수도 있다. 돈의 부정적인 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전부를 내주신 진정한 부자 청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능력은 권력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나처럼 권력과 돈을 아낌없이 나눠 주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
*(예수 죽음의 세 번 말씀 중)이번에는 전보다 더 자세히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분을 버릴 것이라는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 나온다. 8장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란 말만 나오고, 9장에서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식으로 뭉뚱그린 정보만 나타난다. 8장에서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라고만 나오지만 10장에서는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라고 나온다. 이는 예수님이 형사 사법 시스템을 통해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하신다는 뜻이다. 또한 고난에 관한 묘사도 더욱 적나라해 졌다.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예수님은 단 세 장안에 자신의 죽음을 세 번이나 언급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부수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사건으로 보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가복음 10장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죽음의 이유까지 밝히셨다는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주러 오셨다. 예수님이 다른 모든 주요 종교의 창시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여느 종교 창시자들의 목적은 모범적으로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희생 제물로 '죽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온 것"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신 것은 그분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으로 '오셨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라는 말씀에는 예수님이 원래 누구보다도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마지막 문장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이유를 요약한 문장이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에서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anti)'는 '~대신'을 뜻한다. 대속물이 무엇인가? 대속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루트론(lutron)'은 '노예나 죄수의 자유를 사는 것'을 뜻한다.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사 주려면 막대한 비용을 치르거나 그의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했다.
예수님은 이런 몸값을 치르기 위해 오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해결하려는 노예 상태는 우주적인 악이기 때문에 우주적인 몸값이 필요했다. "너희가 치를 수 없는 몸값을 내가 치르겠다. 네게 자유를 사주겠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십자가로 걸어가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는 것뿐이었다. "다 용서해 줄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용서가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그냥 "빛이 있으라"라고 하시니까 빛이 생겼다. 하나님이 "식물이 있으라"라고 한마디만 하시자 식물이 생겼다.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이 있으라"라고 하는 순간, 해와 달과 별이 생겼다(창 1장). 하지만 용서는 "용서가 있으라"라고 말만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은 세상을 순식간에 창조하셨으며 그 과정은 매우 아름다웠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재창조하셨으며 그 과정은 매우 끔찍했다. 진정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구속하는 사랑은 언제나 대속의 희생을 수반한다.
C. S. 루이스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대속의 개념을 이렇게 풀이했다. "반역과 상관없는 자발적인 희생자가 반역자 대신 죽었다. 그 순간, 탁자가 갈라지고 죽음 자체가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52]
*야고보와 요한 –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하여 주소서(마 10 37,38)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을 보건대, 인간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 점을 깨달으면 겸손을 향해 성큼 나아간 셈이다. 교만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교만의 가장 흔한 표현은 걱정이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걱정을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걱정은 어디서 오는지 아는가? 바로 교만에서 온다. "내 삶은 이러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할 때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겸손은 걱정이 아니라 영혼에 안식을 준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비웃을 줄 아는 것이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를 비판할 줄 아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마음속에 이런 종류의 겸손을 심어 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이유를 제자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자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지를 꼬집은 말씀이다. 사람들은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권력과 통제를 추구한다. 힘과 부와 연줄이 있어야 자기 뜻을 이룰 줄 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나서지 말고 초야에 묻혀 살라는 뜻일까? 아니다. 사실, 이 말씀에 담긴 원칙은 이미 예레미야서 29장에서도 등장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멸망을 당했고 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바벨론 포로들은 침략국인 바벨론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품어야 할까?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제 식구만 잘 건사해야 할까? 아니면 게릴라 전술로 바벨론 정부를 전복시켜야 할까?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 예레미야서 29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다시 말해, 바벨론의 번영을 추구하라. 너희가 사는 곳을 위대한 도시로 키우라.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달라도 이웃을 섬기라. 단지 의무감만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곧 그를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 도시를 사랑하라. 그 도시를 위해 기도하라. 그 도시를 번영하게 만들라. 그 도시를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일구라. 너희의 섬김으로 바벨론이 번영하면 너희도 번영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권력을 통해 영향력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권력을 통해 얻은 영향력으로는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너희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퍼부으라. 그러면 곧 그들이 너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너희를 신뢰할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너희를 우러러보면 너희에게 진정한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진정한 영향력은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이런 영향력의 모델은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님은 적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천군 천사를 보내 공격하셨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돌아가는 순간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렇게 원수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지향점으로 삼는 사람은 권력이 아닌 섬김을 통해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 순수한 사랑으로 남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다. 남을 위해, 결국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천국에 갈 확률을 높이기 위해 선행을 베풀 뿐이다. 이런 선행은 결국 이기적인 행위이다. 마냥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하는 행위요 남에게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하는 행위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이기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세속주의와 심리학, 상대주의뿐 아니라 종교와 도덕주의도 우리를 진정 이타적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은 진정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치르셨다. 우리가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길 때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고 깨우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 그 모든 것을 은혜를 통해 선물로 받았다.
이제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선행으로 자존감이 조금 높아져 봐야 뭐하는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나면 선행이 주는 약간의 자존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십자가를 진정으로 아는 순간, 우리는 더없이 겸손해진다. 억지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남을 돕는다.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선물을 주신 분을 닮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상대방이 섬겨줄 만한 사람인지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오직 복음만이 이타적인 삶을 위한 순수한 동기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이런 동기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도 뿌듯함 같은 유익은 똑같이 따라온다.
*얼핏 예수님이 너무하신 것만 같다. 많은 사람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당혹감을 표현했다. 단지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나무를 저주하시다니. 그것도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얼핏 예수님이 너무 속 좁은 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다.
중동의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열매를 맺는다. 무화과가 열리기 전 봄에 나뭇잎이 나기 시작하면 가지에 요깃거리로 꽤 괜찮은 작은 혹이 생긴다. 과객들이 지나가면서 이 혹을 따 먹곤 한다. 나뭇 잎을 내기 시작하는 무화과에 이 맛 좋은 혹이 없으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멀리서 보면 나뭇잎이 있어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혹이 없다는 것은 나무가 속병에 걸렸다는 증거다. 열매가 없는 성장은 썩었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단순히 나무의 이런 상태를 밝히신 것이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첫 번째 성전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오래 기억에 남도록 속 빈 강정과도 같은 종교에 관한 시청각 교육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교훈을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면서 그분을 위해 열매를 맺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나아가 그런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종교적으로 무지 바쁜 장소로 다시 가시는 중이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이와 같다. 일과 위원회, 오가는 사람들, 거래로 쉴 새 없이 북적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 영성은 전혀 없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진정으로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교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의 진정한 변화 없이 덩치만 커질 뿐이다. 마음의 진정한 변화와 남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 교회 일만 바쁘게 할 수가 있다.
같은 날, 예수님은 열매 없는 행위로 가득한 성전을 청소하셨다. 무화과나무를 시청각 자료로 교훈을 주신 뒤 다시 행동으로 그 교훈을 풀이해 주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바쁜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대속을 깨달음에서 오는 진정한 인격 변화를 원하신다. 걱정이나 조바심이 많던 당신이 변하고 있는가? 그 변화가 주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는가? 예수님의 이유 있는 지체를 기다릴 힘을 얻고 있는가? 혹은 분노나 원망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용서의 대가를 스스로 흡수하는 법을 깨우치고 있는가? 두려움, 자기혐오, 허풍 같은 몹쓸 인격의 극적인 변화가 주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는가? 아니면 그냥 종교 활동으로 분주하기만 한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기 때문에 상극처럼 보이는 특성들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말로 예수님의 역설적인 인격에 관한 설교를 마무리했다. 단순히 더 착한 사람, 절제력이나 도덕이 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성전으로 달려가 "이곳은 나의 집이다"라고 담대히 말씀하신 왕, 바로 그분의 삶과 인격이 우리 안으로 녹아들어야 한다. 더 온전한 사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대속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에 마지막 아이러니가 남아 있다. 서로 극단처럼 보이는 이런 특성들을 하나의 온전한 전체로 융합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서 극단적인 반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만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나서 가장 신실해 보이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날지 모른다고 경고하신 분. 소녀를 되살리러 가는 길에 한 여인의 접촉으로 약해지신 분. 그런 분을 무심코 바라보기만 할 사람은 없다. (게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분은 점점 더 놀라운 일을 벌이신다.)
예수님은 쉼인 동시에 풍랑이시며 희생자인 동시에 불 칼을 휘두르는 분이다. 이토록 특별한 분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뿐이다. 받아들이든가 거부하든가. 죽이든가 영광을 돌리든가. '꽤 흥미로운 인물이군.' 예수 사건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절대 아니다. 성전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한 서기관들의 행동은 악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제발, 예수님을 삶의 구석에 두지 말라. 그런 곳에 어울리는 분이 아니다. 그분께 전부를 바치라.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라. 그래야 그분의 인격이 당신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은 또 다른 면에서 대본과 달랐다. 예수님이 떡을 축사하신 것은 유월절의 대본대로였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축사하신 것도 대본대로였다. 모든 유월절 만찬에 떡과 포도주가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복음서 어디에도 메인 요리 이야기가 없다. 이 유월절 만찬에는 어린 양에 관한 언급이 없다. 물론 유월절은 채식주의자들의 만찬이 아니었다. 어린 양 요리가 빠진 유월절 만찬은 있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유월절 만찬에서 어린 양은 어디로 갔을까? 하나님의 어린 양이 상 앞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양이 상 위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봤을 때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사야서 53장에서도 메시아를 어린 양으로 불렀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6-7. 12).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결국 이런 뜻이다. “이사야와 요한이 말한 메시아가 바로 나다. 내가 바로 세상 죄를 짊어질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으셨다. 세상의 모든 죄가 그분을 뒤덮었다. 그분은 형벌이 우리를 영원히 넘어가도록 스스로 모든 형벌을 받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진정한 사랑은 대속과 희생의 사랑이다. 대속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상한 심령과 죄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누가는 같은 만찬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몇 마디 더 기록하고 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분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의식은 흔히 "주의 만찬" (고전 11:20)이라 부르지만 "주의 식탁"(고전 10:21), "축복의 잔"(고전 10:16), "떡을 떼는 것”(행 2:42)이라고도 부른다. 주의 만찬에서 떡을 떼어 주고 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찢긴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를 쏟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요컨대 이 떡을 먹고 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적이며 대속적인 사랑을 기념하는 것이다.
물론 애굽에서의 첫 번째 유월절 만찬은 실제 식사였다.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린 양의 고기를 먹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주의 만찬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먹어'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의식이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막 14:22).
예수님은 "받아먹으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하실 일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실제로 받아먹어야 한다. 주의 만찬에서는 흔히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며 "믿음을 통해 마음으로 그분을 먹으시오"라고 말한다. 음식을 먹어 소화시키지 않으면 영양소를 얻을 수 없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굶어죽을 수 있다. 음식에서 영양분을 얻으려면 먹어야 한다. 스스로 집어서 먹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무용지물이다. 받아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진짜 음식이다"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주의 만찬이 '식사'라는 사실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이 주는 유익을 실제로 누릴 수 없다는 의미다. 특히 예수님 당시에는 누군가와 식사를 하는 것은 곧 그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분의 완벽하고 대속적이며 희생적인 고난이 주는 유익을 누리려면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만찬에는 더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 주의 만찬은 예수님과 함께할 미래를 미리 맛보는 자리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유월절 만찬에서 사회를 보면서 단 두 마디를 통해 최종적인 미래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이 유월절 만찬으로 인해 궁극의 만찬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후 사흘간의 사건들이 언젠가 대단원의 완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미래의 나라에 관한 놀라운 예언들을 생각나게 한다. 예를 들어, 시편 96편 12-13절이 떠오른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이사야서 55장 12절도 있다.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화분에 씨앗을 뿌려 어두컴컴한 곳에 두면 씨앗은 깨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을 볕이 쬐는 곳에 두면 씨앗 안에 잠자던 모든 것이 깨어난다. 성경은 인간은 물론이고 식물과 나무와 바위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잠자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태초에 창조주의 임재 안에 있던 것들, 앞으로 창조주의 임재 안에 있을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마지막 만찬을 주재하실 날,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금 온 땅을 뒤덮고 나무와 언덕들이 다시 살아나 손뼉을 치고 춤출 것이다. 미래의 나라에서 나무와 언덕이 손뼉을 치고 춤을 출 정도면 당신과 나는 얼마나 더 대단한 일을 하겠는가.
주의 만찬은 이런 미래에 대한 작지만 매우 실질적인 맛보기다. 첫 유월절 직후 애굽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지나가는 이스라엘 사람을 붙들고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그러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노예였소. 하지만 어린 양의 피 아래 숨은 덕분에 종살이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이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고백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는가? 그렇다면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만찬에 참여하는 날, 당신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고대 영웅들에 관한 기록뿐 아니라 교회 역사에서도 죽음 앞에서 예수님처럼 고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상하지 않은가? 믿음 때문에 죽어 간 신앙인들에 관한 실화가 많다. 사나운 짐승에게 먹히고 갈가리 찢기고 화형을 당한 믿음의 선배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보다 훨씬 더 담대하게 죽음을 맞았던 것 같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Polycarp)을 예로 들어 보자. 죽기 직전 폴리갑은 총독에게 끌려가 화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기독교를 버리면 형 집행을 취소하겠다." 총독의 말에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붙인 불은 기껏해야 한 시간쯤 타다가 꺼질 뿐이오. 다가올 심판의 불을 모르는구려. 왜 망설이는가? 어서 당신 맘대로 하시오."
1555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믿음 때문에 화형을 당한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와 휴 래티머(Hugh Latimer)는 또 어떤가? 나란히 묶이고 발에 불이 붙자 래티머가 말했다. "니콜라스 선생, 남자답게 당당히 죽읍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 엄청난 불길을 일으킬 거요. 이 불길이 절대 꺼지지 않으리라 굳게 믿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보다 더 멋지게 죽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예수님은 폴리갑이나 리들리나 래티머 같은 순교자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하셨던 게 분명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뭔가를 보고 느끼고 감지하셨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을 흔들리게 만든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것에 비하면 육체적 고난, 심지어 육체적 죽음조차도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벌어질 일은 상상만 해도 피땀이 흐를 정도였다. 그 전까지는 예수님이 다가올 죽음을 모르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다. 이미 자신의 죽음에 관해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뒤였다. 하지만 지금은 십자가 위에서 겪을 상황을 실제로 맛보기 시작하셨다. 육체적 고통과 죽음조차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 지금 예수님은 그 일 때문에 기도하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구약에서 '잔'은 인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잔은 불의를 향해 임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 23장 32-34절을 보자.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잔을⋯놀람 과 패망의 잔...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이사야서 51장 22절에서도 하나님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에 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성령과 춤을 추셨기 때문에 그분이 아버지를 의지할 때마다 성령의 사랑이 그분 안에 충만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변화되셨을 때 가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그분이 기도할 때마다 비가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이 아버지를 의지했을 때는 분노, 암흑, 틈, 공허의 잔만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 생명, 빛, 통일성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 모든 빛, 생명, 사랑, 통일성이 차단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로부터 분리될 때 일어날 무한한 영적, 우주적 붕괴를 겪기 시작하신 것이다. 단지 그 붕괴를 약간만 맛보셨을 뿐인데 극심한 동요가 찾아왔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는 싫어. 사랑의 하나님만 생각하고 싶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문제는 사랑의 하나님을 원한다면 진노의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사랑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화가 난다. 사실, 사랑이 깊고도 클수록 분노도 커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입거나 학대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학대해도 마찬가지로 화가 난다. 사랑과 정의감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짝을 이룬다.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이 자신이나 남을 괴롭힐 때는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해를 입을 때는 그 사랑이 깊을수록 분노는 더 커진다.
하나님의 진노 하면 으레 그분의 정의가 떠오른다.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은 정의가 짓밟히는 꼴을 그냥 좌시하지 못한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를 보면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정의 못지않게 사랑과 선함에서 비롯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그분이 피조물의 상황에 분노하시는 이유 중 하나다. 지극히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세상이 파괴되는 상황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낸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다. 그리고 세상의 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독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세상을 보고 느끼시는 감정은 '진노'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만을 원하고 진노의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는 말은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악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할 정도로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또한 진노의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꼴이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보겠다. 진노하지 않는 신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받고 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악에 분노하시기에 십자가에서 막대한 고통으로 몸값을 치르셔야 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기 위한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는 신은 '공짜 사랑'의 신이다. 그런 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신에게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 사랑의 실체는 알 길이 없다. 그런 신의 사랑은 막연한 개념에 불과하다.
이 신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값을 치르지 않는다. 반면에 성경의 하나님께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깊은 수렁에 빠질만큼 우리를 귀히 여기신다.
*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직접 불 칼 아래를 지나는 방법 말고 다른 길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셨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은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고 하시지 않았다. 결국 순종하셨다.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내려놓고 자신의 욕구를 아버지의 뜻 앞에 복종시키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힘겨워하면서도 사랑으로 순종하셨다.
아직까지도 사명을 포기하고 우리를 죽게 놔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사명을 이루기 위한 다른 길을 부탁했을 뿐 사명을 버리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으셨다. 왜일까? 이 잔이 아무리 끔찍해도 당장의 욕구(회피)보다 진정한 욕구(인류 구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욕구처럼 보이는 것이 단순히 가장 시끄러운' 욕구일 때가 많다. 극심한 고통이나 큰 시험 중에는 올바른 판단이 힘들다. 그래서 너무 아프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머리채를 잡아 뜯기도 한다. 심지어 자해도 한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한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큰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그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심지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틀렸습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버지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셨다. “지금 내 감정과 상관없이 아버지를 믿습니다. 당신의 뜻이 결국에는 나의 뜻입니다. 우리 둘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가장 시끄러운 욕구를 누르고 진정한 욕구를 따라 만사를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현재 상황이 나의 현재 욕구와는 다르다. 이 욕구를 억누르지는 않겠지만 거기에 굴복하지도 않겠다. 이 욕구는 결국 아버지 안에서만 만족될 수 있다. 아버지만 믿고 따르리라. 나 자신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고난을 피하지도 않으셨다. 사랑이 그분을 고난으로 이끄셨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분은 순종하셨다. 아버지를 사랑하시기에,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거나 상황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는 잔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때 진정한 욕구와 실제 상황이 계속해서 수렴하여 영원한 만찬의 날 영원히 하나로 만날 것을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에 비교하신 구절 중에서 마가복음 6장이 가장 간결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리스트를 보여 주셨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0-22).”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4-26).”
성경학자 마이클 윌콕(Michael Wilcok)은 이 본문을 언급하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삶 속에서는 가치의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초라하게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세상이 좋다고 선전하는 것을 의심한다. "세상이 리스트의 바닥에 처박아 놓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리스트에서는 꼭대기에 앉아 있다. 이 세상 나라의 리스트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권력과 돈("너희 부요한 자여"), 성공과 명예("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가 있다.
하나님의 리스트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약함과 가난("너희 가난한 자는"), 고난과 버림("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리스트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막 14:46-49).”
유다는 무장 저항을 예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일행이 이런 식으로 들이닥쳤을 리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여기서 "강도"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 체제를 세우기 위해 폭력적인 전술(검)을 사용하는 게릴라 운동 곧 혁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검으로 대응할 줄 알고 검을 들고 왔느냐?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완전히 다르다."
유다 일행은 예수님이 실제로 혁명을 일으키고 계시지만 그 혁명은 역사상 유례가 없던 새로운 종류의 혁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 나라의 혁명은 일어나 봐야 외향만 바뀔 뿐 여전히 낡은 가치들이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기껏해야 낡은 순서를 살짝 미세조정만 할 뿐이다. 모든 혁명은 결국 사람만 바뀌는 혁명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혁명은 새로운 사람들을 권좌에 앉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정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중이셨다. 예수님은 검으로 저지시킬 수 있는 혁명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혁명은 검의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다는 이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연 유다만 이해하지 못했을까? 예수님이 체포될 당시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이 사람은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해지자 본능적으로 검을 뽑고 말았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지 않은가? 말로는 정의와 평화와 공평의 편이라고 외치면서 막상 시험이 닥치면 검 자루에 손에 간다. 우리는 검을 위시해서 돈, 권력, 성공, 명예로 이어지는 이 세상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 죽음의 입맞춤에 만족하는 우리는 베드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베드로를 비롯하여 수년간 예수님의 곁을 지켰던 제자들이 진짜 시험이 닥치자마자 예수님을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쳤다. 한 청년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유다의 일행에게 옷이 잡히자 아예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성경에서 벗은 몸은 수치와 치욕의 표시다. 벗은 몸으로 줄행랑을 치는 모습이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세상에 둘도 없는 겁쟁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청년이 저자 자신 곧 마가라고 말한다. 실제로 당시 마가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마가만 예수님을 실망시켰는가?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쳤다.
마가가 나체로 동산에서 도망친 청년 얘기를 꺼낸 것은 또 다른 동산을 상기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에덴동산에서도 시험이 닥쳤고 최초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들도 벗은 채로 수치스럽게 도망쳤다. 수세기가 흘러 또 다른 동산에서 또 다른 시험이 닥쳤다. 이번에도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나 수치스럽게 벌거숭이로 도망치는 모습이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잠깐, 뭔가가 다르다. 이 동산의 중앙에는 시험을 통과한 분이 계시다. 다른 모든 사람은 왜 도망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가? 세상의 검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까 봐 혹은 다른 혁명이 일어나 자신들이 권좌에서 영원히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꿋꿋이 서 계신다. 세상의 검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상황을 담담히 맞이하신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날 때 몸을 돌려 정의의 불 칼을 본 것을 기억하는가? 돌아갈 길을 막고 있는 불 칼. 죄는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정의의 칼 아래로 지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동산에서 궁극적인 정의 칼을 맞고 계신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그리고 바로 당신과 나를 위해 그렇게 하고 계신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0-62).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증인석에 앉히고 그분이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냐고 물었다.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에 관한 비슷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거나(막7:5-6)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다(막 11:29). 하지만 이번에는 마가복음의 중심적인 질문에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약속된 자 곧 메시아라고 주장하셨다. 하지만 대체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신으로까지 여기지는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란 표현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메시아'란 칭호의 의미를 확대하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두 가지 성경적 표현(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인자"와 시편 110편 1절에 기록된 "내 오른쪽")은 메시아가 재판관으로 오심을 암시한다. 재판소의 모든 사람(산헤드린 공회 전원)은 인자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니엘서 7장을 보면 인자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늘의 구름을 통해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신다. 이 하늘의 구름은 증기일 뿐인 땅의 구름과는 다르다. 이 구름은 쉐키나 영광 곧 하나님의 임재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뜻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올 것이다.” 충격적인 진술이다.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구약의 본문과 주제, 이미지, 비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그분은 굳이 재판관의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이는 그 현장에 흐르는 패러독스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온 세상의 재판관이 세상의 재판을 받으신다. 판사석에 앉아야 할 분이 쇠고랑을 찬 채 피고석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이 재판관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시자마자 장내가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여, 내 친구여!", "나의 머리여, 나의 머리여!", "나의 손이여, 나의 손이여!"라고 울부짖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나의 하나님." 이는 지극히 친근한 표현이다. 상대방에게 '나의'를 붙이는 것은 애칭이다. "나의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만 그런 표현을 허락하셨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교회 성도 한 명이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하면 기분이 지독히 나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 아내가 내게 그런 말을 하면 그야말로 앞이 노래질 것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실의 충격도 큰 법이다. 아들이 영원 전부터 사랑을 나누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으니 그 충격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다. 무한히 오래된 사랑, 더없이 완벽한 사랑. 예수님은 그것을 잃으셨다. 영원한 춤에서 배제되셨다.
우주를 세우신 예수님이 무너지신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시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버림을 받으셨다. 바로 당신과 나를 위해 버림 받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대신 버림을 받으셨다. 우리에게 쏟아져야 할 심판이 대신 예수님께 쏟아졌다.
*마가는 찢어진 휘장의 의미를 확실히 알리고자 이 의미를 처음으로 깨달은 인물을 곧바로 소개했다. 바로 백부장이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 고백은 실로 대단한 고백이었다. 마가복음 1장의 첫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지만 이 대목에 이를 때까지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불렀지만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신으로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물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권능의 역사, 심지어 대제사장들 앞에서의 증언까지도 그분의 신성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의 신성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은 그분의 죽음을 주도한 백부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로마인이었다. 당시 로마의 모든 동전에는 "신인 아구스도의 아들 디베료 가이사"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충성스러운 로마인이 '신의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로마 황제 가이사뿐이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그 칭호를 붙였다. 또한 그는 냉혹한 인간이었다. 백부장들은 장교로 임관된 귀족이 아니라 졸병에서 한 단계씩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많이 목격했을 뿐 아니라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백부장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정하고 잔혹한 인물. 하지만 뭔가가 그의 영적 어둠을 깨뜨렸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백부장과 십자가 주변의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예수님이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수없이 말씀하셨는데도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제자들, 하나님의 가장 심오한 지혜를 직접 보고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 백부장은 그들과 달리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무엇이 백부장의 어둠을 깨뜨렸을까? 어떻게 그는 갑자기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무려 30년간 이 질문을 붙들고 늘어졌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 왜 이 백부장이었을까? 마침내 나는 이 백부장이 예수님의 절규를 듣고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셨다고 말하는 유일한 종교다. 그런데 하나님의 고난이 무슨 소용인가? 십자가 곁에 섰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일말의 유익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았다.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사랑과 권능, 정의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가장 위대한 역사를 목격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천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까?
고난은 '인간'을 완전한 어둠으로 내몰곤 한다. 대개 우리는 자신이 고난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난이 제자들에게 무의미해 보였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부당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십자가는 고난의 이유가 '아닌' 것을 밝혀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관해 아무런 계획도 없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신다는 증거다. 또한 십자가는 아무런 까닭 없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유명한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조차도 십자가를 보면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했다.
“신인(神人)도 고난을 겪는다. 인내로 고난을 겪는다. 신인도 파괴되고 죽는다. 골고다의 밤이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그 어둠 속에서 신인이 기존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깊은 절망을 포함한 죽음의 고뇌를 끝까지 견뎌 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하지만 살 수 없었던 삶을 사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절대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당신이 누군지는 상관없다. 백부장, 매춘부, 암살자, 목사, 누구든 상관없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장벽이 사라졌다. 이제 누구든 용서와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 말을 듣고 이 여인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가는가? 그들은 시체를 보러 왔다. 그런데 시체는 없고 대신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라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너무 놀라지는 말았어야 했다. 기억나는가?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누차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과 9장과 10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마가의 글은 요점만 간결하게 전달하는 효율성의 미를 보여 준다. 그런 마가가 똑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실었다면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죽었다가 제3일에 살아날 것이다. 내가 죽었다가 제3일에 살아날 것이다. 내가 죽었다가 제3일에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날 무덤가에 남자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자 제자들도 기껏해야 '죽은' 시체에 관례대로 바를 비싼 향품만 가지고 왔을 뿐이다. 부활을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마가복음이란 소설을 쓴다면 이런 식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에 관해 수없이 말씀하셨다면 그분의 죽음 뒤에 최소한 한 명쯤은 그분의 말씀을 떠올리며 다른 제자들에게 "오늘이 제3일이지? 아무래도 예수님의 무덤에 한번 가 봐야겠어. 손해 볼 건 없잖아?"라고 말해야 좀 더 현실감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부활이란 단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빈 무덤 앞에서 천사는 여인들에게 옛 기억을 더듬어 주어야 했다.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오늘날만큼이나 당시도 부활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첫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와는 달랐다. 그리스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리스 세계관에서 내세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경우 적잖은 사람이 온 세상이 회복될 때 나타날 만인의 부활은 믿었지만 개인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다. 요컨대 예나 지금이나 부활은 믿기 힘든 개념이다.
*조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은 손가락이 뒤틀리고 근육은 위축되고 무릎은 비틀어지고 어깨 아래로 아무런 감각도 없지만 언젠가 밝고 가벼운 새 몸을 갖고 강력하고도 눈부신 의의 옷을 입게 되리라. 나처럼 척수를 다친 사람에게 부활이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이 가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토록 놀라운 소망을 얻을 수 있다. 오직 부활만이 새 마음뿐 아니라 새 몸을 약속해 준다. 새로운 몸은 완벽하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다. 새로운 몸은 지금의 몸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춤을 출 수 없지만 너무도 춤을 추고 싶은가? 부활한 몸으로 완벽한 춤을 추게 되리라. 외로운가? 부활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얻게 되리라. 공허한가? 부활 안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으리라. 평범한 삶이 회복될 것이다. 세상에 평범한 삶만큼 좋은 것도 없다. 단지 그 삶이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것이 문제다. 음식과 일, 모닥불 곁의 의자, 포옹, 춤, 산, 그러니까 이 세상이 곧 평범한 삶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 덕분에 우리, 그리고 이 평범한 세상의 나머지 피조물들이 구속되고 완벽해질 수 있었다. 그런 미래가 우리를 기다린다.
이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 아니다. 이 몸이 유일한 몸이 아니다. 이 삶이 끝이 아니다. 언젠가 '완벽한 삶, 진짜 삶을 얻을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용감하게 모험을 할 수 있고, 휠체어 신세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할 수 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모든 고난이 사라질 날을 고대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고난이 영광스러워지는 날을 고대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 주셨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 상처로 인해 자신들이 망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들은 대통령을 세울 계획이었다. 예수님이라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자신들은 장관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이 뚫릴 때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니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 그 상처를 이해하고 나면 그 상처의 기억으로 인해 남은 삶이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상처 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며 그분이 해 주신 일을 떠올렸다. 자신들을 망쳤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알고 보니 자신들을 구원한 상처였다. 그 상처의 기억 덕분에 그들은 십자가 처형을 견뎌 낼 수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바로잡으실 날, 모든 슬픔이 사라질 날, 바로 주의 날 우리의 상처도 영광스러워질 것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고난이 오히려 영원한 기쁨을 더해 줄 것이다. 그날, 모든 것이 역전되고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올 것이다. 영광의 기쁨이 우리가 겪은 모든 상처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부활과 회복이라는 빛 속에서 살자. 영광스럽고 영원하고 즐거운 은혜의 춤 속에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