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신짜오(안녕하세요)" "마간당 아라오(안녕하세요)" "사왓디 카(안녕하세요)"
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전 문화관광부 차관
30년前 중동 근무때 고국 노래를 들으며 활력을 되찾았다. 그 경험 때문에 공익재단 맡은 후 다문화 음악방송을 시작했다. 8개국 앵커들의 음악방송을 통해 결혼 이민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이 감동을 받고 있다.
▲ 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전 문화관광부 차관 | 세월이 흘러도 어제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있다. 누가 내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30여년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국대사관 문화공보관으로 근무한 3년간의 추억을 말하겠다.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오일 쇼크로 휘청거리던 우리 경제에 젖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수백 군데 건설 현장에서 14만명의 우리 근로자들이 열사(熱砂)의 땅을 일궜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처자식을 생각하며 진땀을 달게 흘렸다.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에 심신이 고달프고, 외로울 때면 나는 근로자들과 함께 홍해(紅海) 바닷가를 걸으며 향수를 달랬다. 운 좋은 날은 한국에서 건너온 배를 서로 나누어 먹으며 고향의 아삭한 맛을 씹었다.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빛나던 밤엔 부모님 얼굴이 달처럼 떠올라 남몰래 눈물지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고국의 노래였다. '가고파' 같은 가곡이 나오면 가슴이 뭉클했다. 한국에서 유행하던 대중가요를 담은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 신바람이 절로 났다. 우리는 노래로 활력을 되찾았다.
몇 해 전 기업의 공익재단을 맡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 와 있는 결혼이민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을 떠올린 것은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내가 타국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그리움을 거울삼아 이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노래 한 자락에 실린 따뜻한 위로,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기획한 사업이 '다문화 가족 음악방송'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위성·케이블·인터넷 방송을 통해 중국어·베트남어·태국어·필리핀어·아랍어·몽골어·러시아어·일본어 등 8개 언어로 송출되고 있다. 한국에 온 결혼이민자·외국인노동자·유학생들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헤아려 고국의 말로 고국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다. 한국 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제공하고 한국말 배우기 코너도 운영하고 있다.
이 방송을 진행하는 원어민 앵커들은 8개국에서 온 인재들이다. 모두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음악적 센스를 갖추고 있다. 고교 시절 '겨울연가'를 보고 한국인의 순수한 사랑과 정서에 매료된 아랍어 앵커인 마르와 자흐란은 아랍권 최초로 개설된 이집트 아인샴스대학 한국어과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그녀는 속담으로 배우는 한국어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아랍 속담과 한국 속담은 서로 닮은 것이 많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작은 고추가 맵다" "그 아비에 그 자식" 등을 아랍 속담으로 바꾸어 해설한다.
러시아어 앵커 크므즈 율리까는 113년의 전통을 가진 상트 페테르부르크대학 한국어과 졸업생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어과를 나온 셈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서정적인 러시아 음악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주민에게 인기가 높다. 러시아어를 배우려는 한국인도 애청하고 있다. 중국어 앵커 펑리잉(彭麗穎)은 톈진대와 서울대에서 중국 악기 '고쟁(古箏)'과 우리 가야금을 전공한 연주자이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는 한 중국인은 한류스타와 한국 최신가요 등을 소개하는 이 코너 덕에 직장에서 서먹한 친구들 사이의 담장을 허물 수 있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서 컴퓨터 경영학을 전공한 몽골어 앵커 바트바타르 강덜거르는 한국 내 몽골커뮤니티에서 인기가 높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됐다는 애청자는 그녀가 진행하는 한국말 배우기 시간이 되면 단어와 문장을 받아 적기 위해 공책을 찾느라 바쁘다고 한다. 태국어 앵커 삿타탐군 라다완이 태국의 5성(五聲) 음운으로 방송하는 멘트와 한국어 배우기 코너는 노래만큼이나 살가운 느낌을 준다. 마리아 레지나는 필리핀 소사이어티의 주요행사에서 사회를 도맡아 보는 스타 앵커다. 매주 이주노동자를 위한 봉사활동도 한다.
베트남어 앵커 황밍옥이 받은 편지의 사연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저는 원주에 사는 신랑 유정섭입니다. 나의 어린 신부 깜에게 힘 좀 주세요. 지난 토요일에 한국에 왔는데 울기만 해요. 엄마가 보고 싶은 모양이에요. 좋은 노래로 우리 신부에게 힘 좀 내게 해 주세요." 일본어 앵커인 나타에다 시오리는 한국 음식과 문화에 심취해 한국에 왔다. 그녀의 깊이 있는 한국 문화 소개는 일본인 사회에 "한국을 다시 보게 한다"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음악이야말로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최선의 도구라고 말한다. 이역만리에서 우리 노래를 들어본 한국인이라면 다 안다.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 감동은 우리와 함께 사는 다문화 이주민에게도 마찬가지다. 모국어로 부르는 자장가와 동요를 들을 때의 그 아련함, 자기 나라의 최신 유행가요를 들을 때의 그 푸근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다문화 가족 음악방송은 8개 언어로 인사말을 한다. "니하오"(중국어) "신짜오"(베트남어) "마간당 아라오"(필리핀어) "사왓디 카"(태국어) "곤니치와"(일본어) "센 베노"(몽골어) "아쌀라무 알라이쿰"(아랍어) "조드라브스트부이쩨"(러시아어). 다들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그들과 우리 모두 한국 땅에서 안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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