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일 벽소령 ~ 장터목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느즈막히 눈을 뜬다..
뭐...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주위 사람들이 잠탱이라고 그럴까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여덟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이었으니.. 이렇게 늦게 눈뜬 것도 처음인 듯 싶다..
다시한번 취사장에서는 부식들을 꺼내놓고 뭘 먹을까 고심한다..
그냥 라면에 어제 먹다 남은 밥을 말아 먹기로 하고..
남은 누룽지로 숭늉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 그러는 사이 시나브로님의 일행은 먼저 길을 떠난다..
벽소령산장을 떠난고 30여분... 도로는 끝나고 덕평봉을 돌아서는 길의 중턱... 멀리 반야봉이 보인다.. 흰 고깔모자같은 노고단과 하얀 흉터처럼 보이는 정령치도로도 훤히 바라다 보인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오늘따라 공기는 더욱 깨끗한 듯 지리산의 서쪽 절반이 시리도록 맑게 보인다..
등엔 땀이 흐르고 잠시 쉴 때면 땀이 식어 몸이 차갑다.. 볼은 띵띵 언 듯 말을 할 땐 입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저 앞에 영신봉이 보이는 마지막 봉우리..
잠시 쉬면서 남쪽을 바라보니 멀리 남해바다와 어딘지 모를 도심이 보인다..
저거이 정녕 바다란 말이냐..
신기하다... 여기선 내 전화기가 된다... 곰님의 011도 안되는데.. 016이 터지다니... 지난해 중봉에 이어 또다시 충격이... 전화기의 수명이 쪼금 더 길어질 듯 싶다.. 이녀석도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보다...
영신봉.. 굳이 찾아오르지 않았던 곳이다.. 앞에 출입금지 끈이 쳐진 곳을 지나면 영신대가 있다고 한다.. 음... 지리산에서 젤 영험하다는 영신대에서 소원을 빌자던 곰님이 그냥 지나간다.. 아쉽다.. 하긴 발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눈을 밟는 다는 것이 쫌 깨름찍하긴 하다..
세석 취사장... 아까 마주쳤던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점심 메뉴는 볼가님의 떡볶이... 처음엔 라볶이를 해먹을까 했지만... 떡도 있겠다..떡볶이에 라면사리... (그게 그건가..?) 담날 하산길에 시나브로님이 산위에서 젤 먹고 싶던게 떡볶이였다는데.. 시나브로님이 조금만 늦게 출발했으면 함께 먹을 수 있었을 꺼인디...
세석을 떠나오면서 산장 직원에게 한신길의 상황을 물어본다.. 길은 뚫렸는데요.. 하면서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본다.. 지금 하산하시려구요...?? 아뇨..그냥... 왜 그냥 물어보냐...고 또다시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촛대봉을 오르는길... 이곳은 토끼봉 오르는 길과 함께 주능 중 내가 가장 힘겨워하는 곳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기나긴 계단길도 눈에 묻혀 완만한 경사길이 되어있다...
양옆으로 드넓은 눈밭 곳곳에 산짐승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이 곳은 인간의 땅이 아닌 자연의 영역... 이젠 발목밖에 안되는 울타리 너머는 짐승들의 영역이다.. 마치 신령스러운... 우리가 들어서면 안되는 곳인양..
중간중간 '사악볼가', '볼가바보' 하는 글귀들이 먼저 지나간 달빛소나타팀의 흔적을 보여준다.. 처음엔 스틱으로 나중엔 눈위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글들을 지우니 어느새 촛대봉 정상이다..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반대편 왕시루봉, 노고단도 가깝다... 얼핏보기엔 지리주능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거리가 비슷하게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다.. 이런 날씨는 처음이다..
연하봉을 지나고 일출봉가는 갈림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일출봉을 들르기로 했다..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니 허리춤에 있어야할 나무들이 눈에 파묻혀 무릎 아래에 있다..
마른 가지들이 발에 밟혀 톡톡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나무에게 미안한 맘이 들지만.. 어쩔 순 없다... 새 길을 뚫자니 너무 힘겹다... 가끔 앞서가는 곰님의 허벅지까지 푹 빠져든다... 일출봉...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세상을 굽어보고 길을 찾아 돌아온다... 갈림길 직전.. 서쪽하늘이 붉어지면서 해가 져간다... 구름이 없어 반짝이는 노을을 볼 수는 없었지만.. 서쪽에서부터 양옆으로 퍼져 나가는 붉은 기운이 더없이 힘차보인다.. 조롱박같은 모습의 해가... 붉은 해가 지고 다시 그 아래 황금빛 해가 완전히 지고나니.. 반대편에선 천왕봉 옆으로 커다란 달이 떠오른다.. 어느 한 곳 찌그러짐없는 보름달이다.. 비록 보름은 어제였지만..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장터목산장... 이렇게 한산한 장터목 취사장은 처음이다.. 몇 팀이 식사를 하고 있고 군데군데 빈자리도 많다.. 평소였으면 취사장 밖에까지 식사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붐빌텐데...
저녁은 뭘 먹을까.... 햇반을 데우고.. 라면 한봉과 칼국수 한봉을 육개장과 함께 끓인 제목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엄청나게 맛있는 찌개를 앞에 놓고 소주 한잔 하며 오늘을 얘기한다.. 음.. 앞으로 취사담당은 볼가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유리할 듯 싶다는 생각이...
짐을 풀고나니 볼가님이 제석봉에 가보자고 한다.. 밖은 딥따 춥다.. 바람도 많이 분다..
지금 나가면 가벼운 내 몸은 바람에 날려 중산리 어느 골짝에 떨어질 듯 싶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냥 자리에 누우니 피로가 밀려온다.... 두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리라는 다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실~ 잠이 들어버린다..
제 3일 장터목 ~ 백무동
오늘 아침엔 천왕봉을 들렀다가 세석을 돌아 한신으로 하산하기로 했었다..
새벽 다섯 시.. 잘자고 있는 내 옆구리를 뭐가 찔러댄다... 볼가님이 어느새 짐을 싸들고 나와 깨운 것이다..
이렇게 일찍 가서 뭐하게요..
반달곰님은 좀더 누워있어라고 한 후 볼가님과 바깥 분위기를 볼 겸 나와본다...
눈보라다... 어제보다 더 세찬 바람이 볼을 떼어놓을 듯 할퀸다..
콧물이 핑 돈다.. 띠... 어젠 그렇게 날이 좋더만...
볼가님한테 눈치를 준다.. 이런 날은 일출보기도 힘들고 눈보라 때문에 눈뜨기도 힘들어 위험하고... 가보실래요..?? 실은 오늘도 바람에 날려갈 것이 두렵다..
결국 그냥 한 숨 더 자기로 했다...
누군가 반납해 놓은 모포 두장을 더 가져와 깔고 덮고..
볼가님과 곰님이 잔다.. 근데 등 쪽에서 찬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다...
내려가 두장을 더 들고 올라와 볼가님 덮어주고 한 장은 곰님과 함께 덮으니 좀 낫다..
그래요... 저 코 많이 골아요... 만성비염이 있어서.. 좀만 피곤하다 싶으면 산장 침상이 흔들릴 정도로 그렇게 코골아요... 저도 괴롭답니다... 저도 싫어요...
오늘도 느즈막이 일어나 짐을 챙겨 취사장으로...
천왕봉에 다녀온 이들의 아침을 먹고 있다... 모양새가 말들이 아니다..
구름 속에서 바람만 맞다 왔단다... 안가길 잘했군...
하산은 한신은 포기하고 그냥 하동바위로.. 산장을 벗어나니 그래도 바람이 잦아든다...
주능과 천왕봉이 바라다보이는 바위에서 한참씩을 쉬고 싸목싸목.... 남는 것이 시간인 관계로.. 그렇게..
소지봉.. 흠... 침한번 삼키고...
다행히 소지봉~참샘길이 눈에 덮혀 그냥 경사길로만 보인다.. 그래도 20분이 걸렸다.. 참샘에서 또다시 한참을 쉬고 하산... 역시나 하동바위코스는 지루하다... 가끔가다 보이는 짐승발자국, 새소리를 위안삼아... 한참을 내려오니 계곡에선 시냇물 소리가 반긴다..
그리고 백무동야영장의 모습이....
주차장에 도착하니 5분후에 버스가 출발한다.. 맘씨 좋은 기사아저씨는 음정에서 뛰어내려오시는 할머니들쪽으로 차를 후진시키고... 차안은 온통 시끌벅적하다... 마천에서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아저씨 말로는 약장수가 온 듯 하다는데..
우린 산내에서 하차하여 유성식당으로... 언젠가 대화방에서 볼가님이 얘기한 예전 시골에서 두툼하게 썰어 구워먹던 돼지고기를 맛보여드릴려 했는데... 쩝... 영점 몇초의 사이로 볼가님이 계산해 버린다.. 그런데 식당에서 주워들은 뱀사골에서 나오는 차가 오질 않는다..
겨울이라 그런가... 결국 생전 처음 보는 남원시내버스를 타고 인월로...
반달곰님은 함양행, 볼가님과 난 남원행...
남원에서 다시 전주로... 그리고 다시 제 갈 길로...
그렇게 대보름 달맞이 산행을 접는다....
누가 그런 표현을 썼는지.. 정말 쟁반같은 달과 눈덮힌 산... 시린 하늘...
그 속의 사람들... 이번 산행의 목적은 산보다는 사람이었다..
보고싶던 이들... 그들이 있기에 산이 더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른다...
..........
Epilogue - 후기의 후기....
역시 내가 읽어도 재미없다...
난 언제쯤이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