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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 全羅監司 趙世煥 神道碑銘 幷序 - 송시열(宋時烈)
조 수촌(趙樹村) 억망(嶷望, 수촌은 조세환의 호(號), 억망은 자(字)임)은 순박 진실하고 총명 탁월하며 충효(忠孝) 정직한 사람인데, 젊어서부터 시(詩)에 능하였다. 회옹 부자(晦翁夫子,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를 말함)가 일찍이 이르기를, “좋은 시를 짓는 사람은 좋은 벼슬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억망에게 그런 면이 있다.
공은 젊었을 때 경사(經史)를 읽어 옛사람들의 진유(眞腴)를 음미하였고, 나이 19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숭정(崇禎)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2월에 어떤 사람이 와서 삼전[三田, 삼전도(三田渡)]의 사건을 전해 주자 문득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고, 그 뒤에 또 북경성(北京城)이 함락되고 천자(天子)가 승하(昇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또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마침내 벼슬에 나갈 생각을 끊고서 몸을 숨기고 농사를 지어서 증조모(曾祖母)와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였다.
이윽고 증조모의 상(喪)을 대신 복상(服喪)하고 나자 모부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는데, 공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하마터면 시력을 잃을 뻔하였다. 이에 앞서 조모(祖母)인 민씨(閔氏)가 울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너희 집안의 복조(福祚)가 이렇게 박(薄)한데, 네가 벼슬에 나가 입신 양명(立身揚名)할 뜻이 없으니,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니, 공이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657, 효종 8)에 마침내 갑과 급제(甲科及第)에 발탁되어 부직(付職)되었고, 또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이어 예조(禮曹)ㆍ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쇠잔해진 고을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혁파하였다.
조정에서 균전(均田) 제도를 시행하게 되자 사자(使者)인 민정중(閔鼎重)공이 공을 자벽(自辟, 자의로 관원을 추천 임명하는 일)하여 낭료(郎僚)로 삼았다. 갑진년(甲辰年, 1664, 현종 5)에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으로 있다가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윽고 다시 제수되자 또 소를 올려 사직하여 연안 군수(延安郡守)로 나갔으며, 어사(御史)가 공의 치적을 포계(褒啓)하여 자급(資級)을 올려 주라는 명이 있었다.
갑산(甲山)으로 옮겼다가 무신년(戊申年, 1668, 현종 9)에 정언(正言)으로 불려 와 온궁(溫宮)에 입조(入朝)하자, 제공(諸公)들이 앞다투어 공이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고 임금에게 말하니, 임금이 재삼 공의 이름을 외워두어 기억하였다.
그 뒤로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에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청석령(靑石嶺)에 이르렀을 때 효종[孝廟]이 전에 심양(瀋陽)에 들어가다가 이 재[嶺]에 이르러 지은 어제가(御製歌)가 있었는바, 가사(歌辭)가 매우 슬펐다.
공이 이 노래를 두세 번 음송(吟誦)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으며 마침내 시(詩)를 지어 갱화(賡和)하였는데, 사림(士林)이 이 시를 전하여 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산해관(山海關)에 이르자,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는 모두 가마를 탔으나 서장관은 걸어서 가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관문(關門)을 지키는 자에게 말하기를, “서장관도 사신(使臣)인데, 어찌 그 혼자만 걸어가게 하여 의도(儀度)를 잃게 하는 것이오?”라고 하니, 관문을 지키는 자가 공을 굴복시키지 못하여 마침내 수레를 타고 가도록 허락하였으며, 이때부터 이로 인하여 전례(前例)가 되었다.
무령현(撫寧縣: 평안북도 박천군에 편입된 폐지된 행정구역)을 지나다가 부자묘[夫子廟, 공자(孔子)의 사당]에 더러운 쓰레기가 뜰에 가득한 것을 보고서 연도(燕都, 북경)에 도착한 뒤에 예부(禮部)의 관원을 보고서 책망하니, 예부 관원이 부끄럽게 여기어 굴복하였다.
청인(淸人)이 전례에 따라 주는 물건들도 공은 마치 보기를 더럽혀질 것처럼 여겨 일체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청인(淸人)에게 들은 얘기로 상신(相臣)을 논핵하였고 또 이원정(李元禎)이 고관(考官)으로서 자기 아들에게 사정(私情)을 둔 것을 논핵하였는데, 임금이 몹시 노하여 옥리(獄吏)에게 회부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 9월에 다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 그 당시 현종[顯廟]이 승하(昇遐)하고 금상(今上, 숙종)이 나이가 어렸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하늘에 기도하여 국가의 명운을 영원하게 하는 방도에 대하여 극력 진달하였고 또 음사(陰邪)가 양기(陽氣)를 해치는 조짐을 논하였으며, 집의(執義)와 사간(司諫)이 되어서도 더욱 그 일을 논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그 당시 군흉(群凶)들이 못된 짓을 마구 저지르고 위복(威福)이 신하에게 옮겨지자, 공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으므로 크게 간흉들의 화를 돋구었다. 호남(湖南)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내려가서 선비들을 시험하였고, 무주 부사(茂朱府使)가 되었다가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연안(延安)에 재임할 때의 일을 주워 모아 장차 중하게 다스리려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실을 상세하게 파헤치도록 하였으나 아무 것도 캐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편배(編配)되었다가 용서를 받고 돌아와 외진 진잠(鎭岑)의 수곡(樹谷)에 살면서 해진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항상 스스로 마음에 만족함이 있는 듯하였다. 영외(嶺外)의 고성(固城)이 수토(水土)가 매우 나쁜데 공을 그곳의 현령(縣令)으로 내보냈지만, 공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에 부임하였다.
그곳에 재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공의 선정(善政)에 대한 칭송이 흘러넘쳤는데, 수의(繡衣, 암행어사)로서 그곳에 내려온 자가 곧 시인(時人)으로 공을 매우 미워하였으나 그 또한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조정에 포계(褒啓)하여 벼슬이 승진되고 하사품(下賜品)이 내렸다.
또 임금이 글을 내려 가장(嘉獎)하였고 마침내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옮기어 폐추(廢墜)된 정사를 수거(修擧)하고 절의(節義)를 숭장(崇獎)하였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또 간인(奸人)의 뜻을 영합하여 공을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경화(更化,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말함)하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고사(故事)에 동래 부사는 반드시 화려하게 차려입은 복장으로 왜인(倭人)을 접대(接待)하도록 되었으나, 공이 말하기를, “어찌 사치스럽고 화려한 복장을 꾸미어 적인(敵人)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공이 매우 가난하다는 얘기를 듣고 30금(金)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이 도착하자 충신(忠臣)인 송상현(宋象賢)공의 사당을 크게 수리하고 노비(奴婢)를 사들여 사당을 수호(守護)하게 하였으며, 관노(官奴)인 석매(石邁)도 국난(國難)에 순절(殉節)하였으나 그 자손들이 아직껏 천적(賤籍)에 매여 있자, 공이 그들을 남김없이 속환(贖還)해 주었다.
또 손을 씻고 경건하게 공무를 받들었고 상고(商賈)들의 세은(稅銀)을 호부(戶部)로 실어 보낸 것이 아홉 달 사이에 1만 4천여 냥(兩)이나 되었으니, 옛날에는 없던 일이었다. 또 사봉(私俸)으로 민세(民稅)를 모두 견감(蠲減)하니 관찰사(觀察使)가 그 일을 조정에 알리어, 임금이 또 말을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승진하여 전라 감사(全羅監司)에 임명되었는데, 수령(守令)들의 출척(黜陟)을 엄격하고 공명하게 하였고 권세(權勢)에 흔들리지 않았으나, 이 때문에 논체(論遞)되었다. 얼마 뒤에 들어와서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다가 승지(承旨)로 옮겼는데,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무재(武才)를 친열(親閱)하자, 공은 쓸데없는 물건에 탐닉하면 뜻을 잃게 된다는 경계를 진언(進言)하였다.
일찍이 ≪시경(詩經)≫의 무양장(無羊章)을 강론(講論)할 때 공이 진언하기를, “주(周)나라 선왕(宣王)은 나라를 중흥(中興)시킨 임금인데도 백성들을 어질게 대한 여택(餘澤)이 또 서류(庶類)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소와 양이 이와 같이 많았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조 참의(兵曹參議)로서 교지(敎旨)에 응하는 상소를 올리어 백성들을 보전하는 방도를 극력 말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 9)에 또 승지(承旨)로서 휴가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가 갑자기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람과 눈을 무릅쓰고 급히 달려 서쪽으로 올라오다가 신창(新昌)에 이르렀을 때 병이 들어 11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69세였다.
임종(臨終)할 때 다른 일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물어보지 않았고 다만 임금의 건강 상태만을 물었으며, 이윽고 이르기를, “상사(喪事)를 치를 때 일체 ≪비요(備要,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따라서 하라.”고 하였으며, 또 새 돗자리로 바꾼 것이 편안하지 않다고 말하고서 운명하였다.
처음에 진잠(鎭岑)의 구봉산(九峯山) 아래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공주(公州) 보문산(寶文山) 을방(乙方)을 등진 자리에 이장(移葬)하였으며, 공의 부인(夫人) 김씨(金氏)를 부장(祔葬)하였으니, 모두 선영(先塋)이다.
오호(嗚呼)라, 공은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지극한 행실을 집안에서 실천하였고 충성과 신의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났다. 질박 진실하고 정직하여 이익도 공을 유혹하지 못하였고 위협도 공을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절벽처럼 우뚝 선 기상(氣象)이 있었다.
권세 있는 간신이 나라를 전단(專斷)하는 때를 당하여 공은 그들을 마치 없는 것처럼 보았다. 성화(聖化)가 경신(更新)하였으나 시의(時議)가 도리에 어긋나게 기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서 머뭇거리며 스스로 움츠려 지냈으니, 그 불평(不平)한 마음을 번번이 음영(吟詠)에 발로(發露)하여 슬퍼하고 풍자하면서 위기(危機)와 함정(陷穽)조차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가짐이 청결하고 입의(立義)가 명백하여 사람들이 끝까지 공에게 해(害)를 가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지금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세환(世煥)이고, 조씨(趙氏)는 본관(本貫)이 임천(林川)에서 나왔다.
원조(遠祖)인 조천혁(趙天赫)은 고려에 벼슬하여 가림백(嘉林伯)에 봉해졌고, 그 뒤로 고관(高官)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조(高祖)인 조응침(趙應忱)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그 아들 조장(趙璋)은 아우인 조성(趙珹)의 아들 조인현(趙仁賢)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를 이었는데, 이분이 참봉(參奉) 조석(趙碩)을 낳았다.
공은 신분이 귀해진 뒤에 3대를 추은(推恩)하였다. 선비(先妣)는 이씨(李氏)로 별좌(別坐) 이거인(李據仁)의 딸이며 토정 선생(土亭先生) 이지함(李之菡)의 증손녀이다. 공의 부인은 만력(萬曆)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군 4)에 태어났고 숭정(崇禎)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 세상을 떠났으며, 부인의 선고(先考)는 진사(進士) 이의행(李誼行)이다.
아들은 조홍기(趙鴻紀)이고 네 딸은 사인(士人) 유진서(柳震瑞), 김희중(金凞重), 이희장(李喜章), 도사(都事) 이현성(李玄成)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조봉령(趙鳳齡)과 조봉경(趙鳳慶)이고 네 딸은 모두 자녀가 있다.
억망(嶷望)은 세상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워한 자들이 많았으나, 오직 나는 스스로 공을 제대로 아는 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묘갈명을 지어 묘소에 새기는 바이니, 이야말로 공을 모두 아는 자라고 이를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억망(嶷望)은 세호(世好)와 부앙(俯仰)하였으니, 그대는 고상하고 정직한 선비였네.
교묘하게 벼슬하고 아첨을 잘하는 것을 남들은 모두 달려드는 바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도 우직(愚直)하였나?
저 못된 자들의 혼매(昏昧)하고 탐묵(貪墨)한 행위에 침을 뱉었으니, 나는 빙옥(氷玉)과 같았네.
누가 그 관직에 있으면서 국록을 받아먹고 일을 태만히 하였겠는가마는, 나만 홀로 나라 일을 위하여 애를 썼네.
득실(得失)과 영욕(榮辱)을 나는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니, 외물(外物)이 나를 어쩌지 못하였네.
해진 옷과 나물 반찬으로 살면서도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며 살았으니, 나는 느긋하게 여유가 있었네.
통곡하며 먼 곳을 바라보니 의기(義氣)가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격앙시켰네.
지금 사람과 더불어 살았지만 옛사람이 그와 어울리는 무리였으니, 그래서 관도(官途)가 험난하였네.
세도(世道)가 갈수록 쇠퇴해지니 공은 실로 싫증이 났고 뒤에 죽을 자들의 슬픔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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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全羅監司趙公神道碑銘 幷序。
趙樹村嶷望, 醇實卓犖, 忠孝正直人也。 少而能詩, 晦翁夫子嘗言 “做好詩, 不得做好官”, 嶷望有焉。 公少讀經史, 味古人之眞腴, 年十九, 捷司馬。 崇禎丁丑二月, 有人來傳三田事, 輒北望痛哭。 後又聞北京城陷、天子昇遐, 又北望痛哭。 遂絶意榮進, 潛身耕野, 以養曾祖母、祖母、母夫人。 旣代服曾祖母喪, 母夫人繼沒, 血泣幾喪明。 先是, 祖母閔氏泣謂曰: “汝家祚薄如此, 汝無立揚意, 吾無望矣。” 對曰: “謹受命矣。” 丁酉, 遂擢甲科及第付職, 又捷庭試爲典籍, 歷禮、兵曹佐郞, 出爲黃州判官, 蘇殘革弊。 朝廷行均田事, 使者閔公鼎重辟爲郞僚。 甲辰, 自兵曹郞拜正言、持平, 不出。 旣復拜, 又陳疏辭, 出守延安, 以御史褒啓命陞資, 移甲山。 戊申, 以正言召, 入朝溫宮, 諸公爭言隨處盡職, 上再三誦其名以識之。 歷數官, 以書狀官赴燕, 行到靑石嶺, 孝廟入瀋時, 到此嶺, 有御製歌, 辭氣悲憤。 公吟誦再三, 不覺淚簌簌下, 遂作詩以賡之, 士林傳誦, 無不泣下。 到山海關, 上、副使皆駕轎, 而書狀徒步, 公謂守者曰: “書狀亦使臣也, 何獨步行, 以失其儀乎” 守者不能屈, 竟許乘車, 自是因以爲例。 過撫寧縣, 見夫子廟, 汚穢滿庭。 至燕都, 見禮部官責之, 禮部官愧屈焉。 淸人例給物件, 視之若浼, 一不近身焉。 畢使還, 以所聞於淸人者劾相臣, 又劾李元禎爲考官私其子, 上震怒, 廷尉問。 甲寅九月, 復拜掌令。 時顯廟新陟, 今上幼沖, 上疏極陳祈天永命之道, 又論陰邪剝陽之漸。 爲執義、司諫, 益論之, 遂遞。 時群凶肆惡, 威福下移, 公作詩歎之, 大觸衆怒。 奉使湖南試士, 爲茂朱府使。 不悅者捃摭延安時事, 將以重究, 使本道覈實而無所得, 然竟編配。 赦還, 僻處鎭岑之樹谷, 弊衣糲飯, 常若有自得者。 嶺外固城, 水土甚惡, 以公爲縣令, 公夷然赴任。 居無幾, 頌聲洋溢。 繡衣者是時人而惡公甚, 然亦以治最褒啓, 有晉錫, 又賜書嘉之。 遂移大丘府使, 修擧廢墜, 崇奬節義。 臺臣希姦人旨, 劾罷之。 庚申更化, 特陞通政, 爲東萊府使。 故事, 必以華盛之服接待倭人。 公曰: “豈有爲奢麗而服敵人之心” 上聞公貧甚, 命賜三十金。 至則大修忠臣宋公象賢祠, 買奴婢以守之。 有官奴石邁亦殉節, 而其子孫尙在賤籍, 公爲贖之無遺, 又洗手奉公。 商賈稅銀輸戶部者, 九朔間, 多至一萬四千餘兩, 古未有也。 以私奉盡蠲民稅, 觀察使以聞, 上又賜馬褒之。 辛酉, 陞拜全羅監司, 嚴明黜陟, 不撓權勢, 以此論遞。 旣入, 拜參知, 遷承旨。 上臨春塘臺, 親閱武才, 公進玩物喪志戒。 嘗講《詩・無羊》章, 公進曰: “宣王, 中興之主也, 仁民餘澤, 又有以及於庶類, 故牛羊之衆多如此。” 以兵曹參議, 應旨上疏極言保民之方。 癸亥, 又以承旨休告南歸, 忽聞上候違豫, 觸冒風雪, 奔走西上, 行到新昌, 疾作而卒于十一月十八日, 年六十九。 臨卒, 一無所問, 只問上候而已, 謂曰: “治喪一依《備要》。” 又易新席, 未安而絶。 始葬鎭岑九峯山下, 後移公州寶文山負乙之原。 夫人金氏祔焉。 皆先兆也。
嗚呼! 公非今世人! 至行行於家, 忠信著於人。 惟質實樸直, 利不能誘, 威不能屈, 常有壁立氣象。 當權姦當國, 視之若無。 聖化更新, 見時議乖張, 逡巡自疎, 其不平之心, 輒發於吟詠, 傷歎諷刺, 不避機穽。 然其持身淸潔, 立義明白, 人終不能加害, 終以天年。 嗚呼! 今世復有如許人邪,
公諱世煥, 趙氏出林川。 遠祖天赫, 仕高麗封嘉林伯。 其後簪纓不絶。 高祖應忱, 府使。 其子璋, 取弟珹子仁賢爲後, 是生參奉諱碩。 公旣貴, 推恩三代。 妣李氏, 別坐據仁女, 土亭先生之菡曾孫。 夫人生於萬曆壬子, 歿於崇禎丙寅。 其考, 進士誼行也。 男鴻紀。 四女: 適士人柳震瑞、金熙重、李喜章、都事李玄成。 孫男鳳岭、鳳慶, 幼。 四女皆有育。 嶷望與世不諧, 知之者鮮, 非唯不知, 疾之者多。 惟余自謂知之者, 故爲此文以篆于墓, 其可謂盡知公者耶? 抑否耶 銘曰:
於戲嶷望! 世好俯仰, 子骯髒也。 巧宦善諛, 人所共趨, 子何愚也? 唾彼掊克, 爲昏爲墨, 我氷玉也。 孰居其官, 食而怠焉? 我獨賢也。 得喪榮辱, 我不欣戚, 物莫易也。 衣弊飯蔬, 處之晏如, 我有餘也。 痛哭遠望, 義氣慨慷, 世激昂也。 今人與居, 古人其徒, 以崎嶇也。 世道愈灕, 公實厭之, 後死者之悲也。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