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12.03 00:47
■ 성균생원여흥민공묘표
(成均生員驪興閔公墓表)
내가 예전에 봉발(蓬髮)과 갈의(褐衣)로 증왕고(曾王考: 증조부) 진사공을 모시고 호서(湖西: 충청도)의 진잠(鎭岑)의 구석진 마을의 낡은 집에 있을 때 경술(庚戌) 옥사(屋社)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라의 이른바 유행(儒行) 고가(古家)들이 구업(舊業)을 폐지하고 배척하고 신학문으로 기울어져서 지난 날의 현송(絃誦)의 소리와 읍양(揖讓)의 예의의 향당과 주려(州閭)에서 성행하던 것을 하나도 듣고 볼 수가 없었는데 먹고 사는 일이 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간혹 뜻이 있는 선비들이 통분 질책하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서 도망가니 몸을 굶주리면서 구학(溝壑)에서 달가워하면서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아침 저녁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 때에 공께서는 세상을 피하여 진잠현의 북쪽 백운봉(白雲峯) 아래에 깊이 은거하셨는데 효효연(囂囂然)히 글을 읽으시면서 아들과 손자들을 가르치셨다.
한번 외람되이 보시고는 “사위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셨다. 마침내 손녀를 나에게 시집보내셨다. 실은 공께서 유속(流俗)을 싫어하심이 저와 같으셨고 나의 증조부(曾祖父)와 함께 하셨는데 어찌 나와 같은 사리에 어둡고 철이 없는 사람이 혹 취할만한 것이 있으리오?
세시(歲時)로 가서 뵈었는데 어린 손자 석규(奭圭)와 외손자인 팔수(八洙)와 마을의 자제들 중에서 배우러 온 사람들이 공의 앞에 모시고 앉았다. 공은 문득 운자(韻字)를 부르시면서 근체시를 짓도록 하셨다. 공께서는 일일이 자구를 수정해주시면서 지칠줄 모르시면서 그 이병(利病)과 장부(臧否)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이윽고 또 책을 대하고서 잠시라도 한가로이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하셨다.
공의 성은 민씨(閔氏)이고, 휘는 구식(九植)이며, 자는 덕일(德一)이고, 호는 백거(白居)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인데, 대대로 호서(湖西)의 영동(永同)에 사셨는데, 경파(京派)의 훈척(勳戚)들과는 다르다. 고조부대로부터 연산(連山)의 신도(信都)로 이사를 하였다.
출신이 존귀(尊貴)하고 이름이 높았다. 고려(高麗) 상의봉어(尙衣奉御) 휘 칭도(稱道)가 비조(鼻祖)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영모(令謨), 여평군(驪平君) 휘 함계(咸啓)가 훈덕(勳德)이 있어서 역사서에 실려 있다. 한조(韓朝)에 들어와서 휘 보광(普光) 관직은 별제(別提)인 분이 영동(永同)으로 은퇴하셔서 강학을 하시면서 후세(後世)를 일깨우셨는데 세상에서는 이정선생(梨亭先生)이라 칭하였다.
후손들이 번성하여 옥천(沃川)으로 분가하여 이주를 하였다. 휘 백함(百涵) 좌승지(左承旨), 휘 신혁(臣赫)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휘 치은(致恩)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었다. 휘 광호(光鎬) 행가선대부(行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인해 3대에 증직의 은혜가 베풀어졌다. 실은 공이 5대조 및 고조, 증조 및 조부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영귀(永龜) 통덕랑(通德郞)이다. 선비(先妣)는 공인(恭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용구(容九)의 딸이다.
공은 모습이 단정하고 체구가 작았으며 언행이 침착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였으며 가정을 다스리는 데에 매우 엄격하였다. 공의 형제는 세 사람인데, 공의 순서는 그 중간이었다. 백씨(伯氏: 형님) 도사공(都事公), 계씨(季氏: 아우) 진사공(進士公)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데에 차이가 없었다.
비록 집을 나누는 일이라도 일찍이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백씨께서 전원(田園)을 넉넉히 가지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이들이 어리석고 어려서 주관할 수 없어서 공이 가서 보살피며 다스리셨다. 동복(童僕: 하인)들을 법으로써 거느리고 전호(佃戶: 소작농)를 은혜로써 대하셨으며 안팎에서 원망하고 탓하는 소리가 없었다.
3대의 묘의(墓儀)를 정비하고 제전(祭田: 위토답)을 두어서 제사 음식을 제공하고 묘사(墓舍: 재실)를 건축해서 재숙(齋宿)에 대비하였는데, 일족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매년의 수입으로 조달하여 사용하는 것이 법도에 맞았다. 형의 아들이 성장함에 이르러 되돌려 주었는데 예전에 비하여 더욱 풍부해졌지만 공의 집은 거친 현미를 먹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형의 아들이 감동하여 토지 수 십 두락(斗落)의 땅문서를 가져와서 공에게 사례를 하였다. 공은 그것을 물리치시면서 “나는 나의 직분을 행하였으니, 어떤 공을 행하였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고종(高宗) 신묘년(辛卯年: 189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공은 소시(小詩)에 능하였는데 일찍이 서울에 노닐면서 여러 선비들과 운자를 내어서 시를 지었는데 공이 매번 으뜸을 차지했다. 이미 벼슬할 뜻을 끊어버리고 가정에 있을 때에도 좌석에는 손님들이 항상 가득했다. 시를 읊조리면서 봄날과 가을밤이 긴지를 모르셨다.
공의 차자(次子)가 키가 훤칠하고 피부가 하얗고 슬기롭고 민첩하였다. 족인(族人)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사람을 파견하여 공에게 청하기를 신식 학교에 취학시키도록 하였다. 공은 사양하면서 “가시오! 나의 귀를 더럽히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아! 이로써 공의 평생을 개괄해 볼 수 있다.
배위(配位)는 단인(端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선비 존건(存建)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병수(丙秀)이니 딸 둘을 낳았지만 요절하였다. 차남은 병화(丙和)인데 1남 2녀를 낳았지만 또 요절하였다. 아들은 즉 석규인데 두 집의 제사를 받드는데 내 처(妻)에게 아우가 된다.
장녀는 광산(光山) 김영록(金永綠)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팔수이다. 차녀는 광산(光山) 김봉수(金鳳洙)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용석(容奭)과 용기(容玘)이다. 석규는 아들 다섯을 길렀으니 장남 경복(庚福)은 일찍이 나에게 학문을 배웠다. 차남 경호(庚毫), 경수(庚綉), 경순(庚洵), 경석(庚碩)은 모두 외모(外貌)가 준수(俊秀)하고 풍채(風采)가 당당(堂堂)한 남자들이다.
공은 철종(哲宗) 임술년(壬戌年: 1862년)에 태어나서 대한제국이 망한 후 계유년(癸酉年: 1933년) 11월 20일에 졸하셨으니 향년 72세이셨다. 마을 뒤편의 선영에 안장되셨다가 그 후에 논산군(論山郡) 양촌면(陽村面) 임화리(林花里) 술좌원(戌坐原)으로 이장되셨다. 배위인 단인(端人)도 합장되셨다.
아아! 공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노인들이 여전히 존재하셨는데 서로 세도(世道)를 퇴패(頹敗)에서 부지(扶持)하고자 하여서 경전을 끼고 의리를 지키고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너무 황송(惶悚)하고 두려워서 몸을 떨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한다.
돌이켜 보면 지금 모두 돌아가시고 돌아가신 분은 살아돌아오기 힘들다. 세상은 오직 이익만 추구하여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고 그 생명을 잃는데 이르러서도 그칠 줄 모르니 눈을 들어서 보면 도도(滔滔)한데 혹 능히 성인의 서책을 지키고 의리(義利)를 논변하는 자가 있으려나? 진실로 얻어들을 수 없다.
아아! 슬프도다! 불초(不肖: 저자)는 나이가 60이 넘었고 석규도 그와 같다. 지금 다행히 집을 나란히 하여서 마치 형체와 그림자와 같이 서로 따른다. 가끔씩 나의 학문이 멸렬(滅裂)하여 공께서 평일에 바라시던 것을 저버렸다고 언급하면서 서로 바라보면서 낙심해하곤 하였다.
하루는 석규가 묘표를 청하였는데, 뜻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는데 처(妻)가 옆에 있다가 아무의 말을 도왔다. 생각해 보니 비록 두 손자(손녀)의 말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공의 평생을 차례대로 서술하고자 하였는데 하물며 그 청을 받음에 있어사랴! 다만 문장이 졸렬하고 거칠어서 그 실정에 부합하지 못하니 생존(生存)과 사망(死亡)한 분 사이에 매우 부끄러운 따름이다. <끝>
기미년(己未年, 1979년) 5월 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