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18을 맞을 때마다 윤상원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왔습니다.
살아남은 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몸을 던진 윤동지의 유지를 되새기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지요.
윤상원 동지는 5․18 당시 전남 도청에서 죽음의 새벽을 선택한 5월 항쟁의 지도자입니다.
필자가 조직했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광주전남 당당 중앙위원이었지요.”
고 윤상원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윤동지, 올해의 5․18에는 광주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윤동지를 차마 제 정신으로 만날 수도 없고, 5․18을 망쳐온 자들의 뻔뻔스런 모습을 보기도 싫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런 감정적인 이유보다 더 큰 이유는 지난 28년 동안 해왔던 각오와 다짐을 넘어서는 결연한 의지가 무엇보다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지요. 이제는 상투적인 5․18기념식과 추도를 되풀이 하는 것은 정말 열사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의 5․18은 지난 28년 동안 민주화운동세력이 걸어온 길을 진정으로 되새겨보며 오늘의 이 참담한 현실을 참회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에 걸친 국정운영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내고 국가의 위기적 구조를 바꿔내지 못한채 실망만 주었지요. 우리의 무엇이 문제였길래 국민의 기대와는 먼 현실로 끝났을까요? 그래도 민주화가 이 정도 진전된 것은 큰 소득이 아니냐고 변명하는 자들도 있지만, ‘님’들이 목숨을 내던지고 역사의 무대로 갔던 것은 이런 수준의 사회를 열망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윤동지, 나는 노무현 정권 내내 국민의 어렵고 힘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중국의 추격으로 한국경제가 위기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이에 대처해나가야 한다고 호소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누구도 관심이 없더군요. 아니 관심있는 척은 했지요. 그런데 그들의 진짜 관심은 국민의 고통과 나라의 장래보다 권력의 유지와 자신들의 이해였습니다. 민주화세력이 15년 동안 집권했지만, 민주화가 진전된 것 이외에 이렇다할만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지요.
물론 나도 한때는 청와대수석과 장관의 자리에서 국민 앞에 나섰던 적이 있기에 결코 남탓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자는 것이 아닙니다. 국정일에 책임을 갖게 되면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더 또렷이 보였습니다. 권력에 취해서 호텔에서 음식먹고 굽실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으시댈 시간이 없어요. 어떻게 밤잠을 제대로 자겠습니까? 민주화세력을 대표한다면 당면현안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국민의 고통을 덜 수 있는지 그 해법마련에 혼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권에 일찍 몸담은 인사들이 민주화대표인양 하면서 권력에 취하고 정치공학적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국민은 뒷전에 밀쳐놓고 권력게임에 영일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민주화전선에서 몸을 던졌던 사람들은 지난 15년 집권시기에 무엇을 했기에 국민들이 외면하기에 이른 걸까요? 정치판에 간 선후배들이 권력게임에 빠져 있는 동안 먹고살기 위한 생업에 빠져있었던 거지요. 지난해 이런 상황을 바꿔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윤동지도 잘 아는 광주 5․18세력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고, 80년 봄 우리가 냉정하게 판단했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참회와 반성의 계기가 되어야 할 2008년 5․18이 이명박 정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또다시 투쟁론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검역주권을 포기한 쇠고기협상은 다시 해야 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한국에 부담만 주는 한미FTA도 막아야 하지요.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를 받아주면 한미관계도 복원되고 한미FTA 비준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처럼, 민주화세력들도 지지율이 20%로 떨어진 지금 기회를 이용해 공세를 취하면 정국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국민들이 이 문제는 전혀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고 봅니다. 만약 야당이 정국주도권을 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면, 야당 지지율이 올라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5․18을 맞아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될 문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새롭게 ‘님’들의 뜻을 승화시켜 나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리고 사회적 양극화를 해결하면서 조국통일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들을 결집시켜 우리사회의 지도력을 만들어내고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상원 동지, 현실의 역사무대에서 우리가 분투할 것이니 부디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