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는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읍에서 서쪽으로 80리 떨어진 백운방 텃골 ( 基洞 ) 팔봉산 아래 조부모를 모신 큰집에서 태어났다 원래 안동 김씨인 경순왕 자손 이었으나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멸문의 화를 당할때 한양에서 경기도 고양 으로 옮기게 되었으나 서울에서 가까운 지라 다시 먼곳 으로 이사를 하게 된것이다 집안이 빈곤하고 어머니 나이 열일곱에 아이를 얻어서 어머니는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말을 곧잘 했다 서너살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마마 자국이 많다 부친 김순영은
도존위(면 단위의 실무를 맡아보는 수석)를 맡아 밥 벌이 했으나 양반의 신분을 감춘 상민으로 가난과 양반의 괄시로 인하여 곧잘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다 직장에서 쫗겨 났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신이 어렸을때 "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 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 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 고 말씀 하시어 이를 마음에 깊이 새긴 이유로 평생 술을 멀리 했다 양반도 아니고 가세도 어려워 글 공부가 쉽지 않았지만 학구열이 높아 동냥, 구걸 공부로 과거에 응시 했으나 돈만 있으면 과거 시험 합격도, 벼슬도 할수 있는 현실에 실망 하였다 그런 그에게 부친은 풍수 지리나 관상학 공부를 하도록 권했다 이말을 들을때 " 상 좋은것이 몸 좋은것만 못하고 (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 身好不如 心好 ) " 는 상서의 글을 보면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하게 되었다 이후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 泰山
覆於 前 心不妄動 )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 與士卒 同甘苦 )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 ( 進退 如虎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씨워 지지 않는다 ( 知彼知己 百戰不敗 ) 등의 글을 깨우치며 실천 하기에 힘 쌌던 열 일곱 나이에 일가 아이들을 모아 훈장 노릇을 하며 의미도 모르는 병서를 읽었다 이듬해 열 여덟살, 우연히 동학 사상을 듣게 되었는데 마음이 쏠렸다 과거에 낙방 하여 실망 하였고 관상 공부 하면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차별 대우를 철폐 한다는 말도 호감이 갔다 충청도 보은군 장안 이라는 곳에 동학 교주 해월 선생을 찿아 갔다 당시 남도 지방에 동학의 난이 있었고 전라도 고부 에서는 전봉준이 병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해월 선생과 면담후 해월인이 찍힌 팔봉 접주로 임명되어 군사를 모으니 700 여명의 총가진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총 다루는 기술, 행군, 체조 등을 교련 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낮선 두사람이 찿아왔다 정중히 대접하여 방문 목적을 물었더니 그들은 동학군에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병사 교육과 운용에 원칙을 세워 하도록 다음과 같이 조언 했다 1, 군기 정숙 으로 병졸에게
서로 절 하거나 경어 쓰는것을 폐지 할것 2, 민심을 얻도록 동학군이 곡식이나 돈을 빼았는 강도적 행위를 금할것 3, 현자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경륜 있는 인사를 구할것 4, 전 군을 구월산 안에 모아 군사 훈련을 실시 할것 5, 재령 신천군에 왜놈이 쌓아놓은 쌀 수천석을 몰수하여 패엽사로 옮겨 병사의 양식으로 사용할것 등을 알려 줬다 나는 즉시 실행에 옮기고 한사람은 모주로 다른 한사람은 종사로 모셨다 패엽사 도승으로 명성이 나있는 하은 대사에게 때때로 도학을 들었다 동학군이 관군에게
몰리고 있을 즈음 홍역을 치루게 되었다 당시 열아홉 나이에 하은 대사의 지극 정성 간호로 홍역을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인근 청계동에 사시는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진사를 찿아 인사를 드렸다 안진사는 6형제가 있었는데 테진, 태현, 안진사,, 태준, 테진, 태민, 태순 이었다 모두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안진사가 탁월했다 맏 아들이 중근 이었다 안진사는 스승(고능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고능선 스승으로 부터 심득서(마음 깊이 깨우처 얻는글) 를 얻어 듣는 기회를 자주 갖었다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절박 했다 과거 시험장 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 생긴 것을 슬퍼허여 괴로워 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에 입적하고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 되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곳에다 발을 디뎌 나아갈 길을 찿을수 있을까 ?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고능선 스승은 이러한 나에게 성현을 목표로 그들의 발 자취를 밟아 나가도록 말씀해 주시면서 지금은 마음의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하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줄거움의 뿌리 이니 걱정 말라 하시었다 선생은 의리를 강조 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 에서 벗어나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것 그리고 일을 할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 3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것 등을 말씀해 주시면서 經書(경서)를 가르처 주시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부족하고 떨어진 곳을 기워 주시고 빈 구석을 체워 주는 口傳心授(구전심수)의 교육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여기신듯 하였다 어느 나라든 흥망 성쇄가 있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 삼켰다며 조정 대관 들은 외세에 영합하려고 러시아를 친하여
지위를 보전 하려 하고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에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하려는 자들뿐이었다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오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 에게 아부 하다 꾐에 빠저 항복 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으로 충성하는 一死報國(일사보국)할 일만 남았다 하시었다 그 방법이 무었이냐고 묻자 청 나라에 가서 사정도 조사 하고 쓸만한 인물도 물섹 하여 후일 절대 필요한 인물이 되도록 권하시었다 그러면서 나의 부모님은 선생님의 사랑에서 지내도록 하겠다고도 말씀 하셨다 나는 집에서 부리던 말을 팔아 200냥의 여비를 준비하여 김형진 (보통이 아닌 챰빗 행상) 과 청나라로 출발 하였다 가면서 장사할 요량으로 참빗, 붓, 먹, 기타 산중에서 요긴한 물건을 사서 두사람이 한짐씩 짊어졌다 백두산, 모란봉, 을밀대를 구경했다 조선의 四大物 ( 경주의 인경종, 은진미륵 석불, 연산의 쇠솥釜, 힘흥의 장승) 중 하나인 함흥의 장승, 樂民樓(락민루) 남대천의 만세교도 둘러 보았다 경주의 인경은 통일 신라 성덕 대왕 때 만든 속칭 에밀래종, 은진 미륵은 논산군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석조 미륵보살 입상 함흥의 장승 낙민루 만세교는 조선왕조 발상지이며 태조 관련 유적지가 많다 압록강 에서 중국 까지는 기는 길이 험했지만 맹수는 없었고 인가도 드물었다 수목이 울창하고 나무 크기가 넓고 길었으며 사람의 인심은 후하고 먹을것이 풍부 해서 손님을 번겨 주었다 음식으로 대부분 귀리, 감자 ,물고기, 이면수 등 이었다 첩첩 산중에 동포들이 드물게 살고 있었는데 청일 전쟁을 피해 중국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속 험한곳에 화전을 일구어 조와 강냉이 농사를 짖고 있었다 도중에 풍문으로 들은 사실은 김이언이 의병을 모아 강개에 있는 왜군을 공격 한다는 말에 찿아가 도움이 될만한 역활을 의논하고 의견을 제시 했지만 그자는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공격 했다가 패전 하고 도주 하는 바람에 나도 패잔병 으로 몰릴 위험이 있어 우선 발길을 돌려 고향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가는 중에 고선생을 찿아 인사 했다 당시 고선생 맏아들 부부가 호열병(콜레라)으로 죽었다며 니를 손녀의 남편으로 할것을 부모님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이후 고선생 집에 곧잘 기거하게 되었다 당시 단발령 지시로 군대와 경찰, 문관, 면장 까지 삭발 중 이었는데 고선생과 나 그리고 안진사 3인이 모여 단발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을 고선생이 안진사 에게 물었다 안진사는 의병을 모아 거사 하는데는 실패 할수 있고, 단발에는 동참 할수 있으며, 딩장은 천주교를 믿으며 추세를 관망 하겠다 말 하니 고선생은 당장 단교를 선언 했다 나 역시 이해 안가는 점은 우리나라 에서 일어난 동학은 토벌 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서학은 따른다며 " 목을 자를 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수 없다 " " 저승 에서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이승에서 머리 깍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 " 는 생각을 하였다 일이 잘 되어 가는데 마가 서린다는 말이 있듯 고선생이 찿아와 나에게 " 자네,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게 사실 인가 ? " 물었다 사실 부모님들 간에 너댓살적 약혼 말이 오갔으며 약혼녀가 몇번 칯아 왔지만 글 공부와 접주 업무로 바빠 관심을 갖지 않았던건 사실 이었다 어쨋든 구구한 변명 보다는 " 제가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혼인에 있지 않고 선생님의 거룩하신 가르침을 받아 봉행 하는것에 있습니다 혼사는 서로 단념 하고 의리 로만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 나도 서운 했지만 고선생도 탄식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다시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나섰다가 배를 타게 되었는데 빙산에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여관에 들었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유숙객이 세칸에 가득 찼는데 왜놈이 조선인 복장을 하고 조선말을 쓰는자가 있어 이자가 혹시 국모(명성홯후)를 살해 하고 피해 다니는 자가 아닌가 싶어 고심 끝에 칼 찬 왜놈을 제압 ,살해 한뒤 살펴보니 일본군 중위 였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도록 시키고 그자가 찼던 칼은 기념으로 갖고 집으로 왔다 지인 몇 사람과 부모님은 집에 있지 말고 당분간 피하라 하셨지만 사적인 살인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위한 살인 인지라 피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 무시 했다 석달이 넘도록 무사 했는데 어느날 관군들이 와서 김창수(김구의 어린시절 이름) 의 신원을 확인하고 내무 사령의 체포장을 보이며 해주옥 으로 압송 했고 한달 여만에 심문에 들어갔다 사실 인정 심문에서 부정 하니 주리를 틀어 기절 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찬 물을 끼얹어 의식 회복 되었으나 이후 묻는 말에 침묵 하니 심문을 중단하고 하옥 하였으며 두달 뒤 인천 옥 으로 이감 되었다 이감 도중 휴식 시간 길옆에 孝子 李昌梅 之墓 가 보여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 했다 어머니는 감시가 소홀 하니 같이 생명을 버리자고 말씀 하셨지만 나는 절대 왜놈 손에 죽지 읺는다고 말씀 드려 진정 시켰다 어머니는 옥 바라지를 위하여 개성 사람 박영문 집에 들어가 동자꾼(식모) 으로 일 하셨다 그덕에 삼시 세끼 밥을 얻어 먹을수 있었다 佛書에 " 부모와 자녀는 천번을 태어나고 백겁을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 " 이란 의미를 곱씹었다 감옥안 환경이 불량 하여 장티푸스에 걸려 고통중에 짧은 생각으로 자살 하려고 이마에 손톱으로 忠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숨이 끊어졌다 이때 주위 동료들에게 발각 되어 소생하게 되었다 이후 자살은 옳은 일이 이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열이 내리고 보름동안 음식을 입에 넣지 못했다 심문이 있었다 사실 인정 심문에 " 본인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명을 때려 죽인 사실이 있소 " 이때 배석한 와타나베 순사가 보였다 그는 심문관 에게 " 저자가 무엇 이라고 하느냐 ? " 묻고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 이놈 " 하고 외치고 " 지금 소위 만국 공법 이니 국제 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 조약을 체결한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 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 이 개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 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 하였느냐 ? " 라고 소리 치자 와타나베는 " 칙쇼우 칙쇼우" 하고 사라졌고 심문 하는 사람이 윗사람으로 변경 되었다 윗 사람의 심문에 "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부끄러워 왜구 한명을 죽였소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 이오 ? "
라고 큰 소리 치자 심문관은 상부의 명령에 움작일 뿐 이라며 발뺌 하지만 양심이 찔렸던지 더 이상 심문은 하지 않았고 다시 하옥 했다 강도들과 같이 있는 방에 불만이 일어 관리 에게 호통을 첬다 " " 내 죄상이 강도짓이 아닌데 왜 이곳에 넣었느냐 " " 관리는 상부에 보고 햇고 결과적 으로 대우 받는 감옥 안의 왕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주위에 알려 졌는지 어머니 얼굴에 희색이 돌며 " 심문한 경무관이 돈 150 냥을 보냈다 네 보약 이라도 먹이라며 또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모든 사실을 알고 네가 먹고 싶은것은 다 뒷바라지 해주겠다 했으며 내가 홀 어머니로 보였던지 돈 많은 남자에게 중매를 서겠다는 뚜쟁이 할머니도 있었다 " 는 말씀에 " 그것이 다 아놈의 죄 올시다 " 라고 말씀 드릴수 밖에 없었다 이후 3차에 걸친 심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구경 하려고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왜놈들이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청사 안에서 형구를 갖추어 찍을수 없으니 길거리 에서 형구를 가까이 놓고 찍는 걸로 대신 하였다 살인 방조죄로 수감된 여관집 주인 이화보는 동료 죄수들 에게 " 저 젊은 이는 한끼 밥을 일곱 사람 분을 먹고 700리 길을 걷는다 " 라는 식으로 과장하여 나를 홍보 했고 관리들 역시 과장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유명인이 되어 갔고 따라서 면회객이 믾아졌다 물론 충분한 음식을 준비 해왔으나 나는 몇점씩 맛보고 죄수들 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아버님이 중국 고전, 대학 한질을 넣어 주시고 감리서 직원들의 주선으로 신서적 , 세계역사, 지리등 중국에서 발간된 국한문 으로 번역된 책을 읽으며 의리는 유학자들 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 하는 것이 복리가 되겠다고 생각 하였다 가끔은 동료 죄수 들에게 글을 가리켜 주기도 했다 건양 2년쯤 황성 신문이 창간된 때이다 ( 건양은 양력을 쓰기로한 연호이며 황성 신문은 1898년 9월 5일이 되어 시대적으로 맞지 않고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으로 보는게 타당) 신문 에는 김창수가 재소한 인천 감옥이 감옥이 아니라 학교 라고 쓴 기사가 있었다 가끔은 동료 죄수들의 사정을 들어 보고 솟장(죄를 지은 사건의 내용을 밝혀 재판에서 유리 하도록 만드는 글) 을 지어 주면 인지만
사다가 제출 하여 승소 하는 일이 많아졌다 당시 감옥 규칙이 낮잠은 허락 하는 대신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여 판소리나
옛 이야기를 시켰다 이유는 잠든 틈을 타 도주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덕분에 조덕근의 시조, 여창 지름 , 남창지름 , 적벽가, 가새타령, 개구리 타령 등을 들을수 있었다 하루는 경성, 대구, 평양, 인천 에서 아무날 강도 누구 살인 누구 등을 포함 하여 살인강도 감창수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를 황성 신문에 게재 되었다고 들었으나 마음은 조금도 동요 되지 않았다 박태보의 단근질 (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 삼학사 ( 병자 호란때 청 나라와 화의를 반대한 홍익한,윤집,오달재 등 이들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 당함) 에 대한 이야기에 감동 받았기 때문 이라고 하지만 살아 있는 조문객들이 줄을 잇고 옥의 고급 관리들이 찿아 왔으며 내게 음식을 얻어 먹던 죄수들, 글을 배우던 제자들, 내게 소송 지도를 받던 죄수 들이 한결 같이 애통해 주었는데 매일 보는 어머니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어쩜 주위 사람들이 사실을 감추었기 때문 이리라 나는 아랑곳 없이 대학을 읽으며 소일 했다 이런 와중에 내가 수감된 방으로 사람들 발소리가 들려 " 아이구 , 이제 김창수는 살았소 우리 감리 영감과 전직원이 어떻게 우리 손으로 죽일수 있느냐 ? 걱정 해 왔는데 대군주 (고종) 폐하 께옵서 김창수 사형을 정지 하라는 친칙(고종황제가 직접 내리 명령) 이 내려진 것이다 " 이 말을 들으면서 내 요량은 이재정이 공문을 받고 법부
(法部)에 전화로 교섭 한것 같다 사형은 형식적 으로 나마 임금의 재가를 득해야 했는데 법무 대신이 사형수 마다 심문 조서를 갖어와 상감의 친감(직접 볼수있도록) 을 거친다 그때 입시 했던 승지가 " 국모 복수 " 가 사적인 범죄가 아니라 국제 관계에 해당 하니 아직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며 대군주 께서 친히 전화 한것은 사실 이었다 신기한 것은 경성은 전화가 설치된지 오래 됬으나 다른 지역은 미설치 되고 인천에 가설 공사 된지 3일째 되는 1896년 8월 26일 이었으니 만약 전화 가설이 지연 됬다면 사형은 집행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식은 눈, 서리가 내리다가 갑자기 봄바람이 부는듯 하였다 사람들은 물론 부모님 역시 나를 이인 취급을 했다 사형수가 흔들림 없이 밥 잘먹고 평온하게 독서 하며 지내는 모습은 자기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이라 했다 특히 어머니는 배를 타고 올때 같이 바다에 빠저 죽자 했을때 " 나는 죽지 않슴니다 " 라고 말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어쨋든 인천 감옥은 물론 시가 에서 까지도 축하 잔치가 열렸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죄수들은 물론 옥의ㅏ 관리들 까지 호의를 배풀었고 당시 강화에 양반 중에서 이건창, 상놈 중에서 김경득이 있었는데 그 김경득이 사재를 털어 나의 구명, 석방 운동을 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