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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지도자의 끈질긴 집념으로 소망이룬 소 도읍
경남 남해군 이등면 무림리 정거 지도자 김 순 이
성공내용
이 마을은 남해 금산과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으로 남해군청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 지점에 위치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면소재지 마을로 주민 서로가 융화단결이 잘되지 않고 배타적이어서 새마을운동 열기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김 순이 부녀지도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 마을을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주민의 반발 때문에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연장 720m의 간선도로를 정부의 보상 없이 주변상가 100동을 자진철거 폭 6m에서 12m로 확장하여 기적의 소 도읍으로 변모하였으며,
주변 청소, 폐품 수집, 새마을금고 운영 등 도시 새마을운동이 정착되었고 월1회 정기적으로 경로잔치를 베풀도록 힘써 모범적인 충효마을이 되었고, 마을 앞 넓은 갯벌 6,000여 평의 양식장을 조성하여 알뜰하고 잘 사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 현황
가 구 : 237호(농가 161, 비농가 76)
인 구 : 1,123명(남 550, 여 573)
경지면적 : 38.4ha(논 32.6 밭 5.8)
뒤 늦게 불붙은 새마을운동
이 마을은 남해군청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지점에 위치하며 시장을 한복판에 둔 면소재지로 호당 경지면적은 0.14ha로서 대부분이 시장을 상대로 하루의 생활비를 벌어가야 하는, 주업이 농업도 아니고 상업도 아닌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75년도까지만 하여도 새마을사업이 거의 없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김 순이 지도자와 그의 남편인 남자 새마을지도자 최 무치 부부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기초마을에서 자립마을로 전격적으로 승급되어 새마을을 이룩한 마을이다.
술주정꾼이 새마을지도자로
김 부녀지도자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여고를 졸업한 후 가사를 돌보다가 이 마을로 시집을 왔다. 외아들인 남편은 서울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술과 도박으로 소일했으며, 패거리 싸움으로 깡패라는 별명이 붙어 마을에서는 아예 사람 되기 틀렸다는 식으로 말하여 왔으며 남편에게 말하기조차 싫어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형편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고 고루한 양반의 체통은 생계의 위협을 더욱 많이 가져와 김 지도자는 조그마한 보따리 장사라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깜깜한 3등 여객선을 타고 부산을 왕래하며 옷감 장사를 하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 다녀야만 했다.
집에 돌아오면 발이 부르터서 다음날이면 한걸음도 걷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그때는 마침 첫아기를 낳은 지 3개월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장사라고 다니다 보면 젖이 불어 가슴이 아프고 무거운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갖은 고난을 다 이겨내고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남편은 도박판에 날리기가 일쑤였으며 그 화풀이로 남과 시비하고 술주정하는 것을 볼 때면 김 지도자의 가슴은 견딜 수 없는 배신감에 사로잡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기구한 운명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날이 갈수록 저축이 늘어 5년 만에 35만원의 돈이 모아지게 되어 시장 안에 점포를 하나 얻어 정육점을 개업하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내 점포에서 장사를 한다는 기쁨으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장사를 하여 그의 별명은 이동시장에서 억순이로 불리어졌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이장과 개발위원장이 김 지도자 집에 찾아와서 이 마을이 군내에서도 가장 말썽 많고 협동이 안 되는 낙후마을로 지정 되었다고 하면서 대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뭔가 좀 패기 있고 대가 찬 젊은 사람이 우리 마을을 이끌어야 한다면서 김 지도자의 남편이 새마을지도자로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였으나 그의 남편은 천부당하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75년 6월 결국 그의 남편은 주민총회에 의해 새마을지도자로 선정이 되어 몸서리치는 남편의 술주정과 나태성을 다 털어버리고 이제 마을과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 되어 달라고 밤을 지새우며 설득 했다.
부부 새마을지도자
농업도 상업도 아니며 삶의 영위에 급급하여 장사에 시달리며 농사에 실증을 느낀 주민들의 오해와 갈등은 더욱 심하고 누구 하나 마을일에 솔선하여 협조하는 이 없는 현실에 지도자의 직책이란 너무나 어려웠으며 그러다 보니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진척도 없이 하루하루 세월만 가게 되었다. 남편이 새마을지도자가 된지 8개월이 되던 날 당국의 낙후마을 일소 방침에 따라 특별 지도마을 새마을지도자로서 수원에 있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수료하고 돌아 온 후 남편은 술도 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아 이상하리만큼 변하였다.
새사람이 된 남자 새마을지도자는 그렇게도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인 주민들에게 새마을운동으로 잘사는 마을을 만들자고 끈질기게 설득하게 되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저 사람이 웬일 일까」 「갑자기 정신병환자로 변했는가」하며 반신반의 하였으나 주민들은 하나 둘 호응해 주기 시작하여 마침내 이 마을에 새마을사업이 열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공동작업장을 짓기 시작했고 소 교량을 가설했으며 농로 500m, 하수구 4개소, 소하천 2개소 등 각종 새마을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으며 늦게 불붙기 시작한 새마을사업으로 인해 지붕개량도 면내에서 가장 뒤늦게 완료하는 불명예도 낳았지만 면이나 군에서의 열성 있는 지도에 힘입어 이 마을은 낙후마을에서 자립마을로 획기적인 승격을 하게 되었다.
새사람이 된 남편을 보고 신이 난 김 지도자는 낮에는 더 열심히 장사를 했으며, 밤에는 부녀지도자와 함께 틈나는 대로 부녀회를 열어 절미저축 등으로 부녀회기금을 마련하고 남자들을 도와서 새마을운동에 다함께 뛰어 들자고 호소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76년 4월 마침내 그녀는 부녀지도자로 추천 되었다.
새마을사업이 불붙다
부부지도자로서 마을을 이끌어 갈 중책을 맡게 된 김 지도자는 적은 일부터 쉬지 않고 새마을사업을 이끌어 가기로 마음먹고 우선 쉬운 사업부터 착수하기로 하여 부엌 개량과 장독대 개량을 실시하였다.
젖먹이 아이와 병들어 누워있는 시어머님을 정성껏 돌보지 못하는 아픔도 있었으나 하루의 일과에 피로가 겹쳐 집에 들면 곧바로 잠들기 일쑤였고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은 이미 마을 앰프방송을 통해 그날의 새마을사업으로 해야 할 일을 주민에게 알리고 있었다.
이렇게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는 동안 손발이 터지고 돌에 부딪쳐 멍이 든 지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온 주민들의 열의 있는 협동 속에 장독대 및 부엌을 100% 개량 완료 했으며 면사무소를 통해 은행나무 1,200본을 구입하여 마을 주변 및 각 가정에 식재하였다.
절미저축을 권장하여 저축정신을 길러 나감과 동시에 부녀금고를 운영 육성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여자처럼 뛰어다닌 결과로 196명의 회원을 가입시켜 18개월 만에 214,300원의 자체기금을 확보하였으며 매일 아침 시가지 청소를 실시한 후 폐품을 수집하고 여가를 선용하여 1일 다방을 운영하여 불우한 이웃을 돕고 부녀금고의 이익금과 폐품수집 등으로 면단위 농협에 300만 원짜리 적금을 16개월 째 불입하였다.
또한 어버이날에는 마을 노인들에게 경노잔치를 베풀어 드리고 삼천포 앞바다에 나타난 무장간첩의 만행으로 고생하고 있는 예비군 전투소대를 찾아가 국수와 음료수를 대접하고 매 식사 때마다 순번제로 뒷바라지를 해줌으로서 주민과 예비군과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하고 있다.
갯벌을 개발하여 양식장을 만들고
이 마을에서는 주민의 가까운 것부터 하나하나 확실히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 부녀지도자가 수원 연수원에 입교하여 새마을운동의 참뜻을 터득한 후 이 마을을 위해 부부 새마을지도자로서 가장 멋지고 알차게 일해 보고자 굳은 결의를 했다.
집에 돌아 온 이튿날부터 잘사는 마을을 만드는데 역점을 두어 소득사업에 전념을 하기로 하고 마을 앞에 방치 된 갯벌을 개발하여 소득증대를 기하기로 주민총회에서 결의 하여 조수가 빠져 갯벌이 노출되는 시간이 하루에 불과 5~6시간 정도인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현장에서 취사를 해가면서 한 겨울의 강추위 속에서도 남자들은 돌을 깨고 부녀자들은 머리로 돌을 이어 나르는 작업을 한 끝에 6,000여 평의 양식장을 설치하고 그 후에도 돌이 갯벌에 묻히지 않도록 하는 한편 돌에 붙은 불가사리를 떼어 주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한 결과 77년 8월부터 포자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78년부터는 매년 70여만 원 이상의 공동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 되고 있어 부푼 기대 속에 내일을 기다리고 있어 이제 이 마을은 그 숱한 역경을 이기고 의욕과 활기에 찬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했다.
새마을의 힘을 소 도읍 가꾸기에
수십 년 이어 온 가난을 몰아내고 깨끗하고 산뜻한 소 도읍으로의 면모를 일신시키기 위해 78년 3월 24일 관내 전 기관장과 주민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회관에서 소 도읍 가꾸기 착수대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 노폭 6m에서 12m로 가로가 확장됨에 따라 이에 따른 용지보상 문제를 주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720m의 간선 도로변에 위치한 저촉건물 106동을 정부 보상 없이 자진 철거하여 새로운 현대식 주택을 건립하기로 결의 했다.
가로 확장지역의 철거 대상 중에는 대지가 완전히 도로에 편입 되고 새집을 마련 할 수 없는 극빈 영세민 5가구가 있으며 그들 중에는 폐질 불구자 등이 있어 자기 집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고 하며 강경한 반대를 하였다.
모처럼 마을을 가꾸고 잘 살아 보자고 하는 일이 도중에서 중단되게 할 수 있느냐며 부부새마을지도자는 그들에게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15만원을 내어 놓은 후 주민들과 마을 유지들에게 불우이웃을 돕자고 호소하여 195만원의 성금을 모아 주택부지 200평을 마련하여 그들의 주택부지로 가구당 50평씩 분배해 주었다.
소도읍가꾸기와 불량주택 개량을 동시에
군 당국에서 농촌주택개량 융자금을 알선 해 주고 고향 시멘트 보내기 운동으로 보내 온 시멘트 600포대와 함께 행정공무원의 열렬한 지도로 자신감을 얻어 106동의 저촉건물을 완전히 철거 정비하고 마을 내 국도변의 곳곳에까지 불량주택을 완전히 개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주택개량사업은 무척이나 벅차고 힘겨운 사업이었다. 주택개량 대상자가 마을에서도 제일 생활이 어렵고 불량주택에 살고 있는 극빈영세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설득을 하면 할수록 반발은 더욱 심하여 졌으며 공짜나 되면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하소연을 계속했다. 그리고 면장과 농협장과 상의하여 농협자금을 우선 대출하여 주택부금을 억지로 넣었다.
그리고는 가족 수를 감안하여 식구가 많은 집은 18평짜리를 식구가 작은 집은 15평짜리의 규격 자재를 억지로 집 마당에 운반하여 주었으나 목재를 운반해 놓고도 그래도 「내 모른다」고 조금도 협조를 않던 주민도 이었으나 그 후 시멘트를 한 집에 250포씩 내려놓자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좁은 섬에 많은 사람들이 살다보니 토지를 귀히 여겨 평당 땅값이 최하 10,000원을 호가하고 있어 정부에서 사실상 건축비를 80% 융자해 준다 해도 대지 값이 100만 원 정도 소요되고 부속건물 담장 등을 모두 합하면 200~300만 원 정도의 부담을 안게 되니 영세민은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러나 군 당국의 협조를 얻어 모래와 자갈을 실어 나르고 기술자를 알선해 줌으로서 약 2개월에 걸친 어려움 속에 한집 두 집 짓다보니 나중에는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가 튼튼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렇듯 갖은 고생을 다 이기고 엄두도 못 내었던 새집을 지어 입택하는 기쁨은 말할 수 없었고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좋은 교훈을 이 마을에 심어 주었다.
알뜰히 잘사는 소도시의 꿈
77년도 호당 평균소득이 140만원으로 전국 평균수준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벅찬 소도읍가꾸기 새마을사업을 잘해낸 그 슬기를 줄기차게 이어나가 1가구 1 통장 갖기를 전개하여 가정을 살찌게 하고 마을금고와 절미저축 폐품수집 등을 활발히 전개하여 마을 공동이익 추구에 정열을 쏟아 80년대에는 2,000천 원 이상의 호당소득이 돌아 갈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오늘도 보다 더 잘살기 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새마을사업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