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금봉병연
조선불교의 개혁이 시급하니 더욱 정진하라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연(世緣)을 다했지만, 조선불교 수호와 후학 양성을 위해 헌신했던 금봉병연(錦峰秉演,1869~1916)스님. 조선후기 대강백들의 강맥을 계승하며 도제를 양성하고, 포교당을 개설하는 등 불법홍포의 전면에 섰던 금봉스님의 수행과 행장을 비문, <조선불교총보>, <근대고승명인서한집> 등의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다.
“조선불교의 개혁이 시급하니 더욱 정진하라”
조선후기 강맥 계승한 대강백으로 도제양성
석전ㆍ만해스님 과 조선불교 수호운동 전개
○…속가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출가한 뒤에는 경학을 연찬한 금봉스님은 내외전(內外典)에 두루 밝았다. 스님 비문에는 “유불(儒佛)의 철리(哲理)와 한유구소(韓柳歐蘇)의 문장비체(文章秘諦)를 연수(硏修)한 바 발로(發露)가 애요(要)에 맞으니 제노(諸老)가 망년외교(忘年外交)로 즐겨 창화(昌和)한 시편(詩篇)이 원근(遠近)에 전파되었다”고 적혀 있다.
출가전 어린 시절에도 스님은 총명한 지혜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비문에 나오는 ‘한유구소’라는 구절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장력이 뛰어났던 한유(韓愈,768~824),
유종원(柳宗元,773~819),
구양수(歐陽脩,1007~1072),
소동파(蘇東坡, 1036~1101)를 가리킨 말로 금봉스님의 문장이 탁월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사진> 순천 선암사에 모셔져 있는 금봉스님 진영. 사진 제공=순천 선암사
○…금봉스님의 학식이 깊은 배경에는 조선후기 대강백인 선대 법은사(法恩師)들의 영향이 컸다. 화엄종주인 함명(函溟)스님이 법(法,가르침)으로는 법증조에 해당하며, 경붕(景鵬)스님이 법조(法祖).경운(擎雲)스님이 법부(法父)이기에 금봉스님은 4대에 걸친 강맥을 계승하고 있다.
경운스님은 단번에 금봉스님의 법기(法器)를 인증했다고 한다. 법기는 불도(佛道)를 수행할 수 있는 근기를 갖춘이라는 뜻으로 금봉스님의 수행력을 짐작할 수 있다. 금봉스님은 경운스님 문하에서 <화엄> <법화> <전등염송> 등 경전을 폭넓게 공부했다.
○…금봉스님은 20대 말에 상경한 적이 있다. 신식 문물을 접하고, 격동의 한복판에 있던 한양의 정황을 살피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으로 가기 전에 세상 물정을 풍문으로 들은 금봉스님은 “불교 또한 일대 개혁이 초급(焦急, 시간 여유가 없이 매우 급함)하다”면서 상경 후 급박한 국내외 정세를 면밀히 점검했다. 또한 서양에서 들어온 서적을 구해 상세히 읽으며 서구사회에 대한 지식을 접하기도 했다.
이후 조계산으로 돌아온 금봉스님은 청년도제들에게 내외전을 겸비하고 외국의 신식문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된 금봉스님은 이회광을 비롯한 일부 승려들이 친일 교단을 구성하려 하자, 만해.한영 스님 등과 함께 조선불교 수호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금봉스님은 유학자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문학적으로 ‘여한 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 영재(寗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과 조선후기 우국지사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하정(荷亭) 여규형(呂圭亨,1848 ~1921) 등 당대 지식인들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꿈꿨던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해 금봉스님은 학문의 식견을 더욱 넓힌 것은 물론이다. 또한 10년 이상 세수가 차이나는 이들은 금봉스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건창은 ‘쌍수거사(雙手居士)’라는 필명으로 경붕스님의 진영에 찬(讚)을 쓸 정도로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일제는 이듬해 ‘토지수용령’을 공포했다. 조선을 강점한 뒤 조선인의 토지를 턱없는 가격으로 사실상 ‘강제매입’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찰 토지가 피해를 입었는데, 순천 선암사도 마찬가지였다.
선암사 소유의 산림이 부당하게 국유재산으로 편입되는 일이 발생했다. 금봉스님은 이의 부당함을 탁지부(度支部,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국가 재무를 총괄한 중앙행정부서)에 누차 진정하여 산림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지불했던 세금을 돌려받고 산림 또한 사찰 소유로 환원시켜 놓았다. 이 시기가 비문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대한제국 시기에 해당하며, 토지수용령 공포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일제강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사진> 순천 선암사 부도밭. 금봉스님을 비롯한 역대 조사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금봉스님이 입적한 후 열린 추도회(1917년11월5일)에서 만해스님은 ‘與映湖錦峰兩伯作(여영호금봉양백작) 在宗務院(재종무원)’이란 시를 통해 금봉스님의 원적을 추모했다. 동국대 국어교육과 고재석 교수는 이 시의 제목을 ‘영호 금봉 두 선사와 시를 짓다 종무원에서’로 하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昔年事事不勝疎(석년사사불승소) 萬劫寥寥一夢如(만겁요요일몽여)
不見江南春色早(불견강남춘색조) 城東風雪臥看書(성동풍설와간서)”
“지난날 일마다 소홀했노라 / 만겁인들 한바탕 꿈이 아니랴 /
강남의 이른 봄빛 보려 안은 채 / 성동의 눈바람 속 누워 책을 읽노니”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조선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임제종 건설운동을 펼치는 등 ‘동지적 관계’였던 만해.영호.금봉 스님의 각별한 인연을 짐작할 수 있는 시이다.
○…1917년 발행된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에는 금봉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는 한편의 글이 실려있다. 雲散人(예운산인)이라는 인물이 쓴 글인데, 예운산인은 조선불교학인대회에 순천 송광사 강원대표로 참석한바 있는 최동식(崔東植)스님이다.
<사진>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순천 선암사.
■ 행장 ■
여수 흥국사로 출가
승려교육 포교 관심
스님은 1869년 12월24일 전라도 근천부(近天府) 화양면 옥적리(玉笛里)에서 태어났다. 근천부는 지금의 여수시이다. 이때는 고종 6년으로 조선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부친은 장건하(張建廈)선생, 모친은 영성(靈城) 정씨(丁氏)였다. 속명은 장기림(張基林)이다. 법명은 병연(秉演), 법호는 금봉(錦峰), 아호는 향엄(香嚴)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스님은 13세에 사기(史記)와 경서(經書) 등을 두루 통달했다. 14세에 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의 원력을 세웠다. 이해에 여수 영취산 흥국사의 경담(鏡潭)스님과 인연이 닿았으며, 이듬해 4월8일 정식으로 출가했다.
출가한 후 금봉스님은 10여년간 오직 내전(內典)을 공부하는데 몰두했다. 경학을 연찬하며 출가사문의 기초를 닦는데 전념했던 것이다. 당대의 강백 회상에서 두루 공부했는데, 이때 원화(圓化,구례 화엄사).경운(擎雲, 순천 선암사).범애(梵海, 해남 대흥사).원응(圓應, 해남 대흥사)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집> <사교> <염송> 등을 배웠다. 이밖에도 이밀제(李蜜齊).황매천(黃梅泉) 선생 등과 토론을 벌일 만큼 외전(外典)에도 밝았다.
내외전을 두루 익힌 금봉스님은 1895년(을미년) 3월 선암사 대승암 강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대승암에서는 10여 년간 제자들에게 경학을 지도했다.
1910년 이른바 원종(圓宗)이 설립되어 이회광을 중심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스님은 박한영.진진응.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조선불교 수호운동을 전개했다.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해 경운스님을 종장(宗長)으로 추대했다. 1913년 선암사 주지에 취임했고, 순천 환선정(喚仙亭) 포교당 개설하는 등 산중불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금봉스님은 주지 소임을 보면서 승려교육과 포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격(寺格)을 일신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또한 망실된 임야(林野)를 되찾는 등 사찰 재정을 확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스님은 1916년 하안거 해제후 미질(微疾,가벼운 질환)을 보이다 젊은 나이에 원적에 들었다. 세수 48세, 법납 35세. 금봉스님의 진영과 비는 순천 선암사에 모셔져 있다.
수법제자(受法弟子)로 철운종현(鐵雲宗玄).용곡정호(龍谷正浩) 스님을 두었다. 종현스님은 불후의 명작 <태백산맥>을 지은 조정래 작가의 부친이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