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언니의 소개로 만난 그 사람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웃기만 하고
전화를 해도 듣기만 했지요.
만난지 석 달이 지났어도
손 한번 잡지 않았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느낌...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자꾸만 겉도는 느낌 속에
흐르는 시간...
난 그런게 싫었습니다.
이 애매한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앞에 찾아온 그 사람에게 말해야 했습니다.
사람은 좋지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왜 보자고 했어?" - 남자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오빠. 우리 그만 만나자." - 여자
그 말을 건넨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출근한 내 책상위에 동료직원이 출력한 듯한
넉장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내가 일하던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누군가 올린 글이랍니다.
그 사람인 것 같다며 읽어보라고...
빼곡히 적혀 있는 넉장의 편지에는
그 사람이 여행중이라며 쓴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로, 즐겨 가던 카페로,
내 삶 속에 등장했던 많은 곳들을 사진으로 찍었노라며
100일이 되던 날 함께 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사진으로밖에 보낼 수 없어 미안하다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말없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다 듣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원하는 것... 내게 무엇이 소중한지를...
단지 표현하지 않았을 뿐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누군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20년이 넘도록 다른 환경에서 자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배려 없이 지속되기 힘들다는 걸
부딪쳐보기 전에는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스스로에 대해 표현하는 것에 서투르답니다.
여자들은 스스로에 대해 표현은 잘 하지만 상대방을 포용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여자들은 항상 내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불행히도 남자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도
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작은 다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만남이란 마음속 새하얀 스케치북에 누군가가 와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 사람으로 입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는 거라 말하지만...
마음속 스케치북에는 아직 누군가가 흐리게 남아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예전 그 사람의 흔적을 찾게 된다면
그 만남 또한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나도 그런 것이 부족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스케치북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영향으로 오빠를 바라봤기에...
그 모든 행동들이 이해도 되지 않았고, 또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은 채 혼자 그렇게 맘앓이를 하다 결정을 내려버린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새롭게 만날 준비라는 것도 그래서 필요하단 생각을 해봅니다.
중요한건 누군가 그림 그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남자 이야기//
친구의 소개로 만난 한 여자아이.
세상의 모든 걱정을 품에 안고 사는 아이.
나의 역할은 대부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말 재주가 없는 내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세상은 날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답니다.
하지만... 지난 그 시간들이
나 혼자만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됐습니다.
최근 계속 힘들어 보이던 그녀...
그녀의 집 앞을 마지막으로
그녀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오빠.잠깐 올래? 할 얘기가 있어." - 여자
"우리... 그만 만나자." - 여자
'오빠가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얼마나 사랑하는데...
회사에 갑작스런 휴가 신청을 하고
아침 일찍 무작정 기차를 탔습니다.
창 밖에는 안개만 끼어 있는데 내 눈에는 비가 내립니다.
그녀가 그토록 못잊어하던 그녀의 대학 시절을 나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사진 한 장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공부했었을 도서관,
수업을 받았을 법한 강의실,
작업실, 잔디 옆 벤치...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카페도...
하나도 빠짐 없이 찍고 또 찍어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랑은 아끼는게 아니란 걸...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영화 '시월애'가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그녀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108장의 사진으로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더욱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녀를 잡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란 걸...
힘이 들겠지만 이제 그녀도 나를 이해해줄 거란 걸...
//내 눈에는 비가 내립니다.//
108장이라는 사진으로 강릉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밤새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다가 꺠고 자기를 반복했습니다.
일기장에는 하루 사이에 무척 많은 내용들이 적혀 있습니다.
가방 안을 열어보니 그녀에게 선물하려고 샀던 책이 보입니다.
남자친구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선물받고 싶다던 그녀.
그런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책.
아직 한 번밖에 건네주지 못했는데...한 번으로 끝이 나버리다니...
그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책을 펼쳤습니다.
잠시라도 잊어보고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몸에 생기가 돕니다.
내가 왜 이렇게 혼자 슬퍼하고 있을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데...
'구름속의 산책'카페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었습니다.
'사랑했었다...앞으로도...'
이젠 잊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앞으로도'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이젠 알 것 같습니다.
그녀를 잡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란 걸...
힘이 들겠지만 이젠 그녀도 날 이해해줄 거란 걸...
//그후...//
작은 이별 이후 그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으로 내 어깨에 손을 얹었고
나는 편안하게 어깨에 기댈수 있었습니다...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그 사람은 지금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살
내 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