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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4 - 9일 천하로 끝나고 처형된 비운의 여왕 제인 그레이와 승자 메리 1세!
조선에 3일천하 갑신정변에 김옥균이 있었다면 영국에는 9일 천하 제인 그레이 여왕이 있었으니....
시아버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헛된 욕망에 아버지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가 동조
하면서 순진하고 착한 문학처녀가 영국 여왕에 올랐으나 9일만에 쫃겨나 도끼에 목이 잘린것입니다?
튜더왕조를 세운 헨리 7세와 요크가문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 수립과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으나 여섯번 결혼했는데 왕비 앤 볼린과 캐서린 하워드를 죽였으며 첫 왕비
캐서린과 클레베의 앤과는 이혼했는데 1547년에 죽자....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에드워드 6세 입니다.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의 세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산후욕으로
죽었고 열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큰 외숙인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을
받았는데 조숙하고 냉정하며 책임감이 컸던 소년 왕이었으니 진보적인 신교 사상을
교육받았고 허약한데도 무리한 연례 전국순례 행렬로 인해 열여섯 어린 나이에 죽습니다.
에드워드는 헨리 8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유일한 왕자였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부터 과잉
보호를 받으며 철저한 위생 관리 속에서 자랐으니 왕자의 음식과 의복 및 사용 물품
들은 모두 철저한 검열을 거쳤고 심지어 외부인과의 대화도 차단되었으며 필요한
말이 있다면 문 밖에 멀리 떨어져서 시중드는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조숙한 면모를 보였으니 20년 이상의 나이차가 나는 큰 누나 메리에게도 왕녀
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실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는 근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으며
작은 누나 엘리자베스는 4살 연상이었기 때문에 훨씬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니
엘리자베스와는 라틴어로 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학문적으로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양모 캐서린 파 왕비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윌리엄 그린달을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
의 스승으로 주선하여 희랍의 고전과 성서, 역사, 지리 등을 가르치게 했으니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학문적 동지이자 선의의 경쟁 관계였는데 캐서린 파
왕비는 자상하고 위엄있는 성품으로 자신이 낳지도 않은 자식들을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는 에드워드 왕자를 런던탑으로 데리고 가 추밀원 회의를 소집했고 에드워드
시모어를 호국경으로 추대했으니 즉위한 에드워드 6세는 에드워드 시모어를 서머싯 공작에
임명했으며 부왕 헨리 8세가 확립한 영국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대관식을 치르는 첫 왕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팽팽한 권력 관계에 의해 좌우되었으니 맏외숙 서머싯 공작은 미성년인
에드워드 6세를 대신하여 섭정했으니 그는 '선한 공작'이라 불리며 평민들의 안위에
신경을 썼고, 신교의 영향력 확장에 힘쓰는 등 비교적 왕의 통치 이념과 같은
노선을 추구했지만...... '고집쟁이' 이자 오만함과 다혈질적인 성미로 미움을 샀습니다.
불만이 누적되어 동생 토머스 시모어의 악행이 드러났을 때 반대 세력에게 제거의 빌미를
제공했는데 서머싯 공작은 서민들을 괴롭혀 온 인클로저 반대 법안을 발기했으나 토지
소유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으며 그 과정
에서 뛰어난 무공을 보인 존 더들리에게 역모로 고발당해 런던탑에 갇힌후 참수되었습니다.
존 더들리는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추대되었고, 반대자들을 숙청한뒤 성대한 군 사열식
을 거행하여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는데 소년 왕이 성년이 되면 전권을 넘겨주겠다는
서약을 하여 환심을 샀지만..... 실제 권력을 원했던 그는1550년에는 프랑스의 사신
을 만나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는데 그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은 왕의 두 누이 였습니다.
토머스 시모어와의 스캔들로 칩거중이었던 엘리자베스는 차지하더라도, 구교도로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왕가와 혈족 관계이자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메리는
그에게 위험한 인물이었으니 더들리는 자신의 아들과 왕손인 제인 그레이를
혼인시킨 뒤 차기 계승자로서 제인 그레이를 즉위시켜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리들리 주교 등은 에드워드 왕의 지원에 힘입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에드워드는 1552년에 홍역과 천연두의 발병으로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으나 런던을 출발하여 전국을 순례하는 스케줄을 감행해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
보고 포츠머스를 방문해 해안의 경비 강화에 힘을 쏟다가 허약해져서는 1553년에 죽습니다.
존 더들리는 왕의 병세가 악화되자 비소를 주입해 왕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왕도
사망 직전까지 영국이 다시 구교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니.....
더들리는 구교도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를 차기 계승자로 바꾸는 계약서에 에드워드가 서명하도록 계략을 꾸밉니다.
이른바 9일의 여왕(Nine Days Queen)이라고 불리는 왕녀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인데,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와 프랜시스 브랜든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프랜시스
브랜든은 헨리 8세가 프랑스와 정략 관계를 맺기 위해 결혼시켰던 누이 메리 튜더(헨리 7세의
딸)의 딸이었으니 제인은 에일머에게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공부했고 독서와 토론을 즐겼습니다.
헨리 8세의 맏딸 메리는 성인이었고 작고한 친어머니와 외가인 스페인의 영향으로
가톨릭교도였지만 양모의 장례식을 성실하게 치른 제인은 신교도였 는데 후일
제인을 폐위시킨 후에도 메리 1세는 끝까지 선처를 베풀고자 했으니 제인은
소박하고 겸손하며 지적이었으니....... 결혼이나 왕위 계승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스승이었던 학자 로저 애쉬캠은 헨리 그레이 공작의 집을 방문했다가 『플라토』
를 읽고 있던 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있는데 종종 제인은 매질을 당했
지만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컸으니 부모에게 순종했으며 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제인 그레이는 섭정 에드워드 시모어의 아들 하트퍼드경과 정혼한 상태였지만 에드워드 시모어경이
처형되고 권력은 워윅 백작 존 더들리에게 넘어갔으니 존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 사후에 권력을
유지할 계략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녀 제인을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1553년 5월 혼인시켰습니다.
존 더들리는 추밀원 위원을 참석시켜 세를 과시했지만 거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결혼식이 끝난 뒤
에도 신랑 신부를 동침하지 못하도록 했다는데.... 제인은 시어머니에게만 매달리는 남편 길포드에게
냉담했고 폐위돼 런던탑에 유폐된 시기에도 따로 지냈으며 끝까지 소원한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존 더들리는 4일동안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기고는 추밀원
위원들을 회유와 설득, 협박하는 한편 비밀리에 프랑스에서 자금과 군대를 지원받고
대신 프랑스 내에 남은 유일한 잉글랜드령인 칼레를 프랑스에 내주는 밀약을 맺었으며
제인 그레이 즉위시 메리 세력이 전국적으로 봉기할 것에 대비해 요새에 병력도 배치합니다.
존 더들리는 며느리 제인과 추밀원 위원들을 만났고 왕의 유언에 따라 제인이 왕위를 계승하기로
했음을 선포하나 왕위 계승을 예상하지 못했던 제인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고 이를 거부
했으나 양가 부모의 강압에 못 이겨 결국에는 받아들이고는 튜더 왕조의 첫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1553년 7월 9일 메리 공주는 케닝홀에 도착해 30여명의 충신들과 합류하니 존 더들리에게 불만을
품은 지방의 호족들은 메리가 머무르는 케닝홀에 집결하였으며 존 더들리의 아들 로버트 길포드
는 메리 세력을 진압하러 나섰지만 오히려 메리 세력에 대패하고 메리를 여왕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젠트리들도 점점 메리를 여왕으로 선포하면서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추밀원 위원들도 하나
둘씩 런던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니 위협을 느낀 존 더들리는 남은 아들과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빠져나가 메리를 체포하기 위해 나섰지만 군중은 냉담했고 사병은 이탈하는 등 점점 궁지에 몰립니다.
메리 진영에는 많은 병사가 몰려들었고 추밀원마저 존 더들리의 지원병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현상금마저 걸면서 전세는 역전되자 메리의 지지
세력은 런던으로 진군하였고 1553년 7월 19일에 런던 시내에서 메리는 여왕으로
선포되고 군중은 여왕을 열렬히 환호하였으니 더들리는 반역자로 몰려 체포후 처형됩니다.
제인 그레이는 1553년 7월 19일 친아버지 서퍽 공작이 대전으로 들어와 폐위되었음을 알리자
순순히 물러났고 이듬해인 1553년 11월 14일 남편 길포드 등 반란 세력과 함께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제인에게 고의성이 없었음을 인정한 메리 1세는 선처를 베풀었고
스페인 왕자와 혼인한 자신이 가톨릭 전통을 계승할 후계자를 낳으면 석방할 계획 이었습니다.
제인은 런던탑에 유폐되었으나 평화롭게 생활했고 독서와 여가를 즐기며 자유롭게
지냈는데, 메리 1세가 미혼으로 즉위하자 추밀원은 여왕이 잉글랜드인과 결혼
할 것을 요구했으나 여왕은 잉글랜드가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것을
강력히 소망하고 있었고 외가인 스페인의 왕자 필립과 결혼할 결심을 밝힙니다.
불만을 품은 토머스 와이어트는 1554년 1월에 공주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메리 1세의 침착한 대처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반란에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 서퍽 공작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추밀원은 그의 장녀
제인 그레이를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자 제인은 남편 길포드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메리 1세는 호감을 가진터라 웨스트민스터의 수도원장을 제인에게 보내 가톨릭
으로 개종하면 살려줄 것을 제안했지만 제인은 이를 거절하고 경건하게 죽음
을 준비했으니 처형 당일 여 간수들은 마지막으로 제인의 임신 여부를 검사
했으나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결국 1554년 2월 12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메리 1세는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딸로 잉글랜드 튜더왕조 최초의
여왕이니 신교도를 탄압한 일로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칭으로
알려졌는데, 헨리 8세와 어머니의 이혼 소송에서 꿋꿋히 어머니의 편을 들면서
사이가 틀어졌으니..... 사생아로 선포되고 공주 작위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합니다.
메리는 공주에서 사생아로 전락하여 왕위계승에서 밀려난후 계모 앤 불린의 지시로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하는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게 되는데
같은 아버지 아래서 태어난 적자가 다른 적자의 시종이나 시녀가 되는 경우는
없으며 그 전에 시종이나 시녀는 귀족이 맡는 일이지 왕족이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헨리 8세는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딸인 메리를 적통으로 인정하고 왕위 계승권도
부여하는등 괜찮은 대가를 제시하는 대신 평화롭게 이혼하고 싶어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캐서린은 남편의 사탕발림에 굴복하기보다는 정당한 잉글랜드의 왕비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교황청 대사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제시한 혼인적법성 재판조차 거부해 버립니다.
헨리 8세가 메리를 견제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종교 때문이었으니 당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 의 교회 수장을 '잉글랜드의 군주가 임명' 할수 있는 종교개혁을 선포한
걸 제외하곤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아 잉글랜드의 주교들과 가톨릭 성향 신하들도
심하게 반대하지 않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숙청과 화형 소동을 벌입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 가톨릭 복귀파 세력이 메리를 구심점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
하였고 외부 가톨릭 세력이 잉글랜드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물 건너서 들어오는 메리의
혼사 제안을 거절해 버린 탓에 메리는 헨리 8세가 죽을 때까지 노처녀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메리의 철천지 원수이자 어머니 캐서린의 자리를 빼앗은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 공주만
낳은 뒤 유산을 계속하자 질려버린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불륜, 근친상간등 죄목을
붙여 죽이니 “천일의 스캔들”인데.... 딸 엘리자베스도 사생아로 전락해 메리와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으며 새 왕비 제인 시모어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은후 산욕열로 죽습니다.
유아 사망율이 높은 시대라 불안해진 헨리 8세는, 에드워드가 일찍 죽거나 후사를 못 남길 경우에
대비해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권을 복권했으나 적자로는 인정하지는 않았다는데 헨리
8세가 죽고 메리의 이복 남동생이 에드워드 6세로 즉위하자 메리의 지위는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에드워드의 외삼촌 시모어와 두번째 노섬밸랜드 공작이 섭정을 맡았는데 둘 다
개신교(칼뱅주의) 였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인 메리는 경계대상 1호
가 되었으니.... 에드워드 6세 또한 어린 시절부터 신교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복누나 메리와 사적으로 친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메리는 지지자들 사이에 숨어 가톨릭 교도가 모인 서퍼크 요새로 피신해
버렸고 에드워드 6세가 승하하자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으니, 노섬벌랜드 공작은 반격
을 시도했으나 애초에 정통성 문제에서 밀렸기 때문에 이탈자들이 속출하면서 반
메리 전선은 와해되었으니..... 승기를 잡은 메리는 37세에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어렵게 즉위한 메리는 최고의 미인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과는 달리 불행한 인생을 산 탓인지
이미 오래 전부터 건강이 좋지않은 상태였으며 작고 깡마른 몸매였고 오랫동안 고생했기
때문인지 얼굴에는 주름이 많은데다가 근시까지 겹쳐 항상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데다가 왕의 딸인데도 17세에 사생아로 내쳐진 탓에 높은 수준
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식도 높지 못했으며 어머니가 이혼당하고 자신은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등 파란만장하게 살아서..... 가톨릭 신앙에만 매달리며 자신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엄격한 생활양식을 요구하는 등 인간적인 매력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 있는 후손이고 불행했던 인생역전에
대한 백성들의 연민 때문에 즉위 당시에는 거의 모든 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왕권에 걸림돌이 될 문제는 없었으니 메리는 왕권 확립을 위해 즉위 직후 자신
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고 살해하려고 한.... 노섬벌랜드 공작을 반역죄로 처형합니다.
헨리 8세는 정치적 이유로 딸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했고, 에드워드 시대에도 섭정들이
견제했으니 메리는 37살 때 까지 노처녀로 지내고 있었는데 후사 없이 죽으면
영국 국교회(성공회) 성향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가톨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후사를 목적으로 꼭 결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결혼 상대로 레지널드 폴 추기경은 나이가 50대인데다가 학자 타입이라 여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으며, 두번째는 데본셔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로 플랜태저넷 왕가의 후손이긴
했으나 신하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중에 스페인에서 비밀리에 청혼이 들어오니 카를
5세의 아들로 나폴리왕이며 밀라노 공작이고 스페인의 왕세자인 오촌조카 펠리페 2세 였습니다.
펠리페는 무엇보다 외가의 친척이며 가톨릭 군주 중에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에 고려된 것
이었으나 1553년 여왕의 혼인 계획이 발표되자 큰 반발이 일어났으니 심지어 여왕의
골수 지지층마저 반발했는데... 조국 잉글랜드 왕국이 스페인에게 혼수품으로 팔려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니... 추밀원, 의회, 가톨릭 신하들과 여왕의 심복 스티브 가드너도 반대합니다.
이에 반발로 데본셔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와 왕위계승 후보자 엘리자베스를 결혼
시키려는 시도가 추진되었으며 토마스 와이엇이 여왕의 결혼에 반대하여
병력 4천명을 데리고 런던으로 쳐들어오기도 했지만 반란은 가차없이 진압
당했으니 여왕은 결혼에 극렬 반대한 세력 중에 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블러디 메리" 소리를 듣게 될 행동을 취하는데, 와이엇의 반란이 종결된후 펠리페와
결혼하기 전에 사전 준비 작업으로 국교회 성향 사제와 복음주의자(개신교) 300명씩
을 화형시키는데 5년 치세 중 이 시기 6개월간의 처형자가 대부분이었고 탄압을
피해서 숨거나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해서..... 표면적으론 메리의 반대 세력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메리도 신하들이 우려하는 상황을 무시할 순 없어서, 펠리페 2세는 메리 2세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잉글랜드 왕으로 재위하고, 둘 사이에서 합법적 후사가
없이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경우 펠리페와 그 후계는 영국에 대한 권리가 없고 동군
연합은 해소된다는 조건에 동의후 결혼하니 메리는 38세, 펠리페 2세는 27세였습니다.
만약에 메리와 펠리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었다면 펠리페 2세의 장자 돈 카를로스
는 스페인과 나폴리를 물려받고, 메리의 아들은 잉글랜드와 펠리페의 대륙
영토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네델란드-벨기에)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임을 봐야 뽕을 따지..... 서로 합방할 수가 없었으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했으나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 후보인 엘리자베스와 제인 그레이의 회유 시도가
이어지는데, 제인 그레이는 왕위를 참칭한 반역도였기도 했고 또한 개종과
회유를 거부하여 열여섯 나이에 처형됐고, 시골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엘리자베스
는 메리가 병력 500명을 동원해 런던으로 압송하여 런던탑 '반역자의 문‘ 에 감금합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한 걸 받아들였기에 종교를 빌미로 처형
할 명분이 없었고 또한 튜더 왕조의 후손은 메리와 엘리자베스 자매 밖에 남지않았는데
나이가 40살에 가까워진 메리 1세는 후사가 없었고 대책없이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나면
후계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귀족들끼리 차기 왕위 계승과 관련 내란이 벌어질게 뻔했습니다.
몇세대 전에 잉글랜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장미전쟁이 또 벌어질수 있다는 우려가 생긴 것인
데 가톨릭화를 추진하던 여왕의 심복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가 엘리자베스를
죽여야 된다고 선동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으며 엘리자베스는 4달간 감금중 가짜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노력을 보여 런던탑에서 해방되어 포프경의 감독하에 해트필트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메리는 1520년대 이후 헨리 8세 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반포한 종교관련
법률을 모두 무효화시키면서 선대왕의 반가톨릭적 종교 정책을 바꾸려고
했는데,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한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다시 가톨릭
으로 복권을 선언했으니 큰 소요 사태가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습니다.
여왕의 결혼과 더불어 20년간 교황청에서 생활한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귀국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잉글랜드
가 가톨릭 품으로 돌아온 것에 감격해서 기존에 강탈된 교회와 수도원 재산
에 대한 현재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며 귀족 젠트리들의 민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왕의 심복 스티브 가드너가 그간 쌓인 한풀이를 하려고 신교도들을 공격했으니....
잉글랜드 전체 사제의 1/4에 달하는 성공회 사제 2천명을 쫓아냈고 주교 중에서
개신교 성향이 뚜렷한 글로스터 주교 존 후퍼와 세인트 폴 성당 사제 로저스를 체포했으니
후퍼와 로저스는 예상대로 "가톨릭 미사는 사기다!" 라며 죽기를 자처했고 화형에 처해집니다.
이제 표적은 기존 잉글랜드 교회 수뇌부로 옮겨갔으니.....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로체스터 주교 휴 라티머를 체포하여 배교를 권유했으나
거부하자 역시 화형을 당했는데, 리들리와 라티머 두 사람은 같이 처형되어 죽기
전에 "까짓 거 남자답게 화끈하게 죽읍시다" 라고 외치면서 장렬히 사망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였는데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 부터 공식적으로 임명장을
수여받았기 때문에 다른 주교들처럼 강압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으니 미리 포섭된 지인
들을 이용한 지속적인 회유책과 협박을 병행한 끝에 토머스 크랜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크랜머가 성공회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여러차례 한 것을 보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설교단에 올리자 크랜머는 조용하게 기도문을 읽고 예배를 진행하다가 돌연 "이게
다 훼이크다!" 라며 "나는 협박에 넘어가 배교했고, 큰 죄를 지었다. 화형당하면 이
손모가지를 가장 먼저 태우겠다! 교황은 적그리스도다!" 를 외쳐서 도중에 끌려나갑니다.
곧 평사제로 강등당하며 화형에 처해지는데 불길이 일어나자 약속한대로 오른손을 내밀어 가장 먼저
태웠다고 하니.... 민심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즉위 초기에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메리의 인기
는 고작 3~ 4년만에 나날이 떨어졌으며 더군다나 대외 정책까지 실패하며 여론의 비판을 받습니다.
메리의 대외정책은 유럽의 전통적인 부부 동군연합이니 남편 펠리페 2세를 위해 친스페인
정책으로 잉글랜드가 1556년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스페인편으로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는데, 다만 잉글랜드의 이익 보다는 스페인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백성에게서 군비로 돈을 긁어 모으자 평판은 끝을 모르고 추락합니다.
필리핀이라는 국호는 펠리페 2세 이름을 따서 붙이게 되는데 카를 5세는 장남 펠리페에게 1540
년에 밀라노 공작을, 1554년에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1555년에 플랑드르의 통치권을
부여했으며 1556년에 동생에게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주고 아들 펠리페에게는 스페인
왕위를 물렺부고 은퇴하니 그는 프랑스와 전쟁해 1557년 생캉탱전투에서 승리하가도 했습니다.
신하들과 의회에서도 전쟁에 반대했으나 메리 영왕은 무시하고 참전을 강행했는데...
전쟁에 승리해서 뭘 얻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전세는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고
오히려 스페인-잉글랜드 연합군이 1558년 프랑스의 가톨릭의 영수 기즈 공작
에게 참패하고 칼레를 빼앗겨 잉글랜드의 마지막 대륙거점을 잃는 결과만 초래합니다.
게다가 펠리페 2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인 메리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잉글랜드가
잃은 칼레를 되찾으려는 시도도 하지않았고, 전쟁을 끝내려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해버리니... 잉글랜드는 스페인 때문에 괜히 전쟁에 끼어들어 병사들을 잃었
을 뿐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 세수의 30% 나 차지하는 중요한 영토까지 잃은 것입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전쟁에서 지고 피해만 본 충격 탓인지 메리는 1558년 여름부터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되었으며, 결국 같은 해 11월 치세 5년만에 향년 42세의 나이로 몇몇
시녀들만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쓸쓸히 사망하는데 사인은 난소 종양으로 추정됩니다.
메리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대단했는데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
로 부친 헨리 8세가 어머니를 축출하려고 잉글랜드 가톨릭 교회를 박살냈다는 것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 메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성별이 간접적
원인을 제공하여 어머니는 축출되고 잉글랜드 교회가 박살나는 멘붕을 겪은 것입니다.
또한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잉글랜드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남편에게
"잉글랜드로 오라" 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지만 펠리페는 온갖 핑계를 대며 요청을 묵살
했는데 가뭄에 콩 나듯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 고생하던 메리는 프랑스와의
전쟁에도 가담했지만 패전하여 칼레를 잃고 민심을 잃었으며 상상임신으로 조롱까지 당합니다.
사실상 불임인데도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왕위를 주고 싶지 않아 자녀
를 낳아 왕위를 이어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이가 많았던 데다가
자궁이 좋지 않았고 남편도 아이를 갖는데 적극적이지 않았으니 아이가
없는지라 임종을 맞던 순간에 엘리자베스 1세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해야 했습니다.
메리 1세는 블루드 메리 라고 오명을 썼는데 스페인이 종교재판으로 유명한데종교를 이유로 사형
시킨 개신교 신자의 숫자(284명 처형, 34명 옥사)가 1534~1680년 사이에 엘리자베드가
종교를 이유로 사형시킨 가톨릭 신자의 숫자 보다 많다는 점 때문이지만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보다 더 광신적이였다고 볼 근거는 없으니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반동으로 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