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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르코 4, 26 - 3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1주 사이에 우리 한국교회는 큰 축복이 있었죠.
바로 옆 대전교구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이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청 장관이 되셨어요.
장관직책은 성직자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제 장관이 되셨기에 자동으로 대주교로 가시게 될 것이고, 대전교구 교구장은 새로 임명될 것입니다.
유 주교님이 인터뷰에서 빠른 시일에 교황님을 한국에 모시도록 애쓰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제 교황님이 한국에 오실 확률이 아주 많이 커졌죠.
그전에 코로나가 종식되어 평화로운 가운데 오실 수 있길 바랍니다.
아무튼 우리 한국 천주교 200년 역사 이래 큰 축복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위상이 그만큼 세계적으로 커졌다는 겁니다.
우리 본당도 교구에 교납금을 내듯이, 한국교회도 교황청에 교납금 같은 것은 냅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예전에는 제일 꼴찌였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3번째예요.
바티칸도 교황님이 계시는 나라이기에, 장관도 있고 다 있습니다.
도덕경 63장에는 ‘필작어세(必(반드시 필) 作(지을 작) 於(어조사 어) 細(가늘 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천하의 큰일도 반드시 아주 미세한 것부터 시작된다.’입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화두로 던지는지 짐작하실 거예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도 보면 바람 불면 날아갈 정도로 작은데,
자라면 새들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큰 나무로 바뀝니다.
필작어세나 겨자씨의 자라는 모습이 비슷하죠?
여러분,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치유하고 구마한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정말 작은 사람들이었어요.
키가 작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힘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버러지만도 못한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이 공생활 하시면서 하신 구원의 역사, 그 첫 번째 주인공들은 작디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 백인대장의 종, 장님, 귀머거리, 마귀 들려 집안의 원수가 된 부마자들.
그 시대에 정말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랍니다.
자만자족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의 대상이 아니었던 거죠.
여기에 아주 큰 원칙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이 내 영혼에, 내 썩어 문드러진 병든 몸에, 암에 걸려 있는 내 몸뚱아리에 손을 대시려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내가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입니다.
스스로 큰 자들은 스스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는 거지요.
아프지도 않고, 돈도 많고, 곳간에 재물도 많은데 뭐가 부족해서 나자렛 촌놈을 쫓아다녀!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자 안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 만나서 천국을 향하시려면, 늘 ‘내가 오늘 큰 자처럼 살았는가, 작은 자처럼 살았는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바윗돌처럼 커져야 하지만,
예수님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려면 작은 조약돌처럼 작아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작은 자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고통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과연 고통과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작아질 수 있을까?
제 사제 생활 40여 년의 경험을 통해 보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고통은 신비로운 것이고, 예수님이 인간 구원의 길의 많은 방법 중 택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면 고독해지고, 외롭고 힘듭니다.
나는 너무너무 힘든데, 옆에 남편은 코를 골며 자요.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죠.
그래서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요.
그전에는 자신만만하게 ‘건강? 일주일에 산에 몇 번을 다니고 체력이 30대야.’
그러다가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고 병들면 바뀌죠. 도움을 청하고 싶은 거예요.
고통과 십자가로 작아진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늘 작은 자 안에 머무시기를 바라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는데 원칙입니다.
저는 늘 기도합니다.
‘주님, 사제로서 신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의 악과 마귀 앞에서는 큰 바위처럼 저는 살고 싶습니다.
신자들의 벽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놓인 작은 돌멩이처럼 늘 주님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실 수 있는
미소 하고 작은 모습으로 사는 사제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가난한 자, 병든 자, 실패한 자, 고통받는 자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빛나고 분명 성장합니다.
세리나 창녀나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 이들은 그 시대의 그야말로 한밤중에 누가 죽여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그런 작고 비천한 자였지만,
그들은 세리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보다 먼저 구원을 받았죠.
잘나고 똑똑했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듭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제일 큰 원칙, 출발점은 작아져야 합니다.
내가 커져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은 나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작아져야 합니다.
겨자씨보다도 더 작아져야 합니다.
미소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미소하고 작은 자가 됩니까?’
‘청하세요.’
‘그것 청하면 고통과 십자가가 오는데, 왜 청해요?’
‘견딜만한 십자가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우리 만나고 싶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만자족하기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은데, 저 문을 열면 만날 수 있는데,
만나는 방법은 견딜만한 십자가를 주시는 것밖에 없었던 거죠.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지만 자라나면
어떤 나무보다도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사실,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신앙은 겨자씨보다 더 작아 보입니다.
‘믿음이 꼭 필요한 거야? 뭐 믿어서 돈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돈은 갖다 바치던데?
믿어서 팔자 고쳐지는 것 같지도 않고. 이 바쁜 세상에 시간 낭비, 돈 낭비, 체력 낭비인데 신앙이 밥 먹여 줘?’
하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정말로 우리의 팔자를 고쳐 줍니다.
나도 여러분도 모두 팔자 고쳤습니다. 좋은 팔자가 된 거예요.
또, 믿음이 밥도 먹여 줍니다.
우리는 손에 잡히는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부잣집에 하인,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부인부터 아이들까지 호화스럽게 명품으로 치장을 한 집이었죠.
물론 일 년에 몇 번 부인이 절에 가서 잘되게 해달라고 몇천만 원 들여 등도 달고 오곤 했지만,
사장님 집은 종교가 없었죠.
그런데 이 집사는 천주교 신자였고, 집에 들어가 일할 때 주일에는 꼭 미사를 가게 해달라고 했었죠.
워낙 일을 잘하니, 미사를 가게 해주었죠.
이 형제가 주일이면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지갑 속의 돈 가운데 제일 깨끗한 돈을 다리미로 다려
봉투에 넣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집안 식구들은 모두 비웃었죠.
‘종교라는 것은 없고 못사는 사람들이 의지할 곳 없어 믿고 매달리는 거야.’ 하며 손가락질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장 동생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유명한 의학박사인데도 속수무책이었고 식구들은 발만 동동 굴렸죠.
의사면 뭐합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 심부름 간 그 집사가 동생 손을 잡고 기도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한테서 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나그네이오니, 당신이 보시기에 이 영혼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하실 수만 있다면 암 덩어리 뿌리까지 캐어 내주십시오.’
그 형제는 환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눈을 감고 그 기도를 듣고 있던 의학박사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도를 받은 다음부터 차도가 생기기 시작하고, 정말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어요.
치유가 된 겁니다.
동생은 간증했어요.
‘형님 집에서 일하시는 저분이 나를 살렸어요. 하느님은 계신 것 맞아요.’
그때부터 이 형제는 그 집안에서 대접받고, 봉급도 많이 올라갔죠.
그리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바뀌고, 집안 식구들이 하나둘씩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장 부부도 세례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도, 지식도, 믿음 앞에서는 한낱 티끌이요 먼지였던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우리 믿음 갖고 팔자 고쳤다고요.
믿음 갖고 팔자 고친 분 많습니다.
어둠 속에서 살다가 광명으로 나왔는데요.
세상에서만 헤매고 살다가 새 세상으로 나왔는데요.
‘이렇게 행복한 세상이 있었구나, 영원한 세상에 비하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보다도 작았구나,
수의에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내가 이제 깨닫는구나!’
욕심스러웠던 그 마음들이 하나씩 비워지는 겁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믿음이 정말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믿음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작은 자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이 믿음의 원칙이요, 첫 번째 단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본인도 정말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없으시죠?
우리는 모두 병원이나 조산원, 혹은 집에서 태어났죠.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 사람입니다.
성탄 때면 구유를 번쩍번쩍하게 하지만, 마구간이니 소똥, 말똥 냄새에 얼마나 지저분하겠습니까?
또 구유라는 것이 뭡니까?
말 여물 넣어, 말들이 머리 박고 밥을 먹는 말 밥통이에요.
구세주가 말 밥통에서 태어났어요.
얼마나 더 작을 수가 있는가!
예수님이 석가모니처럼 왕궁에서 태어나 ‘나는 작은 자다’ 한다면 넌센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작은 자로 오셨지요.
작은 자로 오신 그분을 믿는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습게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작은 자가 아니라 그 믿음은 세상의 어떤 지혜와 능력보다도 위대합니다.
오죽하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에 있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심어질 것이라 했겠는가?
아주 오래전 군종 신부로 있으면서 최전방 군인뿐 아니라 근방의 민간인도 사목을 했습니다.
매일 나오시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하루는 나오지 않아 물었더니 풍을 맞으셨대요.
오른쪽을 못 쓰게 되어 거동이 어려우신 거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가 지팡이를 잡고 오른 다리를 끌면서 매일 미사를 오셨어요,
성한 사람이면 20분 거리지만, 거의 한 시간을 걸려 오셨죠.
한두 발 걷다 쉬고를 반복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매일 미사를 오셨어요.
‘할머니, 이렇게라도 미사 오시는 거 보니 참 좋은데, 무리는 하지 마세요.’ 하니,
‘네, 괜찮아요. 신부님.’ 그러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사람들은 다 망령이 난 줄 알았어요.
성체를 모시러 나와 성체를 드리면, 성체를 모시고 바로 가지 않으셨어요.
뒷사람이 기다리든 말든, 제의 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들어가셨죠.
저도 처음에는 당황했죠.
주변 사람들도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치지 않으셨죠.
나중에는 제가 그 할머니에게 맨 나중에 나오시어 잡고 싶은 만큼 잡고 가시라 했어요.
또 미사 후 신자들과 악수하고 있으면, 누군가 뒤에서 수단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져요,
뒤돌아보면 그 할머니예요.
그러니 신자들이 노인네 망령 났다며 얼마나 눈총을 주었겠어요.
한 3개월 지났을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새벽, 누군가 사제관 문을 막 두드리는 거예요.
이 새벽에 누군가 나가보니, 세상에, 그 할머니가 비를 흠뻑 맞고 사제관 앞에 계신 거예요.
저는 직감적으로 ‘며느리가 쫓아냈구나.’ 생각했어요.
시어머니 병들었다고 밥도 잘 안 주고, 욕하고 폭력도 쓴다고 그 조그만 동네에 소문났거든요.
새벽에 비 맞으며 할머니가 쫓겨났다는 생각이 드니, 뚜껑이 열렸죠.
‘할머니, 갑시다. 내 오늘 며느리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야겠어요.’
할머니를 끌고 가려 하니, 할머니가 ‘아녀, 신부님, 울 며느리랑은 관계가 없어.’
‘그러면 왜 이 새벽부터 비를 맞고 오셨어요?’
‘신부님, 나 어쩌면 좋아. 몸이 난 것 같아.’
그러면서 내 앞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시고, 돌아갔던 오른손이 정상인 거예요.
아까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계속 오른손을 움직이고 계셨었어요.
수건으로 할머니 빗물을 닦아 드리면서 어떻게 치유가 되었느냐 물었어요.
‘신부님, 제가 몇 달 전부터 주책맞은 늙은이 소리 들으면서 신부님 제의 자락 잡은 거 알죠?’
‘알죠. 온 동네 사람이 다 알죠.’
본인이 제의 자락을 잡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대요.
‘신부님, 누워서 성경을 보다가, 긴 세월 하혈했던 여인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더니 하혈이 멈추더라 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맞다, 나도 그 여자만큼 믿음은 있어. 우리 신부님이 예수님 대리자인데,
신부님 옷자락 잡으면 나에게도 축복을 주실 거야.’
마음을 먹을 날부터 미사와서 영성체하면서 제의 자락 잡고, 미사 후 뒤에서 수단 자락을 잡았어요.
그런데 어젯밤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비비 꼬였던 팔이 펴졌어요.
그리고 뻗정다리가 되었던 오른 무릎이 관절이 꺾이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죠.
신부님, 저 어제 한잠도 못 잤습니다.
이 기쁜 소식 신부님에게 전해드리어 왔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사제의 제의 자락이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할머니의 믿음이 할머니를 살리신 거예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에 있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심어질 것이 했거늘,
할머니의 믿음은 겨자씨보다 훨씬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셨죠.
그리고 강원도이니 산에 가면 나물이 많잖아요?
그것을 뜯어다가 팔고, 그 돈 보아 성당에 다 감사예물로 봉헌하셨죠.
그때 제가 한참 성당 지을 때인데, 그때 돈으로 이백여만 원 주신 것으로 기억해요.
참 크고 소중한 돈이었죠.
그때도 70 중반이었으니,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저는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잡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옛날 군종 신분 시절 제의와 수단 자락을 움켜잡던 그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아, 오늘부터 큰일 났네. 모두 수단 잡겠네. (웃음)
요즘은 코로나로 못하지만, 예전에는 미사 후 여러분 손 잡아드렸죠.
바로 그런 이유로 제가 먼저 잡아 드린 거예요.
여러분, 다시 명심합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자 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사람들,
예수님이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큰 자들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작고 미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악과 싸울 때는 바위보다 더 큰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 손안에서 노는 작은 조약돌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나에게 고통과 십자가가 오더라도 그 십자가 고통 중에 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작은 자가 되는 절호의 찬스,
예수님이 나에게 터치하시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내 고통과 십자가는 능히 견딜만한 것만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주님 안에서 작은 자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2021년 연중 제11주일 (06/13)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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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