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5월 29일은 3하사관학교를 졸업한 날이다.
무수한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날은 마음속에서 잊어지지 않는다.
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 이유는 아마 24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아 고통의 틀에서 벗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산모가 첫아이를 출산 할 때 그 고통을 참고 견뎌내 순산을 했을때의 그 기쁨은 출산의
고통을 상쇄한다.
아마 우리도 졸업식날 그 산모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졸업식날 하사계급장도 좋지만 그 보다 더 좋았던 것은 그 독한 훈련을 이겨낸 스스로의 기쁨이 더욱 컷을 것이다.
나는 졸업식을 마치고 부산에서 첫날밤을 동네 친구들과 미화당 뒷골목 고갈비집으로 갔다.
그 당시에는 고갈비에 막걸리 한잔하는게 유행이었고 특히 고갈비의 원조 동네가 바로 이 골목이지 싶다.
군복을 입은채로 어느 고갈비집으로 들어가니 식당안에는 발디딜 틈도 없이 젊은이들이 꽉차
있었다.
당시에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특별한 날이라 막걸리에 고갈비를 시켜 몇 잔을 기울였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우리 뒷좌석 손님이 일어 나가자 바로 군인 한명과 일행들몇명이 그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술이 한잔 되었는지 서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 등뒤의 군인이 하는 말이 귀에 들렸다.
아마 일행중에 누군가 군생활 할만하냐고 물은 모양이었다.
"야 말도마라 죽었다 죽었어! 우짜는지 아나 피알아이만 아침부터 점심 묵을때까지 한다."
"무릎팍 다 깨지고 팔꿈치는 빽다구가 다 보일정도로 까진다. 안까지몬 글마는 또 좃나게 깨진다"
나는 그 때 그 말하는 군인을 슬쩍 등을 돌려 쳐다 보았다.
이제 첫휴가를 나온 것으로 보이는 육군 이등병이었다.
일행중 누군가가 또 물었다.
"밥은 잘 나오더나"
"뭐 밥? 야 일마들아 군발이가 밥이 무슨 밥이고 하루 한끼도 제대로 묵을까 말까 한다"
"논산훈련소 있을때는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묵었다. 하루에 잘하몬 두끼 준다"
나는 그말을 듣고 다시 뒤를 돌아보니 다른 일행들은 완전히 얼어 있는것 같이 보였다.
아마 그들은 아직 군대를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때 내 친구들이 그 말을 새겨 들은 모양이었다.
" 어이 저놈아가 하는 말이 진짜가? 니는 고생 안했나?" 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답한 말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 대답이 전부였다.
"니는 훈련만 몇 달씩이나 받았는데? 그라몬 하사는 계급이 높다고 좀 편하게 훈련받나?"
"아니다" 그게 전부 나의 답이었다. 더 할말이 없었다.
나는 가끔 지금의 직장동료나, 다른 사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같은 대답이 나온다.
왜 그럴까?
이제 나이가 들어 무엇때문에 그렇게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지를 이해 한다.
사람은 어떤 한가지 일을 깊이 통찰하고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일에 대한 말수가 적어진다는 것을.
프로는 말수가 적다. 반면 아마추어들은 말이 긴법이다.
깨우친 스님은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수가 적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문향들은 군대 하나만큼은 프로요, 도를 튼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살아 오면서, 또 앞으로 살아갈때도,
삼하교 정신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스스로 겸허하게 우리의 몸속에서 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