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전남대 '함성'지 사건
[민주화 발자취] 6·3사태에서 6월 항쟁까지
維新비판 유인물 전남대ㆍ光州고교들에 뿌려
1973년 3월 18일 오전 전남 광주시 모 화물탁송 회사에 대학생 한명이 이불 보따리 하나를 맡겼다. ‘, 발신 광주 이 강.’ 조금 후 사복 경찰 몇 명이 나타나 보따리를 뒤졌다. 그 속에는 ‘(告發)’ 500장이 들어 있었다.
72년 12월 10일 전남대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일찍 등교했다. 10월 유신 발표와 함께 문을 닫았던 학교가 오랜만에 문을 열었다. 아침 일찍 교정에 들어선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무언가 부지런히 수거하고 있는 사복 경찰들을 보았다.
학교 곳곳에 ‘(喊聲)’. 광주 시내 5~6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도 그랬다. 71년 10월 13일 전남대에 교정에 ‘(綠豆)’. 대규모 교련 반대 시위가 있은 직후였다. ‘’. 15일 위수령이 내려지고 ‘’ 9명이 퇴학을 당하고 24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전남大 이강ㆍ김남주가 유신직후 만들어
原典격인 '녹두'만든 박석무는 '수괴'몰려
홍남순 등 변론 '법정이 유신반대 토론장'
광주지검은 73년 3월 30일, 4월 6일, 4월 12일 세차례에 걸쳐 박석무(朴錫武ㆍ당시 29세, 광주 석산종합고 교사) 이강(李鋼ㆍ당시 25세, 법학과 2년) 김남주(金南柱ㆍ당시 26세, 영문과 4년 휴학ㆍ민족시인ㆍ94년 2월 사망) 등 전남대 졸업생ㆍ재학생 9명을 구속,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박석무 이강 김남주 등은 10여 차례 모임을 갖고 “비상계엄은 친위 쿠데타이며, 헌법개정의 저의는 남북통일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장기집권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폭거이므로 이를 전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법적 투쟁으로는 안되고 오로지 4ㆍ19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며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 구성을 음모했다. 또 ‘함성’과 ‘고발’이란 유인물을 통해 “박정희씨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으로 국민의 귀와 눈에 총뿌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자학과 어둠 속에 허탈을 일삼고 있는 언론인 청년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무서운 음모가 그칠 새 없는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해 4ㆍ19 정신으로 총진격 하라”며 북한 정권과 노동당의 활동을 고무ㆍ동조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결심공판(9월 14일)에서 박석무 이강 김남주에게 징역10년을 구형했다. 선고공판(9월 25일)에서는 북한과 노동당의 활동을 찬양하거나 동조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반공법 부분을 무죄로 인정, 세 피고인에게 징역2~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12월 27일 항소심에서는 박석무에게 무죄, 이강 김남주에게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해 석방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생 1,023명은 국무총리에게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정부 전복을 위해 내란을 모의한 수괴라는 박석무가 무죄를 선고 받고, 그 추종자라는 학생들이 유죄를 선고 받는 희한한 모습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이른바 ‘함성지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홍남순 변호사와 함석헌씨 등 재야인사들이 대거 관여하고, 서울의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광주에 내려와 방청하는 바람에 오히려 반(反)유신, 반정부의 토론장으로 변했다. 특히 제대로 배포되지 못했던 ‘녹두’ ‘함성’ ‘고발’이란 유인물의 내용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13, 14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석무씨의 설명. “70년 전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주 북성중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71년 10월 법대 후배들과 함께 ‘녹두’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었다. 동학혁명을 이끈 녹두 전봉준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취지였다. 현재 성동구청장인 고재득씨가 주모자였다. 나는 ‘동학의 투혼으로 민족, 민주의 횃불을!!’이라는 창간사를 썼다. 하지만 대학원생이며 교사 신분이어서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함성’과 ‘고발’은 ‘녹두’를 원전으로 하고 있었다. 내가 ‘녹두’ 제작의 배후였으며, 그 내용을 항상 후배들에게 역설해 왔다는 이유로 ‘함성지 사건’의 수괴가 됐다. ‘함성’은 이강과 김남주가, ‘고발’은 이강 혼자서 만든 것이다. 내란음모 단체를 구성하려면 수괴가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함성지 사건은 ‘녹두’라는 지하유인물을 1년여 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이 ‘녹두’지를 읽었던 세대가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됐으며, 당시 항쟁의 선두에 섰던 ‘녹두대’가 그들이었다. 3월 22일 검거돼 찰엔엿耭載”瘦沮?약 1달 동안 전남도경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함성’이나 ‘고발’의 내용이 ‘녹두’의 창간사와 똑 같으니 틀림없이 내가 함성지 사건의 주모자라는 것이었다.”
함성지 사건에 연루됐던 학생들은 이강, 김남주의 친구 동생 후배들이 전부였다.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ㆍ전남본부 사무처장을 지냈던 이강씨는 “경찰은 박석무 선배를 중심으로 ‘내란을 모의한 반국가 단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너무나 미약했다. 유인물 등사하는 것을 구경했던 나와 김남주의 동생들, ‘함성’을 한두장씩 받았던 친구와 후배, 전남대 앞 C메밀국수집에서 나의 열변을 들어주었던 동료들이 반국가단체 단원의 전부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