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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40)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는 약 70㎏이었다.
요한 복음서의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복음서1장3절)
모든 존재는 진리로부터 나왔다. 진리에서 나오지 않은 존재는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신의 속성으로부터 나왔다. 신의 속성에서 나오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실은 ‘진리에 속한 이들’이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백성호 기자
그런데도 빌라도는 몰랐다. 예수를 끌고 온 유대인들도 몰랐다. 그들이 진리에 속해 있음을 몰랐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왜 그것을 몰랐을까. 그들이 영원한 왕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사라지는 왕국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왕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빌라도는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일본의 가톨릭 문학가 엔도 슈사쿠는 소설 『예수의 생애』에서 빌라도의 이 물음을 조롱이나 비꼼으로 해석했다. 나는 다르게 본다. 설령 그 말이 빌라도의 조롱일지라도, 그 속에는 빌라도의 절규가 녹아 있다. 그것은 진리가 앞에 있어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의 절규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비명’이다.
그런 빌라도의 물음은 우리의 가슴에 박힌다. 고양이를 앞에 두고서도 “고양이가 무엇이오?”라고 묻고, 코끼리를 앞에 두고서도 “코끼리가 무엇이오?”라고 묻는 식이다. 우리는 교회에 가고 성당에 가고, 성경을 펼쳐 예수의 메시지를 만난다. 그러면서도 묻는다. “예수가 무엇이오?” “지금 어디에 있소?” 빌라도처럼 우리도 그렇게 묻는다. 지금도 그렇게 묻고 있다.
갈릴리 일대에서 하늘의 이치를 전하던 예수는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그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식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새벽녘 갈릴리 호수. 백성호 기자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큰 절기다. 그런 축제 때마다 내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를 한 사람 풀어주는 일이었다. 일종의 특별 사면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바라빠라는 죄수가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바라빠를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맞서 싸우다 체포된 정치범으로 추정한다. 단순 강도가 아니었다.
빌라도는 군중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예수와 바라빠. 둘 중 하나는 살고 나머지 하나는 죽어야 했다. “내가 누구를 풀어주길 원하오?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군중은 소리쳤다. “바라빠요!”
빌라도가 예수를 어떻게 할지 묻자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다. 나는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한 법정의 정문 앞 계단에 앉아 눈을 감았다. 2000년 전 아침, 찬 공기를 뚫고 군중의 외침이 바로 이 자리에서 울렸으리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사람들은 손을 높이 쳐들고 그 말을 외쳤다.
빌라도 총독이 물었을 때 모여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 대신 바라빠를 풀어주라고 요청했다. 바라빠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로마 제국에 저항한 유대인들에게는 하능의 왕국보다 지상의 왕국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유대인들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왕국’을 택했다. ‘사라지는 왕국’을 택했다. ‘영원한 왕국’을 설했던 예수는 죽어야 했다. 서른이 갓 넘었을 나이. 갈릴래아와 유대 광야와 예루살렘을 누비며 아직도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 신비’에 대해 풀어놓을 것이 숱하게 많았을 사람. 참으로 귀한 사람이 그렇게 죽어야 했다.
빌라도의 법정 맞은편에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데리고 총독의 관저로 갔다. 거기서 예수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씌웠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들게 했다.
왕의 옷과 왕의 관, 왕의 지팡이를 든 유대의 왕. 로마 군인들은 예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의 머리를 때렸다. 십자가를 짊어지기 직전에 예수는 채찍질을 당했다. 채찍의 끝에는 동물의 뼈나 쇳조각이 달려 있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졌을 터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을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부른다.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슬픔의 길이다. 예수의 눈앞에는 그 길이 놓여 있었다. 순례객들이 찾아가는 빌라도 총독 관저의 뜰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무게는 약 70㎏이었다. 예수 당시에 사용하던 십자가의 무게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는 약 70kg이었다. 밤새 심하게 고문을 당하며 한잠도 못 잔 상태에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 골고타 언덕까지 올라가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백성호 기자
저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허리를 숙이고 그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졌다. 무거웠다. 어른 한 사람을 업은 것처럼 등이 눌렸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신문과 재판을 받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한 예수였다. 그런 예수에게도 십자가 무게가 단지 70㎏이었을까.
아니었으리라. 십자가에는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멸시와 조롱, 하느님 나라를 향한 세상의 외면. 그 외면으로 인한 예수의 고독이 함께 실렸을 것이다. 예수는 그토록 가혹한 무게를 짊어진 채 비틀거리며 총독의 관저를 나섰다. 나도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뗐다.
짧은 생각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며,
예수의 스토리를 읽으며
안타까워합니다.
왜
그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신의 아들을 몰라봤을까.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눈앞에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렇게 아쉬워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정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 현장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들
잡혀갈까 봐
어딘가에 숨어서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오직 어린 요한(사도 요한)만이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살아 있는 예수를
직접 만났을 때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지금도
신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
진리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왕국을
더 갈망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결정적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 왕국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왕국은
때가 되면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왕국은
잠시 세상에 머물다가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왕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을
설했습니다.
그 왕국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왕국은
신의 속성과
서로 통합니다.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는
왕국입니다.
하느님이
그러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왕국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보다
눈에 보이는 왕국을
더 믿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나를 보는 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왜
눈에 보이는 왕국,
손에 잡히는 왕국을
더 갈망하는 걸까.
그건
결국,
내 안에 깃든
하느님 나라를
내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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