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순지(胡順之)가 청주(靑州)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환관이 끼고는 중요하다고 여겨 청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성(城) 밖의 교(郊)에서 고려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호순지가 “청주는 큰 군진(軍鎭)이다. 당나라 때에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를 맡았는데, 어찌 (고려에게는) 이 같이 비굴한가?”라고 말하고는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 『송사 권303 열전62, 1020년 4월』
“1084년 고려사신 숙소인 고려정을 지으라는 황명을 내리자 하이저우 등 두 고을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송나라의) 백성들 가운데는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1085년) 내가 그곳을 지나다 고려정의 장려함에 탄복해서 시 1수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