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다른 마음 곧 다른 생각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얼마나 첨예한 영적 대립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참 신앙의 길이 얼마나 고달프고 위태한지도 깨닫게 됩니다.
과연 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에베소서가 말하는 교회인가 교회개혁이랍시고
떠들지만 과연 성경의 원형교회를 제시할 수 있을까? 생각이 아득합니다.
전해지는 메시지가 과연 로마서의 구원과 동일할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하는 말은 그들이
실족하는 자들의 짐을 짊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율법의 종이
된 것 자체가 이미 심판입니다. 지금 자신이 율법 아래에서 죄 가운데에 있음을
모르고 예수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고 다른 이들의 죄를 계속 씻어준다고 떠들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중병이 듭니까? 유전적인 요인이라고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 그 안에 계심에도 유전 운운해야 할까요?
만물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심령에 충만하다면 심신이
연약하고 병에 시달릴 수가 있을까요? 목사들이 늘그막에 중병이 드는 것은
그 동안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든 이들의 짐을 혼자지고 끙끙대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미혹하므로 그들의 피 값을 또한 짊어져야 하는 겁니다. 에스겔에게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도 그 피 값을 찾겠다고 하시는데(겔3:17)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앞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을 모르고 성도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 놓고 정신승리만
외치는 이들의 결과는 얼마나 비참할까요? 만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모르고 끝까지 버티면 유황불이 훨훨 타는 불 못을 면할 길이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벗어나 어떤 생각이나 염려에 끌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건강을 위해 굳세게 서서 잔가지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11절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바울이 지금까지 할례만 전했다면 왜 박해를 받겠는가 하는 반문입니다.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 되었으니 하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현저히 짓밟는
것은 일반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거치는 죄가 됩니다(히10)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을 입지 않고도
인간이 자유의지로 제대로 할 수 있고 스스로 변화가 될 수 있다고 하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면에서 부정하게 되는 일입니다. 비일비재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자아와 욕심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곧 자존심인데 진리의 말씀이 이 자존감을 묵사발을 만드니
율법의 젠틀맨들이 좋아할 리가 만무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한 줄 알고
있으므로 적당한 의무와 책임감을 지우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부추기면
좋아하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저 놈 죽여라’하고 벌 떼처럼 달려듭니다.
살인강도 바라바는 흉악범이지만 유대인들의 자존심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 종교의 뿌리인 성전의 권위를 흔들어 놓으시고 너희들은
다 가짜라고 하니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못 박아라’고 고함을 치는 겁니다.
12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진리를 흔들고 복음을 어지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을 잘라 버리라 합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난 자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1:13) 현대교회의
문제는 물질 숭배보다 인간적인 끈끈한 유대에 얽혀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진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잘라 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누룩처럼 온 교회에 번져갑니다. 지금의 교회의 현상의 한 요인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교회의 업무를 잘 보기 때문에 이를 자르지
못한다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볼 때에
교회에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 또는 자신과 친소관계를 본다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유를 육체의 기회(찬스)를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언제나 대가를 받은 후에 후회를 하는 게 문젭니다. 반면에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원하여 종노릇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되는 자유여야 합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온 몸의 지체는 머리와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에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의 반대는 그 짓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 몸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루지 않고 주고받고
거래를 하면 그게 바로 간음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모든 율법은 다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자기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그 이웃을 사랑하므로 영생을 얻습니다. 그 이웃은 바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셔서 한 몸이 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처럼 생각하신 것과 같이 먼저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경건의
훈련을 반복하는 중에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여기는 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의무와 책임으로 율법의 쫓김을 받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의 끌림과 밀림의 자리에 와 있는 겁니다.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아옹다옹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생각하는 것(14절)의 반대입니다.
서로 뺨 때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차 소멸되어 갑니다.
스러져 가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얻은 다음에도 이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6장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된 다음에도
남을 비판하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수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곁길로 가지 말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여
좋은 나무가 되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마7장)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갈5: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