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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__레이몽 아롱-- 노무현 문재인--- 14ok
뚱보강사 이기성
301__ 레이몽 아롱과 노무현
윤희숙 의원, 홍남기에 직격탄…"모두가 어려워졌는데 격차 줄었다 자화자찬". [TV조선]의 홍연주 기자가 2021년 5월 21일 보도했다.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21일 "모두가 어려워졌는데 평등해졌다고 자랑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윤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소득 상·하위가 모두 나빠졌는데 격차가 줄어 자랑스럽다는 우리 정부"라는 글에서 이렇게 전했다. 그는 "어제(20일) 발표된 1/4분기 가계동향조사를 요약하면, 작년 1/4분기에 비해 1분위(소득 하위 20%)와 5분위 모두 시장 소득이 줄었다"며 "소득 상층과 하층이 모두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러나 재정을 대폭 투입한 결과, 가처분 소득상 1분위 소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이전보다 외려 늘었고, 5분위는 줄었다"며 "그러니 양자간 비율인 5분위 배율이 줄어 겉으로 볼 때는 분배가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윤 의원은 '소득분배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 그간의 포용정책 강화 토대 위에 코로나19 피해지원이 더해진 데에 기인하지만 전반적으로 근로·사업소득이 감소하고 5분위 소득도 위축되는 등 시장소득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는 홍 부총리의 평가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홍 부총리가 왜곡을 의도한 것인지, 용비어천가를 부르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경제 수장이 지금 같은 상황을 포용 정책의 결과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의원은 "1990년 마가렛 대처 당시 영국 수상은 의회 생활 마지막 날 소득분배 악화에 대한 질책에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고, 부자를 끌어내려 격차가 줄면 장땡인가?'라고 했다"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라며 글을 마무리했다.
우파 레이몽 아롱과 좌파 사르트르
경기 60회 뚱보강사 칼럼 ‘#290__ 사르트르와 우파 대부 아롱’에서 잠시 알아본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나무위키]에서 보면,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정치학자로 1905년 출생한 레이몽 아롱(=레몽 아롱, Raymond Claude Ferdinand Aron)은 1983년에 78세로 사망했다. 프랑스의 자유보수주의자로 동갑내기인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인 적수(intellectual opponent)로 유명하다. 생전 인터뷰 중 유명한 말. “정치에서의 선택이란 선과 악 중에 고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중에 고르는 것이다(Le choix en politique n'est pas entre le bien et le mal, mais entre le préférable et le détestable.)”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좌파의 대표는 사르트르, 중도 우파의 대표는 레이몽 아롱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입학 동기이자, 친하게 지낸 교우였기도 하다. 교원 자격 고사도 레이몽 아롱이 수석 졸업하였으며, 사르트르는 그해 시험에 떨어졌으나 다음 해에 수석 졸업하였다. 사르트르는 주로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레이몽 아롱은 주로 중도 우파 일간지 르 피가로에서 자신의 논설을 폈다.
***극좌파 투사 사르트르*** 철학서 《존재와 무》, 소설 《구토》로 2차 대전 직후 프랑스에 실존주의를 대대적으로 유행시킨 실존 철학자, 평론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참여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고 소설과 희곡에서 두루 성공을 거둔 작가, 그리고 군중 데모, 항의 시위, 공개장 서명 등에 빠지지 않고 모습을 나타냈던 극좌파 투사로서의 사르트르는 정말로 전후 30년간 프랑스 지식계의 교황이었다.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나 이념의 분쟁 속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 사람들은 오늘 사르트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보수파 레이몽 아롱*** 사르트르에 비하면 레이몽 아롱의 명성은 보잘 것 없었다. 명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치욕스러운 보수파의 상징이었다. 평생 온건하고 상대주의적인 논조를 유지했던 레이몽 아롱은 프랑스의 지식 사회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 교수로 들어갈 때는 그가 우익 인사이며 우익 신문인 피가로의 논설위원이라는 이유로,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에 부딪치기도 했다. 레이몽 아롱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레이몽 아롱은 마르크시즘이 세계를 해석하는 절대적 인식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기본 사상을 깔고서, 전후 프랑스가 상당한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었고, 생활 수준이 신장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축소되었고, 교육 제도도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하며, 과연 좌익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런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며’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소련에 대해서는 강제 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를 경계했고, 이와 같은 오류가 스탈린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이미 공산주의의 이론 속에 배태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사르트르는 "반공주의자는 개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비앙쿠르(르노 자동차 공장이 있던 파리 교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소련의 수용소 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1968년 5월 혁명 때는 비앙쿠르로 달려가 공장 노동자들을 앞에 놓고 선동연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사르트르와 레이몽 아롱의 포폄(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이 갈린 것은 “마르크시즘이라는 유행 사조를 채택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전후 30여 년간 프랑스는 내각이 수시로 바뀌던 불안한 제 4공화국과 드골의 강력한 지도 체제 등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부르주아 우익 세력이 정권을 담당했지만, 지식층의 헤게모니는 마르크시즘 진영이 잡고 있었다. 레이몽 아롱이 당했듯, 추악한 보수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그 누구도 자신이 우익임을 표방하지 못했다.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그랬듯이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반공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주류 사상을 거스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1968년 봄, 파리 근교의 낭테르 대학교 학생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학내 문제로 시작된 이 시위는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로, 기성 세대와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이른바 프랑스의 '1968혁명, 68혁명' 또는 ‘5월 혁명’은 독일과 미국, 멀리 일본까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슬로건은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경찰을 없애야 한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으로!", "보도 블록을 들추어라! 해변이 나타날 것이다." 1968혁명은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하였다. 당시 동·서양 진영은 냉전을 핑계 삼아 국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일상화하고 있었다.
국가는 끊임없이 ‘외부의 적에 맞서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지만, 학생들은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국가에서 내부의 적’을 발견한 것이다. 젊은이들은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우습게 여기고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는 기성 세대와 사회 풍조에도 저항하였다. 이들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들을 억누르는 모든 권위와 권력, 체제, 조직에 반대하였다.
그런데 1975년을 전후해서 ‘1968년 5월 혁명 때 고등학생ㆍ대학생이던 세대가’ 갑자기 마르크시즘의 한계와 소련의 죄악을 깨닫고,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인권 문제’를 들고 나와, 소련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레이몽 아롱이었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이 진보의 사상을 독점한 데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우익과 좌익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레이몽 아롱이 옳았으며, 사르트르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박정자(朴貞子) 상명대 명예 교수).
레이몽 아롱의 저서
레이몽 아롱의 저서 5권 소개.
① 역사철학 서론(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1938)
② 대분열(Le Grand schisme)(1948)
'대분열' 책에서 아롱은 전 세계가 미국의 자본진영과 소련의 사회진영으로 크게 둘로 나뉘게 되면서 소위 냉전이 도래하자, 이 냉전의 쟁점들에 대해 큰 통찰력 있는 해석을 보였고 스탈린 치하 소련의 모순된 모습을 서술하였다.
③ 지식인의 아편(L'Opium des Intellectuels)(1955)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들이 경도된 마르크스주의와 좌익(left-wing) 지식인들의 행태를 비판한 저서.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Religion is the opium of the people.)”라고 말한 것을 변형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다.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에서 도출해낸 분석을 통해 공산주의를 ‘세속화된 종교(religion séculière)’로 정의하였다. 또한 공산주의는 지식인들 중에서도 자격지심(mauvaise conscience)이 있는 지식인을 잘 ‘유혹(séduction)’한다고 하였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심한 비판을 가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저지른 억압, 학살, 비관용에 대해서는 방어에 급급하다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④ 참여하는 관찰자(Le spectateur engagé)(1981)
영문판은 The Committed Observer(1983). ‘참여하는 관찰자’로 번역될 책 제목이지만, 국내에서는 <참여자와 방관자>(이종호 옮김,1982)로 출판되었다.
⑤ 회고록(Memoirs)(1983)
20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과 자신의 지금까지의 모든 저서들을 모아 정리하고, 매 저서의 핵심내용에 대해서 특유의 자신의 문체로 추가설명을 첨가했다. 자신의 인생과 모든 저서들을 귀납한 책. 1983년 78세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기 한 달 전에 발간.
1955년에 소르본느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좌파들에 의해 악마처럼 묘사되는 바람에, 이 때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아롱의 지지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프랑스 최고권위의 교육기관이자 연구기관인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그의 메시지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마르크스주의가 파열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새로운 젊은 세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아롱의 분석들이 높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사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자유주의(libéralisme) 전통에 대해 혐오해왔다. 자유주의는 봉건귀족 및 전제왕정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사상적 무기가 되어, 근대 이후 서구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념)에 대항하여 등장한 이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주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총리인 스탈린(Joseph Stalin =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 1879~1953) 등 공산주의 정권들의 정의롭지 못한 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소위 "반 전체주의 운동(Anti-Totalitarian Movement)"이 일어난 뒤부터 이러한 분위기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롱은 인생 말년에 이르러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말년의 이러한 대접 변화는 그의 사상적 파워에서 온 면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더 이상 젊은 신진 지식인들을 사로잡지 못하게 된 면이 더 큰 원인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지식인층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변화는 전세계적으로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제3세계의 학자, 학생, 지도자들로 하여금 영미권 정치사상(Anglo-American political thought)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대안(alternatives)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예전과 같이 프랑스를 주목하지 않게 된 면이 있다. 아롱의 저서와 사상은 국제관계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균형된 시각과 통찰력을 갖추기 위해 여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프랑스 68혁명과 수구반동
레이몽 아롱은 소위 68혁명(5월 혁명)이라고 불리는 1968년 5월 학생운동을 비난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학생세력들로부터 수구반동(reactionary)이라며 비난을 받았다. 아롱은 비록 그 자신이 드골 정권의 정책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들어선 정권이며, 현 정권이 근본적인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구체적 콘텐츠 없이 모택동과 체게바라, 호치민을 외치며 폭력을 쓰는, 과거의 생 쥐스트(1767~1794), 로베스피에르(1758~1794), 레닌(1870~1924)과 같은 자들의 역할이 대두되는 양상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과거 ‘토크빌’의 역할에 비유하였다.
토크빌(Alexis Charles Henri Maurice Cierel Comte de Tocqueville', 1805~1859)은 프랑스의 정치학자ㆍ역사가ㆍ정치가이다. 19세기 전반에 지배적이었던 전통적 자유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노르망디(Normandy)의 귀족 가정에서 출생. 법률을 배운 뒤에 변호사ㆍ재판관이 되고, 1831년 정부의 명을 따라 미국을 시찰, 미국의 국정을 분석하여 보고한 《미국의 민주 정치 De Ia Democratie en Amerique 5권(1835~40)》은 미국 민주주의의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 제일의 글이 되었다. 1848년 입법 의회 의원ㆍ1839년 외상이 되었으나, 1852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체포되고, 공직에서 은퇴, 역사 연구에 전심했다. 저서 《구 제도와 프랑스 혁명 De L'Ancien Regime et la Revolution(미완ㆍ1856)》은 프랑스 혁명이 루이 14세까지의 역사 과정의 결말이라는 것을 논한 것이고, 혁명사에 새로운 방향을 주었다.(인명사전, 2002.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전후 프랑스는 좌파사상이 유행이고 대세이었기에,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는 것이 아롱과 같이 옳은 것 보다 낫다”. "아롱과 함께 침울함 속에서 옳은 것보다, 거침없고 활기차고 열성적인 사르트르와 함께 잘못되는 것이 더 쉽다(Plus facile d'avoir tort avec Sartre qui "trucule, exubère et effervesce" que d'avoir raison dans la morosité avec Aron"). 아롱의 반공산주의적 태도 덕에, 아롱은 미국과 많은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바드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방문교수로 초빙되었고, 포드, 록펠러 재단들로부터 풍성한 연구자금을 얻어올 수 있었다. 아롱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사상을 들여오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사상을 다시 부흥케 하는데 힘썼다.
레이몽 아롱은 단순한 우파가 아닌 독립적인 자유주의자였기에, 우파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즉, 1957년에는 알제리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가 포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알제리 전쟁 중 알제리의 독립을 위한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료이자 적수인 사르트르와 견해를 같이 한, 몇 안 되는 사안이었다. 아롱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르 피가로지에 장문의 비평기사를 썼다.
레이몽 아롱은 1977년 방한 후, 르 피가로 지에 한국여행기를 3차 연재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을 호평’했다. 하지만 정치, 자유, 인권문제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며, 지식인들은 아롱에 실망해하고 비난하였다. 이런 비난에 대하여, 당시 한국인 주불 특파원이 아롱에게 코멘트를 요청했다. 아롱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경제 발전을 호평한 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말이다. 개인소득 5천 달러가 넘으면 민주화는 분명히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롱은 오히려 “다수의 한국지식인들이 군부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어 실망했다.”고 지적하고, 경제수준이 필연적으로 민주시대를 부른다고 역설했다.
1980년 3월 인터뷰에서 레이몽 아롱은 한국의 민주화에 관해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당시 국제 언론이 서울의 학생시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서울의 봄”을 거론했었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명의 정치지도자가 슬기를 발휘하면 “서울의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이었다. 아롱은 “서울의 봄”이 올 것이라는 국제 언론의 보도를 부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 가깝지 않다. ‘서울의 봄’은 아직 멀리 있다.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쉽게 올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림도 없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서울의 봄”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주화투쟁의 ‘지식인-시민-민중’ 등의 피를 부르는 투쟁으로, 민주주의 나무에 많은 ‘피의 꽃’을 피워야 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부해보라. 민주화의 꽃나무가 시민의 피로 얼마나 많은 꽃을 피워야 민주주의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이 옳았다. 곧이어(2달 뒤) 신군부(전두환/노태우)의 1980년 5.17 쿠데타가 일어났다.
노무현 정부
페친 [김석수]님의 글 ‘문재인 정부(2017.05~)가 부동산뿐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난맥상을 보여서, 노무현 정부(2003.02~2008.02)와 비교되곤 한다’를 소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차이는 ‘패거리주의 정도 차이’다. 노무현 정부도 초기에 매우 협소한 패거리들만 썼다. 일명, 부산파들이 인사를 좌우했다. 같은 당 김근태나 이해찬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국정운영에 문제가 생기고, 자기 역량을 넘어서는 걸 느낀 노무현은 편협한 패거리주의를 열어 제꼈다. 집권 1년 여 만이다. 열린우리당 다른 계파 사람들도 쓰기 시작했다. 정점은 이해찬을 책임총리로 앉히고, 웬만한 일은 전결 처리시켰다.
김대중 정부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한 일꾼 이헌재를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등용하고, 이어 한덕수, 권오규 등을 등용한다. 과학기술부장관은 전두환 정권에서 체신부 장관을 했던 오명 장관을 입각시킨다. 진대제 같은 삼성맨도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쓴다. 부동산정책문제로 타격을 받지만, 무지막지한 법과 정책으로 임기 말에 가서야 겨우 진정시킨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부에서 실패한 것으로 검증된 인사 정책을 다시 쓴다. 부동산시장을 전혀 모르는 김수현을 청와대 사회수석과 정책실장으로 임명해서, 지금의 부동산 대란을 낳는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김수현의 하수인이니 그 실력을 말할 거리도 없다. 여기에 검증되지 않은 먹물 장하성과 홍장표를 내세워 듣보잡 이론인 소득주도성장론으로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는 등’ 부작용을 빚어 3040세대와 제조업 부문, 그리고 자영업에서 숱한 일자리를 없앤다. 그 정책이 실패로 판명난 지금도, 문재인 정권은 소득주도성장을 주장하고 있다. 사람을 쓰는 인재풀이 매우나 좁다.
시간이 흘러 시민사회, 그리고 민주당과 민노당 계열에서 이탈한, 그러나 현실정책을 고민하는 일단의 청장년 연구 인력들이 자생적으로 나타난다. 시민사회 싱크탱크에서도 일해 본 이들은 정당, 특히 민주당과 그 언저리라 할 수 있는 시민사회 싱크탱크, 그리고 제3지대로 나오는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사람중심 창조경제) 등에서 성장한다. 이들은 장하성, 홍장표, 김상조 등 구닥다리 연구자들보다 실사구시적이고, 낡은 진보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청장년 그룹이었다. 물론 그 무리는 하나의 모임이나 단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체나 프로그램에 산재되어 있었다. 혹은 홀로 연구소 활동을 하고 있던 이들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 인재풀이 워낙 협소하다보니, 이들이 정책을 다룰 수 있는 분야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보다는 실물경험이라곤 하나도 없는, 개념 없고 관념적인 시민단체(참여연대, 여연, 민변 등) 출신들이나 초대 비서실장 임종석을 중심으로 한 엔엘(National Liberation) 계열들이 대거 포진한다. 그렇게 초기에 짜여진 인맥구도는 정권이 끝나는 지금까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실사구시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낡은 진보이념으로 이름을 얻은 이들이 등용되고, 머지않아 정책실패로 검증되는 일로 이어진 것이 문재인 정권 4년의 성적이다.
엔엘(민족해방파, National Liberation; NL)은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진보 운동권에 존재하는 정파이다. 민중민주파의 별명인 "평등파"와 대비하여 자주파(自主派)라고도 한다.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사상을 기반으로 좌익 민족주의와 반미주의를 특징으로 하였다. 특히 사상의 모본으로 주체사상을 내세운 정파를 주체사상파로 특칭하며, 노선투쟁 이후 NL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위키백과] 민족 해방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중 하나이며, 특히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반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옹호하였고, 특히 제 3 세계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옹호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이나 쿠바 혁명 때 주로 강조된 이론이었다. 민족 해방은 오히려 부르주아적인 민족주의 관점보다, 국제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이용되었다. 레닌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 결정의 권리가 있음을 선언했다. 레닌은 민족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민족 해방의 이유는 쇼비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급진적 민주주의를 위한 것 이라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 싶으면 얼른 바꾸는 실용성이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은 그게 없다. 경직된 낡은 진보 이념에 갇혀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노무현이 탈권위주의라면, 문재인은 탈권위주의인 듯 하면서도 매우 권위주의적인 양반문화가 있다. 노무현은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이들과도 열띠게 토론하며 소통하는 반면, 문재인은 노무현처럼 다소 거칠게 쓴소리 하는 사람을 아예 만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친노친문이라는 문희상 전 국회의장조차 문재인에게 '아직도 혼밥, 혼술 하느냐'고 걱정한다. 앞으로 남은 임기 1년, 문재인 정권이 크게 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엉뚱한 경제보고를 받는지, 헛소리만 한다.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뜻있는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이유다.
[참고]
[TV조선] 홍연주 기자, 2021.05.21.
[참고]
뚱보강사 칼럼 ‘#290__ 사르트르와 우파 대부 아롱’
http://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8930
[참고]
[나무위키] 레이몽 아롱 = 레몽 아롱
https://namu.wiki/w/%EB%A0%88%EB%AA%BD%20%EC%95%84%EB%A1%B1
[참고]
[김석수]
https://www.facebook.com/seog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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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__ 레이몽 아롱-- 노무현 문재인 ,뚱보강사 이기성,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경기60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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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9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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