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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2(항주의 오산과 용정차)
중국내 최고의 곡창지대로 발돋움하고 상공업이 발달하였다고 그것만으로 항주가 지상의 천당이라 불린 것은 아니다. 항주를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명미한 풍광 때문이다. 항주에는 명승과 고적이 즐비하다. 서호와 용정산(龍井山)·봉황산(鳳凰山)·영은산(靈隱山)·서계(西溪), 그리고 도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전당강(錢塘江) 및 그 주변에 산재한 많은 사찰과 유적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항주의 이름을 빛내는 명소를 하나만 꼽으라 하면 단연 서호를 들 것이다. 최부는 2월12일 항주에 대해 간단히 이렇게 요약했다.
<항주는 곧 동남의 한 도회지로 집들이 이어져 있어 행랑을 이루고, 옷깃이 이어져 휘장을 이루었습니다. 저자거리에는 금은이 쌓였고 사람들은 수놓아진 비단옷을 입었으며, 외국배와 큰 선박이 빗살처럼 늘어섰고, 시가는 주막과 기루가 지척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사계절 내내 꽃이 시들지 않고 8절기가 항상 봄의 경치이니 참으로 소위 별천지였습니다.>
아마 중국여행을 한 사람은 적어도 북경이나 상해 장가계 정도는 다 다녀들 왔다. 나 역시도 중국여행이 열 번이 넘으니 여행사에서 소개하는 웬만한 곳은 다 가본 것도 같다. 물론 항주도 소주도 다녀왔다. 하지만 본 것이 본 것이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릇 10개국을 10박 12일 속성으로 주파하는 사람들인지라 항주 또한 황산을 갈 때 상해를 갈 때 곁다리 4박5일에 껴 다녀 온 관계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고 지금도 간 곳이 헷갈리고 있다. 더욱이 패키지 상품으로 항주는 메인이 못 되고 곁다리다 보니 한나절에 휑하니 항주를 독파하여 진국은 삼키지도 못했다. 으레 항주를 간다 하면 우리는 보통 서호, 송성 가무쇼, 용정 차밭을 들르고 소동파가 개발했다는 ‘동파육’을 맛보고 이내 후딱 돌아선다. 그러다 보니 기억 남는 게 별로 없다. 요즘 나는 직접 발로 걷는 배낭여행을 고집한다. 이제야 소동파가 말하는 적벽부를 제대로 이해한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적벽부의 끝 부분 구절을 이 참에 싣는다.
<(蘇東坡 前赤壁賦解文 중에서)
蘇子曰 소동파가 말하기를
客亦知夫水與月乎 손님은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강이 흐르는 것이 저렇지만 일찍이 다 흘러가버린 적 없고
盈虛者如彼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저렇지만
而卒莫消長也 별안간 소멸하거나 늘어나지도 않는다오
蓋將自其變者而觀之 무릇 변화라는 쪽에서 그것을 본다면
則天地曾不能以一瞬 즉 천지는 한 순간이라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고
自其不變者而觀之 변화하지 않는다는 쪽에서 그것을 보면
則物與我皆無盡也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는 것이오
而又何羨乎 그러니 또 어떤 것을 흠모하겠오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대저 천지지간에 모든 물질은 각각 주인이 있으니
苟非吾之所有 만약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雖一毫而莫取 비록 털 하나라도 함부로 취하지 못하지만
惟江上之清風 강위의 시원한 바람과
與山間之明月 산간의 명월은
耳得之而爲聲 귀로 그것을 들으면 음악이 되고
目遇之而成色 눈으로 보게 되면 아름다움을 이루죠
取之無禁 用之不竭 그것을 취해도 누가 막지도 않고 사용해도 마르지 않습니다
是造物者之無盡藏也 이것이 조물주의 무궁한 저장물이기 때문이죠
而吾與子之所共適 그런데 나와 그대가 함께 좋아하는 바이죠
客喜而笑 객이 기쁘게 웃으며
洗盞更酌 肴核旣盡 잔을 씻고 다시 따르며 포와 과일은 모두 소진되고
杯盤狼藉 술상은 어지러웠다
相與枕藉乎舟中 배중에 서로 포개어 누워
不知東方之旣白 동쪽하늘이 밝아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찬찬히 살포시 느긋하게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어느 새 날이 새는 양 한 마음 그득할 것인데 나는 바삐 무슨 업무 마감 하는 양 서둘기만 했다. 이 참에 최부가 적은 글귀라도 찬찬히 읽어 미처 얻지 못한 단 맛이라도 느껴 볼까 한다. 최부도 호송에 따른 북경서 오는 지시를 기다리며 안타깝게 이를 보지는 못하고 고백이 말해준 것을 적으며 마음으로만 느꼈다.
<성안에는 또 오산(吳山)이 있는데 그 경치는 최고로 좋으며 산 위에는 10묘(廟)가 있었으니, 오자서묘·삼목관(三茅觀)·사성묘(四聖廟) 등이었다. 또 9개의 우물과 3개의 못이 있었으니, 오산의 대정(大井)이 위에 있고, 곽파(郭婆)·상팔안(上八眼)·하팔안(下八眼)·중팔안(中八眼)·서사정(西寺井) 등의 우물이 그 다음에 있고, 또 작은 도랑으로써 서호(西湖)의 우물을 파서 성안으로 이끌어 들어오게 하였다. 부의 진산은 곧 무림산(武林山)이다. 악악왕(岳鄂王, 악비)묘는 서하령(棲霞嶺) 입구에 있고, 냉천정(冷泉亭)은 영은사(靈隱寺)의 앞 비래봉(飛來峯)의 아래에 있었다. 고지(古誌)에 허유(許由)가 일찍이 영은간(靈隱澗)에서 물을 마셨다는 것이 이곳이다. 표충관(表忠觀)은 용산(龍山)의 남쪽에 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비문이 있었고, 풍황령(風篁嶺)은 방목 마장의 서쪽에 있었다. 즉 소동파가 승 변재(辨才)를 방문한 곳이다. 남병산(南屛山)은 흥교사(興敎寺)의 뒤에 있었는데 절벽의 떨어져 나간 곳에 단지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의 예서로 쓴 ‘가인괘(家人卦)’와 미원장(米元章)이 쓴 ‘금대(琴臺)’의 두 글자가 있었다. 소동파의 시에 ‘내가 남병산의 금즉어(金鯽魚, 금붕어)를 안다. 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글을 파악하기 전에 우선 항주지형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항주 서호 주변을 중심으로 지도를 살펴보면 서호를 중심으로 동남방향 남산로 바로 옆 시내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오산이 자리한다. 그 시대는 곳이 맑고 청정한 샘물이 제법 많았던 모양인데 지금은 대신에 성황각이 오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그 오산 옆에는 남산이 있고 남산 뒤로 남병산이 자리하고 그 뒤로 전단강이 흐른다. 북쪽을 살펴보면 백제라 일컫는 뒤로 고산이 있고 그 뒤로는 보석산이 있다. 고산 바로 뒤로 옥천산이 자리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오산보다 이곳이 맑은 샘터가 자리하고 있다. 고산 옆으로 악묘가 있으며 서호로 보아 서편에 옥천산이 있으며 지금 케이블카가 놓여 북고봉까지 가는 데 그곳 밑에 영은사가 자리한다. 옥천산 바로 밑으로 서호에서 보자면 남서쪽에 차로 유명한 용정촌이 자리하고 그 밑으로 운서산이 보인다.
오산은 삼국지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오(吳)나라의 왕 손권이 이 산에 진을 쳤었다 하여 오나라 오(吳)에 뫼 산(山)을 붙여 오산(吳山)으로 이름 붙여진 산으로 당시는 오산이 물맛이 좋았고 서호의 물줄기를 일부 틀어 물을 대 못을 만든 듯하다. 당연 오나라의 책사 오자서의 묘도 그 산에 있다. 사실 항주는 바다에 가깝고 전단강의 쓰나미 효과로 물이 짜 사람들이 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를 당나라 때 자사 이필이 서호의 물을 끌어 들여 우물 6정을 만들어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하면 최부가 말하는 바로 오산에 대정, 곽파, 상팔안등은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오산이 성안이라고 하였는데 그쪽이 그러니까 서호로 부터 동편이 마을이 들어찼고 오산은 아마도 마을 중심에 섰던 것 같다.
번창한 요즘 시대 당연 오산은 항주 중심이다. 곳은 오산광장이 생겨났고 동네를 상징하기도 한다. 곳은 지금 항주의 가장 번화한 상업거리인 연안로(延安路) 남쪽에 위치하며 시내까지 산줄기가 뻗어있다. 그러기에 오산 주변은 명향루, 성황각 등의 유명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오래된 고목과 기암괴석들, 사원과 신묘, 소동파 같은 유명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물들이 많이 있다. 산위의 성황각에서는 항주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고 좌측으로는 서호, 우측으로는 전당강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볼거리도 많고 경치도 뛰어나 외국 관광객은 물론, 항주 시민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 된 것이다.
성황각(청황거, 城隍閣)은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7층짜리 고 건축물로 오산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누각의 모든 조형이 남송과 원대의 건축풍격을 따랐으며 호북성 무한시에 있는 황학루, 장시성 난창에 등왕각, 동정호 웨양의 악양루와 함께 중국의 강남 4대 누각으로 꼽힌다. 이들 누각들은 당연 옛 시인들의 사상의 대상이었다. 황학루는 최호의 시가 백미로 알려져 있다. 성황각의 1층에 있는 <남송항성풍정도(南宋杭城風情圖)>는 항주시 공예연구소 연구원을 비롯한 장인 등 만 여 명이 참여하여 2년 만에 만든 작품으로 입체적 조소가 남송 시기의 생활풍속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거대한 응회암에 서호의 전설과 십대 민간 고사등을 담은 이 조각도는 길이 31.5미터에 높이만 3.65미터로 1000여 채의 가옥과 3000여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어 그 시대의 중국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동네 상징답게 항주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모신 사당도 그곳에 있다. 성황묘(청황먀오, 城隍廟) 명나라의 관리로서 항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주신(周新)을 모시는 사당으로 그의 신주가 영험하다 해서 아직도 많이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성황각과 바로 붙어있다.
우리도 옛 고을은 동네를 수호한다는 진산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아마 항주의 진산은 무림산이었던 모양이다. 앞서 금나라와 싸워 용맹을 나타낸 악비 장군, 그를 흔히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과 많이 비교를 하는데 그의 묘가 바로 서호 곁에 있다. 중국사람들이 관운장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군이다. 동네 이름이 서하령이라는 데 아마 현재 항주식물원 부근이 아닐까 싶다. 보천산이라 하여 천이 맑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네에 정자 이름 냉천정, 지금은 이름이 바뀐 것인지 현재지도에서는 찾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보천산 주변은 물맛이 좋았던 것 같다. 최부 글에 나오는 고대전설상에 나온 관직을 버린 허유가 영은간에서 물을 마셨다는 주변이 바로 현재의 보천산 주변이다.
영은사는 어떤가. 서기 326년 동진(東晋) 때 인도 승려 혜리(慧理)가 창시한 영은사(靈隱寺)는 중국 선종(禪宗) 10대 사찰 중 하나다. 한 때는 3천명 승려를 거느린 대찰로서 현관의 운림선사(雲林禪寺)란 현판은 청 강희제의 글씨라 한다. 대웅보전에는 19미터 높이의 향나무에 금도금한 석가모니불이 계시는데, 입술과 눈동자가 여인의 그것처럼 고혹적이다.
신도들이 빗자루처럼 향 다발에 불을 붙여 다녀 도량이 온통 향 연기에 쌓여 있다.법당 뒤엔 관음보살이 안치 되었는데, 관음보살 머리 위에 신라 왕족 김교각 스님 등신불(等身佛) 불상이 있다. 왕족 형제 중 한사람은 출가하던 것이 신라 풍습이었다. 아마 그는 경주서 해로(海路)로 위해나 양주를 통하여 항주에 왔을 것이다. 영은사와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비래봉(飛來峰)이 있다. 인도 스님 혜리가 ‘인도 천축 영취산(靈鷲山) 봉우리가 언제 이곳에 날아왔는가?’해서 ‘날아온 봉우리’란 뜻의 비래 봉이다. 전단 강 바로 위 남쪽에 남병산 주변에 포진한 흥교사는 이름이 바뀌었는지 현 지도를 보고 끝내 찾지를 못했다. 현재의 남산로 주변에 흩어진 많은 문화재급 고적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은 된다.
항주에서 또한 차밭으로 유명한 용정을 빼놓을 수는 없다. 10여 년 전에 내가 그곳을 갔을 때 워낙 부유한 마을이라 동네사람들이 스스로 도로를 놓고 굴을 뚫어 손님들을 모셨다고 했다. 19세기 중국은 세계 차(茶)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은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차의 수입과 아편 수출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당시 영국은 중국의 차를 대량으로 수입 하였는데 청나라는 대금의 결제 수단으로 은(銀)을 요구하였고 영국은 은(銀)의 조달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 은으로 대금을 받고, 다시 그 은을 차의 수입대금에 충당함으로서 아편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홍콩을 백년간 조차하게 된다. 청나라는 서서히 몰락해가고 차의 수입을 전적으로 중국에 의존해야 했던 영국에서는 직접 차를 재배하고 생산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 끝에 1823년 스코틀랜드 기지 사령관인 R.부르스가 인도 북동쪽의 아샘(Assem) 지방에서 자생하는 차나무를 발견하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 했다. 또한 당시 중국 황실에 의해 비밀에 붙여져 있었던 차 제조 비밀을 알아낸 뒤에는 히말라야 산맥의 다르질링에 대단위 차밭을 만들고 아샘 지방의 차나무는 실론 섬(스리랑카)에까지 옮겨져 '차의 섬'으로 만들어 식민지 인력을 이용한 자급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도 매년 차의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차 산업은 중요한 무역 상품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영국에서 독립한 스리랑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를 수출하는 국가로 매년 17만여 톤을 수출함으로써 연간 4억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용정 차는 발효시키지 않은 찻잎(茶葉)을 사용해서 만든 녹차로 녹차로서는 중국을 대표하고 있다. 용정차의 주산지는 절강성 항주시 서호 서남의 용정촌 주위의 산 지역으로 숲이 울창하고 1년 내내 평균기온 16도 정도로 기후가 온난하며 강수량은 1500mm 정도로 차나무의 생장에 이상적 인 곳이다. 용정(龍井)이란 샘 옆에 용정사란 절이 있었으며 그 절에서 재배한 차를 용정의 샘물로 우려내 마시는 차가 맛이 있어 용정차라고 했다고 하며 용정차 또는 서호 용정이라고 불린다. 신선한 난향을 지녔으며 작설모양이고 차를 우리면 어린 차 싹과 여린 찻잎이 하나하나 피어나 아름다우며 초록빛의 차빛과 은은한 향으로 인해 중국 제일의 녹차가 되었다.
많은 황제들이 항주를 좋아했지만 차를 끔찍이 사랑한 청나라 건륭제를 따르지 못했다. 그는 6차례 모두 항주를 거쳐서 갔다. 중국 청나라 때에는 용정의 차나무를 ‘어차’, 즉 ‘임금의 차나무’로 봉해 놓고는 황실에서만 그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남서지역을 순례하던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곳에 들러 찻잎을 따면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 태후가 아프다는 급보를 듣고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따던 찻잎 주머니를 둘러 맨 채 환궁해 병석에 있는 태후를 문안했다. 그런데 앓아누워있던 태후는 황제의 몸에서 나는 그윽한 차향에 반해 즉석에서 그 차를 달여 마셨고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로 건륭제는 이곳 차나무 열여덟 그루를 어차로 봉하고는 매년 봄 새 차를 따서 태후에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름이 용정이라는 샘물에서 유래됐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용정차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이곳에 좋은 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항주에는 용정 외에도 진강의 중냉천, 무석의 혜천과 함께 ‘천하의 제 삼천’이라 불리는 호포천이 있다. 용정과 호포천의 샘물은 모두 광물질이 적고 분자의 밀도가 높아 맛이 순하고 부드럽다. 이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물위에 동전을 띄우는 ‘마술’이다. 이곳 샘물의 물을 잔에 가득 담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동전을 올리면 동전은 가라앉지 않고 거짓말 같이 물위에 둥둥 뜬다. 물의 표면 장력이 높기 때문인데 그만큼 물의 밀도가 높다는 뜻이고 중국 사람들은 이를 일러 ‘물이 부드럽고 찰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용정과 용정차를 달이는 대표적인 샘물인 호포천은 시내에서 5km 떨어진 서호 남쪽 대자산 정혜선사(定慧禪寺)내에 있다. 정확히는 남산로 길 변에 있다. 호포 천 주변 바위에는 팔베개를 하고 느긋이 누워있는 노선사와 그 발아래 얌전히 앉아있는 호랑이가 조각돼 있는데 이곳 샘물에 얽힌 전설을 말해주는 조각이다. 그런데 이는 여담이겠지만 항주만큼 게으른 여자가 없다고 한다. 옛날 항주의 여인들은 자신의 몸치장이나 유희에만 신경을 썼지 가사나 육아 등의 대부분을 남자가 주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항주에 보면 밥이나 요리를 못하는 여인이 많고 일요일에는 부인은 이웃 주민과 마작을 즐기고 남자들은 옆에서 음식을 하는 가정이 많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가 매번 와서 볼 때마다 항주의 여인들이 놀고만 있는 게 영 못마땅해서 자신이 즐겨 마시는 차를 염두에 두고서는 차를 더욱 많이 심게 하여 매년 4월부터 그 찻잎을 여인들이 직접 따도록 명을 내렸다. 그 후로 매년 4월부터 항주의 여인들이 찻잎을 따기 시작한 전통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원래 항주에 미인이 많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사실 나도 항주 거리를 보았지만 미인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훨씬 더 미인이 많지 않은가 싶은데 항주 여행 중 그 다음 코스인 송성가무를 보고 마침내 알았다. 항주에 예쁜 미인은 모두 송성가무 촌에 모여 있었다. 어디 그곳으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