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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겨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5대 그룹 총수를 모아놓고 "주력 기업 중심의 경영 체제를 갖춰 달라"며 이른바 빅딜(Big Deal)카드를 꺼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현대그룹과 LG그룹의 반도체 빅딜이었다. 하지만 구본무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매각할 바에는 제값 받겠다며 LG반도체를 6조5천억 원에 팔겠다고 하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1조원에 사겠다고 버티면서 빅딜은 장기화됐다. 결국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의 중재로 마라톤 협상끝에 LG반도체는 2조6천억 원에 현대 품으로 들어갔다. LG의 핵심사업 부문이 정치 논리에 의해 반 강제로 다른 회사에 완전히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현대는 반도체를, LG는 현찰을 손에 쥐었지만 반도체 빅딜은 양 그룹에 '악몽'이 됐다. LG반도체를 품에 안은 현대반도체는 인수 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졌고 곧 이어진 반도체 불황에 무려 10조원의 빚을 지고 침몰했다. LG 역시 매각대금으로 데이콤을 인수했지만 밑지는 장사만 했다. 정부 반시장경제정책의 후유증은 컸다.
특히 현대반도체는 부실을 견디지 못해 워크아웃 기업으로 추락했다. 회사명도 '하이닉스'로 바뀌었고, 수차례 매물로 나왔다. 현대중공업과 STX그룹은 물론 해외기업이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 하이닉스 임직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끊임없는 기술혁신과 원가절감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주인 없는 기업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았다.
하지만 2012년 SK그룹이 인수하면서 날개를 달았다. SK그룹은 내수기업 이미지를 탈피하겠다는 최태원 회장의 결단으로 하이닉스를 3조4267억원에 인수했다. 이듬해 중국 우시공장에 대형화재가 발생해 위기에 빠지는 듯 했으나 전화위복이 기회가 됐다. 공급부족으로 D램 반도체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매출과 순이익이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다.
올해 SK하이닉스에겐 기념비적인 해다. 지난해 매출 17조1256억 원에 5조1095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면서 19년 만에 법인세를 내는 감격을 누렸다. 이번에 청주시도 381억원의 법인세를 챙겼다. 물론 최대 수혜자는 SK그룹이다. 계열사마다 경영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SK그룹 입장에선 한해 영업이익이 인수대금보다 훨씬 많은 SK하이닉스는 '복덩어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사면·복권되지 마자 충북 청주와 경기 이천에 31조원을 투자해 공장을 신설, D램 반도체의 선두주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룹의 역량을 집결시킨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마이크론도 미래의 주력 반도체 개발을 위해 굵직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자칫 치킨게임(상대가 파산할 때까지 가격경쟁을 벌이는 것) 양상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SK그룹은 현대와 LG가 놓친 하이닉스반도체의 진정한 수혜자가 됐다. 차세대 메모리 시장에선 누가 웃을까. 인텔, 삼성전자, 마이크론과의 진검승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듯하다.
/jbnews 칼럼^네이버 블로그<박상준 인사이트>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