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세기 야만적 자본주의 시절의 자본-노동 관계 : <노동법>없이 "민법"이 지배하던 시절
아래 어떤 분이 불법을 했으니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흰소리를 한 분이 있더군요. 세상을 수구꼴통과 노빠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잘 몰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참조 차원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과 같이 노동3권 헌법에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것에 대한 사회적 반성 이후부터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1929년 대공황이 발생했고 미국에서는 1932년 루즈벨트 정권에 의해서 뉴딜정책이 시행되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노동권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입법 조치들이 취해집니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노동3권은 '헌법적 권리'로 명시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19세기식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무제한의 착취를 해서는 결국 사회 자체가 망한다는 교훈에 대한 깨달음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1929년 대공황 이전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3권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9세기 야만적 자본주의, 혹은 다른 표현으로 <(구(舊)) 자유주의시대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자본-임노동 계약을 일반적인 상품계약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사인(私人)과 사인(私人)이 서로 계약을 맺고 한쪽이 피해를 입히면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하는 것이 계약의 기본원리이며 이는 오늘날 <민법(民法)>에 고스란히 그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임노동 계약에 민법의 원리를 들이댄다는 것은 '임금' 이외에는 생계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는 사실상 굶어죽거나 노예처럼 복종하거나 둘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노동자들의 저항은 정말이지 강경했습니다. 파업은 '폭력적'인 형태로 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심지어는 경찰과 총격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본가들은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노골적으로 테러를 하고 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199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하게 되면 '의례'(?) 맞딱뜨려야 하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에 대한 테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용역깡패를 고용해서 식칼테러도 하고, 회칼과 전기봉으로 노동자들을 족치고 두들겨패는.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을 강간하거나 성희롱하여 인격적 모멸감을 느끼도록...
)
그 시절 노동자들은 '외통수'였습니다. 모든 노동자들의 저항은 이미 불법이었습니다. '합법적'으로 보장된 것은 굶어죽을 자유와 노예로 살아갈 자유 이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문자 그대로 노동자들은 <가진 것은 몸뚱이밖에 없는 무산자(無産者)>(프롤레타리아)였습니다.
2. 노동자정당, 1929년 대공황, <노동법>의 등장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인간의 정당한 삶에 대한 욕구는 자본가들이 설정해놓은, 그리고 보수정당들이 설정해놓은 '합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조결성의 자유를 주장했고, 협상을 원했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단체행동권을 발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수십, 수백,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테러로 죽어나가고, 죽음으로 항거하고, 혁명전선에 뛰어들고, 파업투쟁으로 조금씩 조금씩 '조직화'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정당>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노동당, 독일사민당, 스웨덴 사민당, 이탈리아 사회당, 공산당, 프랑스 사회당 등등..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장과 1929년 대공황이 맞물리면서, 수십년간의 피눈물과 죽음의 투쟁으로 드디어 "노동3권"을 쟁취했습니다. 노동3권은 헌법적 권리로 격상되었습니다.
헌법적으로 노동3권이 보장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본-임노동의 계약관계가 일반적인 상품계약과는 차원이 다른 "특수한 계약"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약은 서로 쌍방이 평등하고 수평적인 조건에서 체결되는 계약이 아니라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제도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서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민법의 원리가 아니라) 노동3권이라는 형태로, 별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제도적으로 공식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법과 별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노동법>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29년 대공황을 거친 이후에, 특히나 19세기 야만적 자본주의보다는 진전된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손해배상·가압류를 적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19세기처럼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OECD국가 중에서 한국처럼 손해배상, 가압류를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쟁위행위에 <민법>적 원리로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19세기 야만적 자본주의 수준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손해배상·가압류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 : <노동법원>의 필요성
현재 한국의 손해배상. 가압류는 근본적으로 19세기 야만적 자본주의 수준의 법규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의 손해배상·가압류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서 야만적인 법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른 나라에서는 대부분 합법인 파업임에도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합법 파업이라는 것은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 것처럼 힘든 일입니다. 마치, 19세기 야만적 자본주의가 노동3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의 딱지를 붙였던 것처럼.
둘째, 절차상 사소한 불법을 가지고 파업 전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가령, 파업중인 조합원 한 두명이 회사 기물을 파손했다고 해서 그 파업을 불법파업으로 규정한 경우도 있습니다. 노조가 '모든' 조합원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원은 자본가 편향적인 판결들을 계속 내렸습니다. 이렇게 과도한 부분은 당장 시정되어야 합니다.
셋째, 근대 노동법의 기본정신을 재환기해볼 때, <단체행동권>의 발휘로 발생한 회사측의 피해에 대해서는 "노동3권의 헌법적 정신을 근본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조합원들의 생계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가압류는 사라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일반조합원에게까지 확대되는 것은 더더욱 지나친 처사입니다.
넷째,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쟁위행위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별도의 엄정한 기구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독일의 경우 <노동법원>이 존재합니다. 또한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자본편향적인 것을 막기 위해서 재판관의 절반을 노동계 추천인사로 임명하고 있습니다.
4. 참여정부 시대에 '죽음'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노동3권을 보장한다는 것이 노동자의 '모든' 행동을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노동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된 이후에도 노동조합이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노동3권의 헌법적 정신>을 침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해결책이 모색되어져야 하며, 노동법원의 설립등과 같은 공정한 절차속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김주익 열사가 죽음으로 항거했듯이) "월급 실수령액 13만원"으로 한달 5인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라고 명령하는 조중동.노무현.그리고 법원이 한패거리가 되어서 강요하고 있는 상황은 지.금. 당.장. 종식되어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 출범이후 130여명의 노동자를 구속했습니다. 이틀에 한명꼴로 노동자를 구속했습니다. 그러나,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받은 자본가는 없습니다. 노무현이 재신임을 발표했을 때 오죽했으면 "경총"이 노무현의 재신임 국민투표를 환영했다고 했을까요.
현재 노동자들에게 딱지붙어있는 가압류는 1천5백억원 규모에 다다릅니다. 어느 노동자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월급은 물론이요, 일가친척의 모든 재산을 다 끌어모아도 손해배상 청구액을 충족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합니다.
노무현으로부터 '노동귀족'이라고 지탄받던, 그래서 나라를 망친다고 지탄받았던 대기업 한진중공업, 그것도 노동조합 위원장(지회장)이었던 김주익 열사는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노동자는 다 굶어죽으란 말인가? "
이 표현은, 애닮프게도, 2003년 10월 30일 오늘 현재, 문학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팩트'입니다.
정부와 법원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다 굶어죽거나, 노예처럼 찍소리 하지 말고 일만 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당신은 노동자들이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이 '참여정부' 시대, 올바른 노동자들의 처신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은 그것이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는 방법은 위에서 말한 <제도적 대안>을 쟁취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와 노사모와 서프라이즈에는 '친서'를 전달하지만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요구에 대해서는 콧빼기도 비치지 않으며 고답적인 노무현의 맛탱이가 간 노동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낼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참정권을 쟁취했던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20세기 초반 노동3권을 쟁취했던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20세기 초반 노동자정당을 스스로 건설했던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우리는 그렇게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동지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더 이상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만큼은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