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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64강-2 (2015. 6. 1.)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
十行品 第二十一之二
五. 重頌
11. 第七 無着行(끝 구절)
12. 第八 難得行
(1) 自身의 修行願 (2) 神通願
(3) 敎化願 (4) 菩提願
(5) 成熟衆生願
13. 第九 善法行
무슨 불교든지 간에 그 나름대로 중생을 위하는 한 가닥의 그 어떤 의미는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전부 ‘중생을 위하는 길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此見性者所行道(차견성자소행도)로다.
견성한 사람ㆍ성품을 본사람ㆍ참 성품ㆍ참마음ㆍ참나ㆍ참사람ㆍ참 생명. 이것 같은 뜻인데요. 그것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사람이 이 도를 행했더라.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면요? 그것은 하나의 평등이고, 하나의 원리고, 하나의 근본입니다. 그 근본을 알면 그 나머지 어떤 차별된 현상들은 무엇이든지 다 용납이 되고, 이리저리 그 쓰임을 다 알게 되고, 해석이 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을 우리가 망각해버리면 전부 곳곳에 걸립니다.
여기도 걸리고 저기도 걸리고 ‘왜? 이렇게 다른가?’ 다른 것만 쫓아가게 되는데, 근본을 제대로 꿰뚫고 보면 그 다른 것에 크게 마음이 쓰이지가 않습니다. 그런 내용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12. 第八 難得行
(1) 自身의 修行願
安住甚深大法海하야 善能印定一切法호대
了法無相眞實門하니 此見實者所行道로다
難得行(난득행). 얻기 어려운 행.
自身의 修行願이라.
安住甚深大法海(안주심심대법해)하야,
깊고 깊은 큰 법의 바다에 안주해서,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그 살림살이는 이 가르침의 바다. 또 모든 존재의 어떤 그 원리를 꿰뚫어 보고, 그 원리를 말씀하신 그 설법, 그야말로 甚深大法海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은 평생의 살림살이로 했고, 또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불법이 이렇게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모르고 말세가 되니까 엉뚱한 짓을 하면서 “불법이다.” 라고 이렇게 하는 경우가 참 많은데요. 이 甚深大法海. 거기에 안주하는 것. 이것이 근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善能印定一切法(선능인정일체법)호대,
잘 능히 일체 법을 깊이 이해한다. 印定한다. 라고 하는 말은 ‘아주 깊이 이해한다.’ 이 뜻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깨닫는다.ㆍ일체 법을 깨닫는다.’
그래서 了法無相眞實門(요법무상진실문)하니,
법이 형상 없고 진실한 문을 아나니 = 깨닫나니,
此見實者所行道(차견실자소행도)로다.
이것은 見實者所行道라. 그랬습니다. 진실을 본 사람.
진실을 본 사람이 행한바 도로다. 그렇습니다. 여기는 굳이 第八 難得行이라고 했으니까 “난득행 보살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見實者라고 하는 말은 제 1행 보살이 됐든지, 2행 보살이 됐든지, 3행 보살이 됐든지 다 해당되는 표현입니다.
(2) 神通願
一一佛土皆往詣하야 盡於無量無邊劫토록
觀察思惟靡暫停하니 此匪懈者所行道로다
無量無數諸如來의 種種名號各不同을
於一毛端悉明見하니 此淨福者所行道로다
一毛端處見諸佛호대 其數無量不可說이며
一切法界悉亦然하니 彼諸佛子行斯道로다
無量無邊無數劫을 於一念中悉明見하야
知其修促無定相하니 此解脫行所行道로다
神通願(신통원)이라.
一一佛土皆往詣(일일불토개왕예)하야, 낱낱 세계에 다 나아가서
盡於無量無邊劫(진어무량무변겁)토록, 무량무변 겁이 다할 때까지
觀察하고 思惟해서 靡暫停(관찰사유미잠정)하니,
한순간도 잠깐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세계에 다 나아가서, 보살은 그래야지요. 보살은 모든 세계에 다 나아가고, 또 한량없는 세월동안 빠짐없이 하고, 그래서 중생들을 관찰하고 사유해서 잠깐도 머물지 않고 하는데,
此匪懈者所行道(차비해자소행도)로다.
이것은 匪懈者所行道라. 그랬습니다. 게으르지 않은 사람. 일체 공간ㆍ일체 시간에 한순간도 쉬지 않고 관찰하고 사유하니까, 게으른 사람은 그렇게 못하지요. 그러니까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행한바 도로다. 그랬습니다.
無量無數諸如來(무량무수제여래)의
種種名號各不同(종종명호각부동)을,
무량무수 모든 여래의 가지가지 명호. 참 무량 무수한 부처님이름마다 다 다르고, 천불 명호 경, 3천불 명호 경, 만 불 명호 경, 대장경에는 그런 것도 있잖아요. 그 이름들이 각각 다르거늘,
於一毛端에 悉明見(어일모단실명견)하니,
그 모든 여래ㆍ낱낱이 다른 이름들ㆍ무수한 여래들. 그것을 어디서 보느냐?
一毛端에서 悉明見이라. 한 터럭 끝에서 다 본다. 이 말입니다.
우리 법성게에서 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고 했는데요. 여기에는 뭐라고요? 한 毛端에서 무량무수 모든 여래가 거기에 있음을 본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毛端안에 무량 무수한 여래가 있음을 본다. 이 말입니다.
그 속에서 여래를 본다. 그랬습니다. 이런 이치에서 우리가 마음이 열려야하고, 눈이 떠져야 되는 것이지요.
毛端에서 悉明見하니
此淨福者所行道(차정복자소행도)로다.
이것은 淨福者所行道로다. 청정한 복을 가진 사람이 행한바 도다.
그랬습니다.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보는 사람은 그 사람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훌륭한 복을 가진 사람이다.= 청정한 복을 가진 사람이다.
교재를 안 가지고 오는 것은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 지으러 왔다가 복을 잔뜩 까먹고 가는 겁니다. 그래 그것은 안 오는 것만 못합니다.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배려고, 그것이 보시입니다.
그것이 환희고요. 보시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환희라고 그래요.
기쁨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들도 보시라고 하는 사실을 그 동안 여러 수 10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一毛端에서 悉明見하니 淨福者. 그랬습니다.
청정한 복을 가진 사람이다. 그 사람이 청정한 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긍정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사람 복 있는 사람입니다. 똑 같은 세상인데, 세상은 하나도 바뀌거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똑 같은 세상을 두고도 내가 긍정적으로 보고, 정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은 안타깝게 보고 불쌍하게 보고 그래야지, 거기에 어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반기를 든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박복한 사람들이 하는 소견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치고 박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 수용하고,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은 못할지언정 좋게 봐야지요. 그것이 淨福者입니다.
毛端에서 無數無量의 如來를 본다고 했잖아요. 거기에 “내 마음에 든다. 내 마음에 안 든다. 경계가 좋다. 나쁘다.” 그런 것 없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아예 없습니다. 어떤 경계든 간에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으로 보는 그런 마음가짐. 그렇게 해석을 해야 그것이 해석을 잘하는 것이지요.
一毛端處見諸佛(일모단처견제불)호대,
한 모단에서 = 一毛端에서 모든 부처님을 보되 = 한 터럭 끝에서 많은 부처님을 보되, 其數無量不可說(기수무량불가설)이며,
무수무량이어서 가히 말할 수가 없어요. 얼마나 많은지, 한 터럭 끝에서 부처님이, 무량무수부처님입니다. 얼마나 많은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무수무량不可說입니다.
一切法界에 悉亦然(일체법계실역연)하니,
일체법계가 다 또한 그러하니, 어느 한 곳만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곳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평등하지요.
一切法界悉亦然하니 彼諸佛子가 行斯道로다.
저 모든 불자가, 진정 불자라면 그렇게 보아야 진정한 불자다.
저 모든 불자가, 그랬잖아요. 불자가 이 도를 행하도다.
一毛端에서 = 한 터럭 끝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 무량무수不可說의 부처님을 볼 줄 아는 눈. 그렇게 볼 줄 아는 안목. ‘이것이 불자의 안목이다.’ 이런 뜻이지요.
無量無邊無數劫(무량무변무수겁)을, 한량없는 세월을,
於一念中悉明見(어일념중실명견)하야, 한 순간에서 다 본다.
이것은 뭐라고요? 一念卽是無量劫. 우리 의상스님께서 이러한 내용들을 아주 그렇게 일곱 자의 한 구절로써 표현을 다 했습니다. 화엄경에는 이런 말들이 수 100번 나오지만, 법성게에서는 딱 한 구절로 그렇게, 一念卽是無量劫 또 一微塵中含十方 이렇게 다 아주 간단명료한 표현했습니다.
법성게는 이 세상에서 정말 명문중의 명문입니다. 그 얼마 되지 아니하는 글자 몇 자 안 되는 그 구절 속에, 아주 그것 참, 불교의 깨달음의 궁극적 내용이 말하자면 “화엄경이다.” 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그 화엄경이 말하자면 압축된 것. 화엄경의 그 많은 내용이 다 농축되고 농축돼서 엑기스만 되어있는 것이 “법성게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껏 봤지만 의상스님이 뭐라고요?
一微塵中含十方. 딱 이렇게 한마디로 끝내잖아요. 또 一念卽是無量劫.
한 순간이 한량없는 세월이다. 한 순간과 한량없는 세월이 사실은 하나로 연결 되어있습니다. 1초를 빼버리고 100년을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100년도 1초안에 다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00년과 1초는 하나입니다.
요즘 물리학이 발달해서요? 그런 것은 우리불교인들 보다 물리학자들이 훨씬 더 잘 알고, 더 잘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화엄경의 이러한 이치를 보면 정말 기절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無量無邊無數劫을 一念가운데서 悉明見한다.
다 밝게 보아서 知其修促無定相(지기수촉무정상)하니,
修促 = 길고 짧은 것을 아는 것이 定相이 없으니,
길고 짧은 것. 길다 짧다하는 것이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일정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길다 짧다. 금방 말씀드렸지만, 1초와 100년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것이 길고, 어느 것이 짧다. 그 깊이 들어가서 시간의 어떤 존재성을 제대로 파악하면 길다 짧다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고정된 것이...
보통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같은 한 시간도 아주 길게 느껴지고, 뭐
“一日이 如三秋라.” 이런 말도 있듯이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 같은 한 시간도 길게 느껴지고, 금방 지나간 것 같고, 뭐 한 10분쯤 지나간 것 같은데, 한 시간이 지나같다. 이런 경험은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든지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시간의 그 어떤 원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길 修ㆍ짧을 促. 知其修促無定相하니
此解脫行所行道(차해탈행소행도)로다.
이것은 解脫行의 所行道로다. 그랬습니다. 그런 어떤 시간성에서, 차별성에서 벗어난 해탈행자가 행한바 도로다. 그랬습니다.
(3) 敎化願
能令見者無空過하야 皆於佛法種因緣호대
而於所作心無着하니 彼諸最勝所行道로다
敎化願(교화원)
能令見者無空過(능령견자무공과)하야,
능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되게 지나는 이가 없어서,
‘헛되게 지나치지 않는다.’ 이 겁니다.
皆於佛法種因緣(개어불법종인연)호대,
다 불법에 인연을 심게 한다. 예를 들어서 초파일에 한 번 오는 그런 사람도, 일 년에 초파일에 딱 한 번 오는 불자들 많잖아요. 또 불자 아닌 사람도 그렇고요. 어떤 이유에서 왔던지 간에, 부처님도량에 한 번 온 사람은 결코 그냥 헛되게 = 無空過, 헛되게 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조그마한 책자라도, 아니면 한 페이지짜리 一紙經. 한 페이지짜리 경전이라도,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이렇게 해서 감동을 줘서 불법인연을 심어줘야 됩니다. 이것 보세요. 佛法에 種因緣이라 했잖아요. 모두다 불법에 인연을 심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 참 중요한 것인데, 어떤 신심의 문제인지 사람에 대한 어떤 소중함을 크게 생각을 안 해서 그런지, 우리 불교인들은 소홀히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요. 그래놓고는 무슨 장관이나 총리나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된다. 그러면 그만 그 때는 발끈하는 것이지요.
왜? 기독교인들만 그렇게 공직자로 추천하느냐고 그 때야 발끈하는 겁니다.
평소에는 사람 가르치려고 안 하고 인연 맺어주려고 하지 안 해놓고는, 어떤 문제가 터진 뒤에 그 때야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참 그것 잘못된 겁니다. 이번에도 총리가 골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불교계에서 아주 들고 일어나서 재가 신도들이 단체를 만들어서 못 되도록 운동을 벌이려고 지금 하고 있는데요. 제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증엄스님은 기독교인들의 집을 지어주고, 교회를 두 채나 지어줬습니다. 이것이 진짜 불법입니다.
그런 데에서 불만이 있으면 평소에 우리가 잘 해야지요. 이미 빚어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이것은 그야말로 생각이 짧은 것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이 제대로 인연을 심지 못한 것을 통탄을 해야지, 그 인연 심지 못한 것은 탓하지 않고, 이미 빚어진 결과를 가지고 시시비비하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것은 사실은 점잖은 불교인이 할 일은 아닙니다.
물론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요. 중생인 이상은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불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너무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량에 일 년에 다녀가는 사람들이, 큰 절이 됐든 작은 절이 됐든 포교당이 됐든 어디가 됐든 간에, 다녀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전부 불법 인연을 심도록 그렇게 해줘야 됩니다. 여기도 제가 별표를 해놨습니다.
能令見者無空過. 헛되게 지나지 않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皆於佛法에 種因緣이라. 불법에 인연을 심도록 해야 된다. 말입니다.
제목이 敎化의 願이잖아요. 그러면서
而於所作心無着(이어소작심무착)하니,
하는 바에 대해서, 짓는 바에 대해서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彼諸最勝所行道(피제최승소행도)로다.
그것은 저 모든 가장 수승한 이가 행한 바 도다. 그랬습니다. 가장 수승한 사람. 불법과 인연 맺게 해준 그 사람이 가장 수승한 사람입니다.
그 전에 일타스님 상좌, 성진이라고 하는 돌아가셨는데, 그 도반스님은 불법에 한참 신심이 있어서, 젊을 때 정말 열이 올라서 그렇게...
서울에서 부산까지 온다든지 장거리 기차 여행 같은 것 할 때는, 좋은 바늘을 많이 사서, 그 때만 해도 바늘하나가 귀할 때입니다. 지금부터 한 5ㆍ60년 전이니까 바늘하나가 귀할 때라고요. 가면서 기차 칸에서 바늘하나 씩 전부 선물을 해요. 바늘이 자기 집에서 쓰던 것 보다 특별히 좋거든요.
다 받더라고요. 제가 같이 여행을 했어요. 같이 서울을 올라갔는가?
그랬는데 한참 가다가 걸망에서 바늘을 한 무더기 꺼내더라고요. 가면서 다 바늘하나 씩 선물하는 겁니다. 바늘 보니까 너무 좋은 겁니다. 집에서 쓰던 바늘보다 더 좋으니까 다 받아요.
기독교인이고 어떤 비종교인이든 간에 다 받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인연 심으려고 그러는 것이지.” 이래요. 저는 따라다니긴 했지만, 사실 솔직하게 좀 창피했어요. 제가 물었어요.
“뭐 그런 일 하냐?” 하니까, “이 사람아, 이렇게 같은 차를 타고 같이 여행할 때, 이런 작은 인연이라도 인연을 심어 놔야지.” 이러더라고요.
제가 놀랐습니다. 오래전에 열반하셨지만, 그 기억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인연을 심으면 ‘아~ 스님이 나에게 바늘하나 선물했다.’ 그럼 불법에 대해서 일단 호의를 갖는 겁니다. 불교교리가 어떻고 부처님이 어떻고 그것을 따지기 이전에, 호감을 갖도록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가도 일단은 좋게 보고, 절에 갈 일이 있으면 가게 되고요.
초파일이라 하면 ‘아~ 절에 한번 가봐야지.’ 하는 그런 생각을 내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 구절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이것이 가장 수승한,
저 모든 가장 수승한 사람이 행하는 도다. 그랬습니다.
뭐 크게 하늘을 꿰고 바다를 움직이고 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수승한 사람이 아니라, 바늘하나로라도 인연을 심어주는 그 사람이 가장 수승한 사람이다. 초파일도 지난 지 며칠 안 됐지만, 우리는 정말 부처님과 인연을 심어줄 기회가 너무 많습니다. 아주 문화가 있고ㆍ역사가 있고ㆍ예술이 있고ㆍ온갖 인연 심어줄 꺼리가 좀 많습니까?
여기 이 법당에 등표 써놓은 것 한번 보십시오.
제가 그 전에도 한번 자랑했지만, 등표. 자기 이름을 저렇게 정성스럽게 전문가의 솜씨를 빌려서, 전문가도 아닙니다. 여기서 사경하는 어느 신도님의 솜씨인데요. 저것을 딱 보고 감동을 안 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절로 축원이 되는 것 같은 겁니다. 저렇게 정성들여서 이름한자 탁~ 써놓으면 그것으로 그냥 감동하는 겁니다. ‘아~ 그것 축원 되겠다.’ 싶은 것이지요.
굳이 “누구ㆍ누구 보체” 아니해줘도 저절로... ‘아~ 저렇게까지 정성을 쏟아서 저렇게 이름을 써서 걸어 줬구나!’
저는 이것은 무슨 등인가 몰랐는데 오늘 알았습니다.
이 등, 아세요? 모르지요? 아파트 등. 이것은 단독 등이고, 저것은 아파트 등입니다. ㅎㅎㅎ 아~ 그것 멋있잖아요. 스님들도 그렇게 하세요.
큰 등을 한 댓 개 도량에다 이렇게 달아놓고, 전부 거기다가 다 붙여요. 그 전에 언젠가 봉암사에선가 제가 그렇게 했더니, 단독 등에서 이름을 떼어서 거기다 갖다 붙이더라고요. 오히려 거기다 갖다 붙이는 겁니다. 왜냐?
대중하고 같이 있으니까 더 좋잖아요. 단독주택에 보다도 아파트, 고급아파트에 있으면 더 좋거든요. 다시 거기다 갖다 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저는 몰랐는데 오늘에야 배웠습니다. 그것이 아파트 등이래요.
(4) 菩提願
那由他劫常遇佛호대 終不一念生疲厭하야
其心歡喜轉更增하니 此不空見所行道로다
那由他劫常遇佛(나유타겁상우불)호대,
한량없는 세월을 나유타 겁이라고 하지요? 항상 부처님을 만나되,
終不一念生疲厭(종불일념생피염)하야,
부처님을 오랫동안 보았다고 해서 한 순간도 피곤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피곤해하지 않는다. 법당을 우리는, 비록 등상불이고 형식적인 그런 장소이긴 하지만, 사실은 법당을 잘 꾸며야 됩니다. 그렇다고 유치하게 막 꾸밀 것이 아니고, 정말 품위 있게, 거기 들어오면 저절로 마음이 정화되도록 그렇게 꾸며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법당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법당에 오래있고 싶고, 밑에 내려가서 식사하자 하더라도 아~ 이 법당이 더 좋다고, 차 대접하려면 법당으로 가져오라고, 이렇게 될 정도로 법당을 품위 있게 편안하게 그렇게 해야 됩니다.
那由他劫常遇佛호대 終不一念生疲厭이라.
한 순간도 피곤해하거나 싫증내지 않는다. 부처님을 만나는데 대한 이야긴데요.
其心歡喜轉更增(기심환희전갱증)하니,
그 마음이 환희로워서 더욱 더 신심이 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此不空見所行道(차불공견소행도)로다.
이것은 헛되게 보지 않는 사람, 함부로 보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다 뭔가 의미를 갖고 뜻을 갖고 거기에 어떤 신심이 나게 하는 그런 不空見.
헛되게 보지 않는 사람이 행한 바 도로다. 어디를 가도 그냥 무심히 보는 사람이 있고, 하나ㆍ하나 낱낱이 뜯어보고 감동하고 의미를 찾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대승 경전을 많이 공부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안목을 넓히는 겁니다. 그러한 안목을 넓히는 것이 됩니다.
(5) 成熟衆生願
盡於無量無邊劫토록 觀察一切衆生界호대
未曾見有一衆生하니 此堅固士所行道로다
成熟衆生願(성숙중생원)
盡於無量無邊劫(진어무량무변겁)토록, 무변 겁이 다하도록
觀察一切衆生界(관찰일체중생계)호대, 일체중생세계를 관찰하되,
未曾見有一衆生(미증견유일중생)하니,
한 중생도 중생이라고 일찍이 본 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뭐로 보느냐? 중생을 그냥 중생으로 보는 것은, 그것은 相見입니다.
공ㆍ성ㆍ상. 3종으로 배대를 하면 상종의 견해로 = 중생의 견해로 그냥 보는, 그것이 그냥 중생이고요.
우리불교에서는 무엇이든지 보는 견해가 세 가지 종류로 분류가 되는데요.
空觀 = 공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을 공한 것으로 보고, 부처님도 공하게 보는 것. 그것이 空觀입니다. 그 다음에 일체중생을 전부 中道觀.
또는 진제 관. 그것은 부처로 보는 겁니다. 중생을 부처로 보는 것.
여기는 그렇게 표현 되지는 않았지만, 未曾見有一衆生이라. 일찍이 한 중생도 있음을 보지 않는다. 부처로 본다. 이 말입니다. 또 금강경에는 그런 말 있지요. 無量無數無邊衆生을 제도하되 實無衆生得滅度者라 그랬지요.
실로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 왜냐? 본래부처니까요.
본래부처인데 누가 누구를 제도해요? 제도한 적이 없습니다.
이미 제도돼있는 완벽한 존재인 까닭에 그래서, 無有一衆生도 得滅度者라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 이미 멸도 돼있는 것이기 때문에 멸도한 사람이 없다. 금강경에 있는 구절이 그런 뜻이지요.
未曾見有一衆生하니
此堅固士의 所行道(차견고사소행도)로다.
견고한 선비 = 견고한 보살입니다. 선비 士자는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뜻이 견고한 보살이 행한 바 도로다. 그랬습니다. 중생을 중생으로 보지 않고 부처로 보는 그 뜻이 얼마나 견고합니까? 그 뜻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 사람이 행한 바 도다. 그랬습니다.
13. 第九 善法行
修習無邊福智藏하고 普作淸凉功德池하야
利益一切諸群生하니 彼第一人行此道로다
法界所有諸品類가 普遍虛空無數量이어든
了彼皆依言說住하니 ←64강 - 2
↓64강 - 3
此師子吼所行道로다
能於一一三昧中에 普入無數諸三昧하야
悉至法門幽奧處하니 此論月者行斯道로다
忍力勤修到彼岸호대 能忍最勝寂滅法하야
其心平等不動搖하니 此無邊智所行道로다
於一世界一坐處에 其身不動恒寂然호대
而於一切普現身하나니 彼無邊身行此道로다
無量無邊諸國土를 悉令共入一塵中하야
普得包容無障碍하니 彼無邊思行此道로다
善法行을 게송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修習無邊福智藏하고, 가없는 복과 지혜의 장을 수습하고,
普作淸凉功德池하야, 아주 시원한 = 청량한 공덕의 못을 널리 지어서
利益一切諸群生하니, 일체 모든 중생들을 이익케 하니
彼第一人行此道로다. 그것은 第一人이 行此道로다. 제일가는 사람이 이 도를 행했더라. 그랬습니다. 그렇지요. 무량무변한 복과 지혜를 닦고, 또 시원한 공덕의 못을 지어서 일체중생을 이익케 한다. 불교가 결국 이것 하자고하는 것이니까요. 利益一切諸群生이라. 불교가 이것을 하자고하는 것이니까 이것 하는 사람이 第一人입니다. 제일가는 사람입니다.
法界所有諸品類가, 법계에 있는 모든 品類들이,
普遍虛空無數量이어든, 살펴보면 인간을 위시해서 많고 많은 중생들.
금강경에서는 9류 중생 그러지요? 별의 별 중생들. 별의 별 생명체.
그런 것들이 무량무변하지요? 그런 것들이 뭐라고요?
了彼皆依言說住하니, 이것은 뭔가 하니, 전부가 言說에 의지해서 머물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입니다. 표현에 의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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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毛端에서 悉明見하니 此淨福者所行道로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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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令見者無空過하야 皆於佛法種因緣호대...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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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毛端에서 悉明見하니 淨福者...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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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於佛法에 種因緣...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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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令見者無空過. 헛되게 지나지 않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皆於佛法에 種因緣이라. 불법에 인연을 심도록 해야 된다.
此不空見所行道(헛되게 보지 않는 사람이 행한 바 도로다.)
어디를 가도 그냥 무심히 보는 사람이 있고, 하나ㆍ하나 낱낱이 뜯어보고 감동하고 의미를 찾고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이런 대승 경전을 많이 공부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안목을 넓히는 것이다.
·無量無數無邊衆生을 제도하되 實無衆生得滅度者라 未曾見有一衆生(중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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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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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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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毛端에서 悉明見하니 淨福者 한 터럭 끝에서 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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