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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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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계룡산(鷄龍山)(2) 갑사와 동학사
오대댁손자 추천 0 조회 38 07.11.21 12:0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2007년 11월 18일 일요일 아침

 

갑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코스는

갑사-금잔디고개-삼불봉-남매탑-동학사다.

 

 

 

사진 : 계룡산 산행도

 

갑사 단풍

 

“춘마곡추갑사 “라는 말과 계룡 8경 중 제 6경이 갑사 계곡 단풍일 정도로 갑사 단풍은 유명하다.

 

 

 

사진: 갑사 단풍.

이날 단풍철이 조금 지나긴 했다. 그러나 인간은 상상력이 있으니

추갑사-한창 때 갑사 단풍을 그려 보는데 문제가 없다.

다만 사진실력과 글 솜씨가 모자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일주문(一柱門)

 

 

단풍 철이 거의 지났고 일기예보에 영하 몇 도니 해도 사람은 여전히 많다.

 

 

갑사 사천왕

 

 

 

사진: 왼쪽 북방다문천왕(多聞天王), 오른 쪽 동방지국천왕(持國天王)

 

 

 

사진: 왼쪽 남방증장천왕(增長天王), 오른 쪽 서방광목천왕(廣目天王)

 

 

계룡갑사(鷄龍甲寺)

 

으뜸가는 절이라고 갑사(甲寺)다. 한국에서 으뜸갈 수는 없을 텐데 하고

의심했더니 옛 이름이 계룡갑사(鷄龍甲寺)다. 계룡산 으뜸은 말이 된다.

 

 

사진: 계룡갑사(鷄龍甲寺)

 

오기 전 찾은 인터넷에 추사의 글씨라고 하여 그런 줄 알고 버스에서

일행에게 자세히 보라고 설명까지 하였으나 현판 끝에 ‘절도사 홍재희 서

(節度使洪在羲書)’ 라고 쓰여있다.  세상에 누굴 믿는가? 스스로 확인해야지.

 

 

 

 

 

 

 

갑사 동종 

 

조선 시대 중과 절은 거의 ‘만만한 게 홍어 뭐’ 수준으로 괴로웠다.

나라에 특산물을 바치고, 부역에 나가고 (남한산성도 거의 중들이 쌓았다)

또 승군도 조직해야 했다. 또 지방 토호는 절에 가서 술상 내라고

호통 치다가 마음에 안 들면 볼기도 때렸다.

 

조선 중기 여진족 니탕개(尼蕩介)가 국경을 어지럽혀 군사를 일으키는데

하삼도(下三道) 절의 큰 종을 모두 녹여 병기를 만들 때 갑사 종도 없어졌다.

그 뒤 다시 만들었으나 일제 말기에 공출되어 또 다시 사라 질 뻔 하다가

해방이 되는 바람에 인천 부두에서 겨우 되찾았다고 한다.

 

 

 

사진 : 갑사 동종. 지장보살이 구름 위에 있다. 1584년에 다시 주조했으니

조선 중기 양식이다. 지금은 보관만 하여 문 틈으로 겨우 찍었다.

(범종루에 걸린 것은 새 종인 모양이다)

 

 

갑사 표충원 :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활약한 서산, 사명, 영규대사 영정을 모셨다.

 

 

 

사진: 표충원

 

 

 

사진: 서산대사 영정

 

월인석보 판목

 

학교 다닐 때 월인천강지곡이니 석보상절이니 하는 말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둘을 합친 것이 월인석보 인데 그 판목이 갑사에 있으니 보물 제582호다.

 

 

사진: 월인석보 판목 (이건 국가보물이니 인터넷에서 퍼 와도 괜찮겠지?)

15세기 글자와 말을 그대로 담고 있어 국어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원래 25권 57매이나 현재 21권 46매가 남아 있고 유일한 원판이라고 한다.

 

 

사진:갑사 보장각. 저기서 월인석보 판목도 전시하는 듯 한데 이 날 문이 닫혔다.

 

이 밖에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 갑사 부도(보물 제257호)

약사여래상(고려 중엽), 전설이 깃든 공우탑(功牛塔) 등이 있으나

등산 일행을 좇아 가느라 보지 못하였다. 공우탑 전설은 아래에 적는다.

 

 

갑사 공우탑(甲寺 功牛塔)

 

임란 때 불탄 갑사를 중건 키 위해 애쓰던 어느 날, 스님 꿈에

소가 나타나 “내가 다 지어 줄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한다.

꿈에서 깬 스님이 밖에 나가니 과연 소 한 마리가 서 있다.

이로부터 이 소가 온갖 자재를 끌고 지고 옮겨 갑사 중건이 완성된다.

그러나 힘을 다 쏟은 소는 냇물을 건너다 지쳐 죽는다.

이에 스님들이 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공우탑을 세우고

2층 옥신에 "우탑(牛塔)",  3층 옥신에 "공(功)"이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용문폭포

 

 

얼마 전 설악산 토왕성 폭포 옆 험한 암벽을 멋모르고 오르다가

얼마나 줄똥을 싸며 고생했는지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하는 사람을 보았다. 토왕성 보다가 용문폭포 보면 ‘애개’ 할 것이다.

그러나 토왕성 아니라 이과수 폭포라도 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으니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문필봉(文筆峰)

 

다음은 삼불봉에서 본 문필봉이다.

(계룡산 연봉과 남에서 오는 금남정맥 사진은 먼저 글에 올렸다.)

 

 

 

사진:맨 오른쪽 원경이 연천봉, 그 왼쪽 나란한 두 봉우리가 문필봉,

다시 그 왼 쪽이 관음봉이다. 저렇게 봉우리가 붓 같이 뾰족하게 생기면

대개 문필봉이라고 한다. 필자 고향 근처에 삼남(三南)의 삼대 길지(吉地)에

박사와 교수가 수 백 명 나왔다고 자랑하는 산골 마을이 있다.

그게 다 문필봉 덕이란다. 필자도 가 보았지만 선비까지는 좋으나

저런 봉우리가 마을 앞에 높이 있으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남매탑(男妹塔)-오누이탑

 

삼불봉에서 내려와 동학사 쪽으로 얼마 내려 가면 석탑 두개가

나란히 있으니 남매탑(男妹塔) 또는 오누이탑 이라고 한다,

 

 

사진 :오라비 쪽이 7층탑 보물 1285호, 누이는 5층으로 보물 1284호다.

옛 청량사 터에 있다고 하여 청량사지쌍탑(淸凉寺地雙塔) 이라고도 한다.

 

 

남매탑 전설

 

신라 때 한 스님이 계룡산에서 수도 하던 중 호랑이가 울부짖으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입을 크게 벌린다. 호랑이 입 속을 들여다 보니 큰 가시가 목구멍에 박혀 있어

이를 뽑아 준다. 사라진 호랑이는 며칠 뒤 아리따운(이럴 때는 꼭 아름답다)

처녀를 물고 와 스님 앞에 두고 간다. 호랑이에게 물려 오는 통에 정신을 잃었던

처녀는 스님의 보살핌으로 정신을 차린다. 처녀는 상주 사람이었다.

 

추운 겨울 눈이 많이 쌓여 처녀는 산에서 내려 오지 못하고 스님과 토굴에서

함께 겨울을 난다. 봄이 되어 스님이 처녀를 집으로 보냈으나 처녀 부모는

다른 곳으로 시집 갈수 없고 인연도 그러니 둘이 부부가 되라고 한다.

그러나 스님이 남녀 인연 맺는 파계를 할 수 없어 처녀와 남매가 된다.

이후 두 남매는 비구와 비구니로 불도에 힘쓰다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든다.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려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니 '남매탑'이다.

 

전설은 이렇고 양식으로 보면 백제의 영향을 받은 고려 석탑이라고 한다.

 

 

 

거북이

 

남매탑 주위에 거북이 돌 조각이 많은데 앉아서 점심 먹기 딱 좋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 자리 잡기 힘들다.

 

 

 

동학사(東鶴寺)

 

 

 

사진 : 전경

이 절은 비구니-여승들의 절이다. 왜 그런지는 조사하지 못했다.

 

동학사 이름의 유래 :

 

1) 절 동쪽에 학 모양 바위가 있어서,

2)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인 정몽주를 모셔서.

3)동쪽에서 진인(眞人)이 나오고 푸른 학(鶴)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형국이라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

 

푸른 학도, 학 모양 바위도 보지 못했으나 동학사 앞 삼은각에 정몽주는 모셨다.

그런데 동방이학은 학(鶴)이 아니라 학(學)이 아닌가 ? 또  절이 왜 성리학자를 ?

 

 

동학사 대웅전 문창살 

 

 

 

 

삼은각(三隱閣), 동계사(東鷄祀), 숙모전(肅慕殿)

 

동학사와 담장을 같이 하여 삼은각(三隱閣), 동계사(東鷄祀),  숙모전(肅慕殿)이 있다.

 

 

삼은각은 고려 말 삼은(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모신 사당이다.

(고려 말 삼은에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어야 한다고도 한다.)

 

동계사(東鷄祀)

절 사(寺)가 아니라 사당이다.

 

박제상은 학교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신라 눌지왕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을 빼돌리고 남았다가 성난 왜왕에게 화형 당한 인물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왜 여기 모셨을까?

 

 

박제상 옆 위패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이다. 고려 때 박제상 위패를

처음 여기 모신 인물이 류차달 이고 나중 합사했다고 한다.

 

기왕이면 부인-치술령 산신도 모시지 않고서.

박제상 부인은 기다리다 지쳐 망부석으로 변하고 또 치술령 산신이 된다.

 

 

 

사진: 동계사에서 본 계룡산 연봉

 

숙모전(肅慕殿)

삼은각, 동계사 마당 건너편에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쌓았다.

그 후 계유정란에 희생된 사람들 280여명의 초혼제를 지내고 모셨다.

 

 

동학사 일주문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사진: 동학사 주차장에서 본 계룡산 봉우리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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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1.21 13:34

    첫댓글 계룡산 동학사 자세한설명과 직접 가서 보는것보다 더욱 상세하게 볼수있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미리보고 구경을 한다면 더욱더 도움이될것이기에 늘 감사드립니다,퍼가도될지요?멋진산행 부럽습니다,즐즐즐~~

  • 작성자 07.11.21 16:41

    아 얼마든지 퍼 가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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