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명이 극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우리가 안고 있는 의문과 문제를 기독교에서 더 이상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확실한 불교를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 현지인들에게 폭 넓은 포교활동을 시작 하여야 합니다.
반가운 봄비처럼, 언제나 만나뵈어도 반가운 사람들. 이번에 소개 할 분은 워싱턴주 벤쿠버에 살고 있는 박보원 거사님 내외분이다. 박보원 거사님 부부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 시의 보광사에서부터 동암사까지 이지역에 있는 한국사찰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고, 현재는 동암사에 다니고 있다.
오랜 세월 오레곤주 포틀랜드시와 워싱턴주 벤쿠버시에 거주한 까닭으로 이곳의 1970년도 초반 이민 시대부터 현재까지 40여년 세월의 흔적을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있다.
기자 박보원 거사님 내외 분은 언제 미국에 이민을 왔습니까?
박보원 거사 1968년 9월 27일 가발 수출관계 시장 조사차 서울발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 미국과 첫 인연이 되었습니다. 시애틀 포틀랜드, 그리고 L.A.를 거쳐 인도를 비롯하여 월남, 홍콩 등으로 몇 년간 떠돌이 하다 결국 1972년 9월 7일 이곳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이민을 오셨을 당시 한국 사찰을 찾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절을 가시게 되었습니까?
박보원 거사 1968년 처음 왔을 때는 한국 절은 물론 한인 교회도 없었고, 한국 식품점도 없이 일본계 동양 식품점 AnZen을 많이 이용하였던 생각이 납니다. 당시 포틀랜드에 거주 하는 한국인수는 약 500명으로 추산 되었습니다.
기자 당시에 많은 이민자들에게 불교는 가깝지만 쉽지 않은 종교였을 것 같은데요, 어떤 분들이 불교를 믿으셨나요?
박보원 거사 72년에 다시 이곳에 와보니 한인수가 많이 증가되어 한인 교회도 3곳 있었고, 한국 식품점도 왕성하게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인 불교사찰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기자 당시 한인 사찰이 운영 및 유지 되었습니까?
박보원 거사 그 후 1981년 10월 2일 혜수 스님과 몇 명 안되는 신도들이 힘을 합쳐 이곳 포틀랜드에 최초의 한국사찰 성불사를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의 역사 및 의식 그리고 한국 문화를 전파 내지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건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보광사의 원조입니다. 혜수스님, 정업스님, 정현스님, 종안스님, 영안스님, 호묵스님, 자명스님, 각묵스님, 법등스님, 혜원스님, 자명스님 그리고 일묵스님 등 많은 스님이 보광사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1995년경에 종안스님 재직 시 뜻있는 불자님들과 힘을 합하여 지금의 보광사 건물을 시로부터 불하 받아 이주 하였습니다. 법당, 회의실, 휴계실, 도서실, 식당 등등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6천 스퀘어 피트의 넓이의 큰 건물 입니다. 재정상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뚜렷한 개성과 깊은 불심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역대 스님들과 모든 불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1996년 보광사 발전의 한 축을 담당 하였던 종안 스님이 이 지역 불교 발전 폭을 넓히는 차원에서 지금의 동암사를 창건 하게 됩니다. 비록 규모면에서는 보광사 보다는 작지만 아담한 법당 그리고 풍부한 불교서적 및 영상 등 각종 자료를 비치하여 관심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열람할 수 있고 무엇보다 불심 하나로 뭉친 신도님들은 동암사의 큰 자산입니다.
기자 박거사님은 워싱턴주 벤쿠버의 제1대 한인 회장을 역임하였는데 그 당시 한인들의 인구 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박보원 거사 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우리 워싱턴주 벤쿠버 한인 수는 약 300명에 불과 하였지만, 일치 단결하여 한미 친선의 밤을 주최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한 추억이 있습니다. 당시를 회상해 보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고, 모두 하나가 되어 음식을 준비하고, 한국의 자랑 태권도 시범 및 여러 행사를 도와주셨던 분들이 생각 납니다.
기자 그 때는 지금처럼 타종교인 보다 불교가 더 우세 했을 것 같은데, 어떠했는지요?
박보원 거사 그때는 이미 포틀랜에 한인 교회가 7개로 증가 하였으나, 윗 질문에서 말씀 드렸듯이 성불사는 1981년도에 생겼기에, 제가 한인회장 했을 때에는 유감스럽게 절은 아직 없었습니다.
기자 당시에는 요즘처럼 인터넷을 이용하여 많은 정보교류가 용이한 시대가 아니였을텐데, 어떤 방식으로 불교를 포교하며 공부를 하였는지는 궁금합니다.
박보원 거사 1981년 이지역 최초의 불교사찰 성불사 창건 이후 고암스님, 숭산스님, 월하스님 그리고 미국인 현각스님, 활성스님등 큰 스님들이 다녀가서, 불교 포교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기자 요즘 부인 보현행 보살님은 언제부터 사경을 하였으며, 사경을 하면서 변화되어진 삶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박보원 거사 2013년 6월 부터 지금까지 법화경을 사경하고 있습니다. 사경을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부처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자 미국에서의 한국사찰이 어렵게 운영 되어지고 있습니다. 스님을 모셔오기도 쉽지 않을 뿐 더러, 불교인의 수가 열세하여 한국 불교가 번성하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이민오셔서 지금까지 한국사찰에 다니시고 있는 거사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점이 개선 되었으면 하는지 조심스레 여쭤봅니다.
박보원 거사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우리가 안고 있는 의문과 문제를 기독교에서 더 이상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확실한 불교를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 현지인들에게 폭 넓은 포교활동을 시작 하여야 합니다.
기자 박보원 거사님께서는 불교서적을 많이 읽고있는데, 미주 현대 불교 구독자에게 추천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다면 부탁 드립니다.
박보원 거사 요즘 많은 서적들이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을 이해하고 최소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심껏 인터뷰에 응해 주시는 박보원 거사님 내외 분을 뵈며, '살아있는 역사' 라는 표현이 몸소 느껴지는 귀중한 시간이였다. 40년이 넘는 길다면 긴 세월속에서 어떻게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보광사와 동암사가 생겼는지 알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사님 내외분의 불심이 미주현대불교 독자 여러분께 전해 지길 바라며, 박보원 거사님 내외분께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