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고마워요
남 현 숙
연일 찜통 같은 무더위에 세상 모두가 녹아 흘러내릴 것만 같다. 아스팔트가 끓고 있는 듯 일렁이고, 햇볕의 열기는 밖은 물론, 집 안으로도 스며들어 후끈거린다. 펄펄 끓는 쇳물 같은 바람은 열기를 식히기는커녕 더 숨 막히게 할 뿐이다. 이런 날은 문명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렇게라도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오빠가 연락도 없이 택배를 보냈다. 택배 상자 속에는 싱그러운 초록빛 오이들이 줄지어 들어있다. 오빠는 농사지은 것들을 종종 나에게 보내곤 한다. 오이, 옥수수, 쌀 등 오빠의 정이 가득 담긴 농산물들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보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무더운 이 여름, 저 오이에 얼마나 많은 땀과 정성이 스며들어 있는 걸까. 시원한 곳에 있는 나는 땡볕에서 일하는 오빠의 모습이 떠올라 고마움과 미안함에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오빠가 보낸 오이를 하나하나 꺼내 냉장고에 넣으며 내 기억은 어린 시절로 달려간다.
나는 1남 3녀 중 늦둥이로 태어나 바로 위 오빠와 띠동갑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오빠는 군대에 갔다. 멋진 공군복을 입은 오빠는 외출인지 휴가인지 모르겠지만 자주 나왔던 것 같다. 그 시절 아버지는 오빠가 너무 자주 집에 온다고 했지만, 나는 오빠가 오는 것이 좋았다. 올 때마다 군대에서 주는 건빵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건빵 속 별미였던 별사탕을 찾아 먹던 달콤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오빠는 집에 오지 않는 달엔 군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과자를 상자에 넣어 소포로 보내주었다. 오빠가 보낸 소포가 올 때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기뻤다. 소포를 뜯을 때 기대되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구멍가게도 없던 시골에서 과자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는 그 어떤 보물 상자보다 값진 것이었다. 건빵과 초코파이는 꼭 들어있었던 것 같다. 동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렇게 나이 차이 크게 나는 오빠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군대 가서 과자를 보내주는 오빠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오빠는 그 귀한 것들을 직접 먹지 않고 동생에게 보내준 것이다. 나는 그런 오빠 덕분에 친구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며 으쓱해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첩첩산중이라 학원도 없고 마땅히 놀 곳도 없었다. 나는 빈 상자에 노란 고무줄을 걸어 기타처럼 튕기는 놀이를 즐겨 했다.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기타를 치고 싶은 마음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음이 제대로 맞을 리 없지만 마음대로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는 내가 중학생이었고, 오빠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오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기타를 사서 가지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 예쁜 분홍 기타였다. 꿈만 같았다. 고무줄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청아한 선율이 오빠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마음에 스며들었다. 칠 줄도 모르는 기타를 손가락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튕겼다.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행복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에 풀이 죽어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 들떠 있어야 하는 마음은 돌을 매단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내게 오빠는 새로 산 자동카메라를 주었다. 오빠가 사준 카메라로 인해 내 마음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신이 났다. 그 시절 카메라가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친구들 사진을 찍어 주었다. 오빠가 사준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로 수학여행 추억을 켜켜이 쌓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소풍을 가거나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행복했다.
환갑이 지난 오빠는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계절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오고 나이가 들어가도 오빠의 우애와 부지런함은 늙지 않는다. 지구를 녹일 것 같은 무더위에 장마철 내린 비보다 더 많은 땀을 쏟으며, 주렁주렁 열린 자식 같은 오이를 오늘도 수확한다.
오빠가 보내준 싱싱한 오이를 어슷어슷 썰어 새콤달콤 오이무침을 만든다. 하나 집어 입안에 넣으면 아삭아삭 초록빛 싱그러움이 입안 가득 퍼진다. 그 상큼함을 입안 가득, 가슴 가득 채우며 되뇌어 본다.
‘오빠,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