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3편 강해 / 이레교회 새벽기도회 20170118 水曜日 정인준 목사]
사도신경 찬송가 2(6)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께 영원무궁하기까지…’
통성 기도(3분) 말씀 봉독(시편 113:1-9), 설교(15분),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시편 113편에서 시작하여 118편까지의 여섯 편의 시를 ‘할렐’(찬양하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노래들이 한결같이 ‘할렐루야’의 분위기를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날도 이 노래들을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큰 절기 때에 부르곤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26절에,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실 때에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라고 한 장면의 “찬미”가 바로 이 ‘할렐’이었을 것입니다.
‘할렐’ 시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찬양 시로 꼽히는 것이 113편입니다.
◈ 1절 말씀에서 시인은 주의 종들에게 찬양하라고 초청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여호와의 종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과 똑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시편 135편 1절에 보면,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라고 했는데,
이어지는 19-20절에서 그 ‘여호와의 종들’을 부르면서,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라고 말씀한 것을 봅니다.
예배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의 종들’인 겁니다.
◈ 1절 하반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라고 권면한 시인은,
2절과 3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도록 구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라’고 하지 않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름 속에는 주님의 성품과 그 사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기셔서, 십계명의 서론인 출애굽기 20장 2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자기소개를 하셨습니다.
언약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기 20장 7절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이름을 존중히 여길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2절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라고 권합니다.
여기 “찬송할지로다”라는 동사는 “축복하라”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언제 찬송하고 축복할 것입니까?
“이제부터 영원까지”입니다. 끊임없이!
어디서 찬송하고 축복할 것입니까?
3절에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더 나아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이름을 찬양하고 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 4-6절 말씀은 ‘찬양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절 상반절의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모든 나라들과 싸워 이기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5-47절에서 다윗이 골리앗 앞에 가지고 나갔던 그 이름의 능력을 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하나님은 시편 136편 2-3절 말씀처럼,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가 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절에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라 했습니다.
쉬운성경에서는 “몸을 굽혀 하늘과 땅을 내려다보시는”이라 번역했습니다.
높은 위치에서는 낮은 자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7-8절에 보면, 우리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추셨는데,
왜 우리는 자꾸 높아지려고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셨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주님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 마지막 9절 말씀에서 우리는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를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