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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나는 깨어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등대빛
〈1〉 글을 시작하며 왜 달마인가?
데스크승인 2014.01.21 12:46:43 | 목종스님 | 논설위원 부산 대광명사 주지 |
禪관련 서적 수행처 범람
유사수행법 혹세무민 우려
최고지침서 공유하소서…
왜 달마인가? 달과 화성을 탐사하고 태양계 너머 우주를 관측하고 우주 만물의 근원인 신의 입자라고 불리우는 힉스를 증명해내는 21세기 과학문명시대에... 우리 인간은 존재이후로 불편함과 고통에서 벗어나 더 나은 행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불편을 안락으로 바꾸기 위해 물질과학문명을 발전시켜왔고 불행과 불만을 행복과 만족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 학문, 제도 등을 연구, 적용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기술문명의 눈부신 성장을 가져왔고 인간들은 좀 더 안전하고 좀 더 편리한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갖추게 되었다. 더불어 정치의 꽃인 민주주의와 다양한 제도, 수많은 법률 등을 확립시켜왔다. 역사 이래 가장 완벽한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생로병사,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육체와 영혼, 불확실한 미래, 나 자신 존재의 근원,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등 아직 명확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답을 위해 신에게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의식으로, 의식에서 마음으로 인간들의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앞서가는 지혜있는 사람들은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신의 구속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 자신의 근원을 찾기 위해 마음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요 그 핵심이 선수행임을 알게 되었다. 선에 관한 서적이 범람하고 선수행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선과 명상이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수행법이 행해지고 각자 자신들의 수행법이 최고의 수행법이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전통을 알 수 없는, 검증되지 않은 유사 선수행법들이 마치 부처님의 비밀한 수행법인양 혹세무민하고 있다.
이에 불자들은 물론 선수행에 관심있는 많은 인연자들이 갈등하고 방황하고 번뇌하고 있다.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덜어 길을 일러주고자 하는 망상에 선의 최고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달마어록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배움도 일천하고 근기 또한 둔재여서 제불보살님들과 역대조사, 제방의 선지식들께 많은 누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어리석음을 용기 삼아 알량한 동정심으로 나가고자 하니 널리 자비심을 구하며 참회 드린다.
교재는 오래전 월탄 큰스님이 번역한 달마선관을 참고하여 한문원문을 제하고 번역문을 중심으로 써 내려갈 예정이다. 순서는 달마선관의 순서에 따라 1. 달마혈맥론 2. 달마관심론 3. 달마 이입사행론의 순서로 나갈 예정이다.
본문에 앞서 달마대사에 대해 알아보자.
법명 보리달마, 석가모니 부처님께 법을 부촉받은 부법 1대 조사 마하가섭존자로부터 시작한 서천 법맥 제28대 조사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이다. 남인도 향지국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서천 제27조 반야다라에게 출가하여 법을 이었다. 40년 동안 스승 반야다라를 섬기다가 스승의 입멸 후 향지국으로 돌아와 당시 성행하던 소승선관의 6종을 굴복시키고 조카인 이견왕을 교화시켰다. 그 후 소승의 유언에 따라 서기 520년 9월에 배를 타고 중국 광주에 이른다. 광주 자사 소앙의 소개로 금릉에 가서 양의 무제를 만났으나 인연이 없음을 알고 숭산 소림사로 가서 9년 동안 면벽 좌선을 하였다.
후에 신광이 찾아와 팔을 끊어 위법구망의 신심을 보이자 받아들여 사제연을 맺으니 이가 중국 제2조 혜가대사이다. 이로써 중국 선종의 법맥이 이어지니 초조 달마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혜가에게 깊고 비밀한 종지와 부처님으로부터 이어지는 법의 상징인 가사와 발우를 전하고 우문의 천성사에서 서기 528년 10월에 입적하였다.
[불교신문2977호/2014년1월15일자]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219
〈2〉달마혈맥론
사물은 과거에 대한 정보
내 몸 역시 감각을 통한 대상
촉각이 다른 대상들과 차별화
왜 환영〈幻影〉인지 모르고 실재한다 여길까?
1. 마음 밖에 따로 불성이 없다.
“삼계가 혼돈하여 일어났으나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해설 :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이며 생사윤회의 중생계를 말한다. 욕계란 물질적 감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계이다. 욕계육천을 포함해서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이다. 색계는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하는 세계로 색계 십팔천이 이에 속한다.
무색계는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무색계 사천이 있다. 중생계와 그 안에 거주하는 유정들의 종류가 무량무변 무수하고 그들의 성주괴공, 생주이멸이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지만 근원은 마음이다.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마음(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들이다. 산하, 대지, 중생, 부처, 생사열반….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견, 문, 각, 지)의 모든 것들은 참 나에 비쳐진 그림자들이다.
중생들의 감각에는 실재하는데 왜 마음의 환영일까?
첫 번째는 우리는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을 통해 육진(경) (색, 성, 향, 미, 촉, 법)을 인지하고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인지하는 과정은 눈이 색을 볼 때 일어나는 시각정보가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하고 뇌에서 다시 의식으로 전달된다. 전달된 정보는 과거에 경험에 의해 저장된 정보와 비교분석하여 우리는 그때 비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귀와 소리, 코와 향기, 혀와 맛, 몸과 촉감 등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사물 → 감각기관 → 정보전달 → 마음 단계를 거치는데 성찰해보면 마음(참 나)이라는 거울에 정보(식)가 도착하면(비추어지면)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끼는 것은 밖의 사물이 아니고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된 정보를 보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실제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 이외의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시공간의 개념으로 살펴보자.
과거는 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내 마음의 기억일 뿐이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마음의 상상이다. 현재는 존재하는가? 1초전도 과거이다. 0.1초전, 0.0001초전도 과거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인지하는 순간 이미 과거인 것이다. 가장 확실하고 빠른 감각이 바로 눈이다. 그러나 눈이 사물을 보고 시각정보를 내 마음에 전달하고 분석해서 아는 순간 이미 그 정보는 과거의 정보이다. 현존하지 않는 사물의 흔적을 볼 뿐이다. 하물며 이, 비, 설, 신, 의 감각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자, 이제 우리들이 현재 존재한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보자. 지금 눈 앞에 있는 것 외의 것들은 최소한 10분 전, 1시간전, 1년전, 10년 전 과거의 정보들이다. 심지어 문자나 언어를 통해 얻은 정보에 불과한 것도 있다. 실존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정보를 실존한다고 여기고 그 바탕 위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 삶을 판단하고 선택한다.
그럼 모든 사물은 과거에 대한 정보이고 나 자신의 몸은 어떨까? 내 몸 역시 감각을 통해 내 몸이라고 느끼는 대상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특히 촉각이 다른 대상들과 차별화된다. 이 역시도 느끼고 아는 순간 이미 과거의 환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환영인지 모르고 실재한다고 여길까? 바로 집착 때문이다. 물질, 존재, 나, 대상, 감각, 현재, 미래, 과거, 시· 공간.. 이 모두가 집착에 의한 환영일 뿐이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삼계가 혼돈하여 일어났으나 하나의 마음으로 들어간다.”
[불교신문2979호/2014년1월22일자]
〈3〉참 나는 모든 것 나타내는 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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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참나 또한 나에 비친 환영
전하거나 받을 수 없어
참나 깨닫는 방법 전할 뿐
본문
“앞 서 깨달으신 부처님과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 다음으로 마음을 전할 뿐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는니라.”
해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마음(참 나)의 거울에 비친 정보이다.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어떤 정보이든 참 나의 거울에 비쳐지는 순간 생각이 떠오르고 알게 되고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아무리 정보가 많지만 클릭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바로 참 나(자성, 마음)임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부처라고 한다.
부처님이 전한 진리란 바로 그 참 나를 말한다. 참 나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표현은 또 다른 대상이며 정보이다. 그 정보를 비추는 주체인 자성(참 나)는 아닌 것이다.
마음이니 자성이니 참 나이니 부처니 이 모두가 또 다른 망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참 나를 깨달은 선지식은 온 우주가 참 나이다. 티끌 하나, 풀포기 하나,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온갖 언어와 소리, 몸짓 모두가 참 나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모든 모습이 중생의 눈에는 또 다른 환영의 그림자들이다.
문자와 언어는 실제를 전달하는 상징기호, 즉 정보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란 말이 있다.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과 행위가 사라진 곳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마음은 참 나에 비춰진 정보와 참 나가 한 덩어리로 여겨 나와 동일시했을 때의 마음을 말한다. 행위는 마음의 강한 표현이다.
본문을 보자. “앞 서 깨달으신 부처님과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 문자에 의존하지 않느니라.”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문자뿐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참 나는 나타낼 수 없다. 모든 것을 나타내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참 나만이 참 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앞서 깨달으신 부처님이니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니 하는 모든 것도 또한 참 나에 비친 환영일 뿐이다. 또한 참 나는 전해주거나 받을 수 없다. 전하거나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참 나(자성, 불성)가 아닌 참 나에 비춰진 망상(정보, 업식)일 뿐이다. 다만 언어라는 방편으로 참 나를 깨닫는 방법을 전할 뿐이다. 지도요, 네비게이션이다.
역대 전등조사들께서 전한 것은 깨달음이나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모든 것이 군더더기요 알음알이다.
그러나 처음 가는 낯선 길에는 좀 더 상세한 지도나 네비게이션이 필요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나침반이나 이정표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는 채찍의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리석고 고집 센 당나귀는 채찍과 당근과 고삐가 필요한 법이다.
본문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문자를 의지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달마스님이 대답하셨다. “그대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 그대의 마음이며 내가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라.”
해설
언어를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을 표현 전달하며 또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질문하고 답하는 이것이 마음의 표현이며 전달이며 마음이다.
마음이 없다면 무엇이 질문하고 답하고 이해하겠는가. 삼라만상이 참 나에 비친 허상(업식)이지만 그 허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또한 참 나이다.
중생들은 허상을 실체로 여겨 집착하지만 부처님 참 나에 비친 그림자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
중생은 행하는 모든 것이 번뇌 망상(업식)의 환영이지만 깨달은 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산하대지가 모두 참 나의 실상이다.
[불교신문2981호/2014년1월29일자]㉿
〈4〉마음 밖에서 부처 영원히 얻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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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① 마음이 불성 |
법 그대로가 마음이니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
모두가 그대의 근본 부처
본문 : “만일 나에게 마음이 없다면 무엇을 말미암아서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을 이해하며 만일 그대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을 인유하여 나에게 질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질문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니라.”
해설 :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일거수 일투족(一擧手 一投足), 눈 한 번 깜빡이고 숨 한 번 쉬는 것 모두가 근원은 마음이다. 의식적으로 행하는 신, 구, 의 삼업은 당연히 근원이 마음이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지하고 아는 그 자체가 마음(참 나)의 모습이다. 모두가 참 나에 비친 환영이기 때문이다. 거울이 없으면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 또한 없다.
본문 : “끝없는 옛 부터 온갖 동작을 하는 모든 시각과 모든 장소가 그대의 근본 마음이며 모두가 그대의 근본 부처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뜻이다.”
해설 : 과거, 현재, 미래, 사방, 사유 상하 이 모두가 참 나에 비친 환영(업식, 정보)이다. 끝없는 옛 부터 온갖 동작, 시간, 공간, 그대이니 부처니 모두가 환영이다. 환영의 근본은 참 나(불성)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나와 글 내용, 더 나아가 이 순간 모든 상황이 환영이요 꿈 속이다. 알고 보고 느끼는 주체인 참 나(자성)만이 진실이다. 속지마라. 꿈 속의 일이다. 고로 마음(참 나, 자성)이 곧 부처이다.
본문 :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를 찾을 수 없나니 이 마음을 떠나서 보리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성은 진실해서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법 그대로가 마음이니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기의 마음이 큰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는 열반이다. 만일, 마음 밖에서 부처와 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해설 : 부처란 깨달은 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 나(마음, 자성)에 비친 업식(정보, 기억)의 환영임을 깨닫은 자이다. 보리란 부처가 깨달은 내용(지혜)을 말하며 아뇩다라 샴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 이라고 한다. 가장 높고 바르고 평등한 올바른 깨달음, 즉 인간 뿐 아니라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중생들 누구라도 배워서 실천하면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참 나(자성)을 깨닫는 것이다. 열반이란 범어 니르바나의 음역이며 욕망과 집착이 모두 소진된 상태를 의미한다. 참 나(자성)을 깨우치고 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 나에 비친 업식의 그림자임을 알게되어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집착의 근원인 나와 내 몸이 환영임을 알고 필요하다고 여긴 모든 대상들이 또한 허상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참 나를 떠나서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영사기 불빛이 필름을 비추면 스크린에 영화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영사기 빛은 참 나의 비춤이요 필름은 우리들의 업식, 스크린에 나타난 화면은 바로 지금 우리들이 보는 세상과 같다. 부처도 보리도 열반도 나도 너도 내가 아는 모든 대상도 화면 속의 모습이다. 고로 참 나가 곧 부처요 보리요 열반인 것이다.
본문 : “부처와 보리는 모두 어디에 있는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을 수 있겠는가? 허공은 단지 이름만 있을 뿐 형상이나 모습은 없다. 따라서 허공은 잡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
해설 : 부처와 보리, 모두 영화 화면이다. 꿈속의 모습이다. 허공이 있는 듯 하지만 실체가 없는 것처럼 모두가 참 나에 비친 그림자들이다. 부처란 참 나를 깨달음이요 보리란 참 나를 깨닫고 나서 참 나에 비춰진 삼라만상의 모습이요 해탈이란 참 나의 깨달음을 통해 비춰진 모습의 실상을 알고 집착하지 않음이다. 이를 또한 열반이라고 한다. 모든 것의 근원인 참 나가 바로 부처요 보리이며 해탈이요 열반인 것이다. 참 나를 떠나서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불교신문2984호/2014년2월12일자]
〈5〉수행이란 모두의 근원인 참나 찾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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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① 마음이 불성 |
중생은 꿈속에서 실재함 느껴
나 이외 대상서 부처 찾는다
부처, 마음이 지은 업식일 뿐
본문 : “부처란 자기 마음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거늘 어찌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겠는가. 먼저 깨달으신 부처님과 그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 단지 마음 하나만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음을 떠나서 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마음이 없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해설: 어리석은 중생들은 부처님은 원력과 공덕으로 무한히 장엄되고 영원한 행복이 가득한 불국토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곳에 태어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선행(공덕)을 짓는다. 경전 상에는 무수한 불, 보살님들과 불국정토들이 설해져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들이다. 중생들이 집착하고 선망하는 대상들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어 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하려는 부처님의 방편이다. 원력과 공덕의 모습이다. 부처님, 불국정토, 생각하는 나, 지금, 여기, 모두가 참나(마음)의 인식작용(비춤)이다. 방편에 따라 실천해 가다보면 참나를 깨닫게 되고 모두가 환영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꿈을 꾸는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꿈속에서 실재함을 느낀다.
본문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면 어떻게 부처라는 소견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번갈아가며 서로 녹여서 본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무정물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설: 마음(참나)에는 안과 밖이 없다. 중생들이 나에 집착해서 주와 객을 분별하고 주인 내가 가장 집착하는 이 육신을 나와 동일시하게 되었으며 내 마음은 이 몸 안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식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라는 것, 내 몸 내 몸, 안, 밖, 내 마음 모두가 내 마음(참나)에 비친 내 생각(의식) 즉 환영(정보)들이다. 허상인 나와 내 몸에 집착해서 나와 대상의 환영이 생겨나고 육근을 통해 환영의 대상을 분별하여 더욱 강한 집착을 하게 되어 고착화(고정관념)되는 것이다. 그 결과 마음 밖에 대상의 부처가 있다는 어리석음으로 그와 닮은 불상을 조성하고 불상이 부처라고 여기는 것이다.
본문 : 만일 믿지 아니하면 스스로 속이게 되어 전혀 이익이 없다. 부처님은 허물이 없으나 중생들의 생각이 뒤바뀌어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느니라.
해설: 참다운 믿음은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확신이다. 체험이 결여된 믿음은 허상이요. 스스로의 눈속임이다. 확신은 믿음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물이 영하의 기온에서 얼음이 되고 100°C에서 끓어 수증기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의심하지 않는다.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체함을 매순간 체험하고 확신한다. 체험(업식)을 토대로 순간순간 분별하고 선택하고 실천한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마음(참나)이 곧 부처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중생들은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 없다. 안, 이, 비, 설, 신, 의를 통해 실재임을 확신하는 대상들이 환영이라니 어떻게 믿겠는자.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니, 또한 나 자신 역시 실체가 아니라니 어찌 믿고 인정하고 따르겠는가. 자신의 감각과 견해가 뒤바뀐 줄 모르고 불신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본문 : 만일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마라. 부처가 부처를 제도할 수 없으니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볼 수 없다. 다만 밖의 부처일 뿐이니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해설 : 견문각지(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모든 것이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며 이 모든 것의 근원이 참 나(마음)임을 아는 것이 부처이고 깨달음이다. 수행이란 바로 모든 것의 근원(참나)을 찾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어리석은 중생은 나 이외의 대상에서 부처를 찾는다. 이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바다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한 부처는 마음이 지어낸 또 다른 환영이다. 업식일 뿐이다.
[불교신문2986호/2014년2월19일자]
〈6〉 깨달음은 모든 행위 주체 깨닫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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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① 마음이 불성 |
근본 모르고 행위 집착하면
다른 업식·환영에 불과할 뿐
환영인 내가 생사윤회 주인공
본문 : 부처를 구하려고 예불하지도 말고, 마음을 가지고 염불하지마라. 부처는 경전을 독송하지 않고 부처는 계를 지니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고 부처는 계를 지니거나 범하는 일이 없으며 선도 악도 짓지 않는다.
해설 : 우리가 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위는 마음의 모습이다. 하고자하는 마음(의식)이 신, 구, 의 삼업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예불하고 염불하고 계를 지키고 범하는 것, 선행, 악행 이 모두는 참나에 비친 마음(업식)의 모습이다. 예불, 기도, 독경, 지계, 자비행 모두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이다. 즉 성불이다. 깨달음이란 이 모든 행위의 주체(참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근본을 모르고 행위에 집착하면 또 다른 업식(환영)에 불과 할 뿐이다.
본문 : 만일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자성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깨달음을 얻은 부처인 것이다. 성품을 보지 못한 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를 올리거나 계를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 염불을 하면 극락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전을 독송하면 총명해지고 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지만 깨달음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
해설 : 부처란 깨달음을 얻은 것을 말하고 깨달음이란 자성(참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참나를 보지 못하면 백행이 모두 업식(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염불, 독경, 지혜, 좌선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불법의 궁극은 이 업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꿈속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꿈을 깨는 것이 바로 참나(자성)을 보는 것이다. 참나를 알아야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업식의 그림자임을 알게 된다. 참 나를 모르고 염불, 독경, 좌선, 보살행을 실천하면 공덕을 지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다. 극락이나 천상에 환생할 수 있다. 반대로 악행을 하면 고통스런 악몽을 꿀 것이다.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둘 다 꿈속의 일일뿐이다.
본문 : 만일 자기를 분명히 알지 못했거든 반드시 선지식에게 참문해서 생사의 근본을 깨칠지어다. 만일 자성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다. 비록 12부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계에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아 벗어날 기회가 없으리라.
해설 : 생사의 근본은 무명의 어리석음이다. 참나를 모르고 참나에 비친 나라는 업식의 환영을 나 자신으로 여기고 그 ‘나’가 가장 집착하는 육신을 나로 동일시하여 견문각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업식(정보)의 환영임을 알지 못하고 실체로 여겨 집착하고 구하는 것이다. 이 필요하다고 구하는 마음이 생사의 근원인 것이다. 참나를 깨달아 나라고 하는 것과 필요하다고 여긴 대상 모두가 환영인 줄 알게 되면 더 이상 집착해서 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생사해탈이요 열반이요 선지식이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면 행하는 모든 것이 환영인 내가 인식하는 업식(정보)일 뿐이다. 그 환영인 내가 바로 생사윤회의 주인공이다.
본문 : 옛날 선성이라는 비구가 12부경을 모두 암송했으나 여전히 윤회를 면치 못했다. 그 까닭은 바로 자기의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성비구도 그러했거늘 요즈음 사람들이 겨우 서너 권의 경전을 익히고서 법을 깨달았다 하니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일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부질없이 문자를 읽는다고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느니라.
해설 : 경전을 암송하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법문을 익히는 것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인식(업식)에 불과하다.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비쳐 볼 뿐이다. 나라는 것, 경전을 암송하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모두가 업식이다. 참나는 업식을 비추는 주체이지 비춰지는 대상이 아니다. 참나를 깨닫고 비추어 환영인 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진리의 모습이요 참 나를 모르고 실체로 집착하면 업식이요 환영이다.
[불교신문2988호/2014년2월26일자]
〈7〉참나는 일체 모든것 나타나게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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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① 마음이 불성 |
대상 아니라 주체
언어나 사량분별로 얻지 못해
스승에게 배우고 익혀 지혜 열어야
본문 : 만일 깨달음을 얻으려면 반드시 자성을 보아야 한다. 성품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자유자재한 사람이기에 일도 없고 일을 짓지도 않는다. 만일 자성을 보지 못했다면 종일 바쁘게 대상을 쫓아 구해도 깨달음은 끝내 얻을 수 없다. 비록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반드시 선지식에게 묻고 간절히 애써서 추구하여 마음이 열리게 해야 한다.
해설 : 깨달음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을 깨닫는 것이다. 가장 높고 평등한 올바른 지혜를 얻는 것이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의 근원을 아는 것이다. 참 나를 보아야만 존재하는 일체의 근원을 알게 된다. 참 나는 일도 없고 일을 짓지도 않지만 일체 모든 것을 비추어 나타나게 한다. 자성(참 나)을 보지 못하면 행하는 모든 것이 꿈이요 환영이다. 언어나 사량분별로는 얻지 못한다.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다. 모르면 스승에게 물어 배우고 익혀 마음의 지혜가 열리게 해야 한다.
본문 : 생사의 문제는 큰 일이므로 헛되이 보내지말라. 스스로 속이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 진기한 보물이 산처럼 많고 친족이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아도 살아있을 때는 유용하지만 죽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므로 유위법(현상계)은 꿈이나 허깨비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 죽음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지금의 불편함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고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 속이고 합리화할 뿐이다. 많은 재산, 친족, 권력이 있다한들 죽음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으며 죽고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찰해보면 모두가 헛된 일이다.
본문 : 만일 서둘러서 바른 스승을 찾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게 보낼 것이다. 불성은 누구나 본래 가지고 있지만 스승을 의지하여 배우지 않으면 밝게 깨달을 수 없다.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
만일 자기 스스로 인연을 따라 진리를 깨달아서 성인의 신묘한 뜻을 증득한 사람이면 선지식을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깨닫지 못했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열심히 참구해 배워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스스로 분명히 깨달았다면 배우지 않아도 되지만 미혹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해설 : 바른 스승을 찾아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일생이 허사이다.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고자 바쁘게 노력했으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모든 중생들은 불성을 본래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불성은 부처의 성품이요 참 나를 말한다. 그러나 선지식에게 배우지 않으면 참 나를 알 수 없다. 참 나에 비친 환영을 나라고 집착하고 그 환영의 내가 집착하는 대상들을 실재한다고 여긴다. 간혹 근기가 수승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모르면 스승이 필요하지만 이미 알고 나면 스승을 구할 필요가 없다. 스승을 찾고 배우고 실천하는 이유는 불성(참 나)을 깨닫기 위함이다.
본문 : 검고 흰 것조차 구별하지 못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고 망언을 한다면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무리 설법을 비오듯이 해도 모두 마의 소리요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이러한 스승은 악마의 왕이요 그 제자들은 악마의 백성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의 지휘에 따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사의 바다에 떨어지리라.
해설 : 불교의 근본 목적은 참 나(자성, 불성)를 깨닫는 것이다. 참 나를 깨달아야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이 환영임을 알게 되고 구하는 그 마음이 모든 고통의 근원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을 이용하여 또 다른 행복을 얻고자 한다. 주객이 모두 환영임을 알아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상을 구한다면 이는 마의 말이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러한 스승을 따라 행하면 자신도 모르게 생사에 빠져 들어간다. 본래 생사윤회는 나와 대상 모두가 환영임을 모르고 내가 존재하고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려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불교신문2990호/2014년3월5일자]
<8> 모든 고통은 ‘제행무상’을 모르는데서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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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① 마음이 불성 |
대상 아닌 ‘참 나’ 자체만 남았을 때
완전한 행복인 열반이며 정각
본문 : 다만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망령되이 부처라고 하면 이러한 중생들은 큰 죄인이 될 것이다. 다른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마(魔)의 경계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의 성품을 보지 못하면 12부의 경전의 가르침을 강설하여도 이는 모두 ‘마’의 말이요 ‘마’의 권속이지 부처의 제자는 아니다. 이렇듯 검고 흰 것을 판별할지 모르는 사람이 어찌 생사의 굴레를 면할 수 있겠는가.
해설 : 성품(참나)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고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한다. 참 나를 보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일은 허상이요 환영(幻影)이다. 설사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고 경전을 암송할지라도 이 또한 참 나에 비친 환영이다. 환영은 업식의 길이요 업식은 생사윤회고(生死輪廻苦)의 근본이다. 뭇 중생들을 생사윤회의 길로 이끄니 마의 스승이요, 모르고 따라가니 마의 권속이다. 나와 남이 함께 두 눈 부릅뜨고 생사고에 들어가리라.
본문 : 만일 자성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이며 깨닫지 못하면 중생인 것이다. 만일 중생의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성품을 증득할 수 있다면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인 것이다. 성품을 떠나 부처가 없으므로 부처가 곧 성품이다. 이 성품을 떠나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 외에는 성품을 얻을 수 없다.
해설 : 자성(참나)을 깨달으면 부처이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자성, 불성, 성품, 진여, 참나 모두가 같다. 중생, 부처, 깨달음, 나와 대상, 안과 밖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이미지, 정보)이다. 고로 참나(자성)를 떠나서는 중생도 부처도,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
달마혈맥론 - ② 미혹은 윤회의 근본
본문 :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만일 견성은 못했더라도 염불을 하거나 독경하며 보시를 행하고 계를 지키며 정진하여 널리 복을 닦으면 성불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못 하느니라.” 또 그가 물었다. “어떠한 까닭에 성불하지 못합니까?” 이에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얻을만한 법이 있다면 이것은 유위법이다. 또한 이것은 인과법이고 과보를 받는 법이며 윤회하는 법이다. 생사를 면하지 못하는데 언제 성불의 도를 이루겠는가. 성불이란 모름지기 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인과 등등의 말이 모두 외도법이니라.”
해설 : 성품(참나)을 깨닫지 못하면 행하는 모든 것이 업식의 근원이 된다. 순간순간의 행위가 마음의 흔적을 남기는데 이것이 업식이다. 그 업식이 인(因)이 되어 미래에 과(果)가 나타나는 것이다. 염불, 독경, 보시, 지계를 행하면 미래에 이러한 행위의 과보가 나타날 뿐 성불할 수 없다. 참나를 모르고 행하면 모두가 인과에 의한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외도의 법이요 마의 설이다. 성불이란 참나에 비쳐진 대상이 아니라 주체를 깨닫는 것이다. 참나를 깨닫고 보면 존재하고 행하고 받는 모든 것이 업식이 만든 환영임을 알아 머물고 집착하지 않는다. 인과이니 생사이니 고락이니 하는 따위는 햇빛 속의 어둠처럼 미칠 수가 없다.
본문 : 만일 부처님의 제자라면 외도의 법을 익히지 않는다. 부처님은 업도 없고 인과도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모두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성불할 수 있겠는가.
해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들을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고통의 시작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모르고 구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참 나를 깨달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고 더 이상 구하는 마음이 없이 참 나에 비친 대상이 아닌 주체인 참나 자체만이 남았을 때가 완전한 행복인 열반이며 정각(正覺)이다.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무엇인가 참 나에 비추어진 대상을 구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이것은 생사윤회의 길이다. 이것은 욕망과 집착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요, 마와 외도의 길인 것이다.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다. 성불할 수 없다.
[불교신문2992호/2014년3월12일자]
<9> 미혹은 윤회의 근본 마음은 참나에 비친 느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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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② |
부처란 인위적 조작 없는 존재
조작하는 마음은 용납하지 않아
본문: 다만 조금이라도 마음과 능력과 견해와 소견에 집착한다면 부처님은 이러한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부처는 지키고 범함이 없이 심성이 본래 공하고 또한 더럽거나 깨끗한 법도 아니어서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원인과 결과도 없다. 부처는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선을 닦지도 않으며 악을 짓지도 않으며 부처는 정진을 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게으르지도 않나니 부처란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존재이다. 조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부처는 용납하지 않는다.
해설: 마음은 참 나에 비친 느낌의 모습이다. 견해란 대상에 대한 감각의 정보를 과거에 경험 저장된 정보와 비교 분석해서 아는 과정이 참 나에 비춰진 것이다. 부처 또한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부처라는 의미와 정보를 언어와 문자를 통해 알게 될 참 나에 비친 정보일 뿐이다. 계율, 지계, 범계, 더러움, 깨끗함, 수행, 증득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정보)의 환영이다. 인과 또한 매한가지다. 지금 현재 감각을 통해 얻어진 정보와 느낌이 참 나에 비춰진 것, 이것이 ‘과(果)’이고 그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이미 기억된 정보를 비추는 것, 이것이 ‘인(因)'이다. 깨달음이란 참 나에 비친 대상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참 나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참 나(자성, 불성, 법성)를 부처라고 한다. 참 나에는 지계, 범계, 선과 악, 수행, 정진, 게으름 그 무엇도 없다. 이 모두는 참 나에 비친 대상들이다. 고로 참 나는 공적하여 텅 비어 있다.
본문: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나 근본 마음을 알 수는 없다.
해설: 부처는 부처라는 정보(이미지, 업식)을 참 나에 비춘 것이다. 이 상태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 역시도 참 나에 비춰진 감각과 느낌에 대한 업식이다. 부처니 중생이니 깨달음, 미혹 이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이다. 업식이 아닌 비추는 주체인 자성(참나, 불성, 법성)이 부처이다. 일체처일체시에 참 나에 비친 대상만을 읽어낼 뿐 참 나는 알 수 없다.
본문 : 성품을 보지 못하면서 항상 지음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큰 죄인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다. 즉, 무기공에 떨어져서 캄캄한 것이 마치 취한 사람 같아서 좋고 나쁨을 가리지 못하리라. 만일 지음이 없는 법을 닦으려 하거든 먼저 성품을 본 뒤에 반연하는 생각을 쉴지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해설: 무작(無作), 무위(無爲)는 참 나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참 나를 모르고는 무작, 무위는 알 수도 있을 수도 없다. 참 나를 깨닫지 못하고 무작, 무위를 말한다면 거짓이거나 무작 무위라는 또 다른 업식의 환영이다. 참 나(자성)를 깨닫지 못하고 텅 빈 공에 집착하면 참 나에 비추어진 텅 빈 공이라는 업식이 참 나의 성품인 공으로 착각하여 머물러 집착하게 된다. 이것이 무기공이다. 참 나는 밝게 비추어 나타내 보이지만 무기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으며 대하여 비출 수 없다. 무작, 무위, 불도를 이루려면 반드시 참 나를 깨달아야만 한다.
본문: 만약 어떤 사람이 인과를 무시하고 분주히 온갖 악행하면서 망령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해서 악행을 하여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무간지옥, 흑암지옥에 빠져서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지혜인이라면 이런 견해를 짓지는 않을 것이다.
해설: 참 나는 세 가지 성품을 지니고 있다. 텅 빈 공의 성품 비추어 나타내는 성품(환영), 비추어 아는 성품(각) 등이다. 중생들은 참 나의 공한 성품을 모르고 비추어진 환영(대상)이 실체한다고 여겨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참 나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행하는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위는 인과법에 따라 실체로 존재하게 된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업보에 따라 생사윤회의 고통에 빠질 것이다. 자신의 악행에 따라 고를 면치 못할 것이며 뭇 중생들을 잘못 인도하여 고통에 떨어지게 했으니 그 악업이 너무 크므로 무간지옥, 흑암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불교신문2994호/2014년3월19일자]
<10> 법신 그대로가 그대 근본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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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② 미혹은 윤회의 근본본래 |
자성은 증득과 닦음 없이 자재
허공 같아 취함과 버림도 없어
본문: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일체의 시간 가운데 펼쳐 움직이고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근본마음이라면 생신(몸)이 죽을 때 어찌하여 근본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에 달마스님이 답했다. “우리의 근본마음이 당장 눈앞에 나타나건만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다시 묻기를 “마음이 이미 눈앞에 나타나 있다면 어찌하여 보지 못합니까?” 이에 달마스님이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꿈을 꾼 적이 있는가?” 그가 답하기를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달마스님이 묻기를 “그대가 꿈을 꿀 적에 그것이 그대의 본래 몸이었는가?” 그가 답하기를 “예, 그것이 저의 본래 몸이었습니다.” 달마스님이 묻기를 “(꿈속에서) 그대가 말하고 분별하고 행동하던 것이 (현실) 그대와 다른가 아니면 같은가?” 그가 답했다.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달마스님이 말했다. “이미 다르지 않다면 이 몸이 바로 그대의 본래 법신이며 이 본래 법신 그대로가 바로 그대의 근본 마음이니라.”
해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삼라만상 두두물물, 일체처일체시 모두가 근본마음(자성, 참 나)의 표현이다. 마치 TV의 모든 드라마가 모니터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듯이 참 나의 바탕 위에 비추어진 모습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등장인물, 모든 사물, 시간, 공간 모두가 모니터에 비친 화면인 것과 같이 일체의 모든 것도 참 나에 비친 환영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TV프로그램 내용에 빠져 그 모든 것이 모니터에 비친 화면인 줄 모르고 실체로 여겨 집착할 뿐이다.
본문: 이 마음 끝없는 옛 부터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전혀 나고 죽은 적이 없는지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의 모습도 없으며 승려와 속인 노인과 젊은이의 모습도 없으며 성인과 범부도 없다.
해설: TV화면에 어떤 모습 어떤 내용이 나와도 모니터는 그대로이다. 과거, 현재, 생과 사, 생·멸, 증·감, 염·정, 왕·래, 시·비, 남·여, 노·소, 승·속, 성인, 범부… 이 모두는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다. 참 나는 언제나 같다. 사실 참 나에는 언제나 같다라는 것 조차 없다. 방편으로 표현할 뿐이다.
본문: 마음(자성)은 증득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으며 인도 없고 과도 없으며 힘도 없고 모양도 없는데 마치 허공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산이나 강이나 석벽이라도 장애하지 못하며 들고 나고 가고 옴이 자재하고 신통하다. 오온의 산을 벗어나며 생사의 바다를 건너서 온갖 업이 이 법신을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해설: 참 나(자성)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거나 닦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 나는 일체처일체시에 항상 존재한다. 사실 참 나이니, 일체처일체시, 항상, 존재… 이 모든 것이 참 나에 비친 업식(정보)이다. 마치 TV모니터의 작용에 의해 프로그램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화면의 내용이 슬픔, 기쁨, 고통, 행복, 어두움, 밝음, 드라마, 뉴스, 다큐, 예능 프로 그 무엇도 모니터에 의해 나타나며 그 어떤 화면내용도 모니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본문: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운지라 이 마음은 물질의 모습과는 같지 않으며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보고자하나 이 광명 가운데서 손은 흔들고 발을 움직이는 일이 항하강의 모래알 숫자 같이 많되 물어보면 전혀 대답하지 못함이 마치 허수아비 같나니, 모두가 자기의 활동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해설: 마음(참 나)은 찾고자하면 참 나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참 나가 환영의 참 나를 찾고자하는 것을 비추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 나를 버리고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행·주·좌·와·어·묵·동·정, 견·문·각·지, 모두가 참 나의 작용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참 나에 비친 환영에 집착하므로 참 나를 알 수 없다. TV드라마를 보는 동안에는 모니터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불교신문2996호/2014년3월26일자]
<11>‘참 나’ 모르고 행하는 모든 것은 환영〈幻影 ; 업식〉에 불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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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② 미혹은 윤회의 근본 |
한순간도 참나 떠난적 없어
실체한다 여겨 집착함이 문제
본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온갖 중생은 모두가 미혹한 사람이라 이로 인하여 업을 지으므로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나오려 하다가도 도리어 빠지나니 오직 성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시니 중생들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물으면 한사람도 아는 이가 없는가? 자기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은 틀리지 않건만 미혹한 사람 스스로가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마음을 밝히기가 참으로 어렵다.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이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밖의 인간, 천상 등의 무리는 모두 밝히지 못하는 줄 알지니라.
해설: 마음의 근본 성품(참 나)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또 다른 환영(업식)에 불과하다. 수행, 기도, 공덕, 예불 등등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티끌만큼이라도 존재한다, 안다, 얻었다, 구한다 하면 이 모두는 업식이다. 업식은 생사윤회의 근본이요, 고통의 근원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참 나를 떠난 적이 없다. 아니 떠날 수 없다. 단지 중생들이 나라는 환영에 속아 모를 뿐이다. 참 나를 모르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이다. 삼계가 환영임을 어찌 알겠는가.
본문: 만일 지혜로써 이 마음을 분명히 안다면 비로소 법성이라고 부르며 또한 해탈이라고 말한다. 생사에 얽매이지도 않으며 일체법이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이것이 대자대왕여래이며 또한 불가사의라고도 하며 성인의 본체라고도 하며 장생불사라고도 하며 큰 성인이라고도 한다.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그 본체는 오직 하나이다.
해설: 참 나(자성)를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게 된다. 삼라만상의 근본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법성이다. 참 나를 알면 모든 것이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실체한다고 여겨 집착하여 구하는 마음이 바로 구속과 생사윤회의 원인인 것이다. 허상임을 알아 놓아 버리면 해탈이요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는 물론이요 일체법에 구속되지 않으니 대자대왕불이요, 이것은 사량분별로는 미칠 수 없으니 불가사의요, 이런 사람을 성인이라 하니 성인의 본체요, 생사가 없어 신선들이 얻고자하는 장생불사의 가장 완전함이니 대선인이라고 한다.
본문: 성인들의 많은 분별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나니 마음의 양이 광대하여 쓰는데 따라 응해서 무궁하다. 눈에 응하여서는 빛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들으며 코는 냄새를 맡으며 혀는 맛을 알며 더 나아가서는 온갖 활동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며 언제든지 언어의 길이 끊기고 몸과 마음이 미칠 수 없으니 이것이 자기의 마음이다.
해설: 중생들은 실체한다 여겨 집착한다. 참 나를 깨달은 성인은 이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안다. 즉 모두가 참 나의 작용임을 아는 것이다.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등등 일거수일투족 온갖 행위의 주체인 나와 대상이 모두 참 나의 비춤에 의한 작용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 고로 항상 참 나의 상태이다. 언어와 행위 사량분별로는 미칠 수 없다.
본문: 그러므로 말하기를 “부처의 몸이 다함이 없으며 지혜도 그러하다” 하니 몸이 다함이 없는 것이 곧 자기의 마음이다. 마음이 능히 모든 것을 분별하며 또한 온갖 분별과 운동이 모두가 지혜이니 마음이 형상이 없으므로 지혜도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몸이 다함이 없고 지혜도 그러하다” 하니 사대로 된 몸은 번뇌의 몸인지라 생멸이 있으며 법신은 항상 머무르되 머무는 바가 없어서 여래의 법신이 항상 변하지 않는다.
해설: 지혜란 모든 것이 텅 빈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아는 것이다. 부처의 몸이 곧 환영이요 모든 환영이 부처의 몸임을 아니 곧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의 몸과 지혜는 무량무변이다. 육신, 화신, 보신, 모두가 또한 환영이다. 이를 비추어 나타내는 법신(참 나)만이 홀로 항상 변함이 없다. 그러나 참 나를 모르는 중생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실존하며 성주괴공 생주이멸의 모습을 나타낸다.
[불교신문2998호/2014년4월2일자]
<12> ‘참나’ 자체에는 텅 비어 어떤 경계도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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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② 미혹은 윤회의 근본 깨달음이란 참나를 깨닫는 것 보고듣는 모두 환영임 알아야 본문 : 경에 말하기를 “중생이란 마땅히 불성을 본래 지니고 있는 몸임을 알아야 한다” 하니 가섭은 다만 본성을 깨달았을 뿐이요 딴 일이 없다. 본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성품이니 이는 부처님들의 마음이다. 앞서 깨달으신 부처와 후에 깨달으신 부처가 오직 이 마음을 전하셨을 뿐, 이 마음 밖에 따로 부처를 찾을 수 없느니라. 해설 : 중생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 실재한다고 여기고 부처는 참 나에 비친 환영임을 안다. 중생 속에 불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참 나)이라는 거울에 ‘나’라고 하는 환영과 삼라만상이라는 환영이 비칠 뿐이다. 삼세제불보살 또한 환영으로 나타나니 부처의 근본 성품인 불성이라고 한다. ‘나’라고 여긴 환영의 본바탕이니 자성이요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의 근원이니 법성이라 할 뿐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 참 나(불성, 자성, 법성)를 깨닫는 것이다. 삼세제불, 역대 전등조사가 모두 참 나를 깨달은 것이다. 참 나는 전하거나 받을 수 없다. 전등이란 깨달음을 인가(확인)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나를 떠나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본문 : 소견이 뒤바뀐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 구하되 하루 종일 설치면서 부처를 염하고 부처에게 절을 하나니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소견을 짓지 말라.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해설 : 부처란 참 나(불성, 자성, 법성)를 깨달은 자이다. 견, 문, 각, 지(見, 聞, 覺, 知) 모든 것의 근원을 깨닫는 것이다. 참 나를 버리고 참 나에 비친 부처라는 환영을 아 항하사겁동안 다닌다 해도 또한 환영일 뿐이다.
본문 : 경에 말하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하고 또한 “있는 그 자리가 부처가 있는 곳이다” 하였으니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지라 부처를 지니고 부처에게 절하지 마라. 만일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나거든 절대로 예경하지 말지어다. 내 마음이 공적하여 본래 이러한 모습이 없으며 만일 형상을 취하면 곧 마귀에게 포섭되어서 모두가 삿된 도에 떨어진다. 만일 허깨비가 마음에서 일어난 줄 알면 예경할 필요가 없나니 절하는 이는 알지 못하고 아는 이는 절하지 않느니라. 예경하면 곧 마에 포섭되리니 학인이 행여나 알지 못할까 두려워 이렇게 분별하느니라. 해설 :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을 통해 참 나에 비친 정보의 모습이다. 오감의 감각정보가 신경을 통해 대뇌에 전달되고 그 신호를 현재 이전에 기억된 업식과 비교분석하여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참 나에 비쳐진 정보(환영)이다. 부처는 비쳐지는 대상이 아니라 비추어 아는 참 나이다. 현실이든 꿈에서든 부처, 보살을 모습과 소리로 보거나 듣는다면 모두가 환영임을 알아야 한다. 집착하면 생사윤회의 길이요 집착하지 않고 환영임을 알면 불보살의 화현이다. 중생을 생사의 고통으로 인도하므로 악마와 마귀이다.
본문 : 부처님들의 근본 성품 바탕 위에는 도무지 이런 모습은 없으니 꼭 명심하라.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든 결단코 캐지도 말며 또한 겁내지도 말며 의혹심도 내지마라.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거늘 어디에 이 같은 모습이 있겠는가? 나아가서는 천, 용, 야차, 귀신, 제석, 범왕 등에게라도 공경할 생각을 내지 말며 두려워하지도 말라. 만일 부처라는 생각이나 법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또는 부처나 보살의 모습에 대하여 공경할 생각을 낸다면 스스로가 중생이 되는 것이다. 해설 : 제불보살의 근원은 바로 참 나이다. 참 나 자체에는 텅 비어 그 어떤 경계도 없다. 업식을 비추어 나타나게 하는 성품이 삼라만상을 출몰하게 한다. 기이하고 장엄하고 등등 이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모습이다. 부처나 보살뿐만 아니라 천, 용, 야차 나아가 일체 모든 것에, 유와 무, 호와 오, 애와 증, 미와 추, 득과 실 등의 마음을 일으키면 환영에 집착하니 마의 유혹이요 허상임을 일깨우면 제불보살의 화현인 가피이다. [불교신문3002호/2014년4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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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처란 알고·보고·느끼고·행함의 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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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② 미혹은 윤회의 근본 |
범부 사량분별로 알지 못해
대상이 아닌 주체이기 때문
본문 : 만일 바르게 알고자 한다면 온갖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되니 다시 특별한 말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하시니 도무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환영에 일정한 상이 없으니 이것이 무상한 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뜻에 부합되리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온갖 형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한다” 하시니라.
해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 나에 비친 업식(현재 이전에 육근을 통하여 경험되어진 기억)의 환영이다. ‘나’라는 환영에 집착하여 육신에 집착하고 나와 육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내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대상들의 환영을 실체라 여겨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본래 환영이므로 성주괴공 생주이멸의 무상함을 벗어날 수 없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환영의 속성임을 모르고 끊임없이 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생사윤회의 모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모든 것이 환영임을 알아 집착에서 벗어나 참 나(자신)을 찾는 것이다. 참 나를 깨닫고 나면 모든 생사윤회의 과정이 마음이 지어낸 환영임을 여실하게 알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속아서 집착하지 않아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달마혈맥론 - ③ 허상을 공경하지 마라
본문 :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찌하여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예배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하늘의 마왕인 파순과 아수라 등이 신통을 나투어 모두 부처와 보살의 모습으로 갖가지 변화했기 때문이니 이것은 외도일 뿐 모두가 부처가 아니다. 부처란 자기의 마음이니 부처에게 잘못 절하지 말라. 부처란 인도 말이니 각성, ‘깨달음의 성품’이라고 한다. ‘각’이란 바로 각성, 신령스러운 깨달음이다. 근기에 따라 중생을 제접하고,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이고 손을 들어 올리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모두 다 자기의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이다.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도이며 도가 곧 부처이니 부처라는 한 글자는 범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니라.”
해설 : 부처란 참 나(자성)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마음, 자성, 불성, 진여, 법성 모두가 참 나의 성품을 말한다. 견문각지 일체 모든 것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다. 업식은 욕망과 집착의 흔적들이니 집착하여 구하면 생사윤회의 길이 된다. 천마인 파순과 아수라 등은 바른 깨달음의 길을 방해하고 욕망과 집착으로 유혹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 빠뜨린다. 파순,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아라한, 보살, 부처, 시방법계, 불국토 등등 모두가 참 나에 비친 환영들이다. 실재한다 집착하면 마의 신통변화요 환영임을 깨달아 참 나로 돌이켜 반조하면 모두가 불보살의 화신이다. 부처란 일체처일체시에 알고 보고 느끼고 행하게 하는 주인공이다. 범부의 사량분별로는 알지 못한다. 사량분별의 대상이 아닌 주체이기 때문이다.
본문 : 또 말하기를 “근본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다”하니 근본 성품을 보지 못하면 부처가 아니다. 설사 많은 경전과 논소를 강설하더라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범부일 뿐 부처의 법은 아니다. 지극한 도는 깊고도 멀어서 말로는 이해할 수 없나니 경전으로 어찌 미칠 수 있으리오? 근본성품을 보기만 하면 일자무식일지라도 무관하다. 성품을 보면 곧 부처이니 성스러운 본체는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다. 모든 말씀이 다 성인의 마음에서 일어난 작용이다. 작용자체는 본래 공적하여 명칭이나 말로써 미칠 수 없거늘 12부경이 어찌 미칠 수 있으리요.
해설 : 부처란 본성(참 나)를 보는 것을 말하며 부처님의 경, 율, 론 삼장은 참 나의 성품과 참 나를 깨닫는 방법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와 사량분별은 참 나에 비친 대상이므로 배워 익히고 이해하여도 참 나에는 이를 수 없다. 참 나는 비추어 아는 주체이므로 대상의 많고 적음은 전혀 관계가 없다. 참 나는 텅 비어 공적하다. 참 나의 비춤작용이 제불보살의 무량한 자비심과 원력을 비추어 나타난 환영이 화신불이요 12부 경전이다.
[불교신문3004호/2014년4월23일자]
<14> ‘참나’는 본래 완전하다 … 언설로 표현할 수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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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③ 허상을 공경하지 마라 |
수행은 찾아가는 과정일 뿐
얻거나 만드는 과정 아니다
본문 : 도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 닦아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소리나 형상이 아니어서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면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 다른 사람에게 결코 말할 수 없다.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인간이나 하늘 등의 무리들은 도무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형상에 집착한다.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한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형상과 온갖 법에 집착하면 곧 외도의 무리에 떨어지리라.
해설 : 도(참 나)는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수행은 ‘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 얻거나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수행, 기도, 소리와 형상, 감각과 언어 이 모두는 참 나에 비친 대상들일 뿐 참 나가 아니다. 부처는 삼라만상이 모두 참 나이지만 무명의 중생은 그 무엇으로도 참 나를 표현할 수 없다. 표현하면 이미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직 참 나를 깨달은 여래만이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주체인 참 나를 모르고 대상에 집착하여 생사윤회의 고통에 떨어지니 바로 외도의 모습이요 마의 행위이다.
본문 :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알면 집착이 있을 수 없나니 집착하면 알지 못한다. 만일 근본 성품을 보면 12부경이 모두가 부질없는 문자이다. 많은 경전과 논소가 오직 마음을 밝혔을 뿐이니 말끝에 계합해 알면 교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지극한 진리는 말을 떠났고 교법은 말씀일 뿐이니 진리도 도가 아니다. 도는 본래 말이 없으므로 말은 허망한 것일 뿐이다.
해설 : 일체 모든 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우리의 마음(참 나)임을 밝히고 그 참 나를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놓은 것이다. 법은 목적지 참 나를 깨달아가는 방법일 뿐이니 참 나를 깨닫고 나면 불필요하고 목적으로 삼아 집착하면 참 나를 깨달을 수 없다. 불교의 경, 율, 론 삼장이 모두 방법이요 설명일 뿐이다. 참 나는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 언설은 마음(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주체가 아닌 주체인 참 나에 비친 대상일 뿐이다.
본문 : 꿈에 누각이나 궁전이나 코끼리나 말의 무리나 나무, 숲, 못, 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잠시 한 생각이라도 집착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 이 모두가 망념을 의탁해 생겨난 것이므로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해설 : 꿈은 현재 이전에 안, 이, 비, 설, 신, 의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되어지고 저장되어진 의식의 작용이다. 의(意)는 집착과 분별이요, 식(識)은 정보이다. 꿈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든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꿈속의 모습이나 느낌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유추하려고 한다. 간혹 현재의 모습과 미래를 예시하지만 이 모두가 자신의 업식일 뿐이다. 과거의 업식이든 현재의 실제이든 미래의 예측이든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다. 과거의 업식이 집착에 의해 나타난 것이 현재이고 육근, 육경, 육식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되어지는 업식이 표현되어지는 것이 미래이다. 꿈에 집착함은 환영을 집착해 또 다른 환영을 만들 뿐이다.
본문 : 임종할 때에 전혀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의혹을 제거할 수 있다. 털끝만큼이라도 망념을 일으키면 마의 경계에 포섭되리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받는 일이 없지만 미혹한 까닭에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망령되이 과보를 받아 즐기고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다.
해설 : 중생들의 삶은 참 나를 모르고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을 집착하여 실체로 여겨 쉼 없이 구하는 것이다. 이 몸이 환영인 줄 모르고 집착하다 노, 병, 사를 통해 잃게 되면 자신이 집착한 업식에 의해 다시 구하여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윤회이다.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고 살아가고 알고 기억하고 잃고 얻고 분별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등등 이 모든 것은 업식의 작용일 뿐 이 작용의 주체인 참 나와는 무관하다. 참 나는 텅 비어 비추어서 나타내서 알게 할 뿐이다. 바로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 열반이요 집착하여 구하면 생사윤회이니 속박이요 마의 끄달림이다.
[불교신문3006호/2014년4월30일자]
<15> 선지식 가르침 의심하면 깨달음으로 못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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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③ 허상을 공경하지 마라 |
업식을 실재라고 확신하기 때문
빈궁·고통 모두 망상에서 생겨
본문 : 지금이라도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곧 습성에 물들지 않으리라. 성인의 경지에서 범부의 모습으로 나타나 갖가지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직 중생을 위한 까닭이다. 성인은 역순에 자재하여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성인을 이룬지 오래되어 큰 위덕이 있으니 온갖 일체종류의 업이 성인에 의해 전환되므로 천당과 지옥도 어쩌지 못한다.
해설 : 참나(자성)를 깨달으면 일체 대상과 작용이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게 된다.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니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성인의 모습이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다. 마치 하나의 태양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것과 같다. 참나를 깨달으면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참나로 부터 멀어진 적이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선과 악, 역과 순, 생과 사, 무량겁과 찰나, 지옥과 극락 등등 모두가 업식의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으니 자재하다.
본문 : 범부는 신묘한 식이 혼미해서 성인처럼 안과 밖이 뚜렷이 밝지 못하니 만일 의혹이 있더라도 의심을 일으키지 말라. 일으키면 바로 생사의 바다에 표류하게 되니 후회해도 구제할 방법이 없다. 빈궁과 고통은 모두가 망상에서 생겼으니 만일 마음을 알아서 서로 권하여 정진하되 함이 없이 지어나가면 여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다.
해설 : 성인(부처)은 참나를 깨달아 일체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그림자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 무명중생은 혼미해서 실체하지도 않는 갖가지 삼라만상을 분별하여 집착한다. 부처님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중생들은 의심하고 비방한다. 자신들의 업식의 모습을 실재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의심하면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서로 일깨우고 경책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되 부처, 수행 또한 환영임을 일깨우면 언젠가 미래에 참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본문 : 처음으로 발심한 사람은 마음(신식)이 전혀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만일 꿈속에서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문득 의심하지 말라. 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만일 꿈에 광명이 햇빛보다 더 밝게 나타나면 나머지 습기가 모두 사라지고 법계의 성품이 나타나리라. 만일 이러한 일이 있으면 이것은 성불할 원인이 되므로 오직 스스로 알 뿐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느니라.
해설 : 꿈속이든 깨어있든 보고 듣고 알고 느끼는 모든 것은 참나에 비친 업식의 모습이다. 꿈과 현실, 안과 밖, 또한 업식의 모습일 뿐이다. 꿈에 광명을 보는 것은 업식이 점점 밝아져 가는 모습의 상징이다. 태양보다 더 밝은 광명은 남은 습기(무명 : 존재하는 것이 실체라 여기는 마음)가 모두 사라지고 깨달음을 이루려는 징후이다. 마치 해가 뜨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면 나와 남, 꿈과 현실, 밝음과 어둠 등등의 환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 간혹 고요한 숲속에서 행, 주, 좌, 와 수행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광명을 보더라도 남에게 말하지 말며 집착하지도 말라. 이것은 자성의 광명일 뿐이다. 또한 고요한 밤중에 행주좌와 수행하는 가운데 낮과 같은 광명을 보고서라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이 모두가 자성의 광명이므로 마음이 밝아지려는 징조이다. 만일 꿈에 별과 달이 분명하게 보이면 이것 또한 자기 마음의 여러 가지 반연이 쉬려는 조짐이니 역시 남에게 말하지 말라. 만일 꿈에 캄캄하여 칠흙 같이 어두운 길을 가는 꿈을 꾸었다면 이것은 자기 마음의 번뇌 업장이 두터운 조짐이니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해설 : 낮이든 밤이든 꿈이든 현실이든 마음이 밝아지면 밝고 가볍고 기쁘고 명료하다. 마음이 어두우면 무겁고 흐릿하고 모호하고 어둡고 욕망과 집착이 가득하다. 꿈이 미래를 예시하든, 맞든 맞지않든 꿈의 내용에 집착하여 길흉화복을 예단하지마라. 모두가 업식의 환영일 뿐이다. 미혹되어 집착하면 도리어 환영에 빠져들 뿐 이익이 없다. 깨어있음도 환영이거늘 꿈속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불교신문3008호/2014년5월7일자]
<16>참나 깨닫지 못하고 염불·좌선하는 것은 환영일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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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③ 허상을 공경하지 마라 |
허상 알아 집착 않으면 참 불제자
집착하여 구하면 불법 비방의 ‘마’
본문 : 만일 근본 성품을 보았거든 경을 읽거나 염불할 필요가 없나니 많이 배우고 널리 아는 것이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도리어 마음이 어두워질 뿐이다. 다만 교법을 설한 것은 마음의 이치를 표시하기 위해서일 뿐 마음을 알면 교법을 볼 필요가 없다.
해설 : 제불보살의 모든 경전은 중생들을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이고득락이다. 생사를 벗어나려면 참나(자성)를 깨달아야만 하고 깨닫고 나면 더 이상의 독경이나 염불 등이 필요하지 않다. 기도, 수행, 선행, 공덕 또한 마찬가지이다. 널리 배우고 익히는 것은 참나가 아닌 참나에 비친 환영을 실체라 여겨 집착할 뿐이다. 삼세제불의 교법은 참나를 깨닫는 방법일 뿐이다.
본문 : 범부에서 성인의 경지로 깨달아 들어가려면 반드시 업을 쉬고 정신을 길러서 분수에 따라 세월을 보내야 한다. 만일 기쁘거나 성내는 일이 많거든 그 성품을 바꾸어야 한다. 도와 더불어 어긋나니 스스로 속일 뿐 이익이 없다. 성인은 생사 가운데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숨고 나타남이 일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체의 업이 구속하여 장애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삿된 마를 쳐부순다.
해설 : 참나를 깨닫고자하면 반드시 구함과 분별심을 버리고 인연과 근기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허상임을 일깨워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희, 노, 애, 락(喜, 怒, 哀, 樂)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 또한 업식의 환영을 실체로 여겨 집착하는 것이다. 참나를 깨달은 성인은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으니 업식에 구속되지 않으며 일체처일체시에 참나(자성)의 광명으로 비추니 일체의 마(업식)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광명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본문 : 일체 중생들이 본성을 깨닫기만 하면 남아있는 업식이 일시에 소멸되고 신식(마음)이 어둡지 않으니 이것을 바로 즉시 깨닫고자한다면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 업을 쉬고 정신을 기르며 남은 습기가 모두 사라지면 자연히 밝아져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해설 : 누구나 성품(참나)을 깨달으면 일체가 모두 참나에 비친 허상임을 안다. 이것이 마음이 어둡지 않고 밝음이다. 이미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으니 업식과 습기가 미칠 수 없다. 그저 참나(자성)로 비추어 밝히면 된다. 따로이 애써 그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만약 수순하지 못하면 순간순간 참나에 비친 환영임을 일깨워야 한다. 중생, 성인, 업식, 공부, 부처이니 등등 제법이 모두 허상이다. 속지마라.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 주인공만이 진실하다. 방편으로 참나로 이름 할 뿐이다.
본문 : 외도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노력은 많이 하여도 성인의 뜻에 위배되므로 종일 바쁘게 염불하고 경전을 독송하여도 자성에 어두워 윤회를 면치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니 어찌 구구하게 마음 쓸 필요가 있겠는가. 널리 명예와 이익을 구한들 후일 무엇에 쓰겠는가. 다만 자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경전을 독송하고 염불하며 오래도록 정진하고 하루에 여섯 번 예불하며 눕지 않고 오래 좌선하며 폭 넓게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을 불법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해설 : 삼세제불의 가르침은 견문각지 일체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환영임을 알아 욕망과 집착을 버려 생사윤회의 환영(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나(자성)을 깨달아야만 하고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참나의 성품과 참나를 깨닫는 방법을 이야기 할 뿐이다. 이와 다른 수행이나 가르침을 외도라 한다. 참나가 아닌 참나에 비친 대상을 구하는 것은 모두가 외도이다. 외도와 중생들은 나와 대상이 실체한다 집착하여 분별하여 구하니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부처는 나와 대상 모두가 환영임을 알아 구하지 않으니 언제나 한가하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염불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좌선하는 것 등등 이 모두는 환영일 뿐이다. 행복과 기쁨을 만드는 환영이다. 단지 허상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참다운 불제자요 집착하여 구하면 불법을 비방하는 마(魔)이다.
[불교신문3010호/2014년5월21일자]
<17> 자신이 만든 환영, 오히려 비방·의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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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③ 허상을 공경하지 마라 |
본래 참나, 생노병사에 관계없어
업장이 두터워 이를 믿지 않을 뿐…
본문 : 먼저 깨달은 부처님과 나중에 깨달은 부처님들은 오직 성품을 보라 하는 말씀만 하셨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기를 “내가 위없는 도를 얻었노라” 말한다면 이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다. 십대제자 가운데 아난은 많이 듣고 배워 식견이 으뜸이었으나 성문, 이승, 외도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으니 지식이나 숫자를 아는 것으로 닦아 증득한다면 인과의 법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해설 :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참나(자성)를 깨달아 생사윤회의 환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내가 위없는 도를 얻었다고 한다면 대망어 죄이다. 자신도 속고 뭇 중생들도 속여서 다함께 생사의 바다에 빠지게 하니 업이 지중하다. 참나를 깨닫는 것은 많이 들어 배워 알고 기억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배우고 익혀서 알게 된 일체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환영임을 알아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보고 듣고 아는 것이 수행이라 여기면 무량겁을 지낸다 해도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본문 : 이것은 중생의 업보이므로 생사를 면할 수 없으며 부처님의 뜻에 위배되므로 부처님을 비방하는 중생인 것이다. 꺾어 물리쳐도 아무런 허물이 없다. 경에 말씀하시길 일천제는 믿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물리쳐도 죄가 없다 하셨다. 만일 참된 신심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지위에 나아갈 것이다. 만일 성품을 깨닫지 못했거든 절대로 선량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자신을 속이는 짓으로 아무런 이익이 없다. 선과 악이 뚜렷하고 인과가 분명하므로 천당과 지옥이 오직 눈앞에 존재한다.
해설 : 견, 문, 각, 지 일체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다. 환영을 실체로 알고 구하고 집착하는 것이 생사윤회의 모습이요 허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음이 깨달음이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나를 통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이 실체로 여겨지는 것은 신, 구, 의 삼업의 결과이다. 일체중생이 업식의 환영에서 깨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이다. 비춰진 대상이 아니라 비추는 주체인 참나를 깨닫는 것이 수행이요 성불이다. 이와 다르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훼불하는 마이다. 칭찬, 비방, 선과 악, 천당, 지옥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일 뿐이다. 실체로 여겨 집착하는 중생들에게는 선악의 인과가 명확하니 극락, 지옥 또한 실체한다. 믿고 실천하면 부처가 될 것이요. 전혀 믿지 않으면 성불할 기약이 없다. 이를 일천제라 한다.
본문 :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는 까닭에 흑암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이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다. 단지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장님이 “태양에는 횃불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설사 그에게 말을 해준다해도 믿지 않을 것이니 눈이 멀었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방금 축생 등의 나쁜 무리에 떨어졌거나 빈궁하고 하천한 무리에 태어나서 살려고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느니라. 비록 이런 고통을 받으나 직접 물어보면 도리어 답하기를 “나는 지금 즐거운 것이 천상과 다르지 않다”고 하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은 태어난 곳을 즐기면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해설 : 어리석은 중생들은 자신이 알고 느끼는 모든 것이 과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환영임을 믿지 않는다. 생사윤회의 온갖 고통이 참나에 비친 그림자이며 본래 참나는 생, 노, 병, 사, 행복, 불행, 슬픔, 기쁨 등등에 전혀 관계없음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다. 마치 장님이 색깔이 없다고 주장하고 귀머거리가 소리의 종류를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들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상태를 만들어간다. 지금의 내 모습은 현재 이전 무시이래 자신이 노력해온 결과이다. 고로 인간은 인간세계, 축생은 축생계에서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든 환영임을 믿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고 의심한다.
[불교신문3012호/2014년5월28일자]
<18>의심은 확신하지 못함, 완전하지 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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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③ 허상을 공경하지 마라 |
참나는 텅 비어 밝고 맑다
기억·표현, 참나 비친 정보
본문 : 이와 같은 악인은 업장이 두텁기 때문에 신심을 내지 못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만일 자신의 마음이 부처인 줄 깨닫는다면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관계치 않으며 속인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만일 자성을 깨닫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았어도 역시 외도이다.
해설 : 견문각지 일체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비방, 왜곡하는 것은 자신의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고 알고 느끼는 대상들이 자신의 욕망과 집착의 흔적임을 믿으려 하지 않고 실체한다고 확신하는 것, 이것이 업장이다. 참나를 깨닫고 나면 이 모든 것이 환영임을 알게 되며 참나(자성)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된다. 승가, 재가, 정법과 외도 또한 환영임을 알게 된다. 깨달으면 불법이요 모르면 외도이다.
달마혈맥론 - ④ 진리는 마음속에 있다
본문 :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속인은 처자가 있어 음욕을 끊지 못했는데 어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단지 견성을 말했을 뿐 음욕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성품을 깨닫고 나면 음욕은 본래 공적하여 굳이 끊어 없앨 필요가 없으며 또한 집착하지도 않으니 습기가 남아 있더라도 그를 해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품을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비록 오온의 몸속에 처해 있더라도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 : 성불이란 참나(자성, 불성, 법성)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참나는 속인, 출가인, 선인, 악인, 남녀노소를 분별하지 않는다. 무간지옥에서 수억만 겁을 보내고 있는 중생들도 근원은 참나이다. 육도의 중생들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주법계 모든 두두물물의 근원은 참나로 돌아간다. 스크린에 비춰진 영화의 화면처럼 모두가 참나에 비친 환영들이다. 중생들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집착하여 실체로 착각할 뿐이다. 모두가 참나와는 관계가 없다.
본문 : 법신은 본래 느낌이 없다. 굶주리거나 갈증도 없고 춥고 더움도 없으며 질병도 없으며 부모, 형제, 부부간의 은혜와 사랑도 없고 권속도 없으며 괴로움, 즐거움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길고 짧음도 없으며 강하고 약함도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얻을 수 없건만 단지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괴질과 질병 등의 모습이 있게 되었다. 만일 스스로 속지 않게 되거든 마음대로 행동해 보아라.
해설 : 참나(법신)는 텅비어 밝고 맑다. 견, 문, 각, 지 모든 것은 참 나에 비친 정보들이다. 구하는 대상(색, 성, 향, 미, 촉, 법 色聲香味觸法)에 대한 정보를 감각기관(안, 이, 비, 설, 신, 의 眼耳鼻舌身意)을 통해 감지하고 그 정보가 감각신경과 뇌를 거쳐 마음에 전달된다. 그 순간 우리는 알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내 마음이 정보를 읽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성찰해보면 내 마음이라는 것도 무엇이라 부르거나 표현하거나 구체화 할 수 없는 것에 비추어진 나라는 정보(식)임을 알게 된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방편으로 참나라고 부를 뿐이다. 왜냐하면 표현하면 이미 참나에 비친 정보(식)가 되기 때문이다. 참나는 비친 대상이 아닌 비추는 주체이다. 우리 중생들이 느끼고 알고 기억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은 참나에 비친 정보이지 참나가 아니다. 참나는 텅 비어있다.
본문 : 만일 생사 가운데에서 자재함을 얻어 일체법을 굴리되 성인처럼 신통이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으면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으리라. 만일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결정코 일체의 경계를 뛰어 넘지 못한다. 조작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조작이 있으면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만일 본성을 깨달으면 천민도 성불할 수 있다.
해설 : 참나를 깨닫고 나면 일체가 업식의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니 걸림이 없다. 의심은 확신하지 못함이요 완전하지 못함이다. 일체처일체시에 참나를 일깨워 정진해야 한다. 의심과 조작은 업식의 환영인 대상에 집착이 남아 있음이니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참나에는 신분의 귀천이 없고 생사도 없다. 모두가 업식의 환영일 뿐이다.
[불교신문3014호/2014년6월4일자]
<19> 모든 대상들과 행위, 모두가 업식의 환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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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⑤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
실체로 여기면 인과응보 벗을 수 없어
환영임 알아 집착 않으면 인과와 무관
본문 :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전다라(도부)는 살생을 직업으로 삼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달마스님이 대답했다. 다만 성품을 보는 것만 말했을 뿐 업을 짓는 것은 말하지 않았나니 성품을 보고나면 비록 업을 지어도 미혹한 사람과는 달라 일체의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오직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 까닭에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거니와 근본성품을 깨닫기만 하면 마침내 업을 짓지 않는다. 만일 자성을 깨닫지 못하면 염불을 해도 과보를 면할 수 없다. 살생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품을 보아 의혹이 완전히 사라지면 생명을 살해해도 그를 어쩌지는 못한다.
해설 : 참나를 깨달으면 일체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게 된다. 업이란 현재 이전 생각, 언어, 행동에 의해 남겨진 흔적들이다. 우리가 알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 행하는 모든 행위, 알고 행하는 주체인 나, 이 모두가 업식의 환영들이다. 실체로 여겨 집착하면 인과응보, 생사윤회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인과와는 무관하다. 마치 꿈을 꾸는 동안에는 실체인 듯하나 깨고 나면 환영인줄 알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같다. 백정이니 살생이니 성불이니 지옥이니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두두물물 모든 생명 속에 참나(불성)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참나라는 큰 거울에 비친 환영이다. 오직 환영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속아 집착할 뿐이다.
본문 : 인도의 28대 조사들도 오직 마음을 전하셨고 내가 이제 이 땅에 온 것도 오직 돈교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법을 보였을 뿐이요, 계행지키기와 정신과 고행과 나가서는 불이나 물에 드는 법과 칼산에 오르는 것과 한끼니 먹고 오래앉아 눕지 않는 법을 말하지 않았나니 모두가 외도의 유의법이다. 만일 마음을 펴 운동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그 성품을 깨달으면 그대의 마음이 곧 모든 부처님들의 마음이다. 앞서 깨달으신 부처님과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들이 다만 마음을 전하셨을 뿐 달리 특별한 법이 없다. 만일 이 마음을 깨달으면 한글자도 몰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신령스럽게 아는 자성을 깨닫지 못하면 설사 몸이 부서져 먼지같이 되더라도 성불은 끝내 이룰 수 없다.
해설 :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님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오직 마음이 부처라는 것이다. 지계, 염불, 독경, 수행, 고행, 난행 모두가 참나(마음)를 깨닫기 위한 방법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전통적인 수행의 방법이든 혹은 외도의 방법이든 나아가 중생의 욕망과 집착의 삶이든 참나를 찾고자 나아가면 올바른 수행법이요 참나를 찾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의 행위는 모두가 유의법이요 외도인 것이다. 삼세제불과 역대전등 조사님들이 전하신 것은 참나(마음)가 부처라는 것과 참나를 깨닫는 방법 그리고 참나를 깨달았음을 인가해준 것이다. 참나 혹은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다. 참나(마음)는 지식, 수행의 많고 적음은 관계가 없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어려운 난행 고행을 오래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불할 수 없다.
본문 : 부처란 법신이라고도 하며 마음, 깨달음이라고도 하니 이 마음은 형상도 없고 인과도 없으며 힘줄도 뼈도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잡을 수 없나니 또한 물지리의 세계와 같지 않으며 외도와 같지도 않다. 이 마음은 여래 한 사람만이 아시고 그 밖의 중생과 미혹한 사람은 밝게 알지 못한다. 이 마음은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을 떠나지 않았다. 만일 떠나 있다면 운동할 수 없다. 이 몸은 지각이 없어 초목과 기와조각과 같아 감정이 없거늘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해설 : 부처란 붓다, 즉 마음(참나)을 깨달은 자를 말한다. 이 마음을 우주의 모든 법칙, 진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본 몸이라 하여 법신, 혹은 법성이라고도 한다. 허나 사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개념 지을 수도 없다. 표현하면 이미 주체가 아닌 참나에 비친 환영이 된다. 마음을 떠나서는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마음을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하고 모르는 자를 중생, 외도라 한다.
[불교신문3016호/2014년6월14일자]
<20> 마음 작용과 움직임은 마음에 비친 업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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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⑤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
과거 기억, 육근 정보 비교해 느껴
참나는 정보를 비추어 알게 할 뿐
본문 :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분별하고 운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며 움직임의 작용이다. 움직임이란 마음의 움직임이요 움직임 그대로가 작용이니 움직임과 작용 이외의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마음이 아니요 마음은 움직이지 않나니 움직임이란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마음을 여의지 않았고 마음은 움직임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음에는 여윈다는 것도 여의었다는 것도 없으며 마음에는 움직인다는 것도 움직였다는 것도 없다.
해설 : 말하고 분별하고 움직이고 보고 듣고 아는 것. 이 모두는 마음의 작용이다. 말하고 분별하고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과 언어와 육신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이것 또한 마음의 모습이요 작용이다. 감각기관(육근)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과거에 기억된 정보와 비교 분석해서 느끼고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요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자세히 성찰해보면 마음은 새로운 정보, 느낌, 과거의 정보 등이 참나에 비추어져 아는 것일 뿐임을 알게 된다.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이고자 하는 내 마음,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감각정보(내 몸, 공간, 시간)가 변해 가는 것을 비추어 아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움직이는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지만 참나는 아니다. 참나는 단지 정보(업식)를 비추어 알게 할 뿐이다. 참나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마음도 육신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 없다도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업식, 정보)을 비추어 알 뿐이다.
본문 : 이는 마음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니 마음 그대로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 그대로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다. 작용은 바로 마음의 작용이지만 움직임도 아니요 작용도 아니다. 작용의 자체는 본래 공적하여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작용은 마음과 같은 것이지만 마음에는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움직이되 움직이는 바가 없다”하니 종일토록 오고가되 가고 온 적이 없고 종일토록 보되 본 적이 없고 종일토록 웃되 웃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기뻐하되 기뻐한 적이 없고 종일토록 다니되 다닌 적이 없고 종일토록 멈추었으되 멈춘 적이 없느리라.
해설 : 우리 중생의 마음은 참나(자성)의 바탕에 ‘나’라는 환영을 만들고 그 ‘나’라는 환영이 집착하는 육신을 통해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된다. 가장 어리석은 중생은 보고 느끼는 대상이 내 몸 밖에 실체한다 착각하여 집착하고 구하게 된다. 조금 지혜 있는 자는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정보(업식)임을 안다. 참다운 지혜인은 그 ‘나’라는 것이 이 모두를 비추어 알고 느끼는 참나에 비춰진 또 하나의 환영임을 알고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의 작용과 움직임은 바로 참나에 비친 나라는 환영을 통해서 견문각지 하는 작용과 내 마음이 대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작용한 것과 움직인 것은 내 마음에 비친 대상(정보, 업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내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참나는 텅 비어 밝게 비출 뿐이다. 움직이다, 멈추다, 집착하다, 내려놓다, 울고 웃고 오고 가고 기쁨, 슬픔, 이 모두는 참나의 바탕 위에 나라는 환영에 비친 대상의 정보(업식)일 뿐이다.
본문 :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말로써 표현한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분별할 자리가 없다”하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가 원적한지라 성나고 기쁘고 가렵고 아픔이 어찌 본래의 사람과 다르리오. 더욱 미루어 찾아보건데 아픔과 가려움을 찾을 수 없다.
해설 : 말로써 표현 할 수 없고 마음과 행위가 없어진 자리라는 것이다. 즉 모든 표현 수단 이전의 근본바탕이요 대상이 아닌 주체인 것이다. 텅 비어 있는 그 상태를 방편으로 참나라고 표현할 뿐이다. 참나에서 비추어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나에 비친 업식일 뿐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불교신문3018호/2014년6월18일자]
<21> ‘참나’ 깨달으면 일체 업도 구속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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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혈맥론 - ⑤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
견문각지 대상이 ‘공’하고
나와 내 몸이 공함을 알면
지옥과 극락도 허상임 알게 돼
본문 : 경에 말하기를 “나쁜 업은 곧 괴로운 과보를 받고 착한 업은 곧 좋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시니 성내면 지옥에 빠지고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날 뿐 아니라 성냄과 기뻐함의 성품이 공한 줄 알아서 집착하지 않으면 곧 업력을 벗어난다.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경론을 강설하더라도 결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기에 간략히 옳고 그름을 이와 같이 표현하였으나 모두가 미치지 못하느니라.
해설 : 악업을 행하면 고통의 과보를 받고 선업을 행하면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고통이란 욕망과 집착의 대상이나 조건을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리거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느껴지는 느낌이다. 즐거움이란 욕망과 집착의 대상이나 조건을 성취했거나 성취할 가능성이 있을 때의 느낌이다.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느낌을 느끼는 나의 마음, 나의 육신, 원하는 대상이나 조건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참나를 깨달아 견문각지 대상이 공하고 나와 내 몸이 공한 줄 알면 더 이상의 고통도 즐거움도 또한 환영임을 알게 되며 나아가 지옥과 극락 또한 허상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의 업이 그를 구속할 수 없다.
삼세제불의 모든 불법은 참나(자성)를 깨달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면 그 공덕으로 극락, 천상의 행복은 얻을지라도 그것 역시 환영에 불과하다. 이제까지 바른 불법, 바른 수행, 바른 깨달음을 이야기했지만 이것들 역시 참나에 비친 환영인 언어에 불과하다.
본문 : [게송] 마음, 마음, 마음 이라고 하지만 / 찾을 길 없어라. 퍼지면 법계에 두루하고 / 움츠리면 바늘 끝도 용납지 못한다.
[해설] 마음(참나, 자성, 법성, 불성)이라고 하지만 / 모양도 색깔도 크기도 없는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나 가만히 비추면 우주법계에 두루하고 / 찾으려하면 어디에도 없다네.
[게송] 나는 본래 마음을 찾을 뿐 / 부처를 구한 적이 없나니 삼계의 모든 것 공하여 / 아무 것도 없음을 분명히 아노라
[해설] 불법이란 본래 참나(마음)를 깨닫는 것 / 부처를 구함이 아니로다. 삼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 참나에 비친 환영의 그림자일 뿐.
[게송] 부처를 구하려거든 / 마음만을 구할지니
이 마음이란 마음 그대로다 / 마음 그대로의 부처로다
[해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고자 하는가. 마음(참나)을 깨달아라 / 이 마음(참나) 그대로가 부처로다.
[게송] 내 본래 마음을 구하지만 / 마음은 스스로 가지고 있나니 마음을 구하려면 / 마음으로 알기를 바라지 말라.
[해설] 불법의 요체가 마음(참나)을 찾는 것이지만 / 마음(참나)은 본래 스스로 지니고 있나니 마음을 찾아 깨닫고자 하는가. / 구하는 마음 내려놓으면 스스로 온 천하에 드러나리라.
[게송] 부처의 성품이란 / 마음 밖에서 얻는 것 아니니
마음이 생길 때가 / 곧 죄가 생길 때이니라.
[해설] 깨달음의 성품이란 곧 마음(참나)을 말함이니 / 마음(참나) 밖 따로이 구할 수 없네 참나는 텅 비어 본래 공한데 한 생각 일어나면 / 생사윤회의 시작이네
본문: [전법계]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중생을 건지려 함이니
한 송이 꽃에 다섯 잎이 되어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리라.
해설: 중국 선종이 달마대사 이후 육조 혜능까지 일맥으로 내려오다 혜능대사 이후 조동, 운문, 법안, 임제, 위앙의 다섯 종파로 나뉘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불교신문3020호/2014년6월25일자]
<22>청정한 마음은 번뇌 끊어진 진여의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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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달마관심론 - ① 마음을 관하다
오염된 마음은 무명의 마음 두 마음은 본래 함께 존재해 본문 : 혜가스님이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어떤 법을 닦아야 가장 간단하고 긴요하겠습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법이야말로 일체의 현상을 모두 포섭함으로 간단하면서도 요긴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혜가스님이 질문했다. ”관심일법이 일체의 모든 현상을 포섭합니까?“ 달마대사가 답했다. ”마음은 모든 만법의 근본이라.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생기느니라.“ 해설 : 불교의 근본목적은 일체 모든 중생들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과 행복을 얻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인연따라 변해가는, 실체하지 않는, 환영이라는 것을 모르고 실체한다고 여겨 집착하기 때문이다. 오온, 육근, 육경, 육식, 일체 모두가 마음(참나)에 비친 마음작용(업식, 정보)이다. 인지, 느낌, 괴로움, 즐거움, 생각하고 말하고 실행하고, 이 모두가 참나에 비친 정보(업식)이다. 행복의 근원도 마음이요 괴로움의 근원도 마음인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면 근원인 마음의 본성을 알아야하고 알기위해 마음을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삼세제불 가르침의 근본인 관심인 것이다. 그래서 관심 일법이 모든 수행법의 근본이라고 한다. 본문 : 만일 마음을 온전히 알면 만 가지 수행이 모두 갖추어지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는 모두 뿌리를 근본으로 삼으니 나무를 가꾸려는 자는 뿌리가 있어야 살고 나무를 없애려면 뿌리를 제거하면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일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힘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룰 것이요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노력 많이해도 이익은 아무런 이익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알아라. 일체 선악이 모두 자기의 마음에서 생겨나므로 마음 밖에서 달리 도를 구함은 결국 옳지 못하느니라. 해설 :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느끼는 모든 것의 근원이 마음이다. 마음을 깨달으면 일체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큰 나무의 잎과 가지와 꽃, 열매 등이 뿌리로부터 시작되었듯이 마음도 이와 같다. 모든 욕망, 일체의 선과 악, 선업과 악업에 의한 복과 죄, 즐거움과 괴로움, 천상과 지옥, 생사와 열반, 이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을 밝히는 것이 불교요 수행이요 성불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아니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떠날 수 없다. 달마관심론 - ② 청정함과 더러움을 갖춘 마음 본문 : 혜가스님이 질문했다.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알았다.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에는 두 가지 다른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두 가지란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오염된 마음이다. 청정한 마음이란 번뇌가 끊어진 진여의 마음이요 오염된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의 마음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은 본래부터 함께 존재하는 것이어서 인연에 의해 어울릴지언정 서로 생기게 하지는 못하느니라.” 해설 : 마음을 깨달아 아는 것은 사대와 오온이 본래 텅 비어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사대(地水火風)란 우리의 몸을 비롯 일체 모든 존재의 물질적 구성요소를 말한다. 오온(色, 受, 相, 行, 識)이란 대상인 색(色)을 감각으로 느끼고 이미지화하여 분별하고 선택하고 실행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이 참나(마음)에 비친 정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대는 객관적 대상이요 오온은 주관적 인식과 행위의 과정이다. 즉 안과 밖이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참나에 비친 식(정보)의 환영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청정무구한 진여의 모습이요 다른 하나는 오염된 무명번뇌이다. 성찰해보면 무명번뇌의 마음은 청정무구한 참나에 업식이 비춰진 상태를 말한다. 즐거움, 괴로움, 고통, 행복, 슬픔, 내 마음 등등의 정보(업식)가 참나에 비춰지면 집착으로 인해 내 마음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참나는 참나요 번뇌(업식)는 번뇌이다. 서로 변화하여 이루어지거나 서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마치 거울과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불교신문3022호/2014년7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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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일체의 선법은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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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관심론 - ④ 선법의 근본은 깨달음 |
깨달음 뿌리로 공덕의 나무 자라
지혜와 공덕의 근본은 바로 참나
본문 : 불성이란 깨달음을 말함이니 다만 능히 스스로 깨달아 그 깨달은 지혜가 밝아져서 덮히었던 것을 벗겨내면 그것을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선법은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깨달음 뿌리로 인해 공덕의 나무가 자라나 열반이란 열매가 이루어지니, 마음을 관함이 마음을 요달함이라 하느니라.
해설 : 불성이란 부처님의 근본성품이며 부처란 깨달은 자를 의미하니 불성이란 깨달음의 성품을 말한다. 부처, 깨달음, 성품 또한 나의 본성에 비친 모습이니 자성(참나) 이라고 하고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이 근본성품이니 법성이라고 한다. 참나는 새롭게 얻어지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일체처일체시에 모든 것이 참나의 작용이니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 없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근본인 참나를 모르고 참나에 비친 환영을 실체로 착각하니 덮여있음이요 집착하여 구하니 속박이요 윤회인 것이다. 환영임을 알아 집착을 버리고 구하지 않으면 깨달음이요 해탈인 것이다. 선법이란 중생들에게 행복을 주어 행복을 얻는 것이다. 업식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으니 업식이 점점 밝아지고 엷어지고 중생들에게 행복을 주니 행복의 업식과 환영을 만든다. 이 밝음이 지혜의 성장이요 행복의 환영이 공덕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지혜와 공덕 또한 참나의 비춤의 작용이 근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와 공덕의 근본은 바로 참나인 것이다.
달마관심론 - ⑤ 악법의 근본은 삼독
본문 : 이에 혜가스님이 질문했다. “위에서 진여의 불성과 일체의 공덕은 깨달음이 근본이 된다고 하셨는데 무명의 마음과 일체 모든 악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였다. “무명의 마음은 비록 팔만사천가지 번뇌와 욕망이 있어서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온갖 악이 한도 끝도 없지만 이를 요약하여 말하면 모두가 삼독이 근본이니라. 삼독이란 탐욕하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 세 가지 독한 마음이 본래부터 온갖 악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지만 거기에서 생긴 가지와 잎이 무수한 것과 같으니라. 이 삼독의 뿌리가 각각의 뿌리에서 모든 악업이 생기는 것이 앞의 비유보다 백천만배나 더하여 도저히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해설 : 중생들의 무명이란 욕망과 집착의 흔적인 업식이 참나에 비친 환영을 실체라 여겨 집착함을 말한다. 참나인 지혜의 빛이 욕망에 가리워져 허상을 실체라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 모든 고통의 근원임을 모르고 오히려 행복의 근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악법은 중생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중생들은 참나에 비친 환영들을 실체로 착각해서 행복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대상이나 조건들을 구하고 집착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집착한 대상이 방해를 받거나 멀어지면 분노하게 된다. 이것이 진심이다. 이 실체를 알아 집착하여 구함이니 어리석은 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만악의 근본은 바로 탐, 진, 치, 삼독심이요 삼독심의 근본은 무명인 어리석음이다.
달마관심론 - ⑥ 육식을 밝힘
본문 : 이러한 삼독은 하나인 본체에서 스스로 삼독이 되었으며 육근에 응해서 나타나면 육적이라고 하니 육적은 곧 육식을 말함이니라. 이 육식이 육근으로 출입하며 온갖 것에 탐하고 집착해서 자연히 악업을 일으켜 진여의 바탕을 장애한 까닭에 육적이라 하느니라.
해설 : 탐, 진, 치의 근원은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자세히 성찰해 보면 참나에 나라는 의식이 덮인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참나는 본래 텅 비어 밝게 비추는 성품이다. 중생들은 참나의 성품위에 있지도 않는 허상인 나를 만들어 참나에 의해 비추어 나타나는 모든 작용을 내 마음의 작용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근본인 참나의 작용이 내 마음으로 변하고 욕망과 집착에 의해 탐진치 삼독으로 변화된다. 삼독심이 안, 이, 비, 설, 신, 의 통해 색, 성, 향, 미, 촉, 법 구하니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성립된다. 이 육식의 환영에 집착해 참나를 가리니 육적이라고 한다.
[불교신문3026호/2014년7월16일자]
<25> 마음 깨달으면 삼계안에 있어도 삼계 벗어나 달마관심론 - ⑥ 육식을 밝힘
집착않으면 삼계 구속할 수 없어 삼계는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 본문 : “일체중생은 이 삼독과 육적이 몸과 마음을 어지럽힘으로 인하여 생사에 빠지며 육취에 윤회며 온갖 괴로움을 받느니라. 마치 큰 강이 끊임없이 흐르는 작은 샘으로 인하여 계속 흐르고 흘러 마침내 파도가 수만리에 걸쳐 출렁이는 것과 같으니라.” 해설 : 중생들은 어리석은 무명으로 인하여 참나(자성) 위에 나라는 환영을 만들고 그 위에 내가 집착하는 내 몸이라는 환영을 만든다. 그리고 참 나의 작용을 나와 내 몸의 작용과 활동이라고 착각한다. 참 나 ⇒ 나 ⇒ 내 마음(업식 : 정보) ⇒ 내 몸(감각기관 : 안, 이, 비, 설, 신, 의) ⇒ 대상(6경 : 색, 성, 향, 미, 촉, 법)의 과정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대상(6경) ⇒ 내 몸(감각기관) ⇒ 내 마음(정보 6식) ⇒ 나 ⇒ 참 나로 작용하며 끊임없이 순과 역의 상호작용으로 자신의 업식을 변화시켜 나아간다. 나아가는 방향은 지금보다 더 편하고 안락하고 만족한 상태, 즉 행복이다. ‘나’가 따로이 존재해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그 마음이 삼독심인 탐, 진, 치를 만들고 이 삼독심이 6근(안, 이, 비, 설, 신, 의)의 작용으로 6경(색, 성, 향, 미, 촉, 법)을 구하게 되고 구하려는 그 마음이 6경의 환영을 만들어 6식으로 기억하게 되고 이 기억이 내 마음에 저장되어 새롭게 변화된 환영, 업식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육도윤회이고 6취(천, 아수라, 인가, 축생, 아귀, 지옥)이다. 처음 ‘나’가 있다는 한 생각이 행복을 구하게 되고 그 마음이 삼독심이 되어 나아가 6식을 만들어 끊임없이 반복하니 작은 한 생각이 이 무한한 우주법계의 출발점인 것이다. 달마관심론 - ⑦ 삼독의 뿌리를 끊어버림 본문 : “어떤 사람이 그 뿌리와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느니라. 해탈을 구하는 자가가 삼독을 돌려 삼취정계(三聚淨戒)로 삼고 육적을 돌려 육바라밀로 만들면 자연히 모든 고통을 여의게 되느니라.” 해설 : 고통의 원인은 악업이다. 악업의 근원은 욕망과 집착이다. 욕망과 집착의 근원은 어리석음이다. 삼취정계(三聚淨戒: 섭선법계, 섭중생계, 섭율의계)는 악행의 근본이 되는 탐, 진, 치 삼독을 선행의 모습인 모든 선을 행하고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계율을 지키라는 것이다. 즉 선행을 실천하여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또한 6적인 6식을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인 육바라밀로 바꾸어 실천하라는 것이다. 육근을 통하여 대상인 육경을 볼 때 구하고자 하는 탐, 진, 치 삼독심을 버리고 대승보살의 수행법인 육바라밀을 행하여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체하지 않는 허상임을 깨닫고 이 모두의 근원인 나 역시 환영임을 알아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참 나의 지혜광명이 드러나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 즐거움, 생과 사, 해탈, 속박, 윤회, 열반, 중생, 부처, 선과 악, 죄와 복…. 이 모두가 환영이었음을 확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달마관심론 - ⑧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를 벗어남
본문 : 혜가스님이 물었다. “삼독과 육적이 넓고도 끝이 없거늘 오직 마음만 관한다고 어찌 저 무한한 괴로움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달마대사가 답했다. “삼계의 업보는 오직 마음 속에서 행긴 것이다. 만일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안에 있더라도 삼계를 벗어나리라.” 해설 : 삼독과 육식의 업식이 무량무변하지만 참 나(마음)를 벗어날 수 없다. 마치 영화의 내용에 우주가 나오든 티끌이 나오든 한 개가 나오든 무량 무한의 수가 나오든, 크든 작든, 선과 악, 고와 락, 지옥과 극락 등등 모두가 스크린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니 참 나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삼계란 감각적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세계(욕계), 마음의 편안함과 고요함을 추구하는 세계(색계), 마음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인 세계(무색계)를 말하며 이 모두는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인 것이다. 마음을 깨달아 환영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삼계가 더 이상 구속할 수 없다. 삼계의 안과 밖, 구속과 해탈 역시 꿈속의 환영일 뿐이다. [불교신문3028호/2014년7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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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가장 적합한 최적의 삶 선택이 육도 윤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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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윤회 원인은 과거 기억인 업식
무명은 본래없는 대상에 대한 착각
본문 : 삼계란 삼독이니 탐욕이 욕계요, 성냄이 색계요, 어리석음이 무색계이니라. 이 삼독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을 짓는 까닭에 업보가 이루어져서 육도에 윤회하기 때문에 삼계라 하느리라. 또한 삼독으로 인해 크고 작은 업을 짓기 때문에 과보 또한 다르며 여섯 가지 장소로 나뉘어 돌아가므로 6취라고 말한다.
해설 : 삼계란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니 욕계, 색계, 무색계이다. 물질적 감각의 행복을 추구하는 욕계, 마음의 평화로움을 행복으로 추구하는 색계, 나 이외의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물질과 업식이 하나임을 알아 더 이상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무색계로 나눈다. 또한 욕계는 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의 욕계 6천과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 윤회로 분류한다. 중생들은 자신이 행한 업식 따라 가장 적합한 윤회 길을 가게 된다.
자신의 업식을 참 나에 비추어 자신이 더 나은 참다운 행복을 찾아감에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고 잘못된 부분은 정화하고 꼭 필요한 부분은 더욱 증장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최적의 삶을 설계하고 그것에 맞는 삶을 선택한다. 이것이 육도 윤회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생사윤회의 원인은 과거에 행한 기억인 업식이며 행위의 원인은 삼독심이고 삼독심의 원인은 욕망과 집착이며 욕망과 집착의 원인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와 대상들을 실재한다고 여긴 착각인 무명인 것이다.
달마관심론 - ⑩ 6취는 미혹으로 나타남
본문 : 혜가스님이 질문했다. “어떻게 무겁고 가벼운 것에 따라 여섯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바른 길을 깨닫지 못하고 미혹한 마음으로 선행을 닦으면 삼계를 면치 못해서 세 가지 가벼운 곳 ‘삼경취(三輕趣)’에 태어나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가벼운 갈래라 하는가? 미혹한 마음으로 십선(十善)을 닦아 망령되이 쾌락을 추구하면 탐욕의 경계를 면하지 못해 하늘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5계를 지켜 망령되이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면 성냄의 경지를 면하지 못해 인간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유위법에 집착하여 잘못된 법을 믿고 복을 구하면 어리석음의 경지를 면치 못하여 아수라에 태어나느니라. 이 세 종류를 삼경취(三輕趣)라 하느니라.”
해설 : 중생들은 자신의 악업이 많고(무겁고) 적음(가벼움)에 따라 고통이 많은(무거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중취(三重趣)와 고통이 적고 즐거움이 많은 천, 아수라, 인간의 삼경취에 환생하게 된다. 십악(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악구, 양설, 탐, 진, 치)을 버리고 십선을 실천하여 행복을 구하면, 즐거움을 구하는 그 마음에 집착하여 하늘에 태어나고,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를 지키되 애증의 분별심에 집착하면 인간에 태어나고 선행을 지어 공덕을 쌓아 삶 속에서 욕망 성취에 집착하면 아수라에 태어나게 된다. 이 모두는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인 나와 내 몸, 나 이외의 모든 대상들을 실체로 여겨 구하게 되고, 구하는 마음이 삼독심을 일으키고 삼독심이 6근, 6경, 6식에 작용하여 업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미혹된 어리석음이 근본인 것이다.
본문 : 무엇이 세 가지 무거운 갈래인가? 삼독의 마음을 좇아 나쁜 악업만을 짓는 것이니 탐욕이 무거운 자는 아귀에 떨어지고 성냄이 많은 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어리석음의 업이 무거운 자는 축생에 떨어지나니, 이 세 가지 무거운 것을 앞의 세 가지 가벼운 것과 합치면 육취가 되느니라.
해설 : 삼중취(三重趣, 세 가지 무거운 갈래)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말한다. 삼독심이 6근(六根 : 안, 이, 비, 설, 신, 의), 6경(六境 : 색, 성, 향, 미, 촉, 법), 6식(六識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에 작용하여 악업을 지음에 특히 어리석음으로 인해 악업을 많이 지으면 축생계에 환생하게 된다. 삼독심에 의한 악업이 매우 많고 그 중 탐욕으로 인하여 많은 악업을 지으면 아귀계에 태어나고 분노로 인해 극악무도한 업을 지은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선행을 지어 업이 가벼운 삼경취(천, 아수라, 인간)와 악업을 행하여 업이 무거운 삼중취(지옥, 아귀, 축생)를 합하여 6취(六趣) 혹은 6도(六道) 윤회라 한다.
[불교신문3030호/2014년7월30일자]
<27>공간의 변화는 ‘참나’에 비친 정보의 변화
달마관심론 - ⑪ 마음을 잘 다스리면 해탈
시간과 공간 본래 존재하지 않아
정보 변화 정지되면 시간도 정지
본문 : 그러므로 알라. 악업이 자신의 마음에 의하여 생긴 것이니 마음을 잘 포섭하여 모든 악업에서 벗어나면 삼계 6취의 윤회가 자연히 사라져서 모든 고통이 다 없어지니 이를 곧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해설 : 욕계, 색계, 무색계인 삼계와 천,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6취가 모두 탐진치, 삼독심이 많고 적음에 따라 나타나고 삼독심은 욕망과 집착의 마음이요, 욕망과 집착은 참 나에 비친 환영을 실체로 착각하여 나와 내 몸에 집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삼계, 육취, 생사윤회의 고통, 이 모두를 홀연히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이다. 사실 본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스스로 환영을 만들어 집착하고 집착하니 실체라 착각하여 더욱 집착하게 되고, 업식을 만들고 업식에 의해 삼계와 6취의 환영이 나타나고 그 환영에 속아 생사윤회고를 받게 된다. 이 모두가 아닌 환영임을 알면 홀연히 집착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해탈이다.
달마관심론 - ⑫ 악법의 근본은 삼독
본문 : 혜가스님이 물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무한한 세월(아승기겁)동안 무량한 고행을 닦아 비로소 성불할 수 있었다고 하셨거늘 지금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오직 삼독만을 제거하면 그것을 해탈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십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허망함이 없다. 이 아승기의 고통은 삼독의 마음을 말한다. 아승기는 인도 말이며 중국어로는 불가수이니라. 이 마음 가운데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나쁜 생각이 있으며 낱낱의 생각 가운데에도 또한 일 겁의 시간이 들어있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란 헤아릴 수 없는 숫자라는 의미이다. 이 삼독의 나쁜 생각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숫자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해설 : 성불이란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깨달음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닌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허상임을 알아 구하려는 욕망과 집착을 갖지 않으니 열반이요 허상에 속아 집착하여 얻으려고 추구하지 않으니 욕망과 집착의 구속에서 벗어나므로 해탈이라고 한다. 이 욕망과 집착의 모습이 바로 탐, 진, 치 삼독이다.
삼독이 대상과 조건, 시간, 공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해 가니 우리의 마음에 기억된 업식은 무량, 무변, 무한이다. 성불이란 수행을 통해 이 모든 업식이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음이다. 즉, 무량, 무한, 무변의 모든 업식의 근원인 삼독심(탐, 진, 치)을 버리는 것이며 삼독심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초발심으로부터 삼 아승기겁 동안 수행하여 성불한다는 말씀은 탐, 진, 치 삼독을 버리는 것을 말함이다. 이를 깨달음, 공이라고 하며, 삼 아승기겁이란 바로 삼독심의 소멸을 의미한다.
본문 : 진여의 성품이 이미 삼독에 덮였으니 항하사 수효의 나쁜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면 어찌 해탈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능히 탐, 진, 치 삼독을 없앤 이가 있으면 곧 삼대 아승기겁을 뛰어 넘는 것이 되거늘 말세의 중생이 어리석고 둔해서 여래의 깊고도 묘한 이치와 삼아승지겁이 지나야 비로소 부처를 이룬다고 하니 어찌 말법시대의 수행인을 의심하고 그르치게 하여 보리의 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설 : 시간과 공간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공간의 변화를 디지털로 변환시킨 것이다. 공간의 변화는 참 나에 비친 업식(정보)의 변화이다. 업식(정보)의 변화가 정지되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변화의 시작은 시간의 시작이요 변화의 완성은 그 행위에 소요되는 시간의 끝인 것이다. 중생이 초발심한 순간부터 성불할 때까지 삼아승기겁이 걸린다는 것은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는데 삼아승기겁이 걸린다는 것이며 삼아승기겁이란 본래 삼독을 버리는 것을 말함인 것이다. 나아가 시간, 공간, 변화, 삼독심, 성불 이 모두가 참 나에 비친 환영이다. 모두가 꿈속의 일일 뿐이다.
[불교신문3032호/2014년8월13일자]
<28> 집착하여 구하니 행위의 업식 만들어져
달마관심론 - ⑬ 삼취정계와 육바라밀
업식이 참 나 비치니 환영 나타나
환영 모르고 구하니 생사윤회 존재
본문 : 혜가스님이 물었다. “보살마하살이 삼취정계를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해야 불도를 이룰 수 있거늘 어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만을 관하게 하고 계행의 닦음을 하지 않으면 어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였다. “삼취정계(三聚淨戒)는 곧 삼독의 마음을 끊는 것이니 하나의 독을 끊으면 무량한 선의 모습을 성취하느니라. ‘취(聚)’라 함은 ‘모으다’라는 뜻이니 삼독의 마음을 능히 끊으면 세 가지 무량한 선법이 널리 마음에 모이기 때문에 삼취정계라 이름 한다. 육바라밀은 육근이 청정한 것이니 인도에서는 파라미타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도피안(저 언덕에 건너갔다)이라고 말 하느니라. 즉 육근이 청정하여 세상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번뇌를 벗어나 저 언덕에 도달하니 그러므로 육바라밀이라 하느니라.”
해설 : 삼취정계(三聚淨戒)란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로 일체의 악을 끊고 일체의 바른 법을 닦으며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로 대승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수행,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 모두는 우리 중생들의 윤회의 근원인 탐, 진, 치 삼독심을 끊어버리려는 것이고 탐, 진, 치 삼독심의 근본인 욕망과 집착을 버리려는 방법이며 욕망과 집착의 근본 원인인 ‘나’라는 집착을 버리려는 것이다. 즉 모든 고통의 근원인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견, 문, 각, 지 일체 모든 것과 그 모두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주체인 ‘나’라는 것 역시 참 나에 비친 환영임을 알아 집착을 버리면 ‘나’ → 욕망 → 탐, 진, 치(삼독심) → 육근, 육경, 육식이 모두 환영임을 알게 되어 이 모든 것이 실체한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되며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
나(아취), 욕망, 집착, 삼독심, 윤회고, 삼취정계, 육바라밀, 열반, 해탈 모두가 참 나(마음)에 비친 환영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관하여 참 나를 깨달으면 팔만사천 일체 선법과 수행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다.
본문 : 또 혜가스님이 물었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삼취정계는 일체의 악을 끊겠다고 서원하는 것이고, 일체의 선법을 닦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며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을 서원하는 것인데, 삼독심을 끊기만 하라고 하시니 이는 경전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은 진실하여 마땅히 거짓됨이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이 과거 보살행을 닦을 때에 삼독을 끊기 위해 세 가지 서원을 세워 삼취정계를 지키셨으니 항상 계법을 닦는 것은 탐욕을 물리치기 위함이니 맹세코 모든 악을 끊기를 서원하기 때문이요 항상 선정을 닦는 것은 성냄을 다스리기 위함이니 일체 선법은 닦겠다고 서원하기 때문이며 항상 지혜를 닦는 것은 어리석음을 다스리기 위함이니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 서원하기 때문이니라.”
해설 : 삼취정계(三聚淨戒)는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이다. 계율의 근본은 지악권선(止惡勸善)이다. 섭율의계는 악을 멈추고 선행을 하는 것이며 선행이란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방법이니 삼독심중 탐심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올바른 법을 배우고 실천함은 욕망과 집착에 의해 헐떡이는 갈애를 멈추고 마음의 고요함을 얻기 위함이니 욕망과 집착의 갈애로부터 나오는 성내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인 것이다.
일체 중생을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구하고자하는 섭중생계는 치심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를 구함이다. 무명중생들의 어리석음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인 줄 모르고 실체한다고 여겨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하여 구하니 행위의 업식이 만들어지고 업식이 참 나에 비치니 환영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고 환영인 줄 모르고 집착하여 구하니 생사윤회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한다함은 나와 너, 모든 중생들이 참 나를 깨달아 생사윤회고가 업식의 환영임을 일깨워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불교신문3034호/2014년8월20일자]
<29>惡 끊고 善 닦으면 일체 수행 성취돼
달마관심론 - ⑬ 삼취정계와 육바라밀
나와 남 모두 이롭게 중생 제도
戒 닦음도 마음 떠난 것 아니다
본문: 이와 같이 계, 정, 혜 세 가지 청정한 법을 지킴으로 삼독의 악업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나니 삼독을 끊으면 모든 악이 없어지기 때문에 끊는다는 것이요, 삼취정계를 가지면 모든 착한 것이 갖추어지므로 닦는다고 말하며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일체의 수행이 성취되어 나와 남이 모두 이롭게 되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를 닦는 일도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닌 줄 알지니라.
해설: 섭율의계를 통하여 계행을 실천함은 일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악을 끊고 행복의 원인인 선행을 지어감이요 섭선법계를 닦아 수행을 실천함은 삼독심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보다 수승한 행복인 마음의 고요함으로 나아감이다. 섭중생계를 서원하여 지혜를 구함은 욕망과 집착의 근본이요 생사윤회고의 근원인 ‘나’라는 집착이 참 나에 비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계, 정, 혜 삼학이요 삼취정계이다. 욕망과 집착, 삼독심, 삼취정계, 삼학, 미혹, 깨달음 모두 참 나에 비친 환영들이다. 환영에 집착해 더욱 만들어 가는 환영과 허상임을 알아 벗어나려는 환영인 것이다.
달마관심론 - ⑭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깨끗함
본문: 만일 스스로의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 중생이 모두 청정해지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면 중생이 깨끗하다”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국토를 깨끗이 하려면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할지니 마음이 깨끗해지면 국토가 깨끗해지리라 하셨으니 삼독의 마음을 제거할 수 있으면 삼취정계를 자연히 성취하리라.
해설: 견문각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체 모든 것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들이다. 나의 밖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대상을 ‘색(色)’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온의 ‘색(色)’이다. 그러나 자세히 성찰해보면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을 통해서 느끼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감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色, 聲, 香, 味, 觸)도 존재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즉, 밖의 대상인 ‘색(色)’은 내게 전달된 감각의 정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오온의 ‘수(受)’이다.
그러나 감각의 정보를 내가 읽어내야 대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감각을 읽어내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현재 이전에 내 마음에 기억된 정보와 현재 새롭게 들어 온 감각정보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 대상에 대한 정보들을 모아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오온의 ‘상(相)’이다. 그런데 내 마음 속의 ‘상’을 성찰해보면 내 마음속에 항상 나타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대상을 떠올릴 때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집착해서 그 대상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나타나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온의 ‘행(行)’이다.
이 과정을 성찰해 보면 나 밖에 대상이 있다는 ‘색(色)’, 감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受)’, 정보를 읽어내 취합하여 만든 이미지 ‘상(相)’, 마음이 집착해서 움직이는 ‘행(行)’이 모두가 내 마음에 비치는 또 다른 정보들인 것이다. 이것이 오온의 ‘식(識)’이다. 즉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인 것이다. 색, 수, 상, 행, 식(色, 受, 相, 行, 識)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 환영이다. 더 나아가 오온의 주체인 ‘나’라는 것 역시 오온을 통해 형성된 또 하나의 환영일 뿐 실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비추어 알고 보는 주체가 있다. 이것이 ‘참나(眞我)’이다. 우리가 대상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참나의 작용에 ‘나’라는 환영이 더해지고 ‘나’ 위에 구하려는 욕망과 집착이 더해지고 욕망과 집착의 마음이 육근인 안, 이, 비, 설, 신, 의를 통해서 작용하게 되어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을 보고, 듣고, 느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과 집착이 있으면 욕망과 집착의 모습으로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자비의 모습으로 삼라만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욕망과 집착의 근원인 ‘나’라는 것이 허상임을 알아 내려놓으면 삼라만상은 그대로 참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치 색깔 있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우주가 청정해지는 것이다.
[불교신문3036호/2014년8월27일자]
<30> 자비는 소유 아니라 필요한 곳에 나눠야
달마관심론 - ⑮ 육바라밀을 거듭 밝힘
집착을 지혜로 변화시킴이 수행
육경 대상 업식 환영임 일깨워야
본문: 또 물었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6바라밀은 6도(六度)라고도 하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이거늘 지금 말하시길 육근이 청정한 것을 육바라밀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의미가 통하며 건넌다(度)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달마대사가 답하였다. “육도(六度)를 닦으려면 반드시 6근을 청정하게 해야 하며 육근을 맑히려면 우선 육적(六賊)을 항복시켜야한다.”
해설: 바라밀이란 파라미타라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이며 도피안(到彼岸), 도(度)라고 번역하며 미혹의 이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무명의 중생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바라밀을 실천 수행하여 생사의 강을 건너 열반의 언덕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시는 행복을 주는 것이요, 지계는 고통에서 구하는 것이요, 인욕은 보시와 지계를 실천하기 위하여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진이다.
쉼 없이 나아가면 탐, 진, 치 삼독이 줄어들게 되며 삼독이 주는 만큼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참다운 지혜가 드러나게 된다. 그 지혜로 다시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완전한 지혜인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정진해 나아가는 것이다. 육바라밀의 실천 수행은 참 나의 작용에 의해 비추어진 일체 대상을 욕망·집착 마음이 아닌 지혜·자비의 마음으로 비춰보고 판단·선택·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육근을 맑히어 청정하게하며 욕망과 집착을 부추겨 생사윤회 고를 가져다주는 6식을 조복 받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것이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고 육바라밀 수행의 주체인 나 역시 환영임을 깨달아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 해탈 열반으로 나아가니 바라밀을 도(度)라고 한 것이다.
본문: 눈의 경계를 버리면 모든 색의 경계에서 벗어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보시라하고 귀의 경계를 막으면 소리의 대상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지계라 하고 코의 경계를 항복시키면 향기와 악취에 평등하여 자유롭게 되므로 인욕이라 하고 혀의 경계를 다스리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읊고 강설하되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정진이라 하고 몸의 경계를 이기면 모든 애욕에서 초연히 요동치 않으므로 선정이라 하고 뜻의 경계를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깨달음의 지혜를 닦아 모든 공덕을 즐기어 닦으므로 지혜라 하느니라. 또 도라함은 운반한다는 뜻이니 육바라밀은 배와 같은 것이어서 중생들을 운반하여 저 언덕에 이르는 까닭에 육도(六度)라고 하느니라.
해설: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의 경계란 무엇인가? 육근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 육경을 욕망과 집착의 대상으로 보고 집착하여 머물고 구하는 것이다. 이 대상들을 욕망·집착이 아닌 자비·지혜의 대상으로 비추어보고 판단·선택·실천하는 것이 육바라밀, 즉 육도(六度)이다.
욕망의 대상이 아닌 자비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구하여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의한 집착의 대상을 지혜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육근에 의한 육경의 대상들이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일깨우는 수행의 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눈의 경계를 버리어 보시를 성취하고 귀의 경계를 막아 지계를 성취하고 코의 경계를 다스려 인욕을 이루며 혀의 경계를 다스려 정진을 행하고 몸의 경계를 이겨내어 선정을 이루고 뜻의 경계를 조복하여 지혜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욕망과 집착에서 지혜와 자비로 바꾸라는 것이다. 안, 이, 비, 설, 신, 의, 색, 성, 향, 미, 촉, 법 어디에도 욕망과 집착은 없다. 지혜와 자비 또한 없다. 욕망과 집착, 지혜와 자비, 선과 악 등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 6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의 주체는 ‘나’라는 환영이다. 참 나 → 나 → 내 마음(욕망, 집착 혹은 지혜, 자비) → 업식 → 내 몸 → 육근 → 대상의 순서로 사물을 인지하게 된다.
내 마음을 욕망과 집착이 아닌 자비와 지혜로 바꾸면 육근, 육경, 육식 모두가 지혜와 자비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육도이다. 육도란 중생을 생사윤회 고의 강을 건너 해탈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므로 육도(六度),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칭한 것이다.
[불교신문3038호/2014년9월3일자]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5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