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은 제주 4·3민중항쟁의 아픔을 담아내어서 2023년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5·18민중항쟁을 그린 <소년이 온다>에 이어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으면서 민중의 위대한 민족해방 투쟁의 역사이기에 합니다.
제가 제주 4·3민중항쟁을 만난 시기는 1980년대 중반 <해방전후사 인식1~6>을 통해서였습니다. 저가 학교에 다닐 때는 유신시대라 제도교육에서는 해방 후 역사 즉 현대사는 공부하지 않았고 정기고사나 대외고사에서 시험에도 나오지 않았기에 거의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해방정국의 역사를 알고 나니 소위 둔탁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학가에 하루가 멀다 하여 시위가 일어나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공간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에 생산의 집중과 자본의 집중이 독점을 이끌어 왔고, 또 현재도 이끌고 있을 정도로 그 집중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은행의 산업과의 흡수합병과 통합 등으로 금융자본이 생겼습니다. 이 금융자본은 은행이 통제하고 산업자본가들이 운용하는 자본입니다. 이 금융자본 즉 제국주의는 남아도는 잉여자본을 수출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독점적 연합이 이루어져 세계의 경제적 분할을 이루고, 자본수출국들은 세계 영토분할, 식민지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합니다. 자본수출로 제3세계에서 막대한 이윤을 만들기에 한줌도 안되는 소수의 부국들이 세계의 수많은 민족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강한 기초입니다.
자본가들은 그 어떤 특정한 악의를 갖고서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도록 발전된 자본의 집중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를 자본에 비례해서, 그리고 힘에 비례해서 분할합니다. 왜냐하면 상품생산과 자본주의 하에서는 또다른 어떤 분할수단이나 분할원칙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부터 이런 금융자본은 최대한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서 후진국 민중들을 착취·학살해왔습니다. 물론 해당국가의 자원도 약탈해왔습니다.
*베트남 하미학살 위령비. 2024.2 답사 솟터선생님들이 위령무를 추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서 용병(베트남인도 이리 부름)로 수많은 베트남민을 학살하였습니다. 한국군의 뿌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으러다는 일본군 출신으로 해방정국에서 베트남전에서 518민중광쟁에서 수많은 민중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제주 4·3민중항쟁 뿐만 아니라 베트남, 대만, 경산 등 제국주의에 의해서 수많은 민중의 학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일제 만주군이고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우리 민중을 셀 수 없이 학살했습니다. 얼마 전에 베트남 답사를 다녀와서 한국 군인이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인들을 수없이 학살한 현장을 통해서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5·18민중항쟁도 같은 맥락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서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중략)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냐? 점점 빠르게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아래쪽 무덤들은 봉분만 남고 뼈들이 쓸려가버린 것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했다.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바로 지금(9~10쪽)
작가는 자신이 투영된 경하란 인물을 통해 이 꿈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작가는 2014년 5.18광주민중항쟁을 형상화한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쓴 이후 직접 꾼 꿈입니다. 가깝게는 해방 후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한 민중, 조금 멀리는 동학농민전쟁, 만주벌판에서 항일무장투쟁하면 희생된 전사들.민중들에 대해 우리가 잊지 않고 추모.기억.연대하면서 진상규명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꿈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작가는 문학작품에서 고통의 상징물인 눈을 여기에서는 더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끈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도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써 4.3항쟁의 희생자들을 상징합니다.
경하는 인선이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를 하다가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가 봉합하는 수술하면서 부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선은 경하를 옆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57쪽)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직간접으로 경험 속에서 공감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인선이는 손 가락 두 개가 잘리는 고통 이리 아픈데 43항쟁 때 무참하게 도륙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합니다.
인선이는 자신이 키운 새를 구하기 위해 경하에게 산간마을에 가도록 부탁합니다. 제주도의 산간마을은 항쟁 기간 소개지역으로 모든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 상당수가 학살당했습니다. 그래서 인선이 집은 마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제주도민 30만을 다 죽여도 좋으니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
병원에서 집까지 가는데 폭설이 내리는데 운좋게 버스를 타고 갑니다. 이곳에부터 집까지는 한 번 온 기억으로 가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미끄러져서 큰 부상을 입고 갑니다. 도착하니 이미 새는 죽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새는 항쟁 때 학살된 사람들입니다.
눈에 고립된 경하는 제주도가 육지와 연락하여 도움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518민중항쟁 때도 광주시민들을 언론을 통해서 폭도로 규정하고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여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3만명에서 8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제주도와 섬인 대만에서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경하는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와 죽었던 새의 환영을 봅니다. 경하는 칠십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얽힌 인선의 가족사를 마주하게 된다. 온 가족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부모와 동생을 한날한시에 잃고 오빠마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채로 언니와 둘이 남겨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와 함께, 학살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며 오빠의 행적을 찾는 일에 수십 년을 바쳐 끝까지 포기하기를 택하지 않았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고요한 싸움이, 폭설로 고립된 외딴집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 아래 떠오른다.
인선이가 아버지와 학살을 피해 동굴로 간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에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158쪽)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159쪽)
항쟁 답사를 몇 번에 걸쳐 가면서 이런 피난 동굴에 들어가 봤습니다. 큰넓게, 도틀굴, 목시물굴 등입니다.
*토틀굴 2018.6 답사
*묵시물굴 2018.6 답사
*큰넓궤 2018.8 이곳에 피신한 주민들은 결국 정방폭포 등에서 학살되었습니다.
...만주 촬영이라면 벌써 십 년 전, 인선이 후암동에서 살던 때다.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나는 물었다. 제주공항, 하고 대답하며 인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활주로 아래에서 (210쪽)
우리는 제주도를 관광하러 가면서 무심결에 제주공항을 스쳐 지나간다. 활주로 아래 자주통일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어 묻혀 있는데도.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찰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서 젊은 남자들을 잡아가 실적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으까.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대로 고문을 한다고, 그렇게 읍내 경찰서에서 죽은 고등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듣고 온 뒤로는 아버지 혼자 동굴에 숨어 지내게 했대.....(217쪽)
이북에서는 친일앞잡이와 악덕지주들을 숙청하는 관계로 이중 상당수가 남한으로 내려와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해방정국에서 자주통일세력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남한은 일제 시대에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하여 죽이고 민간인들을 괴롭힌 친일 매국노 경찰들이 미제에 의해서 그대로 등용합니다. 이들 또한 양민학살에 앞장섭니다.
p읍에 있는 초등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0쪽)
빨갱이란 단어 속에는 인간으로써 존재할 가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공포스럽고 무시무시한 상황을 만들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족자주통일과 민중생존권을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한 말이 이 빨갱이입니다. 저도 사회과목이라 교직생활할 때부터 이런 미약하나마 노력을 이 말로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당시 갓 태어난 아이도 죽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면 빨갱이가 되니까. 제3차 세계대전이 러-우전으로 시작해서 가자-이스라엘전으로 확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수많은 희생자 중에 절반 가까이가 어린이입니다.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225쪽)
*불타고 학살당해서 사라진 곤을동 마을터 2016.8 답사
몇 년 전 제주 4.3항쟁 추념식장에서 유가족 대표로 한 대학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살아있는 할머니는 바닷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고. 이 고기들이 바다에 군경에 의해 수장한 가족들을 먹이 삼았을테니까요. 이 항쟁기간에 주로 중산간 지역을 소개하고 불태우고 학살하였는데 해안가 마을은 집단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곤을동은 해안가 마을인데 집단학살을 하고 마을을 불태웠다고 하던군요. 이유인즉 부상당한 무장대원들을 육지로 실어나르는데 도와줬다고 하더군요. 이 마을 앞 바다에서도 학살당한 많은 사람들을 수장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그 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우리 민족이 분단된 지 반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서 한 세기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분단으로 인해서 민족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선이 두 개의 손가락이 절단 고통이 학살당한 제주민을 말하면서 분단된 우리 민족의 고통을 상징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인선이의 손가락 봉합수술 이후 3주 동안 3분에 한 번씩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느껴야만 손가락이 썩지 않듯이 당시 고통과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민족의 분단된 상처와 위험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면서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손가락을 봉합하지 않으면 환상통에 시달리는데 우리 민족의 분단을 남한 민중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히 생각하는 바람에 이런 환상통에 고통받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