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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31일 금요일
[(백)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요한 보스코 성인은 1815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스텔 누오보 근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머니에게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하였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고자 1859년 살레시오회를 세우고,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934년에 시성되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는 겨자씨와 같다며, 군중에게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필리 4,4-9)와 복음(마태 18,1-5)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이 두 비유의 핵심은 ‘자라나는 것’ 곧 성장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와 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성장해 가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장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지요. 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서 자신 안에 있는 참생명을 틔우지 못하면, 그렇게 먼저 자신이 싹을 틔우고 그 씨를 성장시키는 양분이 되지 못하면 그 씨는 돌덩이와 다름없습니다. 흙 곧 땅은 씨앗을 감싸고 그 씨앗이 스스로 열도록 수분과 온기를 건네며 기다립니다.
씨앗은 여기에 화답하여 자신을 열고, 내주며,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나 자신 그대로 있고자 하는 안온함과 익숙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성장하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참으로 감싸고 있는 땅과 나의 내밀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열리기 시작하면 나와 우리의 성장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거대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2).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보스코 성인은 자기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격려의 손길을 건넨 분입니다. 많은 젊은이를 품고 돌보았는데 모두 저마다 각별한 사랑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힘들면 언제든지 오라토리오로 달려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줄테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보스코의 제자 중에 아버지로부터 상습 폭행과 아동 학대를 받던 펠리체 레빌리오가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오게 된 스토리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펠리체에게 하루 온종일 중노동을 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한창 성장기에 있어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팠던 아이는 혹독한 굶주림에 늘 울고 다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돈보스코가 아버지 몰래 펠리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펠리체! 얼마나 힘드니? 얼마나 배고프니? 혹시라도 더 이상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땐, 도망쳐서 오라토리오로 달려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줄테니.”
더 이상 아동 거듭되는 아동학대와 굶주림을 견디기 힘들었던 펠리체는 마침내 가출을 한 다음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로 달려왔습니다. 안그래도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펠리체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돈보스코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짓고, 두 팔을 활짝 펼치며 펠리체를 온 몸과 마음으로 끌어 안았습니다. 펠리체는 그 은혜로웠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며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가 죽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 돈보스코가 보여주었던 친절과 자비와 환대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돈보스코에게로 달려갔을 때,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는 굶주린 제게 따뜻한 스프와 빵을 마음껏 먹도록 준비해주셨습니다. 이어서 두 분은 손수 제 잠자리를 챙겨 주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받아들여진 두 번째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기꺼이 환대하고, 양육시키고, 성장시키고, 성화시키는 본당이요, 학교요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광주대교구 용봉동 성당 설립 25주년 기념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놀랍게도 용봉동 성당 주보 성인이 돈보스코였습니다. 사목적 열정으로 가득한 주임 신부님께서는 본당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교우들과 함께, 향후 10년을 위한 시노드 작업을 하셨습니다.
8가지 실천 과제를 마련하셨는데, 그 가운데 청소년•청년을 위한 실천 과제 첫 번째 항목이, 본당 안에 청소년 청년을 위한 공간-오라토리오-마련하기였습니다.
점점 노쇠화되어가는 우리 가톨릭교회입니다. 청소년과 청년들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우리 교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용봉동 성당에서 준비하고 있는 본당내 청소년•청년을 위한 공간(오리토리오) 마련하기는 정말이지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청소년•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성찰해봅니다. 그들이 선호하는 역동성과 활력의 심각한 부족이 아닐까요? 적극적인 환대와 배려의 부족이 아닐까요? 호감과 매력의 상실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해봅니다. 오늘 우리 본당과 수도회, 수녀회는 진심으로 청소년•청년들을 환대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 울타리에 들어와서 신명나게 기도하고 역동적으로 뛰어놀고,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꺼리’들이 준비되어 있는가요?
오늘 돈보스코 축일을 맞이하며, 우리 모든 사목자들 안에 그분께서 살아생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뜨거운 사목적 열정이 되살아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기울였던 그 각별하고 개별적인 사랑이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에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교육자들이 더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교육자들, 과연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까? 그런 체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 사목자들, 교육자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사랑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양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양들을 위한 더 깊은 헌신과 희생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는 ‘눈’이 내리면 학교도, 성당도 문을 닫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난 1월 9일에 달라스 지역에 눈이 내렸습니다. 전날 이미 학교는 문을 닫는다고 공지했습니다. 저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서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오전부터 내리던 눈은 오후에도 계속 내렸고, 교우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성당 미사도 중단했습니다. 달라스가 눈 때문에 성당 문을 닫아야 했다면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많은 재산 피해가 있었고, 소중한 인명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뉴욕에서는 눈이 온다고 학교 문을 닫거나, 성당의 미사가 중단되는 예는 없었습니다. 눈에 대한 대비책이 잘 되어 있고, 눈이 내려도 제설차가 눈을 치우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달라스에 왔으니, 달라스의 상황을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가 중단되었고, 약속도 취소되었습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을 읽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옴니보어(Omnivore)’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옴니보어라는 말은 형식, 세대, 성별, 나이로 구분되던 삶의 유형이 통합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인터넷과 AI의 결합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라는 삶의 과정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삶의 과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00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기에라도 ‘스타트업’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노년기에도 ‘인턴’으로 스타트업에 입사해서 자기의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와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조부모의 건강과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관람도 예전에는 남성이 많았지만, 요즘은 여성 관객이 더 많습니다. 남성이 여성이 하던 일을 즐겨하기도 하고, 여성이 남성이 하던 일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옴니보어’의 시대에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순환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을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없습니다.
‘옴니보어’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때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적인 힘과 재능과 엄청난 에너지를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정통 유다인이자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 전도유망한 율법 교사로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안에는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가 한 첫 번째 일은 자신 안에 가득 차 있었던 세상의 것들을 말끔히 비워내는 일이었습니다. 비워낸 그 자리에 전혀 새로운 가치관인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마음으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옴니보어’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밤을 새운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착한 목자는 더 기뻐한다.” 사제는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 것이니 그리 되더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믿으니
더욱 더 굳게
믿게 되더이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니
희망하니
더욱 더 하얗게
희망하게 되더이다
희망이란 그런 것이니
사랑하니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더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
일어나니
더욱 더 가뿐히
일어나게 되더이다
일어남이란 그런 것이니
나아가니
더욱 더 힘차게
나아가게 되더이다
나아감이란 그런 것이니
품으니
더욱 더 따뜻하게
품게 되더이다
품음이란 그런 것이니
나누니
더욱 더 아낌없이
나누게 되더이다
나눔이란 그런 것이니
어울리니
더욱 더 갈림없이
어울리게 되더이다
어울림이란 그런 것이니
섬기니
더욱 더 정성껏
섬기게 되더이다
섬김이란 그런 것이니
살리니
더욱 더 오롯이
살리게 되더이다
살림이란 그런 것이니
오늘의 성인
성 요한 보스코(John Bosco)
신분 : 신부, 증거자, 설립자
활동연도 : 1815-1888년
같은이름 : 돈 보스꼬, 돈 보스코, 돈보스꼬, 돈보스코, 보스꼬,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왕국 피에몬테(Piemonte)의 베키(Becch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프란치스코(Francisco Bosco)와 마르게리타(Margherita Occhiena)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두 살도 안 되었을 때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여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과 근면한 노동 정신 그리고 순종의 덕을 배웠다.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성 요한 보스코는 9세 때 농한기를 이용하여 카프릴리오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만을 배웠다. 15세 되던 해인 1830년에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 읍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이수한 후, 키에리(Chieri) 시의 인문학교에 진학하여 5년 과정을 마치고 1835년에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41년 6월 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성 요한 보스코는 그의 은인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 6월 23일) 신부의 도움으로 토리노(Torino)에 있는 사제 연수원에서 신학 연구와 현대 사목에 관한 연구 기회를 얻게 되었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로 정치와 산업화의 중심지인 토리노에 체류하는 동안, 토리노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12-20세의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소년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844년 연수원을 졸업한 후 바롤라(Barola) 후작 부인이 경영하는 '소녀들 고아원'의 지도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소년들의 사목에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독립한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00여 명이 넘는 소년들과 함께 거처도 없이 이동하다가 1846년 4월 토리노 시의 서북쪽 도라 리파리아 강변의 발도코(Valdocco)에 정착하였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한편으로는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견습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851-1853년에는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성 요셉 카파소 신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발도코에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일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기숙사의 소년들을 외부 학교에 보냈으며, 1856년에는 불어나는 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숙사 구내에 학교를 세우는 등 그의 청소년 교육 사업은 점점 커져갔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여 대응하였고, 각자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냈다.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니는 한편 유명한 “예방 교육법”이란 저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사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교황 비오 9세(Pius IX)의 권고에 따라 1859년 18명의 제자들에게 수도 서원을 하게 하였고, 그들은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서약하였다. 수도 서원으로 기초를 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3월 1일 정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으며, 1871년 4월 13일에는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하였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888년 1월 31일 침대 주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회원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마르첼라(Marcella)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로마(Rome)
활동연도 : +410년경
같은이름 : 마르셀라, 말셀라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모든 성인과 로마 부인들의 영광”이라고 칭송했던 사람이 바로 성녀 마르첼라이다.
그녀는 7개월간의 결혼생활 끝에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 후 집정관 케레알리스(Cerealis)의 구혼을 거절하고 동방 은수자들의 생활을 본받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녀는 고기와 술을 끊고 주로 독서에 열중하면서 순교자의 성당을 방문하며 기도하였다.
그녀의 표양으로 감동된 여러 부인들, 특히 귀부인들이 그녀의 지도를 받으려고 모여들자 단 기간 내에 로마에 이런 공동체가 여러 개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성 히에로니무스의 지도를 받곤 하였다. 그녀는 410년 로마를 약탈하러
온 고트족에게 붙잡혀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숨겨둔 곳을 찾으려는 그들로부터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미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알려졌을 때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사랑하던 제자인 성녀 프린치피아(Principia, 5월 11일)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녀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성 니체타 (Nicetas)
활동년도 : +1107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노브고로트(Novgorod)
같은 이름 : 니체따, 니체따스, 니체타스, 니케따스, 니케타
키예프(Kiev) 출신인 성 니케타(또는 니체타)는 젊은 나이에 그 지방의 동굴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독수자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경험 많은 노원장의 충고마저 마다하고 무리하게 행동함으로써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다.
천사를 가장한 사탄이 출현하여 기도 대신에 독서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읽기 시작한 것은 구약성서였다.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갖추게 되자 이제 마음이 교만해져서 백성들에게 충고하며 가르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끝내 꽃피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성서 지식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늦게나마 깨달은 그는 겸손하게 죄과를 뉘우치고 다시금 기도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는 1095년에 노브고로트의 주교로 간택될 정도로 덕이 높아졌다.
그는 항상 기도만을 가르치고 기도만 할 정도로 기도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기도의 모범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12년간 주교직을 수행했는데, 그의 유해는 후일 '거룩한 지혜'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복녀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Paula Gambara-Costa)
활동년도 : 1473-1515년
신분 : 부인
지역 :
같은 이름 : 바울라, 빠울라, 파울라
바울라 감바라 코스타는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에서 태어났고, 12세 때에 베나스코(Benasco)의 루이스 코스타(Louis Costa) 백작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작은 형제회의 유명한 사제였던 키바소(Chivasso)의 안젤루스(Angelus, 4월 12일)의 도움과 자문을 받았으므로, 아내가 자기 집으로 오기 전에 먼저 안젤루스(Angelus) 신부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매일 첫 새벽에 일어나 아침기도와 로사리오를 바쳤고, 그 얼마 뒤에는 인근의 프란치스코 성당에 찾아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오후가 되면 그녀는 성모소일과를 바쳤고, 저녁에는 밤기도와 로사리오 기도를 또 바쳤다.
그녀는 1488년에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이 젊은 아내는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걸인들에게 많은 음식을 나누어 줄만큼 사랑이 차고 넘쳤다.
한편 남편은 행실이 나쁜 다른 젊은 여자를 사귀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나쁜 사건이 터졌다. 그 젊은 여자가 독살된 듯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바울라는 끝까지 인내하여, 오히려 남편을 감복시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녀의 자선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길을 가다가 걸인을 만나면 입고 있던 겉옷과 신발까지 벗어 주었으므로 가끔 맨발로 걸어가는 그녀를 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42세에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4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